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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여든다섯 [其八十五]

보고하는 일입니다. 28일에 전주에서 전진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거니와, 같은 날 30리를 가서 금구현(金溝縣)에서 점심을 먹고, 20리를 가서 원평(院坪) 거리(巨里)에 도착해보니, 25일에 ≪동학농민군을≫토벌한 뒤라 가게 및 여염집 40여 채가 불탔으며 비류들이 저장해둔 곡식 몇 100석과 민가의 물건들이 모조리 불에 타서 보기에 몹시 처절하였습니다. 그래서 흩어진 약간의 백성을 불러 모아 우선 불타지 않은 집에 머물게 하고 차차로 집을 짓고 거처할 곳을 정하도록 각별히 효유(曉諭)하였습니다. 17리 정도를 행군하여 태인(泰仁)의 석현점(石峴店)에 도착하니 수십 채의 인가가 역시 불에 탔는데 연기와 불꽃이 아직도 살아있어 몹시 참담하였습니다

장위영 대관 윤희영·이규식이 자기 소대를 이끌고 원평을 지원하기 위하여 바로 내려오다가 태인읍에 도착하여 비류 몇 천 명을 토벌하였는데 포살한 자가 매우 많았으며 생포한 자와 노획물 또한 많았다고 합니다. 태인읍에서 묵으려 할 즈음, 석현점의 앞길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세한 상황을 듣고 이어서 행군하는 부대와 함께 3리쯤 가서 태인 읍내에 도착하니 7,800채의 집이 또한 불에 타버렸는데 모두 비류들이 흩어질 때에 방화한 것이라 합니다. 몇 백 채의 마을 집도 각 공해(公廨)도 모두 텅 비었습니다. 몇 명의 유랑민을 불러서 만 가지로 효유(曉諭)하니 차츰차츰 모여들었습니다만 그중에는 멀리 달아난 자도 있으며, 비류들의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자도 있는지라 끝내 편안케 불러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비류들이 저장해 두었던 곡식이 남아있어 이것으로 각 진영(陣營)을 공궤한 뒤에 그대로 묵었습니다.

한편 비류들이 다시 진을 치고 정읍(井邑) 등지로 전진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 이튿날 29일 진시 경에 일본군 각 부대와 함께 동시에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정읍현 앞의 점(店)에 도착하니, 비류들은 이미 달아나 흩어져서 끝내 자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리를 전진하여 정읍현 중흥리(中興里)에 도착하여 유숙하였고, 일본군 병사는 천원참(川原站)에서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금구현 아래의 100리 길에는 점막(店幕)과 여염집은 물론 원평(院坪) 석현(石峴)이 전소(全燒)된 것 외에 가끔 있는 한두 집까지도 불에 타서, 인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영원히 끊어지고 사는 사람이 없으니 보기에 처절함을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위영 두 소대와 일본 병사 64명이 도착하여 태인읍의 싸움에서 이긴 일은 다만 일본 사람의 통지에 의해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보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승첩한 사실을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하니 그 전보(轉報)를 기다렸다가 즉시 급히 보고할 생각입니다. 생포한 놈들은 이미 일본 진영에서 참작하여 방면하였다 하므로 문초(問招)할 수 없었습니다. 적의 정형은 다수가 나주 근처에 모여 있다고 하는바, 일본 사람이 각 부대가 일제히 도착할 때까지 하루 더 머물 것을 요청하기에 그대로 천원(川原)에 유숙하였으며 차차 전진할 계획입니다. 연로의 상황은 우선 급히 보고할 연유를 알립니다.

제(題)

주석
태인(泰仁) 주력 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를 끝으로 동행하던 손병희와 헤어져서 손병희는 최시형이 숨어 있는 임실로, 전봉준은 장성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세 산은 태인읍을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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