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여섯 [其六十六]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접수한 출진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에, “제사(題辭)에 따라 하루빨리 공주에 도착하기 위해 이달 초 9일 해미를 떠나 출발하여 홍주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묵은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그 다음날 초 10일에 30리를 행군하여 대흥읍에 주둔하고 유회소의 지적대로 동도(東徒)를 붙잡아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11일에는 40리를 행군하여 공주의 유구(維鳩)에 머물러 있었더니 12일 축시(丑時, 오전 1∼3시)에 도착한 전령에, ‘곧바로 정산로(定山路)를 향해 출발하고 편의대로 기다렸다가 군사를 합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전령에 따라 회군하여 정산 쪽으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11일 신시 경에 유구에 도착하여 주둔하기 위해 수레를 멈추고 병사를 쉬게 하였습니다.
의병(義兵) 진영에서 잡아 보낸 동도 9명이 있었는데, 바로 유구에서 사는 놈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공초를 하였더니 유구에는 이른바 충경포(忠慶包)가 4∼5,000명이 되는데 저들은 당일 밤이 깊어진 뒤에 약속대로 산에 올라가 포를 쏘아 민심을 현혹시킨 다음 경군(京軍)의 무기를 약탈하여 경군을 도살하고 그 탈취한 기계를 가지고 동도가 강의 북쪽으로 성원하도록 한다는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저녁밥이 다 되었다 하는데도 먹을 겨를도 없이 황혼녘에 병력을 출동시켜 저들을 엄습하여 천여 명을 체포하여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놈들을 캐물어 조사하니 거괴가 매우 많았고 위협에 못 이겨 복종한 자들의 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일의 이치를 따지자면 마땅히 다 죽여야 하지만 감히 그 거괴만 죽이고 위협에 복종한 사람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에 따라 그 괴수만을 죽이고서 협조한 사람들은 석방하였습니다. 유구에 있던 적의 큰 소굴을 통렬히 다스렸으니 역시 전투를 벌려 적을 사살한 것에 비해 못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적의 담력을 부숴버리는 동시에 뒷길을 열어 무고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 방편의 계획이었습니다.
금영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대교가 있고, 가운데 광정(廣亭)이 있으며, 서쪽으로 유구가 있는데, 유구에서부터 넓게 트였습니다. 대교와 광정은 근래 어떤 판국인지? 남쪽과 북쪽에 있는 적들이 서로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경군을 포위하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그들을 예측하지 못하는 행동을 대처함은 오직 깊이 통촉하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놈들을 처단하여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오며 거괴 중에는 선봉진의 별군관 한 명이 있는데 여러모로 물어보고 들어보니 범한 바 또한 많았습니다. 즉시 처단하여 화근을 제거해야 할 것이오나 군관이기 때문에 회답의 공문을 기다렸다가 처결하려고 공초한 내용을 첨부해 보고합니다. 그리고 대흥읍에서 처단한 동도의 성명도 책자를 만들어서 아울러 보고합니다.
대저 유구의 각 동에 당초 포(包)를 설치했다가 추후에 귀화를 하니 곧 이는 각 읍과 각 동의 근래 상투적 수법입니다. 지금 장위진(壯衛陣)이 본 동으로 들어가 주둔하는 날에 잡은 비류들의 공초한 내용이 이와 같이 확실하니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 진실로 크게 징계하고 뉘우칠 겨를도 없이 비류가 도처에서 난을 일으키니 어찌 심하고 심하지 않은 구별이 있겠으며 그 난을 일으키는 계제를 따져보면 한결같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귀화한 뒤에도 참작하고 구별해야 다 죽여 버리는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오정선은 사교(邪敎)에 물들어 이름을 더럽힌 자로 조정의 신료로서 마땅히 그 처벌을 배로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귀화하였는데 다만 난을 일으킨 비류를 공초하는 죄목으로만 조정의 신하를 잡아가두었으니 사리로 보아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선 진중에서 명령을 기다리면서 회답의 공문을 기다려 시행할 뜻을 써서 보내오니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 공초한 내용을 어찌하여 올려 보내지 않았는가? 즉시 속히 보고해서 결단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이며, 이른바 별군관 일원(一員)의 성명 역시 보고하지 않았으니 심히 모호한 일이다. 아울러 오정선을 잡아 가둔 뒤에 함께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