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규태왕복서병묘지명
  • 기사명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의 묘비명과 서문[兩湖巡撫先鋒將李公墓碑銘幷序]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일러두기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의 묘비명과 서문[兩湖巡撫先鋒將李公墓碑銘幷序]

국조(國朝, 조선)의 영조 이후에 황지(潢池,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의미)의 반란이 3번 일어났는데, 이인좌(李麟佐)가 당론(黨論)이 의(義)를 가리는 가운데 힘차게 일어났고, 홍경래(洪景來)가 권신(權臣)이 《임금의》 명(命)을 집행한 뒤에 준동(蠢動)하였으나, 당시에 충의(忠義)를 일으킨 신하의 대부분이 그 공이 사직(社稷)에 있게 되었고 이름이 종(鐘)과 이(彝, 제기)에 새겨졌다. 그러나 갑오년 동비(東匪)가 창궐한 것에 있어서는 실제로 우리의 도(道)가 분열된 일이 일대 관건이었다. 우리의 도는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선생에게서 밝아지기 시작하여 정암(靜庵, 趙光祖의 호)과 퇴계(退溪, 李滉) 이후에 선현(先賢)들이 배출되어 교화(敎化)가 아름답게 빛났다. 혹시 도에 어긋나고 취향이 다른 무리들이 있어 그 사이에 자라나면 반드시 풀을 베듯 짐승을 잡듯이 하여 3장목(三丈木)이 서리와 눈보다 준엄하였다. 일종의 무슨 사악한 기운이 동학(東學)의 이름으로 모여 깃대를 들고 일제히 일어나서 많게는 60만~70만 명에 이르렀는데, 날마다 하는 일은 하늘의 이치를 어기고 인륜을 저버리는 변고가 아닌 것이 없었다. 양호(兩湖, 호서와 호남)가 어지럽고 온 나라가 흉흉해지니 조정에서는 영조 때의 고사(故事)에 따라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여 《그들을》 진정시키고, 당대에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뽑아 그 직임(職任)을 채웠는데, 초하(蕉下) 이규태(李圭泰)는 미약한 하료(下僚, 말단 부하)로 제일 먼저 뽑혀 양호선봉장(兩湖先鋒將)의 직임을 맡아 수천 개의 포(包, 동학의 조직단위)를 토벌하고 수백 개의 주(州)와 군(郡)을 숙청하였다. 왕명(王命)을 선포하고 사문(斯文)을 지켰으며 폐하에게 승리를 아뢰고 몸을 들어 집으로 물러났다. 그 공(功)이 3번의 반란 중에 첫 번째가 되기에 충분하였으나 명(命)이 때와 어긋나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아! 애석하다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공(公)의 자는 호경(昊卿)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시조(始祖) 알평(謁平)이 크게 가문을 열었고, 그 뒤에 공(公)과 경(卿)들이 밝게 드러나서 세상에 전하였다. 정형(廷馨)에 이르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었고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는데, 호(號)가 지퇴당(知退堂)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黃兎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를 지었고, 죽어서는 춘천(春川)의 퇴계서원(退溪書院)에 배향되었는데, 그가 바로 공의 10세(世) 선조이다. 증조(曾祖)는 이름이 제(晢)인데 무과출신으로 좌포장(左捕將, 좌포도대장)을 지냈고, 조부는 이름이 현기(顯虁)인데 무과출신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이름이 겸주(謙周)인데 무과출신으로 부사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어머니 진주(晋州) 유씨(柳氏)는 통덕랑(通德郞) 준검(俊儉)의 여식이고 충경공(忠景公) 형(珩)의 후손이었다.
공은 헌종(憲宗) 신축년(辛丑年, 1841)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문사(文辭)가 일찍이 성취되었다. 임술년(壬戌年, 1862)에 무과에 합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을 당했는데, 슬픔이 지나쳐서 상제(喪制)를 넘어섰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판관(判官)·첨정(僉正)으로 옮겨갔다. 정묘년(丁卯年, 1867)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슬픔과 예식을 모두 갖추었다. 임신년(壬申年, 1872)에 도총 도사(都摠 都事)·호조 좌랑(戶曹 佐郞)·도총 경력(都摠 經歷)이 되었다가 홍원 현감(洪原 縣監)으로 나가 임소(任所)에 도착해서 처음부터 간략한 것을 따르는 데에 힘썼다. 함영(咸營, 함경도 감영)에 나아갔을 때에 관찰사가 말하기를, “해당 군(郡)의 고질적인 폐단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환미(還米) 1만석이다. 백성은 아전에게 미루고 아전은 백성에게 미루어 받을 곳이 없다. 《다른 하나의 폐단은》 읍에 지방 유생들이 있는데 대대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해서 종종 해괴한 일이 있다. 이 2가지 폐단을 바른 데로 돌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라고 하니, 공이 대답을 하고 물러났다. 정사(政事)를 여는 날에 교장(校長)이 재임(齋任, 향교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을 교체할 것을 요청하였고, 수리(首吏, 이방 아전)가 환곡의 장부를 조사하여 바로잡을 것을 보고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향교의 폐단은 해당 임원을 자주 교체하는 데에서 연유하여 혼잡이 생겨나니 이제부터 교장은 원향(原鄕)에서 맡고 장의(掌儀, 향교 안의 직임) 2자리는 속향(屬鄕)에서 나누어 대대로 유생 2명이 6개월씩 교대하며 문장과 덕망이 있는 자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그것을 따라 시행하니 향교의 폐단이 없어졌다. 또한 “환미(還米)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내어주거나 영작(營作)할 때와 피곡(皮穀)을 옮겨 쌀을 만들 때에 직접 장부를 조사해서 질서있게 구별을 하고 각각 책자를 만들어 눈으로 보며 손으로 베껴 써서 계산을 하라”고 하고, 장부를 1달 내에 마감을 하여 장리(將吏)를 정해 장부를 깨끗하게 하니 아전과 백성이 모두 그 신통함을 칭송하였다. 영사(令辭, 명령을 적은 글)와 보장(報狀, 상관에게 올리는 보고)은 논리가 있고 본말이 분명하여 익숙한 자와 같았는데, 공이 본래 의마지재(倚馬之才, 글을 짓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고 구고(句股,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짧은 변과 긴 변)하는 방법을 잘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옥사(獄事)의 사정에 익숙하여 심리(審理)가 마땅함을 얻어 관찰사 홍우길(洪祐吉)이 막빈(幕賓, 裨將)에게 일찍이 말하기를, “홍원(洪原) 수령은 보장(報狀)의 말이 막힘없이 통하여 능숙한 유생이라고 할만하다.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정다산(丁茶山, 정약용)의 수제자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사관(査官, 옥사를 조사하는 관원)과 옥관(獄官, 옥사를 다스리는 관원)이 된 것이 10여 차례나 되었다. 매 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의 수령이 객사에서 殿牌를 모셔놓고 절하는의식을 하였고, 새벽에 일어나 촛불을 들고 가서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 그만둘 때까지 시종(始終) 한결같아 그것을 거행하는 아전이 처음에는 괴롭게 여겼으나, 끝내는 그것에 감화되었다. 교궁(校宮, 각 고을에 있는 문묘)에 선비를 기르는 밑천으로 전답(田畓)이 있었는데, 공이 정교하게 실제를 살피고 적합한 사람을 얻는 데에 힘쓰니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나서 기술(記述)할 정도가 되었다. 모든 일에 실제로 마음이 정성스러워서 비록 드러나는 명성은 없었으나 떠날 때에 반드시 불망비(不忘碑, 전임 수령의 공덕을 칭송하여 건립한 비)가 있었다. 정축년(丁丑年, 1877)에 충청병마우후(忠淸兵馬虞候)로 옮겨가니 유생과 백성들이 반원(攀轅, 수레의 끌채에 매달리고 수레바퀴 앞에 눕는다는 뜻으로, 훌륭한 관리의 이임을 아쉬워하며 유임을 간청함을 비유함)하였고, 찬(饌)을 마련하여 전별(餞別)하는 자가 뒤를 이었다. 무인년(戊寅年, 1878)에 청주 영장(淸州 營將)으로 승진하였고, 품질(品秩, 품계)이 차서 내금장(內禁將)으로 옮겨갔다. 신사년(辛巳年, 1881)에 삼수부사(三水府使)가 되어 유가(儒家)를 높이고 글을 숭상하니 어리석은 《사람들이》 크게 변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883)에 내금위 천총(內禁衛 千摠)으로 옮겨갔다가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885)에 3남(三南)에서 적의 변고가 크게 일어나서 대신(大臣)이 연주(筵奏, 임금의 면전에서 아뢰는 것)하니, 진영(鎭營)을 다시 설치하여 《관질(官秩)에》 구애받지 말고 뽑아 임명하라고 하였는데, 공이 이 선택에 뽑혀 청주 영장(淸州 營將)이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품계(品階)의》 차례에 따른 것이 아니고 재임용된 것이었다. 공이 1필의 말로 병영에 가서 정찰을 베풀어 밝게 살피고 민중을 심복시켰다. 병사(兵使) 이민응(李敏應)이 사유(事由)를 갖추어 장문(狀聞)하여 윤허를 받아 방어 이력(防禦 履歷)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병술년(丙戌年, 1886)에 다시 내금장(內禁將, 내금위장)에 제수되었고, 기축년(己丑年, 1889)에 총어 천총(摠禦 千摠, 摠禦營의 천총)으로 옮겼다. 경인년(庚寅年, 1890)에 별시(別試) 참고관(參考官, 시험관)으로 임명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891)에 경리청(經理廳)의 파총(把摠)이 되었다가 바로 참령관(參領官)으로 바뀌었다. 임진년(壬辰年, 1892)에 전라우도(全羅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제수 받았다가 갑오년(甲午年, 1894)에 임기가 차서 돌아와서 훈련도정(訓鍊都正, 훈련도감의 도정)·총어영 별장(摠禦營 別將)·장위영 정령관(壯衛營 正領官)을 제수 받았다. 이때에 동비(東匪)가 난리를 일으켜서 각각 포(包)를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것은 수만 명이었고, 적은 것도 7,000~8,00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8역(八域, 8도)을 선동하였는데, 3남(三南, 호서·호남·영남)이 가장 심하였다. 성을 점거하여 수령을 죽이고 군기를 빼앗았으며 공화(公貨, 관아의 재물)를 약탈하였다. 임금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고 유생과 백성들이 달아나서 숨었다. 그래서 특별히 본영(本營, 순무영)을 설치하여 신정희(申正熙)를 순무사(巡撫使)로 삼고 공을 별군관(別軍官)으로 불러 군무(軍務)를 돕게 하였다. 정부(政府, 의정부)가 공을 뽑아 선봉(先鋒)으로 삼아 군대를 출정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장위영 영관(壯衛營 領官) 이두황(李斗璜)으로 하여금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의 적(賊)을 토벌하게 하고, 공주에 나아가 주둔하고서 경리청 영관(經理廳 領官) 홍운섭(洪運燮)과 대관(隊官) 조병완(曺秉完)으로 하여금 미리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재앙의 기미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도백(道伯, 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서천(舒川) 수령 유기남(柳冀南)으로 하여금 대진(大陣, 본진)에 위급함을 보고하게 하였고, 《공은》 밤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다. 많은 적들이 땅을 덮어 왔는데, 80여리에 걸쳤고 대포알이 비오듯하였다.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우기를 원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 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충지이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어서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더욱이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가볍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마침내 감영에 편지를 보내 형세를 기다려서 병사를 뽑아 늘어세워 요충지를 지키게 하고, 동쪽으로 판치(板峙)에서부터 서쪽으로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병사를 매복하게 하였다. 다시 2개 소대(小隊)를 보내 길을 나누어 파견했는데, 왼쪽은 판치에서 나와 경천(敬天)·노성(魯城)·이인(利仁)을 거쳐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오른쪽은 우금치(牛金峙)에서 나와 나조로(那條路)를 따라 왼쪽으로 들어가서 돌아 의병(疑兵, 적을 속이기 위해 위장한 병사)을 만들었다. 교도소(敎導所)의 병사로 하여금 제천(堤川)과 청풍(淸風) 등의 군(郡)에 있는 《적을》, 경리청의 병사로 하여금 회인(懷仁)과 진잠(鎭岑) 등의 군에 있는 《적을》, 장위영의 병사로 하여금 당진(唐津)과 덕산(德山) 등의 군에 있는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공(公) 자신은 대진(大陣)을 인솔하여 좌우를 지원하였다. 적의 괴수(魁首)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介男)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침범하여 오니 공이 칼을 뽑아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민(軍民)이 뛰어올라 부딪히고 병사들이 자신의 몸을 저버리며 싸움에 나아가서 마침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적이 무리를 모아 논산(論山)과 강경(江景) 포구를 점거하자 공이 3갈래로 길을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북을 한번 쳐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승세를 타서 멀리 전진하였고,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에 이르렀다. 양호(兩湖)가 모두 평정되어 명을 받들어 군대를 돌려 돌아왔으나 시기(時機, 상황)가 크게 변하여 공(功)을 논해 상을 주는 은전(恩典)에서 빠지게 되었다.
아! 공의 성품이 넉넉하고 깔끔하여 기쁨과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고,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타고났으며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에 온화한 기운이 성대하였다. 남이 혹시라도 허물이 있으면 좋은 말로 하여 감동하여 깨닫게 하였고, 일은 반드시 3번 생각하여 잠깐의 실수도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장공예(張公藝)의 100개 참을 인(忍) 자(字)는 비록 감히 미칠 수 없으나, 10개 참을 인자는 내가 진실로 갖고 있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의(義)가 아닌 것은 조금도 취하지 않고, 의를 보고 용감히 나아가는데는 성패(成敗)를 가지고 걱정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경솔한 말과 급박한 기색이 없었고, 마음가짐과 행실이 넓고 깨끗해서 애초에 막히거나 구차한 뜻이 없었다. 여러 차례 주(州)와 군(郡)을 맡으며 단지 공심(公心)과 나라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서는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으나, 그것에 처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따뜻하면서 곧고, 온화하면서 근엄했으며, 담력이 견고하고 심신(心身)이 밝게 빛났다. 만약 공의 재주와 덕을 옛사람에게서 구한다면 그에 필적할 《사람이》 드물 것이다. 내가 공의 휘하로 전의(全義, 지명)에서 옥사(獄事)를 처리하다가 권신(權臣)을 거슬러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호하고 남김없이 변명해주어 공의 은혜가 골수를 적신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묘지문을 부탁하는데, 어찌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을 하겠는가? 마침내 오른쪽처럼 지어 훗날의 자운(子雲, 揚雄의 字)과 요부(堯夫,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 邵雍의 자)를 기다린다.
을미년(乙未年, 1895) 6월 23일에 서울의 집에서 죽었는데, 수명이 겨우 54세였다. 고양군(高陽郡) 벽제면(碧蹄面) 선유동(仙遊洞)의 선영(先塋)내에 해좌(亥坐)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인 병사(兵使) 선응(善應)의 여식과 나주김씨(羅州金氏)인 학생(學生, 벼슬이 없는 사람을 지칭) 영묵(永黙)의 여식이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다. 3번째 은진(恩津) 송우규(宋祐圭)의 여식을 《부인으로》 들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종익(鍾翊)은 부위(副尉)이고, 딸은 정규찬(丁奎燦)에게 출가를 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 관섭(觀燮)의 아들이 이어서 명문(銘文)을 지었다.
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충과 효에 근본하고
재주는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였네.
이르는 곳마다 성적이 《뛰어나서》
백성이 소(召, 선정을 베푼 한나라 태수 召信臣)와
두(杜, 선정을 베푼 後漢의 태수 杜詩)를 노래하네.
황지(潢池,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반란 3개중에
동비(東匪)의 반란이 가장 컸네.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으로 세상을 미혹하여
도의(道義)를 저버렸네.
공(公)이 엄격한 선발에 뽑혀
월(鉞, 도끼)을 지고 출정해서
사문(斯文)을 지키고
왕명(王命)을 선포하였네.
6달 에 《적을》 토벌하고 어루만져
양호(兩湖)가 깨끗하게 평정되었네.
군대를 돌려 승리를 아뢰고
대수(大樹, 後漢의 이름난 장수인 馮異)처럼 이름을 감추었네.
때와 명(命)이 어긋나고
이수(二竪, 질병)가 다시 이르렀네.
운수가 막혀 전몽(旃蒙,) 고갑자로( 乙해)의 해에
철인(哲人)이 시들었네.
우뚝한 묘소는
선유동(仙遊洞, 葬地)에 자리잡았네.
고개의 구름과 산의 달
모든 일이 한바탕 꿈이었네.
휘하(麾下)의 늙은 몸이
생석(牲石, 지석)에 와서 《글을》 새기니
부끄러움은 없고 도(道)가 있으니
천억(千億)년을 전할 만하네.

때는 전몽(旃蒙, 고갑자로 乙) 단알(單閼, 고갑자로 卯)이고 오추(梧楸, 先塋)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전 행일성록 편집관(前, 行日省錄 編輯官) 완산(完山, 본관) 이승욱(李承旭)이 삼가 지음.

주석
이인좌(李麟佐) ?∼1728. 영조 때의 역신(逆臣)으로 본명은 현좌(玄佐)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728년 3월에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洪景來) 1771∼1812. 농민반란의 우두머리로 본관은 남양이고 용강(龍岡) 출신이다.
원향(原鄕) 한 지방에 여러 대를 내려오며 사는 향족(鄕族)을 말한다.
의마지재(倚馬之才, 글을 짓는 탁월한 재주) 말에 기대 기다리는 동안에 만언(萬言)의 문장을 지었다는 진(晋)나라 원호(袁虎)의 고사에서 유래하여 탁월한 문재(文才)를 말한다.
장문(狀聞) 감사나 병사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摠禦營 총어영(摠禦營). 1888년에 별영(別營)을 고친 것으로 1894년에 혁파한 군영을 말한다.
경리청(經理廳) 북한산성의 관리를 위해 설치한 관아를 말한다.
장공예(張公藝) 당(唐)나라 사람으로 9세(九世)가 함께 살았다. 고종(高宗)이 그의 집에 가서 친족을 화목하게 하는 비법을 물었더니 공예가 참을 인(忍)자를 100번 넘게 써서 바쳤다고 한다.
자운(子雲, 揚雄의 字) 양웅(揚雄). B.C. 53∼A.D 18. 한(漢)의 학자로 자는 자운(子雲)이고 사부(辭賦)에 능숙하였다.
대수(大樹, 後漢의 이름난 장수인 馮異) 후한(後漢)의 풍이(馮異)가 광무제를 보좌할 때에 공을 자랑하지 않고 여러 장수가 서로 공을 다툴 때에 항상 큰 나무 아래로 피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전몽(旃蒙, 고갑자로 乙) 단알(單閼, 고갑자로 卯) 을묘(乙卯)년 1915년을 가리킨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