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덟 [其五十八]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인·판치 두 곳에 있는 경리청·통위영 병정들이 돌아가면서 방어하도록 한 일은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초 8일 미시 경에 판치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구두로 전한 급보에, “당일 미시 경에 수만의 비도들이 경천점(敬川店)에서 오는가하면 노성현 뒷산에서도 산에 올라 포위하면서 쳐들어옵니다. 포성이 진동하고 깃발들이 뒤섞여 어지럽고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병력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형편에 따라 효포·웅치의 요새지인 높은 산에 진을 치고 각별히 파수를 명하여 관망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인으로 출동하여 주둔하고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이 구두로 전한 급보에, “몇 만 명의 비류가 논산 직로(直路)로부터 고개를 넘어 지쳐오고 있으며 또 다른 몇 만 명이 길이 끊긴 오실산(梧室山)의 뒤편을 따라 포위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장교에게 통보해 그들의 군대를 출동하게 하는 한편, 감영에 머물러 있던 통위영 병정 2개 소대를 나누어 출동시켜 지원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연이어 판치의 진영에서 급히 보고한 내용에, “효포와 능치를 방어한 이후로는 비도들이 산야를 가득 뒤덮고서 감히 곧바로 올라오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에 온갖 깃발을 곳곳에 세워놓아 기세가 매우 성대하고 날이 저물 무렵에 이르러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요를 일으키는 정형(情形)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속해서 이인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양쪽 길로 쳐들어온 적병들을 힘을 다해 싸워 죽이고 양쪽의 적들을 격퇴하니 그들은 10리 밖 우금치(牛金峙)로 후퇴하여 주둔하니 이때 술각(戌刻, 오후 8시)이 되었습니다. 양쪽 부대의 병정 및 군수물품은 손실이 없었으나 좌 2소대 병정 김명수(金明壽)가 왼쪽 팔에 탄환을 맞아 실어 왔습니다. 그리고 밤이 이미 깊어 다시는 적의 정형을 정탐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형이 좋지 못하고 지원하는 병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 우금치로 후퇴하여 진을 치게 하였습니다. 휘하의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이인에 파견되어 지원하는 처지로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으되 몇 만의 비류를 죽이거나 물러나게 하였으며 병정을 독려하고 신칙하여 군사를 온전하게 하면서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힘을 내 앞장서지 않았다면 이런 전과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각처에서 방어하고 관망하는 일에 있어 각별히 더 독려하고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군 장교 육군 보병대위가 친히 병정을 거느리고 우금치로 출동하여 함께 머물러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초 9일 이른 아침에 적의 정세를 자세히 정탐하니 적들은 각기 진영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여러 깃발을 빙 돌아 꽂아놓아 동쪽 판치의 뒤 봉우리에서부터 서쪽 봉황산 뒤 능선까지 3∼40리를 연달아 뻗어있었고, 산위에 부대를 벌여놓고 사람들을 병풍같이 에워싸게 하여 기세가 심히 창궐하여 고립무원의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금학·웅치·효포에서 산을 넘어온 비도들은 10리 정도의 서로 바라다 보이는 높은 산에 나열하여 진을 치고 있었는데, 때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때로 포를 쏘기도 하면서 항상 침범할 기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학동(金鶴洞)을 방어하는 통위영 대관 오창성(吳昌成), 교장 박상길(朴相吉), 웅치 양쪽을 방어하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대관 조병완·이상덕, 참모관 이상덕·황승억, 별군관 유일환(兪一煥), 교장 김홍엽·이봉춘·이장혁·우기준, 효포를 방어하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 대관 신창희, 교장 김상운 등에게 각별히 정찰할 것을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류들의 정형은 온종일 출몰하면서 우리를 침범할 듯하고 조금이라도 허술히 하면 올라와서 시험 삼아 떠보며 총포를 쏘면 몸을 피하며 빠르게 움직이니 만약 꾀어내는 계책이 아니라면 반드시 싸울 태세입니다.
그들이 단속하는 정도는 맞붙어 벌이는 싸움터보다 배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금치의 서쪽과 남쪽 양쪽에 있는 적의 무리는 고함을 질러대며 요란스러워 늘 침범해 들어오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머물러 주둔해 있는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에게 신칙하여 일본 병사와 합세하고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시 경부터 비로소 포를 쏘아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일본 병사는 앞 산봉우리 위쪽으로 군대를 정렬하고 총포를 수십 차례 몰아 쏘니 적들이 많이 피살되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으나 인원은 아직도 중과부적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시 경에 이르러도 격퇴시키지 못하자 모든 사람들이 충성심을 분발하였고 사졸들이 원통해하였습니다.
이때 참모관인 전 도사 권종석(權鍾奭), 참모사인 전 주서(前 注書) 이규백(李圭白)과 유학 정도영(鄭道永) 등이 사졸을 독촉하여 용맹스럽게 진격하였고 본영에서 계차(啓差)하여 별군관이 된 출신(出身) 이달영(李達榮)·송흠국(宋欽國), 전 만호(前 萬戶) 이지효(李志孝), 전 감찰(前 監察) 이재화(李在華), 전 중군(前 中軍) 이종진(李宗珍), 전 수문장(前 守門將) 유석용(柳錫用), 전 부장(前 部將) 박정환(朴晶煥), 사과(司果) 이흥교(李興敎), 본진에서 차정(差定)한 군관(軍官) 전 오위장 황범수(黃凡秀), 유학 이주서(李周瑞), 사과 이선(李璿) 및 서산군수 성하영, 경리청 교장 김명환·정재원(鄭在元)·정인갑(鄭寅甲)·장대규(張大奎)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먼저 올라가 몸을 떨치며 독려하여 총포를 쏘아 죽인 자가 속출하니 그 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격하여 비류를 쫓아내고 적들이 진을 쳤던 높은 봉우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군기·대포 등의 군물 및 잡기(雜旗) 6∼70면(面)을 탈취하고는 일본군 장교 대위 및 병정들과 함께 중로(中路)에서 남쪽으로 뒤쫓아 갔습니다. 공주영장(公州營將) 이기동(李基東)은 공주영의 수교(首校) 박준식(朴準植), 병교(兵校) 박춘식(朴春植)·안재후(安在厚), 집사(執事) 김백현(金伯鉉)·양원길(梁元吉), 천총(千摠) 박순달(朴順達), 좌별장(左別將) 박춘명(朴春明), 우별장(右別將) 조광승(曺光承), 파총(把摠) 말시원(末始元), 장무군관(掌務軍官) 정평오(丁平吾) 및 공주영의 병정을 이끌고 봉황산(鳳凰山) 뒤 원봉(圓峰)을 파수하다가 몸을 떨쳐 병정을 거느리고 북쪽에서 길의 우측을 따라 전진하여 적을 뒤쫓았습니다.
경리청 대관 조병완·이상덕·참모관 황승억 등은 웅치의 최고봉을 방어하다가 100여 명의 병정을 거느리고 동쪽 길에서 왼쪽을 따라 돌격하여 힘을 모아 적들을 사살하고 10리쯤 추격했습니다. 그리고 경리청 대관 윤영성·백락완 등은 우금치 동쪽 최고봉을 방어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벗어나 연대(聯隊)를 버리고 먼저 오르는 비류들을 힘을 모아 방어하며 총포를 쏘아 격퇴시켜 다행히 수호하는 진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비도로 하여금 사방으로 흩어지게는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칠흑 같아 병사를 철수하여 진영으로 돌아오게 되어 결국 깨끗하게 섬멸하지 못하였습니다.
참모관 이구영(李龜榮), 유학 이승욱(李承旭), 전 사과 신효식(申孝湜)·이윤철(李潤徹), 별군관 전 부사 이필영(李弼榮), 전 오위장 김진옥(金振玉) 등은 탄환을 조달해주어 각 진영에서 조금도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였고 병정들을 독촉하고 신칙하여 함부로 차서를 잃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금영은 서북쪽의 대로(大路) 아래에 큰 강이 가로질러 흐르고 산성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고 있으며, 감영 동남쪽의 산세는 높이 치솟았고 아주 험하여 단지 두서너 통로만 있기 때문에 방어의 성첩이 없더라도 본래부터 믿을 만한 장소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런데 아! 저 비류의 몇 만 무리들이 4·50리나 둘러 뻗쳐 있어 길이 있으면 싸워 빼앗고 높은 산은 싸워 차지하여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에서 내달리며 왼쪽에서 번쩍하더니 오른쪽으로 사라지고 깃발을 휘두르며 북을 쳐대고 목숨을 버리면서 먼저 오르려 하니 저들의 의리는 무엇이며, 저들의 담략은 어찌된 것입니까? 그들의 하는 짓을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섬뜩해집니다.
우리의 미약한 병력으로도 전후좌우에서 대비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 모두가 힘을 다하여 용맹을 펴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깨끗하게 섬멸하지 못하여 비류로 하여금 아직도 여기에서 날뛰게 한 것은 몹시 절통하나 다행히도 일본군 대위와 각 영의 장졸 및 종군한 여러 관원들 그리고 토병(土兵)과 민간 장정들의 분력과 합심에 힘입어 비록 적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어놓았지만 잔당이 아직도 많으며 실상 적의 동정을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로 명령하여 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방어하게 하면서 관찰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고립무원의 우리 병정들이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먹고 잠을 잔지가 6·7일이나 되고 매우 격렬한 싸움을 치르고 난 뒤에 연이어 밤새 노숙하였으니 극히 불쌍합니다. 경리청 좌 2소대 병정 남창오(南昌五), 중 2소대 병정 김관일(金寬一)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앞장을 서다가 남창오는 왼팔에 탄환을 맞았고 김관일은 오른팔에 탄환을 맞았으나 다행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래서 어제 탄환을 맞은 병정 김명수를 포함하여 모두를 고쳐주었다 합니다.
비류가 창궐할 때에 성에 가득했던 백성들은 큰소리로 울부짖고 달아나니 거의 한순간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같았고 참담한 일을 당하고 나서 ≪관군이≫싸움에서 이기자 백성 노소는 각각 빼앗은 깃발과 죽창을 쥐고서 기뻐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각 아문(衙門)에서 치하하면서 한쪽에서는 소리쳐 울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기뻐하며 웃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천의(天意)가 민심이라는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부상을 입은 두 병정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앞장 선 장졸과 참모관은 비록 본분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지만 합당하게 격려하는 포상의 법은 있으나 감히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고 노획한 군물은 책을 만들어 순무사께 올릴 것입니다. 탈취한 군물을 부대[선봉진] 앞으로 와서 바치는 병정은 마땅히 구별해 별도로 갖추어 보고할 것이며 군관인 전 오위장 황범수, 사과 이선, 유학 이주서 등은 먼저 계차(啓差)하고 나서 격려해 전공을 쌓게 하는 것이 편의종사(便宜從事)에 합당할 것같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모두 차례로 급히 보고할 것입니다.
제(題): 장계로 아뢴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장관(將官)들이 적을 증오하여 잘 싸우고 사졸들이 명령에 잘 따랐으니 바로 행군한 뒤로 가장 큰 승전이다.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을 것이다. 남은 적들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거괴를 아직 잡지 못하였으니 앞으로도 힘을 크게 기울일 때이다. 진병하여 적을 토벌함에 조금이라도 태만함을 용납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각별히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부상을 입은 병사 3명은 각별히 구호해야 한다. 이후의 상황을 연속해서 급히 보고할 것이며 앞에서 말한 군관 3명은 마땅히 다시 전공세우길 기다렸다가 포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통위영, 장위영, 경리청, 총어영에도 그대로 베껴서 보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