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일곱 12월 초 3일 [其八十七 初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장위영 대관 윤희영 등이 보초(報草)를 베껴 올린 내용에, “지난달 26일에 본영의 좌부영관(左副領官) 이두황의 통지에 의거하여 대관 윤희영·이규식, 교장 오순영(吳順永)·장세복(張世福)·양기영(梁基英)·이경진(李景振)·홍선경이 병정 230명과 일본 병사 40명을 거느리고 완영(完營)을 출발하여 금구읍의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행군하여 태인의 경계에 이르니 때가 사시(巳時)였습니다. 적의 정형을 정탐하니 동괴(東魁) 전봉준·김문행(金文行)·유공만(劉孔萬)·문행민(文行敏) 등 네 놈의 접주가 8,000여 명을 이끌고 태인읍의 주산인 성황산(城隍山)·한가산(閒加山)·도리산(道理山, 또는 道伊山)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 곳이라고 하지만 봉우리는 아홉 봉우리가 되며 깃발을 세우고 진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적은 경군(京軍)이 도착한 것을 알고는 천보총을 한꺼번에 쏘아대니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탄환이 빗발쳤으며 계속해서 깃발을 휘두르고 나팔을 크게 불어 그 기세가 호대(浩大)하였습니다. 적들이 진을 치고 모여 있는 곳은 모두 높은 산과 험한 곳이고 그 이외는 모두 넓은 들이었습니다. 우리 병사는 230명이고 일본 병사는 40명이었는데, 대관 윤희영, 교장 이경진·홍선경이 거느린 병정 9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적이 있는 산 서쪽 길에서부터 공격하고, 대관 이규식, 교장 오순영·장세복·양기영이 거느린 병정 140명은 일본 병사 20명과 함께 동쪽 길을 따라 호응하였습니다.
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분담이 정해지자 두 길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산으로 올라가니 이때 적의 탄환이 끊임없이 아래로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밭이랑에 의지하여 몰아서 한꺼번에 총을 쏘기도 하고 혹은 들판에 엎드려 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대열(隊列)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호응하여 길게 몰아서 앞을 향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비로소 황겁한 기색이 있었고 깃발이 바야흐로 움직이려 할 때 두 길목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으로 올라 잽싸게 공격하니 적들은 대열 앞뒤가 뒤섞여 후퇴하며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적들이 진을 쳤던 산을 탈환하고서 멀리 건너편을 바라보니 앞뒤의 산에 있던 적들이 성황산에서 합하고는 회룡총을 연속 쏴대며 크게 나팔을 부니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즉시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모으고 각각의 산으로 올랐던 병사를 집합시켜 다시 네 갈래 길로 나누어 산으로 돌격하였고 몰아서 한꺼번에 총을 쏘며 공격하니 그 소리가 우레 같았습니다.
이때 적들은 막아내지 못하고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도망하였습니다. 네 길목에 있던 병사들은 동서로 20리가 되는 경계까지 그들을 뒤쫓아 각기 생포한 자가 50여 명이고 탄환을 맞아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습니다. 노획한 군물(軍物) 가운데 회룡총 15자루, 조총(鳥銃) 200여 자루, 탄약과 죽창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안장을 앉힌 말이 6필이었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술시(戌時)가 다 갔는지라 즉시 태인읍에서 군대를 모아 한 명 한 명 점군(點軍)하니 우리 병사와 일본 병사 모두 무사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휴식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승리의 사유는 이미 급히 보고하였거니와 보초(報草)를 지금 대관들이 있는 곳에서 베껴 보내온 바, 격려하는 보답을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기에 우선 보고하며 책자는 다듬기를 기다렸다가 수정하여 올릴 계획의 연유입니다.
제(題): 이렇게 대첩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상하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의 군대의 행진을 계속하여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