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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선봉진상순무사서(부잡기)
일러두기

11월 30일 편지[十一月 三十日 書]

18일에 전주(全州)에서 전진한 연유는 첩보하였고, 그날 30리를 《가서》 금구현(金溝縣)에서 점심을 먹고 20리를 《가서》 원평(院坪)의 거리(巨里)에 도착하였습니다. 25일에 《적을》 토벌한 뒤에 《살펴보니》 점사(店舍)와 여염(閭閻, 민가) 40여 채가 불에 탔고 비류가 저장한 곡식 몇 백석과 민가의 집물(什物)이 모두 소실되어 보는 것마다 매우 참담하였습니다. 《그래서》 흩어져서 떠도는 약간의 백성을 불러들여 우선 타지 않은 인가에 살게 하고, 차차 《집을》 지어 편안히 살라는 뜻으로 특별히 타일렀습니다. 길을 떠나 17리쯤에 태인(泰仁)의 석현점(石峴店)에 이르렀는데, 수십 채의 인가도 불에 타서 연기가 아직도 나고 있어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장위영 대관(壯衛營 隊官) 윤희영(尹喜永)과 이규식(李圭植)이 소대(小隊)를 인솔하여 원평에서 후원(後援)해 와서 바로 태인읍에 이르러 비류 몇 천 명을 토벌했는데, 쏘아죽인 자가 매우 많았고, 생포한 자와 노획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태인읍에서 묵을 때에 이 점사의 앞길에서 척후(斥候)를 기다려 상세한 소식을 듣고 바로 행진하여 3리쯤의 태인읍에 도착했더니, 7~8호가 또 불에 탔는데, 모두 비류가 흩어질 때에 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몇 백 호의 집과 각 관청의 건물들이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떠도는 백성 몇 명을 불러다가 온갖 방법으로 타일렀더니 차츰 모여들었는데, 멀리 도망한 자도 있고 위협에 따른 비류도 있어서 끝내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비류가 저장했다가 남은 곡식이 있어 각 진(陣)에 나누어 준 뒤에 《거기에》 묵었습니다. 비류가 다시 정읍 등지에 돌아와서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29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 쯤에 일본군 각진(各陣)과 함께 일제히 출발하여 정읍현 30리 지점의 점사(店舍)에 이르렀더니 비류도 흩어져서 끝내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정읍현 20리 지점의 중흥리(中興里)에서 묵었고, 일본군은 천원참(川原站)에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금구현에서 《여기까지 오는》 100리길에 점막(店幕)과 민가를 막론하고 원평과 석현에서 온통 불에 탄 것 이외에 종종 1~2채의 집이 소실되었으나 사람 그림자가 영영 끊기고 사는 주민이 없어 보는 것마다 비참함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인읍에 장위영의 양대(兩隊, 2개 부대)와 일본군 64명이 와서 승리를 했으나, 일본군 진영의 지시 때문에 애초에 적어서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사실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 부영관(壯衛營 副領官) 이두황(李斗璜)에게 급히 보고하였다고 하기에 그 전보를 기다렸다가 바로 보고할 계획입니다. 생포한 놈들은 일본군 진영에서 참작하여 풀어주었다고 해서 문초(問招)를 하지 못했고, 비류의 사정은 나주 근처에 많이 모여 있다고 하나 일본인이 각 진(陣)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주둔했기 때문에 그대로 천원에 머물렀으며 차례대로 전진할 계획입니다. 연로의 사정은 우선 급히 보고하고 연유를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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