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10일
기영(箕營, 평양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4개 읍의 관아가 빈 것은 저번에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 보지 못한 듯합니다. 기윤(箕尹, 평양감사)은 죽었고, 숙천(肅川) 수령은 관인(官印)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강동(江東)·성천(成川)·상원(祥原)·영변(寧邊)·안주(安州)와 우후(虞候)도 관아를 비웠습니다. 정주(定州)이북의 수령들에 대해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나 사정이 매우 급박하여 묘당(廟堂)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신(印信)이 없어 계(啓)를 쓰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