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진이 무안읍(務安邑)에 이르러 첫 번째 물의(物議), 어떤 일에 대한 이런 저런 비평는 당초에 비류(匪類)가 일으키는 소요가 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왕사(王師), 임금의 군대가 〈비류를〉 토벌한 뒤에 방비하고 체포하는 일을 마련하는데 확실히 규모가 있었고, 붙잡은 거괴(巨魁)와 접주(接主)들이 거의 8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본진이 주둔한 뒤에 〈죄를〉 헤아려서 처단한 자도 있었으나 각 해당 면(面)과 리(里)에서 오히려 잡아서 바친 자들이 많았습니다. 낌새를 채고 도피한 자 이외에는 거의 모두 귀화하였으나 그사이에 난리를 겪었고, 또 면과 리에서 수색하여 체포를 했기 때문에 읍 전체의 민정(民情)은 아직도 도탄(塗炭)에서 편안하지 못한 형편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사정에서는 안심시켜 살게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망에서 빠진 어지간한 자는 읍에서 잡을만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특별히 귀영(貴營), 호남 초토영)의 수성군(守城軍)에게 지시하여 혹시라도 이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핑계를 대어 멋대로 구는 자가 있다면 본읍에서 보이는 대로 잡아서 금지하고 일일이 보고하도록 해당 현(縣)에 관유(關由)를 하여 방수군(防守軍), 수성군)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폐단이 없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