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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규태왕복서병묘지명
  • 기사명
    갑오년 10월 25일 신정희(申正熙)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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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4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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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10월 25일 신정희(申正熙)의 답장

이때에 《소식이》 끊겨 울적했는데, 보내준 2번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공벽(拱璧, 두 손으로 에워쌀 만큼 큰 옥)을 얻은 듯합니다. 영감이 지내는 형편이 좋고 군중(軍中)도 모두 편안하다니 위로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금영(錦營, 충청 감영)에 도착했을듯한데, 일본군도 왔습니까? 《동도를》 토벌할 방법은 함께 상의하여 이제는 성산(成算, 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고 큰 공(功)을 《임금에게》 상주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걱정스럽고 그립습니다. 내포(內浦) 등지에 파견한 군사의 소식은 지금에야 들었는데, 반드시 중간에서 보고가 지체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근심스럽습니다. 예산(禮山)과 덕산(德山)의 《적들이》 흩어진 것은 비록 다행스러우나 거괴를 잡기 전에는 염려를 놓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해미(海美)·서산(瑞山)·태안(泰安)의 적이 아직도 집결하고 있고, 또한 숭학산(崇學山)을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수로(水路)로 병선(兵船)을 보내는 일은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외서(外署, 外務衙門)와 상의를 하였으나,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목천(木川)의 적이 먼저 놀라서 흩어진 것은 뜻밖입니다. 병법(兵法)의 기미가 늘 이와 같아 한탄스럽습니다. 김형식(金衡植)·김공량(金公亮)·안교선(安敎善)·김금청(金錦淸)·손수문장(孫守門將)·오영수(吳泳壽) 등은 모두 병천(幷川)에 살고 있는데 이놈들을 잡지 못했으니 어떻게 소탕할 수 있을지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일본군과 상의하여 반드시 오리가 수초에서 노는 것과 같은 기쁨을 함께 가지고, 그렇게 된 뒤에야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헤아려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석규(田錫圭)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바로 가도록 권면할 터이니 양해해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탄환은 바로 보내야 하나 일관(日館, 일본 공사관)에서 그것을 구한 뒤에야 실어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서(外署)와 상의하여 행도소(行到所, 군대가 행군하다가 주둔한 곳)에 보낼 것입니다. 총담(驄毯, 말총으로 두텁게 짜서 만든 요)을 어떻게 구할 수 있습니까? 빈손이기 때문에 뜻대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동로(東路)의 일본군 소식은 오랫동안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들었으리라 여겨지는데, 청산(靑山) 등지에 《있습니까?》 일전에 영영(嶺營, 경상 감영)의 전보를 보았는데, “일본군이 진주(晋州)에서 300여명을 죽이고 곤양(昆陽)으로 향했으며, 또 삼가(三嘉)의 군대가 50여명을 죽이고 의령(宜寧)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군대가 멀지 않아 호남에 도착할 수 있을듯하니 매우 《마음에》 들어맞습니다. 계속 호남 등지를 탐문하여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이만 줄입니다.

갑오년 10월 25일 제(弟) 정희(正熙, 申正熙)가 답장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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