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다시 보내온 전보에, “감영에 주둔한 3대 중에 1대는 연산(連山)과 진잠(鎭岑)사이에 머물러서 협력하여 비도를 토벌하도록 하고, 다른 1대는 지난 전보에 따라 충주(忠州)와 진천(鎭川)에 주둔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시 보내온 전보에, “연산에서 보고하기를, ‘고산(高山)의 적이 20일 밤에 침입하여 촌민을 쏘아죽였는데, 마침 남쪽에서 오는 일본군이 있어 토벌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적이 높은 산에 올라가 초막(草幕)을 짓고 근처의 마을이 기포(起包)하여 수 천명이 되었으나, 진산(珍山)과 금산(錦山)은 관아가 비었고, 전주성은 그들을 토벌하지 못하여 그 해가 연로(沿路)의 경계지역까지 미쳤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잠에 다시 급히 순찰을 보냅니까? 토병(土兵) 40명이 진잠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