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6일
화영(華營, 수원)에서 총리대신 댁에 전보를 보냅니다. 동적(東賊, 동학농민군)의 소문은 공주(公州)위로는 전해지지만 내포(內浦)의 동적이 신창(新昌)과 예산(禮山)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홍주(洪州)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신임 완백(完伯, 전라 감사)은 그저께 와서 머무르고 있으며, 강화 병정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금영(錦營, 충청 감영)의 소식을 듣고 전진한다고 합니다. 소인(小人) 화성(華城, 수원) 유수(留守).
수원(水原)에서 보낸 전보에 답신하기를, “전선(電線)이 진위(振威) 아래를 통하는 대로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다. 정부(政府, 의정부).
기백(箕伯, 평양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신임 해백(海伯)이 교유서(敎諭書)와 밀병부(密兵符,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병부)를 차고 처분 뒤에 부임하였고, 김유현(金有鉉)은 지금 의주부윤(義州府尹)에게 전보로 지시하여 하루가 가기 전에 그를 기송(起送, 사람을 내세워서 보내는 것)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호비(湖匪, 호서와 호남의 동학군)에 대한 소문은 매우 놀랍습니다. 저들이 만약 고개를 넘었다면 기세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형세에 따라 빨리 일본 공사관에 알려 구원하게 해주십시오. 근래에 외서(外署, 외무아문)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사령관과 상의하여 부산의 영사(領事)에게 전보로 지례(知禮)와 김산(金山)의 경계를 나누어 지켜주도록 간청을 하였습니다. 아직 전보에 대한 회답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산 항구의 일본군이 철수하였고, 토포사(討捕使)도 관아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동의 일이 매우 소홀하여 연이어 곤읍(梱邑, 兵使가 있는 읍)과 각 관(官)에 특별히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하동 수령의 새로운 정치는 취할만한 것이 많고 위세(威勢)를 행할 이웃 읍이 없으니 조방장(助防將)으로, 인동(仁同) 수령을 좌도토포사(左道討捕使)로 임명한다면 혹시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을 드리니 헤아려보시고 화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토포사가 보내온 전보에, “3일에 부산항에 도착한 일본군과 진주와 하동의 비류를 토벌하니 지금은 도망가거나 흩어졌습니다. 흩어졌다가 다시 보여 기량(技倆)이 있는 저들이 만약에 다 운집한다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독은 지난날의 100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촉영(矗營, 진주병영)의 병사 100명을 보내 하동에 주둔을 시켰으나 쇠잔하여 쓸모가 없습니다. 일본군을 빌려 진주와 하동 등지에 주둔을 요청하는 일은 여러 번 전보로 말씀을 드렸으나 아직 회답을 받지 못하여 매우 송구스럽고 울적합니다. 외서(外署)에 지시하여 일본 공사에게 가서 다시 일본군 몇 백명을 파견하여 진주 등지의 침입을 받는 곳에 나누어 주둔하고, 때에 따라 대응하여 끝맺음을 온전히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백성의 바람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엎드려서 재가를 하여 회답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4일.
곤양에서 잡아온 동도(東徒)13명은 현재 일본 육군의 조사를 받고 바로 토포사(討捕使)에게 보내졌습니다. 그 중에 10명은 엄중하게 곤장을 쳐서 풀어주었고, 3명은 동래부(東萊府)에 옮겨 가두었습니다. 울산(蔚山)에서 잡은 동도 최(崔)와 김(金) 2명은 3달 동안 가두었으나 아직도 정안(定案, 결정된 사안)이 없습니다. 현재 일본 영사의 말에 따르면, “반드시 전보로 외무아문에 보고하여 결정을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살펴보시고 하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화류(華留, 수원유수)에서 총리대신의 댁에 보내온 전보에, “지금 포내(浦內)의 한강나루터 방수좌열장(防守左列將)이 인시(寅時, 오전 3시~ 5시)에 보낸 수본(手本)을 보면, 일본 윤선(輪船) 1척이 한강나루에 와서 정박했다가 바로 백석포(白石浦)로 향했는데, 내린 병사의 수효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내포(內浦) 소식은, 비류가 근래에 많이 예산과 덕산 등지에 주둔하였으나 홍주의 군대는 탄환이 떨어져서 아직 싸움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