순무사에게 보내는 답장[撫使前答錄]
말씀하신 참모군관(參謀軍官)등의 일은 이처럼 반복하여 말씀을 하시니 더욱 황송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군관의 《경우》에는 이 성(省, 같은 고향)안에 사는 사람으로 막역한 친구가 아니면 바로 가까운 인척입니다. 지금 동요(東擾)가 있을 때에 억지로 들어갔다가 바로 귀화하거나 피신하여 편안하지 못한 자들인데, 대진(大陣, 본진)이 경내에 들어오면 모두 《거기에》 의탁하여 형세를 빌리려고 군관첩(軍官帖)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심정을 돌아보아 괄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십 장을 준 곳이 있습니다. 어찌 그 사이에 혹시라도 폐단을 저지른 게 없는지 알겠습니까? 비록 현장에서 잡힌 《죄목은》 없더라도 경미할 때에 막기 위해 여러 번 미리 지시를 하였으나 잡기(雜技)와 몇몇 읍의 수령들의 일에 있어서도 이런 폐단이 있어 조치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책임은 진실로 감수할 일이나 실제로 전혀 허튼 얘기가 아닙니다. 근래의 일은 비록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오히려 헛소문을 만드는데 하물며 이같이 단서가 있는 일이야 어떻겠습니까? 이 10여명은 단지 1차례의 폐단만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일이 생기기 전에 엄중하게 규제하지 못하여 정중한 하교(下敎)를 받게 되니 나도 모르게 송구스러움과 근심을 느낍니다. 모든 일에 효과가 없어 단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탄환의 일은 지금 가부간에 말씀이 없으신데, 요청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돌아보니 어찌 할 수가 없고 실제로 변통할 방도가 없습니다. 일관(日館, 일본 공사관)에 이러한 탄환이 없다면 말할 수가 없고, 지금 청나라 사람이 남긴 탄환으로 비록 구차하게 사용하지만 쓰임에 맞추기가 어려우니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지금 특별히 남은 《자를》 탐문해보니, 2명을 당장에 죽이는 것은 경솔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로는 글로 보고할 때에 반드시 날짜를 써서 근거하여 살필 수 있게 할 일.
곡화천면(曲火川面) 덕지산(德芝山)의 도사(都事) 구연준(具然駿)은 서울에서 본 마을에 이사를 와서 며칠이 되지 않아 이 동요(東擾)를 만났습니다. 옥석(玉石)이 함께 불탈 염려가 있으니 엄중히 지시하여 폐단을 막을 일.
본읍 곡화천면 덕지산에 사는 도사 구연준의 일.
삼가 말씀을 드려 원정(原情, 관아에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 호소하는 것)할 일은, 저는 서울의 삼청동(三淸洞)에 살며 과장(科場, 과거 시험)에 출입하는 것을 득실(得失)로 삼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을 허비하여 백발이 성성하고 형편이 다해서 문을 닫고 병으로 신음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삼청동은 궁궐과 너무 가까워서 6월의 여름에 유독 놀라운 《일을》 겪어 온 동네가 텅 비어 혼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8월에 가솔(家率)을 끌고 양자강(楊子江, 한강을 가리키는 듯)에서 배를 빌려 교남(喬南, 喬桐島의 남쪽)과 심북(沁北, 강화도의 북쪽)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여러 번 파도를 겪어 모진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공주의 남쪽 덕지(德芝)에 사는 남선달(南先達)을 평소에 서로 알고, 가지고 있는 척박한 땅 몇 섬지기에서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조(租)가 10여 섬이 되지 않기에 믿고 몸을 맡길 데가 여기[남선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지내는 가깝고 먼 친척이 거의 없고, 명색이 도조(賭租)라고 하는 것이 소요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그 형세가 낭패스럽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남선달이 그 사정을 불쌍히 여겨 집을 빌려주어 거처하게 하였고, 땔감을 주어 불을 때게 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동네의 사람들도 불쌍하게 여겨 기름과 소금을 보내거나 그릇을 빌려주기도 하여 이렇게 지낸 지가 2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남선달이 사정에 몰려 영문(營門)에 정문(呈文, 사정을 호소하는 글)을 《내고》 피신을 한 지도 1달이 되었습니다. 객지에서 외로운 처지에 더욱이 이런 지경에 처하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고, 사립문 한쪽은 반쯤 가리었으나 서로 문안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어린 자식인 용서(龍書, 이름인듯)와 이웃집의 몇몇 아이에게 함께 글을 읽게 하였으나, 아이들은 매우 싫증을 내고 가르치는 것도 권태로웠습니다.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을 하여 진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미(子美, 杜甫의 字)가 달빛을 거닐며 집을 그리워하고 왕찬(王粲)이 누대에 올라 가을 촛불을 슬퍼하는 것이 비록 고금(古今)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감회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돌아보니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 가득하고 공사(公私)간에 모두 없어졌으나 살리기를 좋아하는 하늘과 땅의 덕(德), 밝게 비추는 해와 달의 빛은 어두워도 비추지 않는 곳이 없고 미약해도 살피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저처럼 외롭고 괴로운 사람이 기댈 데가 없고, 아는 친척도 전혀 없어 날마다 울고 있습니다. 세속에서 이른바 ‘산도 서고 물도 선 곳’인데, 어찌 한걸음이라도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겠습니까?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속여서 호소하겠습니까? 《저의》 행실을 살펴보면 친척을 멀리하고 《조상의》 묘소를 버린 것이 첫 번째 죄이고, 어지러운 때에 땅을 살피지 않고 거처한 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이미 이와 같이 피하기 어려운 죄가 하나가 아니니 비록 옥석이 함께 불타버리는 탄식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그 죄가 없고 목숨을 보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본 동네가 다행스럽게도 편안하다면 저의 목숨도 편안할 것입니다. 위에 하늘의 해가 있는 《것처럼》 살펴서 구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처분 : 십실지읍(十室之邑, 열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충신(忠信)이 있다. 각각 편안히 지내면 반드시 나중의 폐단이 없을 일.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