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영백(嶺伯)의 전보에, “부산 감리서(監理署)의 전보에, ‘어제 외무아문의 전보를 받았는데, 부산의 일본군이 하동에 파견되었는데, 일본 영사(領事)도 가기에 우리 감리(監理, 감리서의 관리)도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여 현재 등정(等情, 공문)이 재가되어 영사와 담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진주 등지는 동도(東徒)가 창궐하여 매우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새벽에 먼저 항구에 있는 150명의 병사가 출발하는데, 우리에게 서기(書記) 3명과 서예(署隸) 및 모군(募軍, 모집한 병사) 100여명을 파견하여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영사는 사태를 보았다가 나중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영(統營)에 빠르게 이문(移文)을 하니 바로 병사를 조달하여 성화같이 진주에 오게 하면 함께 토벌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길이 멀어 왕복하는데 많은 날이 소요되어 일을 거행하는 것이 자연히 지체되어 근심스럽습니다. 잠시 전보에 의지하여 《소식을 전하니》 헤아려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24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