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9일
영백(嶺伯, 경상 감사)이 보내온 전보에, “정부(政府, 의정부)가 전보로 하교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하동과 인동 2개 읍의 일은 지시하신대로 통지하였고, 울산의 죄수는 조사하여 처리할 계획입니다. 양호의 비류는 갈수록 예측하기가 어렵고, 황간(黃澗)·영동(永同)·무주(茂朱)등지에 1,000명 또는 10,000명씩 모여 행인을 만나면 바로 쏘아죽여서 정탐하러 간 자가 바라만 보다가 지금 돌아왔습니다. 전에 외서(外署, 외무아문)의 전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몇 대(隊)가 3개 읍의 요충지에 나누어 지키는 일에 대해 일본 사령관과 담판을 하였는데, 부산의 영하(領下)에 전보로 부탁을 했더니 지난번에 경상 감사의 통보에 따라 바로 떠났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왕복하고 내왕(來往)하는 도중에 일이 반드시 어긋날 것 같아 근심스럽습니다. 진주 목사[민준호]는 병 때문에 여러 번 단자(單子, 사직을 올리는 글)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제 위무사(慰撫使)가 진주에 이르러 보내온 글을 보았더니, “진주 목사의 병이 위중하여 며칠을 지나 교체된다고 해도 길을 나서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헤아려서 변통하여 《진주 목사를》 특별히 가려서 뽑아 빨리 내려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화성 유수(留守)가 총리대신 댁에 보내온 전보에, “지금 내포의 기별을 들으니, ‘지난 25일에 일본군 장교 아카마츠(赤松國封)가 89명의 병사를, 장위영(壯衛營)귀관 김홍수(金弘秀)와 통위영 황영옥(黃永玉)이 병사 40명을 인솔하여 홍주(洪州)로 향하다가 당진(唐津)의 도동(道洞)에 이르러 이곳에 주둔한 적을 격파하였습니다. 해미(海美)의 여미장(餘美場)에 이르러 적은 많고 아군의 수는 적어서 어쩔 수가 없어 밤새 물러나서 홍주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서산(瑞山)과 태안(泰安)의 적괴(賊魁) 유상대(柳相台)와 박덕칠(朴德七) 등 6명이 광천(廣川)등지의 3포(三包)와 연합하여 덕산(德山)과 면천(沔川)의 경계로 흩어져 나와 연로에서 폐단을 저질러 100리가 모두 비게 되었습니다. 적이 예산 신례원(新禮院)에 주둔하여 홍영(洪營, 홍주 초토영)에서 군사를 보내 적을 토벌하였는데, 군관(軍官) 김병돈(金秉暾)과 이창욱(李昌旭) 등 4명이 싸우다가 한바탕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죽었습니다. 한기경(韓基慶)은 16세의 어린나이에 용기를 내어 싸움터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죽은 군졸은 30여명입니다. 그러나 경군과 일본군은 10리에 미치지 못하여 구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2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적들이 홍주성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성 밖의 민가를 모두 태웠는데, 성안의 토병(土兵)인 700여명의 총수(銃手)와 창수(鎗手)가 일본군 및 경군과 합세하여 밤새도록 포를 쏘았습니다. 포에 맞아 죽은 적들이 600여명이 넘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여 성의 동쪽 5리쯤으로 물러나서 주둔하였습니다. 그래서 29일에 성을 나가 격퇴하고 50~60을 쏘아 죽였으며 빼앗은 소·말·총·창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관군은 한사람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달 4일에 백석포(白石浦)에서 내린 일본군은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6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쯤에 포소리가 신창(新昌)등지에서 연달아 나왔으나 그 승부를 알지 못해 지금 소식을 탐문하러 보냈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