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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곡성군수보장 谷城郡守報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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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군수보장(谷城郡守報狀)

지금 도달된 사또의 감결(甘結)에, “이번 그 비류(匪類)를 토벌하는 데는 영(營)과 읍(邑)이 차이가 없었는데, 유독 본현(本縣)만이 거행하는 행동이 전혀 없다. 방비를 어떻게 하였고, 비류를 토벌하는 데 근실하였는지를 조사해서 징계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다. 수성장(守城將) 김명국(金明局)과 호장(戶長) 신정열(申正悅) 그리고 수이향(首吏鄕), 좌수과 수형리(首刑吏)를 칼을 씌어 올려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시었습니다.

본현은 지난해 6월에 김개남(金開南)이 먼저 대낮에 침입하여 여러 날 동안 떠나가지 않아 마을이 무너지고 훼손되었습니다. 7월 초에는 또다시 장성부(長城府) 제암리(霽岩里) 이사홍(李士弘)의 무리에게 밤에 습격을 받아 함락되어 창고의 무기와 민가의 재산이 약탈 당해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후로 백성은 하루도 편하게 거처하지 못하여 심지어 〈짐을〉 이고 지면서 대기하는 자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전에 없던 큰 변고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 남원(南原), 서쪽으로 담양(潭陽), 남쪽으로 순천(順天)이 연이어 저들의 소굴이 되었고, 바로 본현은 큰길에 고립된 읍으로 강력한 이 도적들 사이에 처하여 그 화(禍)를 유독 많이 입었습니다. 그래서 온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어쩔 수 없어서 성을 방어할 것을 도모하여 사인(士人), 유생 김명국을 수성두령(守城頭領)으로 삼고, 흩어져버린 노령(奴令)을 불러 모아 사졸(士卒)로 삼았습니다. 또한 이교(吏校) 중에 똑똑하고 일에 능숙한 몇 사람에게 요청하여 〈그 일을〉 계획하고 유지하게 하였는데, 바로 호장(戶長) 신정열도 그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군수(軍需)는 각 마을의 요민(饒民)이 자원하여 나누어 분담하였습니다. 이러한 조목(條目)은 모두 백성들이 의논하여 산정한 것에서 나왔습니다. 맹서가 이루어지고 군용(軍容)도 점차 갖추어져서 거주하는 백성이 안정되었고, 비록 이웃 읍에서 도적을 피해온 자들도 많이 본읍에 의지하여 〈그 화를〉 면했으나, 저들이 날로 극성스러워지고 여러 읍들이 어려워짐에 따라 본읍도 지탱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명국과 그밖에 군직(軍職)에 참여한 사람들은 저들이 민포(民包)로 지목해서 온갖 방법으로 죽이려고 하여 겨우 몸을 피신했는데, 이와 같은 경우가 10여 차례나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백성들의 칭송이 그치지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경군(京軍)과 일본군이 경내(境內)에 들어오는 날을 맞이하여 김명국이 억울함을 씻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선도(先導), 군대의 길안내가 되고 힘을 내어 비류를 잡아 경군과 일본군에게 바쳐서 칭찬과 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2월 20일 이후에 소모소(召募所)에서 공형(公兄)에게 김명국을 압송하라는 명령이 와서 비록 향촌의 여론에 따라 사실대로 사면을 보고할 수 있었으나, 김명국이 처음으로 곁에서 헐뜯는 자가 있음을 의심하여 사임(辭任)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향촌 전체의 선비들이 공회(公會)를 열어 연명(聯名)으로 공형을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하여 김명국을 그대로 수성중군(守城中軍)으로 삼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신정렬(申正烈)을 호장으로, 연로하여 물러나 농사를 짓던 정일훈(丁日熏)을 이방(吏房)으로 삼았습니다. 김명국을 수성중군으로 삼은 뒤에 다시 민통(民統)을 만들어 철저히 〈저들을〉 토벌할 계획이었습니다. 김명국은 지금 순영문(巡營門)의 감칙(甘飭), 감결로 하는 지시에 따라 순창군에 옮겨 가두었고, 다시 엄중한 감교(甘敎)를 받들어 호장과 수이향(首吏鄕) 및 수형리는 〈지체할〉 겨를이 없이 압송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설 이전에 잡은 비류는 단지 12월의 반달 만에 거행한 것인데, 마침 경군과 일본군이 경내를 지나가게 되어 잡는 대로 죽였습니다. 설 후에는 모두 백성의 논의에 따라 공형을 바꾸고 부오(部伍)를 다시 정했는데, 조치가 없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관심없는 것처럼 하겠습니까? 사정이 이와 같아 감히 사실에 근거하여 첩보를 합니다. 위의 호장 신정렬과 수이향 및 수형리를 압송하는 일은 우선 헤아려서 처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번역 : 최원경)

주석
이번 그 절해(節該)* : ‘이번에 그’ 라는 뜻이다.
노령(奴令) 지방 관아의 관노(官奴)와 사령(使令)을 말한다.
신정렬(申正烈) 앞에서는 신정렬(申正悅)로 썼으나 동일 인물인 듯하다.
감교(甘敎) 감결로 하는 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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