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금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청주에서 보발로 비도를 격파했다는 얘기는 잘못 전해진 것입니다. 일본군 40명이 상주에서 왔다가 적이 많은 것을 보고 돌아갔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크게 거사하여 다시 오려는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청곤(淸梱, 청주 병사)이 보내온 전보에, “남쪽에서 온 비류가 지금 영동과 청산에 있는데, 날로 많아져서 10,000명이 되어 적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이 달 12일에 경리영과 진남영이 패배하여 본영(本營)의 위태롭기가 조석간에 있게 되었습니다. 정부(政府, 의정부)에서 일관(日館, 일본 공사관)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충주와 상주에 주둔한 일본군 500명이 17일에 보은에 모인 병력을 토벌하였습니다. 최시형은 도망 중입니다”라고 하였다.
완영(完營)에서 보내온 전보에, “이 달 12일에 고창(高敞)의 사민(士民) 이봉우(李鳳宇)가 손화중(孫和仲)을 잡아서 바쳐 지금 현(縣)의 옥에 가두었습니다. 유쾌하고 다행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기영(箕營, 평안 감영)에서 보내온 전보에, “선천부사가 임소(任所)에 도착한 일은, 읍에서 바로 장계(狀啓)하는 것은 전례가 없으며, 본영(本營)의 등계(謄啓, 공문을 베켜서 임금께 보고하는 것)가 없어 규정에 어긋납니다. 의정부에 도착한 장계는 들이지 마시고 본영의 수계(修啓)를 기다려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29호(二十九號)
기백(箕伯, 평안감사)에게 전보하기를, “선천부사가 임소에 가는 것은 감영의 계문(啓聞)을 기다리겠다”라고 하였다. 정부.
영백(嶺伯)이 보내온 전보에, “호남의 비류가 황간과 영동 등지에 벌떼처럼 모여 그 기세가 매우 커서 청주의 군대도 패하여 물러갔다고 합니다. 부근 읍의 장정과 남영(南營, 대구에 설치한 친군영)의 병사에게 힘을 합하여 추격해서 잡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지금 상주 소모사의 답신을 보니, 유격장이 평민을 함부로 잡아들인 일이 없다고 하나 특별히 조사해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밀양(密陽)의 아전과 백성이 도내에서 가장 교활하고, 서로 나뉘어서 다투어 이기는 것을 주로 하여 법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자격(資格)에 구애받지 말고 엄중하고 공명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밤을 가리지 않고 부임을 재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위무사(慰撫使)는 어저께 돌아갔습니다”라고 하였다.
30호(三十號)
완백(完伯)에게 전보하기를, “손화중을 일본군에게 보내 압송하라”고 하였다.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