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11월 6일 서만보(徐晩輔)가 보낸 편지[甲午 十一月初六日 徐晩輔上書]
온양의 2,300 호(戶)중에 양반이 2,000호이고, 상민이 200호입니다. 의병을 의논한다면 형세상 먼저 제기하는 자가 없고, 말에는 알력이 많으며 습속은 상도(常道)와 많이 어긋납니다. 경향(京鄕)의 유명한 읍이지만 상민 중에 50명만이 윤치소(尹致昭)의 진(陣)에 겨우 응모하였고 군기(軍器)도 모두 준 것은 알고 계실듯합니다. 그러나 지금 협잡을 하는 자들은 공을 얻으려는 마음에서 관에 와서 호소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은 것은 진정한 충심(忠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하(轅下, 절도사의 진중)에 호소하여 반드시 《눈과 귀를》 가릴 염려가 있을듯하니 미리 헤아려보시고 원문(轅門) 밖으로 내쫓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을》 제지하고 번거롭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공(公)에 근거하여 은밀히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편지 봉투 앞면
편지를 올립니다.
편지 봉투 뒷면
인
저들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으니 4면(四面)이 모두 적입니다. 요충지로 진군하는데 이인(利仁)과 효포(孝浦) 2갈래의 길이 있으나 가볍게 나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적이 따라와서 청소(靑沼)를 점거하고 있다고 하나 결코 깊이 들어가서 공격을 해서는 아니 되기에 1군(一軍)으로 하여금 우금치(牛金峙)를 나와 먼저 오실(梧實)의 큰 산 위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이인·반송(盤松)·경천(敬川) 3곳을 관할하는 데입니다. 대실촌(大實村)에서 밥을 먹고 적을 몰아내어 판치(板峙) 뒷산으로 바로 올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판치점(板峙店)은 바로 요충지이어서 우선 산을 내려가 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길은 2개 소대로도 가능합니다. 만약 산등성이에 오르는 것을 꺼려 먼저 큰길을 따라 간다면 온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일군(一軍, 일부의 군대)은 바로 능치(陵峙)에서 산을 끼고 적을 몰아내어 효포로 나와 판치에서 합세한 뒤에 형세를 보아 진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인은 바로 적의 소굴입니다. 저들이 먼저 지형 《의 이로움을》 점거하였기에 기병(奇兵, 기습부대)이 아니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먼저 일군(一軍)으로 하여금 지진(遲津)을 건너 몰래 이인의 뒷산을 오르게 하고, 일부는 회선동(會仙洞)에서 이봉(貽峰)의 앞산을 올라 서로 호응하여 이인을 습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함지(陷地, 움푹 들어간 땅)여서 구정연촌(九亭硯村)앞에 나가 《주둔하고 있는》 진(陣)과 합세하여 판치에 《주둔한》 진과 서로 호응하게 합니다. 사방의 길에서 이 같이 한다면 적을 모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저들의 식량을 《운송하는》 길도 모두 끊어질 것입니다.
장기진(將旗津)에 머물고 있는 진(陣)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이 네 갈래 길의 병사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청소(靑沼)에 《주둔하고 있는》 적진의 거취를 탐문하고 나서 상륙한 논산의 수군(水軍)과 합세하여 이 네 갈래 길의 병사와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노성과 초포는 바로 각 길이 모이는 곳이어서 일개 진(陣)을 산에 의지하여 마을 부근에 두어 내포(內浦)와 동협(東峽)의 적을 끊는 것이 좋습니다. 논산과 입암촌(立岩村)과의 거리는 5리에 지나지 않으나 지세가 높고 앞에 큰 마을을 끼고 있어 중요한 지역입니다. 저들의 이인포(利仁包)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을 점거하면 저들의 식량길을 끊고 우리가 양식을 얻을 수가 있으니 더욱 좋습니다. 초포를 바라보고 바로 논산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24일에 금영(錦營)에서 적이 10리에 임박했다는 급보를 듣고 갑절이나 길을 재촉하여 나아간 연유는 치보(馳報)하였고, 그 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에 금강의 장기진에 이르러 관아에 들어갈 겨를이 없이 바로 납교(蠟橋)의 뒷 봉우리에 올라 적의 형세를 바라보았더니, 적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서 깃발을 늘어세우고 수십 리에 걸쳐 산위에 늘어선 것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였고, 서로의 거리가 1리쯤 되는 중간에 하천 1개와 큰 평야 1곳이 있어 총알이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날이 어두워졌고, 형세상 나가 싸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우금치(牛金峙)·금학동(金鶴洞)·효포봉(孝浦峰)·납교의 뒷봉우리·산성(山城) 동쪽가의 요충지에 척후를 세워 지키게 하였습니다. 25일 날이 샐 때에 선봉이 통위영 영관(領官) 이하의 2개 소대를 인솔하여 병사를 나누어 정렬을 하였으나, 가볍게 나아가기 어려운 형세일 뿐만 아니라 상세히 적의 동태를 탐문하였더니, 저들의 대진(大陣)이 효포봉 건너편에 모여 있고, 통위진(統衛陣) 건너편에 모여 있는 적도 후원하는 적이었습니다. 납교 뒷 봉우리와 효포봉에서 지키는 곳과의 거리가 남북으로 가로로 걸쳐 있어 몇 십리쯤이 되고 연달아 이어져서 끊이지 않아 한 곳에서 공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효포 등지에 지시하여 각 진(陣)을 지켜 바로 진격하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각 대(隊)를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일시에 공격할 때에 통위영 대관(統衛營 隊官) 신창희(申昌熙)·오창성(吳昌成)과 교장(敎長) 김상운(金相雲)·박상길(朴相吉)이 용기를 내어 위험을 돌아보지 않고 포를 쏘며 앞장서서 병사를 독려해서 바로 적진으로 향해 포를 난사하여 죽였습니다. 탄환에 맞아 죽은 적이 5~6명이 되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적의 선봉이 일단 꺾여 봉우리의 꼭대기로 물러났고 늘어서서 관망하던 적은 모두 산등성이를 내려가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날도 어두워지려고 했기 때문에 군사를 거두어 예전대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날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도착하여 받은 서산 군수(瑞山郡守) 성하영의 첩정(牒呈)에 이와 같이 말하였고, 함께 《도착하여 받은》 안성 군수 홍운섭(洪運燮)의 보고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적의 형세가 저처럼 대단한데,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가 장소를 나누어 지키니 그 형세가 모두 고립되었으나, 장졸(將卒)이하 각 대(隊)의 병사들이 솟구치는 충성심만으로 자신의 몸을 잊고 힘을 내어 전진하여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을》 모두 섬멸하지 못했으나 크게 적의 사기를 꺾어 감히 날뛰지 못하고 물러나서 모습을 숨기게 하였습니다. 적을 벤 수가 적지 않고 빼앗은 기계가 매우 많고, 대포를 도로 찾은 것은 더욱 가상합니다. 다음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경리청(經理廳)의 병사 12명이 적의 남은 무리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몰래 나가서 대비가 없는 《적을》 치니 적들이 놀라서 겁을 먹고 흩어졌고, 회선포(回旋砲) 1대를 빼앗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군사로 적을 습격한 것이 가상하여 당장에 그들을 격려하는 상이 없어서는 안 되기에 포를 빼앗은 위의 경리청 병사 12명에게 은(銀) 1푼씩을 상으로 주었습니다. 각 영(營)에서 넉넉하지 않은 병사를 각처에 나누어 주둔하고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할 때에 1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왕령(王靈)이 미친 것이어서 기쁨을 견딜 수가 없고, 각 영에서 적을 죽인 수효와 빼앗은 군물(軍物)의 실제 숫자를 일일이 적어 성책(成冊)해서 올려 보내며 그 연유를 첩보합니다.
이번 11일에 경리청(經理廳)의 병사들이 논공(論功)을 적어 보고할 때에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여 무리를 모아 강을 건너 올라가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난리보다 심하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비록 순상(巡相, 관찰사)과 제가 함께 나가 바로 타일러서 돌아오게 했으나 그 당시의 모습으로는 장관(將官, 장수)를 쏘아 죽이는 일이 있더라도 누가 금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훈련되지 않고 신실하지 못한 병사인데다가 소인의 나약함 때문에 이런 변고가 있었으나 그 우두머리를 조사하지 못하고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하였으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한 죄는 진실로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적이 앞에 있는데 이런 행동이 있었으니, 이와 같은 군심(軍心)으로 어떻게 나가 싸우겠습니까? 비록 바로 여러 차례 와서 날마다 잘못을 빌었으나, 무뢰한 습속이 진실로 이와 같고, 또 단서가 없이 통정(統丁)과 따지려고 하니 안에서 허물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근심스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비류(匪類)가 4차례 패악한 편지를 《보내왔으나》 《일일히》 들어 보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함께 올려 보내니 보시면 아시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거만하고 패악한 말에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처음 편지에서 《폐단을》 제거하고 《조정의 권귀(權貴)를》 없앤다는 몇 마디 말을 적어 보냈기 때문에 이것을 베껴 올리나 의정부에 전하여 보일 것이 못됩니다.
첩보할 일은, 이번 7일에 영감의 지시를 받들어 참령관(參領官) 구상조(具相祖), 대관(隊官) 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 참모관(參謀官) 이상덕(李相德)·이윤철(李潤徹)·신효식(申孝湜)·황승억(黃昇億), 교장(敎長) 김홍엽(金弘燁)·이봉춘(李鳳春)·이장혁(李章爀)·설기준(卨基峻)이 2개 소대를 인솔하여 판치(板峙)에 주둔해서 지켰는데, 8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쯤에 경천(敬川) 수월리(水越里) 등지에서 적들이 산과 들에 가득하여 사방을 에워싸고 오기에 형세가 매우 급박해서 능치(陵峙)로 물러나 주둔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잠깐사이에 이르러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진을 치고 지키는 자가 거의 수만 명이 되었고, 작은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모여서 엿보는 자도 300~40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저들이 말하는 총을 지니고 앞장을 서는 정예병사인데,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반드시 예상했을 것이기 때문에 능치의 높은 봉우리는 참령관이 1개 소대만을 인솔하여 예전대로 지키고, 대관 조병완 이하 참모관과 교장이 1개 소대를 인솔하여 작은 산등성이에서 갑자기 나와 일제히 포를 쏘아 여러 명을 쏘아 죽였더니 적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흩어져서 도주하였습니다. 진을 마주하고 지키던 자는 세력이 비록 대단했으나 저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아 이처럼 고립된 군사로 나가서 토벌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본군과 서산 군수 성하영은 적과 우금치(牛金峙)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세하여 싸움을 도우려고 병사를 인솔하여 달려갔으나 적은 이미 조금 퇴각하였습니다. 형편을 헤아려보니 이인(利仁)의 적은 거괴(渠魁)인 듯하나 이미 기세가 꺾여 승세를 타고 토벌을 하면 실제로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힘을 합해 함께 갈 것을 요청했으나, 이인의 5리에 이르지 못하여 밤이 깊고 길이 험해서 적의 사정을 분명히 모른다면 잠시라도 깊숙하게 들어가서는 안 되기에 높은 곳에 올라 불을 피워 진을 쳐서 지키는 모습을 《거짓으로》 취한 뒤에 바로 회군하였습니다. 연유를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일전에 태봉(台峰)의 승리는 계책이 타당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공사(公私)간에 칭송할만합니다. 깊은 골짜기에 사는데 소문으로 소문이 전해지니 두려워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강(江, 금강인듯)의 동쪽 감성(甘城)과 유성(儒城) 등지는 오히려 응결된 빙옥(氷玉)이 두려운데, 무리를 지어 종종 소요를 일으켜서 주민이 안도를 할 수가 없고, 무뢰배가 좌우에서 안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아직도 관군(官軍)의 위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경리청의 진(陣)과 일본군이 지금 연기(燕岐)로 향하면 혹시라도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사과(司果) 유기정(柳冀楨)의 《일은》 전령을 받았는데, 평소에 풍력(風力)과 계략이 있는데다가 지리와 정형(情形)에 익숙하여 진실로 이런 때에 쓸 만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모수(毛遂)의 천거를 꺼려 원문(轅門, 절도사의 문하)에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의 생각에는 크게 도울 방도를 지니고 있으니 헤아려서 써보시는 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하신다면 내일 나아가도록 권면하겠습니다.
이번에 보내는 협지(夾紙)의 편지는 바로 아산(牙山) 이대감 효약(孝若)씨의 서찰로서 안성(安城)어른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석남(石南) 유석진(柳錫晋)이 여기에 살기 때문에 아울러 그 생질에게 편지를 전할 것이 있었으나, 안성어른이 아침에 연기(燕岐)로 출발을 하여 그 행차를 쫓아가서 편지를 받아 들이려면 오고가는 데에 날짜가 많이 지체될 것입니다. 심부름 온 사람이 금방 돌아갈 리 없으므로 저에게 이런 사정을 말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대감의 편지와 6장(六丈)을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올리니 바로 보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금곡(金谷)은 바로 그의 백씨(伯氏)인 판윤(判尹)어른이 사는 곳이고 황곡(黃谷)은 바로 이대감 어른이 말한 것이며, 권곡(權谷) 이수사(李水使)는 바로 순오(舜梧)영감이고, 미곡(美谷) 이언양(李彦陽)은 바로 막료인 성대(聖台)의 숙부입니다. 황곡 이학관(李學官)은 바로 석남 유병사(柳兵使)의 증외척(曾外戚)이고, 대동(大洞)의 김(金)아무개는 바로 유병사의 셋째아들이 달포 전에 재취를 한 집이나 아직 우례(于禮)를 치루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근처에 의병의 폐단이 적지 않아 경병과 각 진의 하인보다 심해서 이렇게 사람을 시켜 보고를 하니 아울러 양해하여 시행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하인이 오늘 답장을 받아 여기에 도착한 뒤에 내일 새벽에 떠날 수가 있으니 헤아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