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10월 25일 [其二十七 二十五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출진(出陣) 장위영 부영관 죽산도호부사 겸 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보고에, “죽산부를 떠나 행진(行陣)한 뒤로 18일에 연기읍(燕岐邑) 봉암동(鳳巖洞)에 도착하여 상부의 결정에 따라 전진하기 위해 금영에 보고한 사유는 이미 19일 봉암동에 있을 때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21일에는 목천의 세성산에 도착하여 비류들을 대파한 사유도 21일 술시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20일 사시에 발송하여 22일에 도착한 전령 안에, ‘주력부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지 벌써 열흘이 되었거늘 겨우 금영의 이문을 받고 비로소 본진이 연기읍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건대 군무(軍務)의 허술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군법대로 문책함이 마땅하지만 본진에서 전해 알릴 수 있는 편권(便權)이 없었으니 혹 용서할 수도 있겠다. 연기는 유성(維城)에서 40리 거리에 있는데 요즘 듣자하니 비도(匪徒)가 그곳에서도 출몰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선 유성 어귀 등지로 이동하여 주둔해서 먼저 ≪동학농민군이≫날뛰는 폐해를 막고 또 호남의 비도가 이곳을 경유하여 올라올 걱정거리를 끊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들을 토벌할 경우에는 금영의 지원군을 기다렸다가 진퇴해야 하지만, 적의 동정을 살펴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오로지 임기응변하는데 있는 것으로, 멀리서 헤아려 지휘할 것이 아니다. 대저 중요한 길목을 굳게 지키는 것이 만전의 대비책이다. 이런 뜻을 금영에다 공문으로 통지하였으니 틀림없이 소상한 지시가 있을 것이다. 마땅한 바를 헤아려 시행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16·17일 양일에 즉각 금영(錦營)으로 오라는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금영으로 급히 나아가 직접 분부를 받고 진병하기 위해 연기 봉암동에 있으면서 금영에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제(回題)에서, ‘비류들의 정형(情形)을 계속해서 더 정탐하여야 할 것이며, 주거할 만한 곳에 부대를 머물게 하고 선봉진의 지휘를 기다리라’고 하기에 사태의 실마리를 알 수 없어 즉시 금영으로 달려가 직접 지휘를 들은 다음 진병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달 20일 묘시 경 청주 병영에서 도착한 감결(甘結) 안에, ‘목천의 세성산에서 진을 치고 모여 있는 비류들을 빨리 섬멸하라’고 하셨고, 목천의 적들은 공주·청주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장차 크게 함부로 날뛸 우려가 있고 또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핍박하여 선봉진의 전도에 장애가 될 터이니 가슴속에 숨어있는 화근이라 이를 수 있습니다.
한편 금영의 사기(事機)로 말한다면 경리청(經理廳)의 군병(軍兵)들이 이미 그곳 병영에서 방어하고 있으니 방비책이 전에 비하여 조금은 낫고, 또 한편 명령을 들은 것으로 말한다면 이미 가서 지원하라는 순무영(巡撫營)의 전령이 있었습니다. 이치를 따져서 거행하자면 먼저 청주에 근접해온 적을 섬멸하는 데에 있지만, 목천이 다급한 지경에 처해 있기에 또한 위급한 형세를 들어 금영에 논보(論報)한 뒤 행군하여 곧바로 비류들이 모여 진을 치고 있는 목천 세성산에 들어가서 크게 전승을 얻었습니다.
그랬는데 즉시 도착한 금영의 제사(題辭) 안에, “공주로 가서 지원하라는 순무영의 전령이 이미 도착했을 것인데 순무영의 지시는 듣지 않고 청주 곤수(梱帥)의 감결만을 따랐으니 이 무슨 곡절인지 모르겠다. 병사(兵使)가 처리함이 일치하지 않고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현재 파직(罷職)시킬 것을 장계로 올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도착한 금영의 관문에, “전에 접수한 귀 영관의 보고 내용은 연기에 도착하여 명령을 듣겠다고 말한 까닭에 감히 공주와 대전으로 진병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지금 병영에서 온 감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서 공문을 보내면서 ‘전진할지 말지 명령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병영의 말을 오인하여 진병시켰다가 돌아와서 당돌함을 깨달으니 매우 당혹스럽다. 지금 순무영의 지시 때문에 문서를 보냈는데, 귀 영관이 순무영의 절제를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병영의 절제를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또 비류들을 섬멸하는 일로 말한다면 도내에서 봉기하는 것이 목천의 무리들과 같이 도처에 다 그러하지만 전주에 있는 거괴(巨魁) 전봉준(全琫準)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과 같이 가장 큰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공주는 성회(省會)의 중요한 땅이자 요충의 큰 길목인데다 적들은 100리의 안쪽에 있어서 하루나 반나절이면 공주에 이를 수 있는데도 귀 영관이 험난한 곳을 피하여 평탄한 곳으로 가느라고 이렇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귀 군진(軍陣)이 나가고 머무르는 것은 본영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진퇴하는 일을 잘 헤아려 알아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목천의 적을 먼저 토벌하는 것은 실상 선급후완(先急後緩)하는 의도에서 나왔겠지만 금영의 지시가 이처럼 엄격하니 황송한 마음 간절합니다. 이제 세성산에서 적을 토벌할 때에 생포한 북접(北接)의 유명한 괴수 김복용(金福用)을 압송하여 주력부대에 대령해야할 지의 여부는 회답에 따라 시행할 생각이며 노획물은 책을 만들어 수정하여 상부로 올려 보낼 것이라 합니다.
사로잡은 괴수 김복용을 잠시라도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즉각 목을 베어 백성들을 깨우치게 한 다음 즉시 본영(本營)에다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쌀과 벼는 주력부대가 행군을 옮긴 뒤에 비도들이 노략질을 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즉시 청주병영으로 수송하게 하였고, 군기(軍器)는 목천과 천안으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해당 영관이 거느린 병사는 금영에서 지원을 요청하기에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어 밤낮을 가리지 말고 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노획한 책 한 건은 잘 간수해 상부로 보낼 것입니다.
이번에 목천의 비류들이 공주·청주의 사이에 모여 웅거해 심히 창궐하는 형세였으나 해당 영관이 깊이 들어가 소탕하여 괴수를 사로잡았으며 그 밖에도 군기(軍器)와 쌀과 벼 등 작물이 적지 않아 공효가 극히 가상합니다.
제(題): 듣건대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다. 노획한 공을 아뢰어 더욱 사기를 분발시켜라.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