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0월 21일 회담의 초고 [十月 二十一日 會坐談草]
총리대신(總理大臣)·궁내대신(宮內大臣)·외무대신(外務大臣)·학무대신(學務大臣)·탁지대신(度支大臣)·내무대신(內務大臣)·공무대신(工務大臣)·농상대신(農商大臣)·군무서리대신(軍務署理大臣)
오카모토(岡本) 공이 평소에 태공(太公, 흥선대원군)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 공사의 뜻을 알고 있어 이번 회담에 참석하였다.
태공이 말씀하시기를, “정치를 개혁하는 논의가 100일이 넘었으나 아직 실시한 것이 없다. 이후로는 정부이하 각 아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맡아 각자 권리를 갖고 서로 침범을 하지 말라. 협조하여 변통할 일이 있으면 협의해서 결정하라. 이노우에(井上)공사는 일본의 명치유신의 원로공신이고 동양의 선각자이다. 우리 정부는 허심탄회하게 대우해야 한다. 잘 헤아려서 우리가 두루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면 국가의 정치에 유익할 것이다. 공들은 힘쓰고 힘쓰라”고 하였다.
삼가 말씀을 드릴 것은, 지난번에 경기도 광주(廣州)의 농민이 사람을 불러 모아 관장(官長)을 압박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흉악함을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그 보고를 들은 날이 우리 달력으로 11월 11일입니다. 우리 군대를 파견하여 먼저 가서 탄압을 하고 바로 해당 주(州)의 지방관이 지목한 영두(領頭, 변란의 주동자) 남대희(南大熙)·구연태(具然泰)·심상현(沈相賢)등 3명을 다음날에 사로잡아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영사(領事)에게 심문을 하게 했는데, 지금 구술로 공초(供招, 죄인이 진술한 말)를 갖추어 보고를 하였습니다. 미리 그 공초의 사정을 살펴보았더니 정말로 확실하게도 해당 지방관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둔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비록 백성들이 세금 감면을 호소하는 데에서 연유했더라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장 선 민인을 잡아들이려고 하여 끝내 민인이 과격한 변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근래에 동학의 비도(匪徒)가 각지에서 난리를 선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지방관이 백성의 재산을 깎아먹는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사로움을 드러낸 이런 지방관을 조처하는 것을 등한시하고 또한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국의 대신에게 요청하니 먼저 이번의 민변(民變, 백성의 변란)을 상세히 조사해서 확실하게 지방관의 가혹한 세금징수에서 일어났다면 해당 광주부의 관장(官長)을 엄중히 징계해야 합니다. 그밖에 이런 때에 귀국 정부가 각 도의 크고 작은 지방관에게 관문을 보내 고질적인 폐습을 고치고 관규(官規)를 깨끗하게 한다면 관을 압박하는 민란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영두(領頭) 남대희 등에 말한다면 실제로 같은 패거리를 불러 모아 관부(官府)에 저항한 자들입니다. 비록 그 일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 행위를 살펴본다면 관대하게 용서해서는 아니되고, 사정을 참작하여 법을 살펴 처벌을 해서 전장(典章, 나라의 법도)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본 공사의 소견을 편 것에 관계되나 귀국의 대신께서 분명히 살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공초 단자를 덧붙였으니 보시고 헤아려서 시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대감의 복을 기원합니다.
백작(伯爵)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올림. 우리나라 달력(양력)으로 1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