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넷 30일 [其八十四 三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이달 20일에 작성하여 27일에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의 보고에, “행군하던 부대가 부여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둔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홍산(鴻山)을 향해 출발하여 부여(扶餘) 근방 30리 가량에 이르러 정탐하니 바로 그곳 마을은 본래 동도가 기포(起包)한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 대관 윤영성, 교장 장대규(張大奎)·정인갑에게 1대 병력을 거느려서 그 마을을 포위하고 그 마을 사람들을 시켜 비류들을 찾아내고 우두머리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캐묻고 조사하여 실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이운(金伊運)·강공진(姜公鎭)·강원형(姜元亨)·강팔복(姜八福)·이명옥(李明玉) 등 5놈은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홍산 고당리(古堂里)의 주민들이 비류 최상윤(崔尙允)·전묵진(田黙鎭)을 붙잡아 바치기에 자세히 조사한 뒤에 역시 그 자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홍산읍에 이르러 주둔하면서 소문을 들으니, 한산·서천 등지에서 비도들이 바야흐로 무리를 모아 이 때문에 소란스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장차 그쪽 두 읍을 향해 출발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1일에 작성하여 29일에 도착한 서산군수의 보고에, “이달 20일에 홍산현에서 출발하여 한산군으로 향한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그날 오시 경에 한산읍에 이르니 온 성의 인가(人家)들은 모조리 불타버렸고 각처의 공해(公廨)는 네 벽만이 남아있을 뿐이었고, 아전과 백성들이 울부짖는 모습은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들여 위무하였습니다.
한편 적의 정형을 정탐하니 서천·한산 두 곳에 둔취한 비류들이 서천 읍으로 돌격해 들어와 불을 지르고 성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산 수성장(守城將) 김련(金鍊), 홍산 유회장(儒會長) 최학래(崔鶴來)가 보부상을 거느리고 몸을 날려 뒤를 따랐고 병정들이 가운데에서 모두를 길게 몰아 크게 진격하여, 겨우 한산읍의 경계를 벗어나니 적의 무리가 서천읍에서부터 이미 불을 지르고 들판을 뒤덮으며 퇴각하였습니다.
적은 문득 주력부대가 전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남북으로 흩어지니, 몇 천 명은 서천의 삼수동(三水洞)의 뒤 산기슭으로 뭉치고 몇 천 명은 그 읍의 남쪽 연포(沿浦) 등지에 둔취하였습니다. 북쪽에 둔취한 적군의 형세는 심히 창궐하여 깃발이 산을 덮었고 포성은 우레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대관 윤영성, 별군관 유석용, 참모 신효식, 교장 장대규·정인갑은 1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북쪽 산길을 따라 교전하면서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관 이상덕, 참모관 권종석, 교장 이봉춘·이장혁은 1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쪽 갓길을 따라서 힘을 떨쳐 곧장 들어가 위아래에서 협공하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적진을 대파하니 포살한 자가 몇 백 명이 되고 빠져 도망친 나머지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숨었으며 남쪽에 둔취한 비류 역시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날이 이미 저물고 캄캄해져서 더 이상 추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회군하여 한산 역촌(驛村)에 주둔하면서 여섯 곳에 복병(伏兵)을 두어 적도 몇 십 명을 잡아 죽였습니다. 노획물은 책자를 만들어 보고합니다. 향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2일에 작성하여 29일에 도착한 서산군수 보고에, “서천·한산 두 지역에서 적을 물리친 사유는 어제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한산 역촌으로부터 21일 묘시 경에 내산(內山)·외산(外山)·길산(吉山) 등지를 거쳐 행군하여 서천 지역에 이르러 잔당인 김제(金堤)에 사는 강명선(姜明善) 등 일곱 놈과 대기수(大旗手)라는 네 놈을 체포하여 모두 즉시 포살하였습니다.
이어서 한산읍의 신아포(新牙浦)로 가다가 강을 건너 도주하는 임피(臨陂)에 사는 비류 김해룡(金海龍) 등 7명을 잡아 죽였고, 마침 날이 이미 저물고 어두워서 그대로 신아포에서 주둔하였습니다. 22일 묘시 경 행군하면서 연포(沿浦)를 방어하는 일을 더욱 더 엄히 단속시키고 주민을 안무하고는 와초포(瓦草浦)를 거쳐 돌아 활동리(活洞里)로 향하였습니다. 한산읍의 아전과 이교(吏校)들이 소 2마리·돼지 5마리·술 10동이·떡 10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군진(軍陣) 앞에서 기다리므로 병정들을 먹였습니다. 지나는 여러 곳에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효유하였으며, 향후의 상황을 차례로 급히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산·서천 두 읍이 혹독하게 비류들의 해독을 입었다는 말을 듣자니 애처롭고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거처할 만한 곳을 특별히 조치하고 호남 연해로 통하는 길목을 엄하게 방비하도록 공문을 발송하는 한편, 각 해당 읍에다가도 감결을 보내 신칙하였습니다. 장졸들이 의기를 떨치고 힘을 다하여 이렇게 크게 승리하였으니 가상하고 칭찬할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에는 합당한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노획한 군수물자는 책자를 만들어 순무사께 올립니다.
한산읍의 아전과 이교 등이 사용한 양곡 및 처단한 여러 놈들의 명단은 처음에는 책자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순무사께 보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보고를 기다렸다가 차례로 급히 보고할 계획입니다.
제(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