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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경상도관찰사가 올린 장계 [1894년 9월 30일]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09월 30일
일러두기

승선원(承宣院) 개탁(開坼)

갑오년 10월 13일 경상감사 신(臣) 수결 근봉(謹封)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대구도호부사 친군남영외사(行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都巡察使 大邱都護府使 親軍南營外使) 신(臣) 조(趙) 수결.

도내(道內)의 진주(晋州)등지에 창궐하고 있는 동도(東徒)를 토벌하러 외무아문(外務衙門)이 전보로 한 지시를 받들어 토포사(討捕使)대구 판관(大邱判官)지석영(池錫永)이 벌써 길을 떠나 남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연이어 각 읍의 보고와 문장(文狀)을 받아보니, “남해현령(南海縣令) 이규풍(李圭豊)의 첩정(牒呈)에, ‘이달 11일에 호남의 동도 19명이 본현에 갑자기 들어와서 이청(吏廳)에 자리를 마련하고 감옥의 형리(刑吏)와 옥쇄장(獄鎖匠)을 위협하여 갇혀있던 비류(匪類)16명을 제멋대로 풀어주었으며 읍의 폐단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난류(亂類)를 모아 읍과 촌을 다니며 폐단을 저지르는 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16일에는 그 무리 200여명이 앞장을 서서 인도한다고 하며 진주에서 곤양(昆陽)등지로 갔습니다’라고 하였고, 사천현(泗川縣)삼공형(三公兄)의 문장(文狀)에, ‘이달 13일에 동도 수십명이 조사할 일이 있다고 하며 호장(戶長)과 이방(吏房)을 잡아갔고, 그들 수백명이 포를 쏘며 남문에서 동헌(東軒)으로 바로 들어와 본관(本官)을 놀라게 하고 마침내 무기고를 부수어 군물(軍物)을 탈취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관이 여러가지로 타일러서 도로 추심하여 무기고에 들였으나 그들은 돈과 재물을 마구 수색하고 전표(錢標)를 억지로 받아서 갔습니다. 17일에는 그 접소(接所)에서 사천의 수령이 영남과 호남에서 모두 알고 있는 선량한 관리라고 하며 전표를 관아에 돌려보냈습니다. 18일에는 호남의 동도 100여명이 다시 갑자기 들어와서 작청(作廳, 구실아치가 일을 보는 곳)에 묵고, 19일에는 남해(南海)로 향하여 모두 가버렸습니다. 20일에는 각처의 동도 800여명이 각각 총과 칼을 가지고 읍내에 난입하여 관속(官屬)을 보면 칼을 빼어 위협을 하고 각 공해(公廨, 공청公廳)에서 숙식한 뒤에 하리(下吏) 황종우(黃鍾羽)와 황대연(黃台淵)의 집을 불태워 파괴하고 약간의 물건들을 일일이 빼앗아 가졌고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소·말·의복·산물(産物)을 마음대로 빼앗아서 가져갔습니다. 22일에 고성(固城)을 향해 모두 물러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송휘로(宋徽老)의 첩정에, ‘이번 15일에 하동(河東)의 동도 수천명이 본군의 다솔사(多率寺)에 모였고, 광양(光陽)과 순천(順天)의 동도 수천명이 깃발을 들고 뿔피리를 불고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면서 바로 성안으로 들어와서 묵거나 점심을 먹고 가기도 하였는데, 진주를 향해 가다가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진주의 접경인 완사(浣沙)등지에서 합세했을 것입니다. 본군을 지나 갈 때에 읍의 병정(兵丁)이 훈련할 때 쓰던 조총 20자루를 위협해서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하였고, 고성 부사(固城府使)신경균(申慶均)의 첩정에, ‘부사가 영문(營門)에 연명(延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의 하예(下隸)가 와서 하는 보고를 들었는데, 동도 600여명이 각자 창과 칼을 지니고 관아가 비었을 때에 본읍에 와서 창고를 부수고 심영(沁營, 강화 진무영)에 납부할 포량미(砲糧米, 강화 진무영의 운영을 위해 징수하던 세미) 10석을 마음대로 내어가서 가까운 마을에 나눠주고 밥을 해서 나눠 먹었습니다. 밤낮으로 포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잡류(雜類)가 그 무리에 꾀어 들어갔고, 요민(饒民)을 잡아가서 토색질에 일정함이 없는데, 지금 읍내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진주 목사(晋州牧使) 유왕석(柳王奭)의 첩정에, ‘이번 14일에 본주의 대가촌(代加村) 민인(民人)들이 폐단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각 면(面)에 통문을 내어 무리를 모아 읍에 들어왔기에 잘 타일렀으나 듣지를 않고 장시(場市)에 장막을 크게 설치했습니다. 인가를 불태우고 동헌에 난입해서 위협하는 말이 많고 옥문을 때려부수어 마음대로 죄수를 풀어주었습니다. 1,000명 또는 100명씩 무리를 이뤄 옥천사(玉泉寺)로 향해 가서 불우(佛宇, 불당)와 승사(僧舍, 절)를 모두 불태워 없앴는데, 그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17일에는 동도 수천명이 하동에서 본주(本州)에 왔기 때문에 병사(兵使)와 목사가 함께 성곽에 나가 한편으로는 방어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타일렀으나, 많은 수의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난입하여 각 공해(公廨)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는데, 도통령(都統領)이라고 하는 정운승(鄭運昇)이 인솔한 수백명·중군장(中軍將)이 인솔한 400~500명·하동포(河東包)가 인솔한 700~800명·우선봉(右先鋒)이 인솔한 500~600명·후군장(後軍將)이 인솔한 400~500명·도통찰(都統察)이 인솔한 100여명과 그밖에 단성포(丹城包)·남원포(南原包)·섭천포(涉川包)·상평포(上平包)·오산포(吾山包)·구례포(求禮包)가 읍내에 흩어져 있어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18일에 영호대접주 김인배(金仁培)가 1,000여명을 이끌고 성안의 이청(吏廳)에 들어왔는데, 동라(銅鑼)와 북을 두드리고 포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총·창·칼이 매우 예리하였습니다. 대열 전면에 붉은 깃발을 세웠는데, 보국안민(輔國安民)4자를 크게 썼습니다. 술과 밥을 토색질 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관속(官屬)과 읍민(邑民)이 대부분 도망을 가서 숨었기 때문에 여러번 타일렀더니 읍내의 무리들이 19일에 비로소 물러갔습니다. 중군장(中軍將)이 21일에 수백명을 인솔하여 소촌역(召村驛)에 나가 한마을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여 산물(産物)을 빼앗아 가지니 많은 민들이 놀라 흩어져서 온 역말이 비게 되었습니다. 22일에는 대가촌(代加村)용심동(龍潯洞)으로 향해 가서 재산을 모두 빼앗고 30호를 연달아 불태웠으며 창과 칼에 부상을 당한 주민이 매우 많았습니다. 24일에는 성안의 무리는 모두 물러갔으나 남은 무리가 마을에 출몰하고 있으며, 영(營)과 주(州)의 관속(官屬)대부분이 도망을 가거나 흩어져서 지금의 형세로는 대비할 방도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병사(右兵使) 민준호(閔俊鎬)의 첩정에, ‘사연(辭緣)이 해당 목사의 보고와 한결같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5개 읍에 출몰하는 난류(亂類)는 호남에서 시작하여 고개를 넘어 하동을 침범하고 바다에 이르러서 무리가 더욱 늘어났으며 연경(沿境)을 차례대로 침탈을 했습니다. 공곡(公穀)을 훔쳐내가거나 옥에 갇힌 죄수를 마음대로 풀어주고 군물(軍物)을 약탈하거나 관장(官長)을 위협하며 가사(家舍)를 불태우거나 재산을 빼앗는 것이 모두 통탄스러운 데에 관계가 됩니다. 명목(名目)이 통령과 중군이라고 하는 자는 더욱 흉악하여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주(州)의 성에 난입하는 데에 이른 자들인데 바로 모두 전에 없는 변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바닷가에 머무르고 있으며,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 일정함이 없어 그 정형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연읍(沿邑)이 대부분 놀라고 두려운 마음을 품고 이민(吏民)이 안정을 하지 못하니 이 해괴하고 패악한 습속을 용납하지 말고 모조리 가라앉혀 그치게 해야 할 듯합니다. 토벌하는 일을 잠시라도 늦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벌써 비밀리에 통제사(統制使)에게 공문을 보냈고, 각 해당 영(營)과 읍에 지시를 해서 시기에 따라 변화에 대응하여 힘을 합쳐 《그들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하동 관아에 창궐하던 무리가 진주읍에서 만나기로 한 일은 음모가 먼저 누설되어 미리 들었기 때문에 저의 영(營)에서 따로 이목(耳目, 정탐군)을 보내 은밀히 정탐을 하였더니, 당초에 주(州)의 백성이 동요한 데는 저들의 종용이 없지 않았으며, 《저들의》 흉악한 칼날이 이어지니 관속이 놀라 흩어졌습니다. 평상시의 대비가 엄밀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입니다. 비록 감사와 부사가 고심하여 《그들을》 타일렀기 때문이지만 무리들이 무사히 물러나 흩어졌다고 합니다. 관속이라고 하는 자들이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어려움에 직면해서 도피하려고 하니 진실로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그래서 영(營)과 주(州)의 장리(將吏)와 두령(頭領)을 지금 특별히 다스린 뒤에 그 사정을 차례대로 등문(登聞)하겠습니다. 그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9월 30일.

개국 503년 10월 13일에 의정부에 계하(啓下)하다.

주석
연명(延命) 감사나 수령이 부임할 때에 궐패(闕牌) 앞에서 왕명을 널리 알리는 의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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