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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규태왕복서병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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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록[雜錄]

4일에 각 부대를 인솔하여 무사히 장성(長城)에 머물렀고, 담양(潭陽) 관아에 병사를 보낸 연유는 이미 치보(馳報, 급히 보고하다)하였습니다. 어제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쯤에 대관(隊官) 오창성(吳昌成)이 담양 관아에서 일본군 대위와 함께 진중에 돌아왔는데, 해당 관아는 의병이 일어나서 읍내를 지키고 순창(淳昌)의 의병도 구원을 하러 왔기 때문에 비류들이 경병(京兵)이 도착하기 전에 흩어졌으므로 가서 묵은 뒤에 진중에 돌아왔으나 대관 신창희(申昌熙)는 비괴(匪魁)를 토벌하기 위해 우선 나누어 주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읍의 보고는 별다른 변고가 없기에 그 연유를 《아룁니다.》
5일에 나의 아버지가 각 부대를 인솔하여 폐단이 없이 장성 관아에서 묵었습니다. 정읍(井邑)의 비류들의 거괴(巨魁) 손덕수(孫德秀)는 바로 손화중(孫化中)의 친족인데 읍민(邑民)이 잡아 바쳤고, 용(龍)을 그린 큰 깃발과 수기(手旗)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손화중과 곤장(棍杖)치는 사람인 정(丁)과 본부(本府) 아곡(鵞谷)에서 잡아서 바친 거괴 이(李)와 오(吳) 3명과 함께 어제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독정(獨定)에서 크게 군민(軍民)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효수(梟首)하여 경계를 하였습니다. 어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쯤에 대관 신창희가 담양 관아에서 진중에 돌아왔는데, 담양 접주 2명을 잡아왔으나 일본군 진영에서 잡아가두었기 때문에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에 일본군 대위의 지시 때문에 병사 20명을 흥덕현(興德縣)에 파견하였고, 30명은 일본군 20명과 함께 고창현(高敞縣)에 보냈습니다. 부대 2곳에 남은 병사와 일본군은 영관(領官) 장용진(張容鎭)과 대관(隊官) 신창희·오창성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하여 일본군 대위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와 합세해서 영광(靈光)의 사창(社倉) 50리 되는 곳까지 나아갔습니다. 선봉진은 순무영의 각색(各色)과 병사 30명을 인솔하여 장성읍에 그대로 머무르고 그 연유를 《아룁니다.》 지금 부내(府內, 장성)의 비류는 각자 접이 있고 접주(接主)가 바로 우두머리입니다. 크고 작은 구별이 있는데,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介男)은 바로 거괴(渠魁)라고 할 수 있으나 이들보다 큰 자는 무장(茂長)의 손화중(孫化中)과 무안(務安)의 배상옥(裵相玉)입니다. 각각 포(包)의 무리를 이끌어서 많게는 몇 만명에 이르러서 전(全, 전봉준)과 김(金, 김개남)에 비교하면 2배와 5배에 해당됩니다. 다만 전봉준과 김개남은 그 악명이 서울과 지방에 퍼져서 조정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에 반드시 이 2명을 거괴라고 하지만 만약에 거괴를 말한다면 손(孫, 손화중)과 배(裵, 배상옥)를 가리켜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최경선(崔敬善)·오권선(吳權善)·이사명(李士明)·남응삼(南應三)·이방언(李邦彦) 등 몇 십명인데 모두 전봉준과 김개남과 같은 부류로 죄악이 하늘에 넘쳐나서 그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각 읍을 두루 세어도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읍을 말한다면, 무장(茂長)·영광(靈光)·광주(光州)·담양(潭陽)·무안(務安)·함평(咸平)·동복(同福)·흥양(興陽)·부안(扶安)·장성(長城)·고부(古阜) 등의 읍이 큰 소굴이 될 것입니다. 통틀어 말한다면 소굴이 아닌 읍이 없습니다. 설령 전봉준과 김개남이 잡혔더라도 그 밖의 거괴(巨魁)가 거의 말로 셀 정도로 많은데 지금 그들을 토벌할 때에 일일이 거괴를 모두 없앤 뒤에야 편안하게 쉬는 것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전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만을 쓰고 단지 그들을 품어 안정시키는 것을 주로 한다면 지금 비록 잠시 위축되었으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틈을 보아 일어날 것입니다. 이 폐단을 유념하여 묵묵히 훌륭한 계책을 운용하실 듯하나 그것 때문에 매우 근심스러워서 《마음을》 놓지 못할 뿐입니다. 지난달 그믐날 밤에 1,000여 명의 적들이 남평(南平)에 난입하여 공당(公堂, 관아)을 부수고 해당 수령을 끌고 갔으며, 포(砲)에 망가진 곳이 2군데나 되었고 인부(印符)를 빼앗아갔다는 급보가 새벽에 왔습니다. 그래서 바로 군사를 보냈으나 적은 벌써 흩어져서 가버렸습니다. 영(營, 순무영)에서 《적을》 잡아보니 각 읍의 적들이 광주(光州)의 《적을》 불러 모아 이런 일을 벌이는 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읍에서 잡아 바쳤다고 하는 28명은 2차례 조사를 했으나 아무 이유 없이 잡힌 자가 태반이나 되었습니다. 지금 명령을 내어 뒤를 밟아 잡도록 하였으나, 일이 너무 크고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끝내 실정(實情)을 어떻게 얻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인부를 찾을 길이 없고 해당 수령은 생사를 모르니 제 어리석은 생각에는 설령 대군(大軍)을 급히 보내더라도 실정을 얻을 수가 없을 듯하니 우선 천천히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기회를 보아 조처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께 함평현에서 온 급보에, “해당 읍에서 접괴(接魁, 접주인 우두머리) 1명을 잡았다”라고 하는데, 이백인(李白仁)은 이름이 없는 작은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같은 패인 임춘경(林春京)과 김태원(金泰元)이 사람들을 이끌어 핍박했으나 마침내 아전과 백성이 막고 기회를 보아 쫓아내어 패해서 돌아가게 되었는데, 다시 각 포(包)를 일으켜 세워 읍을 도륙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어 급박함이 조석간(朝夕間)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 구원하려고 할 때에 다시 장흥성이 무너졌다는 보고가 있었고, 병영(兵營)에서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는 보고가 연달아 3차례나 있었습니다. 지금 나주의 군대와 영암의 병사를 보내 힘을 합해서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장흥이 무너지면 병영을 침범하는 것은 바로 다음 차례이기 때문에 함평을 버리고 장흥을 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좌우로 병사들을 나누려고 했으나 기세가 양분되고 힘이 약해져서 비록 병사를 인근의 읍으로 인솔하게 하더라도 군사와 계책도 없어 이로움이 없을 듯한데, 어찌 하겠습니까?
행군소(行軍所, 행군중인 진영)에서 지금 담양의 큰 적(賊)에 전적으로 힘을 쏟고 있어 군사를 나누어 멀리 구원하는 것이 어려우리라 여겨져서 매우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초토(招討)를 내세우고 책임이 딸려있으나, 전혀 승산이 없어 다만 송구스럽고 절박할 뿐입니다. 어제 다시 탐문을 해보니, 함평은 저들이 기포(起包)한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아직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형적이 비록 예상하기 어렵더라도 경군(京軍)이 경계 가까이에서 압박을 하고 초토군(招討軍)도 지금 출동했다고 하니 오합지졸(烏合之卒)과 같은 저 적들이 반드시 기포하여 다시 모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장흥에 온 힘을 다하고 일이 끝나는 것을 기다린 뒤에 다시 함평과 무안에 힘을 쏟다가 힘이 넉넉하지 않으면, 또한 통보를 할 터이니 경군으로 구원하고 뒤에서 호응할 계획입니다.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군무(軍務)에 관해 의논할 일이 매우 많으나 성(城)을 지키는 데 몸이 매어 있어 함부로 뺄 수가 없습니다. 이미 1차례 베풀어주신 가르침을 받아서 한번 찾아뵙고 대면하여 마음을 터놓고 싶을 뿐입니다. 한번 찾아뵈면 들을 말씀이 많을 것인데, 도리어 가르쳐주기를 말씀하시니 더욱 송구스럽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번에 가는 이(李) 아무개는 바로 제가 묵고 있는 소년의 친구입니다. 구원을 요청하러 보낼 사람이 없어 이 사람을 심부름꾼으로 보냅니다. 백의(白衣, 벼슬이 없는 野人)여서 스스로 피하고 감히 사정을 말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진실로 형세 때문입니다. 이번에 그를 맞이하여 정성을 베풀어 일마다 상세히 물어보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 이것을 넘지 못할까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
완판(完判, 전주 판관)의 편지는 주신대로 보고, 초토사(招討使)의 은명(恩命)이 10월 28일에 나왔으나, 겨우 지난달 24일에야 비로소 정부(政府, 의정부)의 관문(關文)으로 한 지시를 보고 그 사이에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었습니다. 어찌 한탄스러움을 견디겠습니까? 신임 순사(巡使) 어른은 언제 영(營)에 도착할는지 모르겠고, 영읍(營邑)의 일은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어 근심스럽고 절박할 뿐입니다.
이번에 군대가 나아갈 때에도 일본군이 좌우에 있어 혹시 옥석(玉石)이 함께 불탈 탄식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전주 관아로 말한다면 비도(匪徒)가 아닌 읍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협박을 받아 도(道)에 들어간 자가 잘못을 고쳐 선(善)에 나아갈 줄을 안다면 바로 양민(良民)인데, 하물며 나중에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끝내 근본을 지킨 자가 많으나 대개 겁을 먹어 행군하는 것을 일단 보면 먼저 멀리서 보고 숨어버립니다. 갑자기 보면 같은 부류로 섞여 의심을 받을 만하고, 구분을 하지 않으면 원망할 만한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뜻을 군대 전체에 널리 펴서 행군하는 길에 오로지 어루만져 안정시키도록 지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첫 번째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치입니다. 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잘 헤아려주시리라 여겨집니다.
순노(順奴, 이름에 순이 들어가는 하인)편에 5월 29일에 보낸 편지를 받고 비록 위로가 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으나 어느덧 60일이 지났습니다. 삼복(三伏) 더위가 그 사이에 지났고 처서(處暑)도 지났는데,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내시는 모든 형편은 여전히 병환이 없고 늘 편안하신지요? 망망한 외진 바다에서 꿈속에서도 이르기가 어려워서 생각하면 간이 끊어지는 듯하나 어찌 하겠습니까? 형수님의 초기 학질은 뒤탈 없이 완쾌되었습니까? 서울과 지방의 모든 사람들도 편안합니까? 아이들은 아픈 일이 없습니까? 일마다 마음에 걸려 비록 목석(木石)이더라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제가 믿을 것은 평소에 병이 없는데다가 주색(酒色)에 《따른》 병의 빌미가 없어 제 스스로 비록 이 곳에 있더라도 근근이 병이 없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끝내 장기(瘴氣)와 더위가 깊게 핍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6월 18일에 처음에는 더위를 먹은 듯하다가 바로 학질의 초기가 되었으나, 지독하게 아픈 병세는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사와 약이 없고 골육(骨肉, 형제)도 없는 곳에서 진실로 충분히 죽을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 경험했던 약간의 보고 들은 것으로 처음에는 약을 먹는 것을 끊고 독한 약제를 많이 복용하였으나 3~4직(直, 학질이 진행되는 횟수)이 지난 뒤에 일일학(日日虐, 날마다 일정한 시각에 발작을 일으키는 학질)이 되었다가 야야학(夜夜虐, 밤마다 발작하는 학질인듯)으로 변했습니다. 가져온 처방을 상세히 살펴보고 매일 약을 먹었으나 끝내 효과가 없어 지금 35직(直)이 되었고 아직도 완쾌가 되지 않았습니다. 학질 기운이 조금 덜해져서 비록 두려워할 것이 못되어도 기운이 전부 빠져 실제로 《몸을》 수습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인삼을 사러 하인 1명을 지금에야 올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오고 가는 데에 수 십일이나 오래 걸려 이것이 근심스럽습니다. 소위 ‘찬도(饌道, 반찬)’라고 하는 것은 이곳에 파 1뿌리도 없습니다. 비록 황금이 상자에 가득하더라도 쓸 곳이 없어 이것이 가장 어려운 처지입니다. 비록 견책을 받아 물러난 뒤에 위(胃)를 회복하여 완쾌할 방도가 있더라도 계책이 없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대개 이곳에서 병이 나면 반드시 죽을 처지가 됩니다. 지금 지독한 비증(痞症, 배가 그득 찬 것 같으며 덩이가 만져지는 증상)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으나 반 정도 나은 것은 어찌 불행 중 천행(天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이 병으로 넘어져서 마침내 불효한 귀신이 되지 않을 것이니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병이 난 이 소식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병을 숨기거나 속이는 것이 매우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지로 붓을 잡고 이렇게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이곳의 나쁜 풍토와 지독한 장기(瘴氣) 및 습기는 비록 장량(張良)·진평(陳平)의 지혜와 항우(項羽)·장비(張飛)의 기운이 있더라도 병을 모면하기가 어렵고, 일단 병석에 누우면 소생할 가망이 아득합니다. 올해는 비록 다행스럽게도 회복되었으나, 앞으로의 일은 저 스스로도 도모할 수가 없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올해의 패택(霈澤, 죄수를 크게 사면하는 은전恩典의 비유)은 바로 전에 없었던 나라의 큰 경사입니다. 하늘이 불쌍하게 여겨 주신다면 살아 고향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자식 및 형제와 살아서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할 수 없고 저 푸른 하늘만 바라볼 뿐입니다. 어찌 달리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땀이 흐르고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8월 1일 자식 올림.

제삿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아 하늘 끝에서 한탄하며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부(仲父, 가운데 작은 아버지)님도 함께 《편지를》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어찌 각자 편지를 보낼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도 보아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진(珍, 이름인듯)

액(液)이 너무 건조하고 나쁜 증세가 번갈아 침범하여 녹용 몇 냥을 구해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근래에 서울에서 녹용이 매우 귀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한탄스럽습니다.

병조(兵曹)가 계(啓)하기를, “하교하신대로 해당 선전관(宣傳官) 최명건(崔命健)에게 《명을》 잘못 전한 곡절을 조사하였더니, 그 보고에, ‘군사방 승지(軍士房 承旨)가 표신(標信)을 전하고 《대궐을》 돌며 호위하는 군사들에게 계엄을 풀라는 명령을 전했기 때문에 월근문(月覲門) 밖 각처의 병사들이 모두 계엄을 풀어 조사하라는 이 명(命)을 초래하여 황공(惶恐)하고 지만(遲晩, 죄인이 고백할 때에 죄를 너무 오래 속여 미안하다는 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알았다. 최(崔, 최명건)는 어제나 오늘쯤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다. 설령 최명건이 고(告)하지 못한 사령(辭令, 명령)과 색부(嗇夫, 농부)의 그럴 듯한 말이 있더라도 속담에 한 숟가락의 《밥으로》 배부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 어찌 이처럼 착각하는 것이 없겠는가? 저들이 어가(御駕)를 보고 들은 뒤에 선전관 중에 패두(牌頭)라고 하고 제법 일을 아는 자를 정해서 그로 하여금 지시하고 단속하게 하였다. 법의 본래 뜻이 상세하여 최명건이 잘못 듣고 전했을 때에 미리 최에게 묻고 해방(該房, 군사방)에게 물어서 그 허실에 따라 살펴본 뒤에 《명령을》 받았다면 어찌 이러한 폐단이 있었겠는가? 또한 일의 이치로 말한다면 월근문(月覲門)과 인정문(仁政門)과의 거리가 몇 리 밖인데 시위군병(侍衛軍兵)이 이곳에서 어찌 계엄을 풀 수 있겠는가? 해방에 다시 묻지 않더라도 저절로 알 수가 있다. 패두라고 하는 자의 죄는 더욱 숨길 데가 없다. 해당 선전관은 태거(汰去, 가려내어 쫓아버리는 것)하라. 일이 군률(軍律)에 관계가 있으니 소홀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헤아려서 용서할 것이 있으니 선전관 최(崔, 최명건)를 품처(稟處, 임금께 상주하여 처리하다)하라. 일개 청(廳)의 크고 작은 일은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이 통솔하지 않는 게 없으나 근래의 선전관청은 일개 잡류(雜類)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 되어 소리를 질러 나가고 물러나며 뛰어다닐 뿐이다. 명을 전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사풍(士風, 병사의 기풍)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몰라 청선(淸選, 지위가 높고 귀한 벼슬)을 더럽히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또한 채찍질을 할 수가 없어 도리어 그만 내버려두었다. 오늘의 일이 오히려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선전관 이(李)아무개도 품처하라”고 하였다.

아버님께 답장을 올립니다.
순노(順奴, 이름에 순이 들어가는 하인)편에 만날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난달 보름부터 문을 바라보며 춥고 배고픈 근심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일전(日前)에 이르러 여름을 잘 지냈다는 서울집의 안부편지가 늦어져서 20일이 넘으니 매우 조급하고 울적하였습니다. 지난 23일 저녁에 지친 심부름꾼이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짐을 진 등은 구부정하여 귀신의 몰골이었습니다. 그들을 어찌 허물하겠습니까? 상심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황급히 편지를 찾아 6일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으니 직접 쓰신 글씨가 완연하여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였습니다. 어떻게 문자(文字)로 감회의 만에 하나라도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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