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여섯 11월 23일 [其七十六 二十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경리청 부영관으로 안성군수를 겸직한 홍운섭이 20일에 작성하여 23일에 도착한 보고 내용에, “이달 18일 은진(恩津) 성응리(成應里)에 도착하여 영리한 사람을 많이 동원하여 적의 정형을 정탐하니 각처에 패주한 자들이 모두 남하하였는데 거처가 일정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진의 육곡(六谷)에 사는 신현기(申鉉基)가 자신을 대장이라 하고 무리 5,600명을 모아 김산 등지에서 소란을 피우더니 현재 자기 집에 있다고 하므로 오늘 첫 새벽에 1개 소대를 조발하여 대관 김명환(金命煥), 교장 정재원(鄭在元)에게 가서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현기는 아직 귀가하지 않아 그 아비 신응균(申應均), 숙부 신낙균(申洛均), 종형 신현구(申鉉九) 및 옥천포(沃川包)의 잔당 원준상(元準常) 등 네 놈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쌀과 벼와 화약·납탄·조총·곤장 등의 물건을 무수히 쌓아두었기에 불로 태울 수 있는 것은 태우고 물에 빠트려 버릴 수 있는 것은 물속에 집어넣었고 곡물의 경우는 모두 운반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육곡 주민들 모두가 말하길, ‘잡혀간 네 놈 중에 만약 한 놈이라도 살아서 돌아오는 자가 있게 되면 온 마을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였으니 이놈들이 서로 얽혀 저질렀던 행패를 미루어 알 만하였기에 한꺼번에 포살하였습니다.
쌀과 벼는 성덕리 각 식주인(食主人)들에게 적당히 헤아려 나누어 주었고 다시 남은 것은 수량을 기록하고 일본군 진영 소위에게 이송하여 병영에서 수요대로 쓰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운섭이 거느린 경리청 2소대는 금영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는바 벌써 지시를 받았으니 성하영이 돌아와 주둔할 때까지 지체하며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로 하여금 임시로 그 부대를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홍운섭은 23일에 출발하여 안성을 향해 전진할 때에 우1소대 2분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였는바, 경기도의 안성·죽산과 충청도의 진천·목천 등지에 흩어져 있는 비류들이 많다고 하니 역시 소홀하게 할 수 없는 탓에 금영에 있는 2개 소대 중에서 1개 소대를 안성으로 파송하여 그로 하여금 순라를 돌며 보초를 서게 하고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처분을 기다려 시행할 생각입니다.
제(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