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十月初九日]
아뢰기를, “계하된 강화 유수(江華 留守) 김윤식(金允植)의 장본을 지금 보니, ‘심영(沁營)의 포량(砲糧)에 충당하는 전(錢)·미(米)·목(木) 가운데서, 전에 무위소(武衛所)에 옮겨 지정해 주었던 수삼세(水蔘稅)와 포삼세(包蔘稅) 15만 3,800냥과 동래목(東萊木, 동래부에서 부담하는 포목) 10동 2필, 통위영(統衛營)의 전 해방아문(海防衙門)에 옮겨 지정해 주었던 쌀 9,855석, 경리청(經理廳)에 옮겨 지정해 주었던 무주목(茂朱木, 무주현이 부담하는 포목) 15동 1필을 모두 본영(本營)으로 환속(還屬)하도록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강화도 진무영(鎭撫營)은 국방의 요충지로서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늘 군량이 부족하여 걱정인데, 학도(學徒)와 해군(海軍)까지 신설하여 지출이 너무나 많습니다. 방어를 견고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 군량을 보충할 밑천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원래 포량으로 충당되던 전·미·목 가운데 각 영(營)에 옮겨 지정하였던 것을 모두 장계에서 요청한 대로 환속시켜 결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 박제순이 올린 장계의 등보를 보니, ‘병영의 영장(領將) 염도희(廉道希)가 병정 80명을 인솔하여 연산(連山)과 진잠(鎭岑)을 나누어 순찰하고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와 대전(大田, 한밭) 땅에 이르러 갑자기 비도 1만여 명을 만나 사로잡혀 불에 타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해 영관이 한 달 넘도록 돌아다니며 순찰을 한 것으로도 이미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결국 ‘적도들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나 놀랍고 참담합니다. 나랏일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을 추증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다시 그 실상을 조사하여 빨리 시행해 주십시오. 전사한 병정들에 대해서는 충청 병영에서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사상자를 장사지내고, 유족들을 위무하고 구휼해 주는 은전은 넉넉하게 베풀도록 하며, 생전의 신역(身役)·환곡(還穀)·군포(軍布)는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십시오.
비류들이 제멋대로 창궐하는 사태가 갈수록 더욱 심하여 감히 관군(官軍)을 해치기까지 하였으니, 토벌을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경영(京營)과 충청 병영의 병정이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빠른 시일 내에 적들을 토벌하도록, 충청도 관찰사와 병사·수사에게 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