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덟 [其四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李軫鎬)가 초 2일 문의읍(文義邑)에 있으면서 문서로 작성하여 초 3일에 도착한 보고 안에, “청주진(淸州鎭)으로부터 지난달 26일 자시에 휘하의 병정과 진남영(鎭南營) 병정 100명과 일본 주력부대가 합세 출발하여 이미 회덕(懷德)에 도착하여 명장(明場)에 이르러 보니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적의 무리가 물 건너에 진을 이루었는데 그 세력이 자못 괴이하였습니다. 그래서 혼전(混戰)을 한바탕 치러 수십 명을 죽였고 남은 적의 무리는 흩어져 사방으로 도망쳐 다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그 생포한 동도 13명 가운데 정복기(鄭福基) 등 6명은 본래 농민들로 비록 비류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이는 흉도들이 위협해서이지 실상은 본심이 아니라며 귀화할 것을 애걸하기에 일깨워주었고, 박성엽(朴聖燁) 등 7명은 소란을 피운 짓이 많고 너무도 경악스러워 문의(文義) 남장(南場)에서 총포로 사살하여 대중을 경계시켰습니다.
장차 공주로 합류하기 위해 29일에 행군하여 부강(芙江)의 신대(新垈)에 도착하니 정탐군이 저들 세력이 회덕에 많이 모여있다고 보고하기에 문의읍으로 회군하여 섬멸시킬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려주신 군량이 불과 며칠이면 떨어질 지경이니 316명분의 군량과 복마(卜馬) 43필의 먹이 대금을 즉시 넉넉하게 내려주셔서 군색하고 낭패한 지경을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비도들을 토벌하고 생포했다는 보고는 심히 가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들어 온 책은 다시 수정하여 보고할 것입니다. 과천의 길에서 나누어 출발한 뒤로 비로소 한 번의 보고가 있으니 군대의 기율이 허술하고, 양식과 반찬의 금액은 마땅히 다시 보고하도록 회답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차례로 초 3일 증약참(增若站)에 있으면서 문서로 작성하여 초 4일에 도착한 중대장 이진호의 보고 안에, “현재 비도 5∼60,000명이 옥천에 모여 있는데 형세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일본 병사 2개 소대 및 교도소 병사 1개 소대가 그저께 먼저 도착하여 증약역에 주둔하여 있고, 주력부대의 병사들도 뒤를 이어 출발하여 내일이면 즉시 옥천으로 향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현재 군수 물자가 떨어져서 온 군사가 굶주린 기색을 면치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적을 격파하기를 기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한 달치 군량에 한하여 한 시각도 지체하지 말고 보고대로 교도소 병력이 주둔한 곳으로 수송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비류들이 여기저기에 창궐하여 처음에는 회덕에 있다 보고하고 또 옥천에 있다 보고한 것은 그들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각별히 탐색하여 섬멸한 뒤에 곧바로 연산(連山) 등지로 향해야 할 것이고, 군량 자금은 재차 보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군색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당초에 여러 읍에서 제공함이 없었는지, 형편상 갑자기 마련하여 보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의·회덕·옥천·공주·연산 등의 읍에다 이진호의 부대가 지나갈 때 군량을 제공해준 다음 보고하고 또한 별 탈 없이 책임지고 제공하도록 공문을 보낸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교도대가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으니 필시 중도에 적을 토벌하는 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인지 행방을 단정 짓기가 어렵다. 군수 물자는 즉시 발송해야 할 것이니 그쪽에서 서둘러 수송케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