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다섯 11월 22일 [其七十五 二十二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교도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에, “이달 초 5일에 파송한 대관 이겸제가 병정 1대를 거느리고 각 읍으로 나가서 청산(靑山) 석성리(石城里)에 도착하여 저들 무리 수만 명과 한바탕 접전하여 40여 명을 죽였습니다. 초 8일에 김산읍으로 회군할 때에 옥천의 양산(梁山) 장터에 도착하여 또 저 무리들을 만나 몇 천 명이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접전하여 50여 명을 죽였습니다. 초 10일에 금산에 도착하여 보니 저 무리들 수만 명이 읍 안과 산 위아래에 포진함에 적의 형세가 자못 괴이한바 한바탕 혼전하여 50여 명을 사살하였다”고 합니다.
동시에 도착한 교도소 중대장 이진호의 보고에, “이달 12일에 금산읍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13일에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진산(珍山)으로 향하였습니다. 교도소 병정은 일본군 중위 히라기 조다로(白木城太郞)와 함께 행군하여 14일에 용담(龍潭) 위의 조림(照林) 장터에 도착하여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의 무리와 접전하여 30여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동도 20명 중에 서도필(徐道弼)·박만호(朴萬浩)·이만실(李萬實)·조윤삼(趙允三)·박치팔(朴治八)·김윤일(金允一) 등 6명은 대단히 소란을 피워 극히 망측하기에 모두 사살하였고 그 나머지는 효유(曉諭)하여 석방하였습니다.
16일에 진안읍(鎭安邑)에 도착하여 또 저들 수천 명을 만나 한바탕 접전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고 17일에 고산읍(高山邑) 산천리(山川里)에 도착하여 저들 수백 명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죽였습니다. 18일에 고산읍에 도착하여 또 몇 만 명인지 알 수 없는 저들을 만나 한바탕 혼전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포한 동도 30명 가운데 이른바 접사(接司)인 고산에 사는 이만학(李晩學)·여관서(呂寬西)와 진안에 사는 김치서(金致西) 등 세 놈은 우선 잡아 가두었고 김성도(金聖道)·임성원(林聖元)·김중이(金仲伊) 등 3명은 포살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효유해서 석방하였습니다. 교도소 병정과 일본 병사는 한 사람도 부상자가 없었습니다.
각처에서 접전할 때에 노획한 여러 군물(軍物)은 법대로 그곳 읍에다 두어야 하지만 읍이 대부분 비어 있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되어 총 200자루, 창 300자루는 파쇄하고 화약 천여 근은 물에 띄워버리고 납탄 10여 말은 주조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는 여러 가지 물건은 태웠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진영의 장졸들이 여러 곳에서 노고를 이처럼 가상하게 바치니 포상하고 격려하여 주시길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제(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