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영영(嶺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지금 사천(泗川)향리의 문장(文狀)을 보니, ‘13일에 곤양(昆陽)과 하동(河東) 등지에 주둔한 동도(東徒)가 묵패(墨牌, 문서)를 만들고 공형(公兄)을 잡아갔습니다. 군량(軍糧)이라고 하며 많은 쌀과 돈을 가져갔고, 또한 무수한 사람들이 남문(南門)에 들어가서 해당 수령을 위협했으나, 아전과 백성이 대항하여 머무르지 못하고 갑자기 중도(中途)에 와서 화를 모면하려고 5,000명과 500명으로 표(票, 문서)를 만들어 돌아가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날로 불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곳곳마다 이와 같은데, 비록 읍과 진에 그들을 추격하여 잡도록 엄중히 지시한다고 해도 이것은 실제로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잘 타일러서 그만두게 할 수가 없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깊이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