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선원(承宣院) 개탁(開坼)
수결 근봉(謹封)
절충장군(折衝將軍)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신(臣) 이(李) 수결(手決).
이달 24일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도착하여 받은 부산첨사(釜山僉使) 이종호(李鍾浩)의 치보(馳報)에, “삼범화륜선(三帆火輪船) 1척이 당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남쪽 바다에서 건너왔다는 봉군(烽軍, 봉수군)의 보고에 따라 탐문을 하러 본진(本鎭)의 2전선장(二戰船將) 임유수(林有洙)를 보냈는데, 그 선장(船將)의 치보에, ‘《위에서 말한》 배 1척은 서반아국(西班亞國, 스페인)사람이 탄 화륜선으로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흑암(黑巖) 앞바다에 정박해 있습니다’라고 하였기에 그것에 근거하여 치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탐문을 하러 신(臣) 영(營, 수영)의 4전선장 박평준(朴平準)을 바로 보내고, 사정을 알아보는 일은 초량(草梁)의 임소(任所)에 머물러 있는 신영(臣營)의 역학(譯學, 역관) 백운배(白運培)에게 명령으로 지시하였습니다. 25일 자시(子時, 오후 11시~1시)에 도착하여 받은 부산 첨사의 치보에, “지금 도착한 함께 대동한 역학 백운배의 수본(手本, 글로 쓴 보고서)에, ‘관소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귀국(貴國)의 동당(東黨, 동학군)이 창원(昌原)등지에 모여있다고 하기 때문에 사정을 알아보려고 우리나라의 육군 병대(兵隊)와 귀국에서 고용한 군사가 지금 배를 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온 상판(商販, 상선)의 양범화륜선(兩帆火輪船) 1척의 선주(船主) 계륙민웅(係陸民雄)과 격군(格軍, 선원) 45명, 병대(兵隊)100명이 각자 포·총·칼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모집한 군사 109명도 각자 짐을 지니고 함께 타서 24일 술시(戌時, 오후 7시~9시)에 창원의 마포(馬浦)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폐단이 있을 것을 걱정하여 《그것을》 조사하러 《가는》 감리서 주사(監理署 主事) 정약림(丁若臨)과 이상만(李尙萬)이 순사(巡査) 최기호(崔琪浩)·김성병(金聖炳)·김정안(金正安)·김학도(金學道)·김봉문(金奉文)을 인솔하여 5명으로 하여금 순찰을 해서 잡게 하려고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라고 하는 보고에 근거하여 치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 도착하여 받은 첨사의 치보에, “그날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에 도착한 영(營)의 초탐장(哨探將)의 치보에, ‘축시(丑時, 오전 1시~3시)에 신초량(新草梁)에 달려가서 보았더니, 서반아국 사람이 탄 삼범화륜선 1척이 흑암의 앞바다에 정박해있었기 때문에 본진(本鎭)의 2전선장이 함께 살펴보고 지켰습니다’라고 하였고,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도착하여 받은 초탐장의 치보에, ‘그 배 1척을 밤새 지켰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지금 도착한 함께 대동한 역학의 수본에, ‘흑암 앞바다에 정박한 서반아국의 삼범화륜병함(三帆火輪兵艦) 1척에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함장(艦長) 파토리남(巴土利南)·사관(士官) 8명·수부(水夫)와 화부(火夫) 160명·고용한 중국인 2명 등이 함께 타고 있고 식량과 석탄이 각각 200석이며 포·총·칼이 각각 175자루이고 대포 6문(門)·화약과 연환(鉛丸, 납으로 만든 총알)은 각각 20궤짝을 싣고 있다고 하였으나 중국인들은 이 서반아국의 병함 1척이 이달 4일 술시(戌時, 오후7~9시)에 부산(釜山)항에서 출발하여 5일에 일본의 나가사키(長岐)에 도착해서 머물렀다가 23일에 떠나 어제 이 항구에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더니 그 배와 작은 배의 수효와 실린 물건이 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초탐장 등이 철수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꺼번에 도착하여 받은 첨사의 치보에, “지금 도착한 함께 대동한 역학의 수본에, ‘관소(館所)에 이르러 상판(商販)의 양범화륜선(兩帆火輪船) 1척에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선주(船主) 계륙민웅(係陸民雄)과 격군(格軍, 선원) 45명이 함께 타고 있다고 하였으나 선주는 우리 배 1척이 어제 술시(戌時, 오후7~9시)에 관소에서 떠나 해시(亥時, 오후 9~11시)에 창원(昌原)의 마포(馬浦)에 도착해서 귀국의 주사(主事) 일행과 모집한 군사 및 우리나라의 육군 병대가 모두 뭍에 내린 뒤에 오늘 진시(卯時, 오전 5~7시)에 떠나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돌아왔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치보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9월 25일.
개국 503년 10월 14일에 《계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