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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서른여섯 [其三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금일 10월 24일에 적이 금영 10리까지 당도했다는 급보를 듣고 길을 재촉하여 진군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또한 당일 신시 경에 금강(錦江) 장기진(將旗津)에 도착하여 공주부에 들어갈 겨를도 없이 납교(蠟橋)의 뒷산에 올라 적의 형세를 관망하였습니다. 적들은 건너편 높은 봉우리에 있었는데 늘어세운 깃발이 가로로 수십 리나 산 위에 걸쳐있어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습니다. 서로의 거리는 1리쯤 되는데 사이에 하나의 개천과 큰 들이 있어 총탄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해질 무렵이라 나가 싸우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금치(牛金峙)·금학동(金鶴洞)·효포봉(孝浦峰)·납교(蠟橋) 뒷산 및 동편 산성(山城)의 요해 각처에 병정들로 하여금 적을 관망하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25일 이른 새벽에 선봉이 통위영 영관이하 2개 소대를 거느리고 병정을 나누어 진을 폈으나 상황으로 보아 경솔하게 진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적의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른바 저들의 주력부대는 효포봉 건너편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고 통위 진영의 주변에 있는 적진은 모두 성원하는 적들이었습니다. 또한 납교 뒷산의 앞과 효포봉의 방어하는 곳은 서로 남북으로 떨어져 가로로 걸친 거리가 수십 리가량 되지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어느 한 곳을 따라 진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효포 등지에서 방어하는 각 진영에 명령하여 곧바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각 진영을 독촉하여 때를 같이하여 함께 전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통위대관 신창희(申昌熙)·오창성(吳昌成), 교장(敎長) 김상운(金相雲)·박상길(朴相吉)이 분발하여 용기에 북받쳐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총포를 쏘면서 앞장서 병정들을 독촉하여 곧장 적진을 향하여 불시에 습격하니 적 가운데 총포를 맞은 자가 5∼60명이 되고 부상당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적의 선봉이 한 번 꺾이자 적들은 후퇴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갔으며 늘어서서 바라보던 자들도 모두 산등성을 내려와 후퇴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이때 날도 어두웠기 때문에 2전대처럼 병정을 거두어 방어하였습니다.

그날 유시에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 안에, “24일부터 25일 진시 경까지 적을 대항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적과 교전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적들은 조금도 후퇴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지라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락완이 병정을 나누어 거느리고 세 갈래 길로 협공하여 반나절을 싸웠고, 적 수십 명이 총포에 맞아 죽자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긴 여세를 몰아 추격하여 대포 2좌(坐) 및 총·창·탄약·깃발 등을 빼앗으니 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산꼭대기로 도피하였습니다. 겨우 격퇴할 즈음에 선봉진으로 가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대관 백락완에게 1개 부대의 병정을 이끌고 진격하게 하니 역시 적당(賊黨)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현재 가까운 산꼭대기에 퍼져 있고 군수가 거느린 병정은 이제 네 번에 걸쳐 주야로 싸우면서 잠시도 쉬지 못하여 전투에 임하여 힘을 쓰지 못하니 송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착한 안성군수 홍운섭의 보고 안에, “이달 24일에 대교에서부터 공주목으로 돌아와 주둔한 사유는 이미 보고를 드렸거니와, 그날 술시 경에 곧바로 금영에 도착하여 미처 주둔하지도 못하고 바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군수가 대관 조병완과 함께 1개 소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금강 나루터를 경계하여 지켰고, 참영관 구상조는 참모관 이상덕·신효식·황승억과 대관 이상덕,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장대규(張大奎)와 함께 1 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봉수현(烽燧峴)을 경계하여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25일 인시 경 다시 받은 지시 안에, ‘서산군수 성하영이 웅치(熊峙)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적의 세력이 심히 커서 우리가 허술함이 있을까 염려되어 길을 나누어 구원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군수가 20명만 남겨서 전대로 경계하여 지키게 하고는 대관 조병완을 시켜 군수 휘하의 병정을 거느리고 북쪽에서 적의 오른쪽을 치게 하고, 참영관 구상조에게는 그의 휘하 장졸을 거느리고 일본 병사 30명과 함께 남쪽에서부터 적의 왼쪽을 공격하게 하고 서산군수 성하영은 전면을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의 형세는 과연 소문대로 산과 들을 온통 덮을 정도여서 승리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이란 놈은 가마를 타고 일산을 펴고 깃발을 날리며 나팔소리와 함께 벌떼처럼 옹호하면서 왔습니다. 세 갈래 길에서 부대가 진격하여 반나절 동안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부를 판가름내지 못하더니 해질 무렵에 이르러 70여 명을 포살하고 2명을 생포하고 군기(軍器)를 뺏으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여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 들 건너 바라보이는 시야산(時也山) 능선에 모여 진을 쳤습니다. 이때 해는 이미 저물고 병정들도 피로하여 교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시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오경(五更, 4시경)쯤 되어 여러 적은 어두움을 타고 도주하여 남쪽 30 리쯤 되는 경천점(敬川店)을 향하여 가니 우리가 조금 승리했다고 하여 방어를 소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각별히 단속하여 전처럼 경계하여 지켰습니다. 포살하고 생포한 숫자와 뺏은 기물은 책을 만들어 보고하겠거니와, 두 차례의 접전에도 우리 병사들은 한 명의 부상자가 없으니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의 세력이 저와 같이 크고 성한데 관군은 사방으로 나누어 적들을 막고 지켜냄에 그 형세가 모두 고립무원(孤立無援)인데도 장졸 이하 각 부대 병정들은 다만 충성심이 격동하여 제 몸도 잊은 채 힘을 내어 진격하면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비록 적을 모두 섬멸하지는 못했으나 적들의 기세를 크게 좌절시켜 날뛰게 하지는 못하게 하고 퇴거시켜 형적을 숨기게 하였으며 참획한 자도 적지 않고 빼앗은 기물도 심히 많습니다. 그리고 대포를 탈환한 일이 더욱 가상합니다.

이튿날 오시에 경리청 병정 12명이 적의 남은 무리가 모여 진을 친 곳을 관망하다가 몰래 습격하여 그들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하니 적들이 놀라 겁을 먹고 달아나 흩어짐에 회선포(回旋砲) 1좌(坐)를 빼앗아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의 후미를 습격하니 가상한 일입니다. 당장 격려하고 권장하는 포상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앞에서 말한 대포를 탈환한 경리청 병정 12명에게 은전(銀錢) 1푼씩을 시상하였으며, 각 진영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병정으로 곳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적은 수로서 많은 적을 대적하였어도 손상된 자가 한 명도 없으니 이는 진실로 왕의 신령이 미친 바로 엎드려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각 진영에서 죽인 적의 수효와 노획물은 하나하나 책자를 만들어 올려 보내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뢸 것이다. 도착했다. 전후로 두 번이나 승리한 것은 장사(將士)들의 적개심과 병정들이 명령에 잘 따른 것으로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다. 경리청 병정들이 회선포를 탈취한 일은 기특한 공로이니 아울러 가상하다. 만들어 온 책자는 받았다.

주석
산성(山城) 쌍수산성을 가리킨다. 공주에는 산성을 별도로 쌓지 않고 백제시기 쌓은 쌍수산성을 금강을 지키는 보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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