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넷 12월 20일 [其百四 二十日]
보고하는 일입니다. 15일에 작성하여 20일 인시 경에 도착한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의 보고 내용에, “금영 순찰사 지휘에 따라 대관 김명환과 참모관 이윤철(李潤徹), 교장 정재원(鄭在元)으로 하여금 병정 70명을 거느리고 이달 초 8일에 거괴를 토벌하고 체포하게 하려고 보은·청산 등지로 출발시켜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관 김명환의 보고(手本)에, ‘초 9일에 회덕에서 유숙하고 초 10일에는 옥천에서 유숙하면서 비류들이 영동 용산(龍山) 장터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11일 청산으로 군대가 행군할 즈음에 청주 병사 180명을 청산 땅에서 상봉하여 진영을 합하고 청산읍에서 유숙하였습니다. 12일 새벽에 군대를 출동하여 영동 용산 장터로 출발해 가니 적의 형세가 호대(浩大)하고 숫자가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접전을 하여 비류 5∼60명을 포살한 다음 이어서 비류들을 추격하였더니 탄환이 떨어져 군대를 돌려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적들의 형세가 다시 강성해졌고 사면으로 포위해 와 형세상 회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순무영의 참모관 이윤철 및 본영의 좌소대 병정 김창운(金昌云) 1명, 진만영(鎭南營)의 병정 1명이 총포에 맞아 죽었으나 시신은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군사의 수효를 점검하니 좌 1소대 병정 이기준(李基俊)·김억석(金億石)·김태산(金太山) 3명도 낙오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으되 바로 청산읍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읍 역시 적들의 소굴이어서 항거하며 총포를 쏘기에 머물러 주둔하지 못하고 다시 보은으로 회군하였습니다.
그러자 저 무리들이 우리 군대가 미약한 것을 엿보고서 사면에서 추격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13일 청주 병영으로 회군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애당초 군대가 출동할 적에 지나가는 군읍(郡邑)에 순라를 돌고 보초를 서게 하였기 때문에 병정이 많지 않았으며 탄환도 넉넉하지 못한데다 갑자기 적당을 만나 이렇게 손실을 입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참모관과 두 병정의 죽음은 그 참담하고 애통함이야 다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관군도 따라서 체모가 손상되었으니 얼마나 죄송하고 민망스러운 일입니까? 충청도의 각 읍이 굳이 일시의 편안함을 두고 무사하다고 말하면서 각 면리에서는 ≪동학농민군을≫토벌하는 규율이 전연 해이하여 ≪동학농민군이≫이렇게 잡초처럼 뻗어내려 무성해지는 데에 이르렀고 마침내 모여들어 다시 창궐하게 하였으니 법과 기율을 생각하면 극히 통탄할 뿐만 아니라 잠적했던 비류들이 다시 뒤이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미리 난리를 방지하는 경계[綢繆之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