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여덟 12월 13일 [其九十八 十三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방금 도착한 서산군수 성하영 진영으로 부임한 참모관 권종석, 별군관 유석용의 보고에, “한산·서천의 비류들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유는 서산군수에게 보고하여 속속들이 알렸거니와 이달 초 2일에 군수가 부임하기 위해 경리청 병정을 거느리고 비인·남포로 방향을 바꾸었고 저희 참모관·별군관은 선봉의 본진으로 부임하려 서천 송동(松洞)으로 길을 나누어 출발하였습니다. 가면서 각별히 연로의 정형(情形)을 살피니 비류 가운데 궤멸되어 흩어진 잔당들이 왕왕 말썽을 일으키니 단기(單騎)로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산군수와 충분히 상의하여 결정하고 경리청 병정 20명을 나누어 거느리고 당일 유시 경에 지나는 길에 한산읍에 도착하여 묵으면서 읍민(邑民)을 불러 모아 낱낱이 효칙(曉飭)하고 위무(慰撫)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초 3일에 부대를 이동하면서 나루를 건너려고 한산의 죽산(竹山) 나루에 도착하니 한산 주민 수백 명이 말하기를 ‘함열·웅포의 비류들이 와서는 한산성을 함락하고 읍촌(邑村)을 몽땅 태워버렸으니 이들 경군(京軍)의 뒤를 따라가서 그 곡절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어 배를 타려하기에 하나하나 금지해 나루를 건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웅포의 앞 바다에 도착하니 웅포 주민들이 배가 대는 것을 엿보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나루 주변에 배를 정박하고 백성들을 불러 타이르고 안도시켰습니다. 뒤를 이어 한산의 부보상(負褓商) 및 웅포 주민이 힘을 합쳐 잡아 바친 자는 바로 한산읍을 불지를 당시 앞장서서 변을 일으킨 최득용(崔得用)이었습니다.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고는 당장에 처단하고 이어서 함열읍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무사히 묵었습니다.
그 이튿날 초 4일에 조반을 먹은 뒤 지나는 길에 읍 근처 상와촌(上瓦村)에 도착하니 이곳은 본래 ≪동학농민군의≫소굴인지라 그래서 정탐하여 수십 명을 붙잡았고 낱낱이 캐어물으니 모두 양민인 까닭에 효유(曉諭)해서 놓아 보내주었습니다. 소위 비류를 따랐던 천귀돌(千貴乭)은 막 은신하였다가 붙잡혔는데 자복(自服)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분명히 증언한 까닭에 즉시 처단하였습니다.
익산(益山)의 경계에 이르니 좌우로 울창하게 수십 리나 되는 소나무 숲에서 연달아 포성이 났는데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미약한 병력으로는 정찰할 수 없어 서둘러 익산읍에 이르러 알아보니 익산읍 미륵면(彌勒面)의 거괴 오경도(吳敬道)가 여기에서 출몰하여 스스로 기포(起包)한다고 말한 연고로 익산군수·이교(吏校) 및 병정 5명을 독려해 같이 보냈으나 오경도란 놈은 이미 도망쳤고 그놈의 부하인 포사(砲士) 7명을 붙잡았습니다. 그 중에 최영환(崔永煥) 등 세 놈은 비록 나쁜 짓을 같이 했다고는 하나 억지로 가입한 것이 분명하여 타일러서 석방하였습니다. 최정선(崔定仙) 등 네 놈은 익산읍의 군기(軍器)가 탈취를 당할 때에 총을 가지고 변을 일으킨 행위를 여러 사람이 목격하였다고 하므로 조사하여 실정을 알게 되어서 백성을 많이 모아놓고 사방으로 뚫린 큰 거리에서 포살하였습니다.
그들이 탈취한 군기는 저들이 사는 집 뒤에 묻어두었다 하므로 즉시 찾아오도록 익산읍 공형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전술한 죄인 6놈은 즉시 진영의 앞으로 압송하여 대기시켜야 하지만 갈길이 요원하고 비류들이 곳곳에 산재하여 빼앗길 우려가 없지 않기에 스스로 결단하여 처결하였으니 지극히 황송하며, 이달 초 6일 미시 경에 완영에 도착하여 우선 머물러 주둔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참모관·별군관 두 사람이 경리청에서 부임하러 가는 길에 한산·임천·서천 등지에서 현저한 공적이 많았고 이번 연로에서 조처(措處)함에도 수고가 많았으니 매우 가상하고 칭찬할 만 하다는 연유의 일입니다.
제(題): 도착하였거니와 이후의 상황을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