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 개탁(開坼)
갑오년 12월 2일 전라도 병마절도사 신(臣) 수결 근봉(謹封).
가선대부(嘉善大夫)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 兵馬節度使) 신(臣) 서(徐) 수결.
지난 7월 5일에 내어 10일에 도착한 도내(道內)의 무장현감(茂長縣監)김오현(金五鉉)의 첩보에, “본현(本縣)이 4월 9일 소요를 겪을 때에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을 빼앗긴 연유는 전에 벌써 치보(馳報)하였습니다. 거듭 동도(東徒)를 귀화시키는 감칙(甘飭, 감결로 한 지시)을 받들어 민간에 언문으로 번역하여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총과 칼 등을 조속히 각 관아에 도로 납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일전에 왜병(倭兵, 일본군)이 장차 온다고 해서 일이 급박하다고 하여, 다시 소요를 겪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 29일 저들 무리 500~600명이 성안에 난입하여 창고문을 부수고 군기고(軍器庫)에 있는 약간의 집물과 탄약 등을 전부 빼앗아 갔습니다. 법의(法意)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고, 겪은 일을 돌아보면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연유를 첩보하고 또한 첩정(牒呈, 등급이 낮은 아문에서 높은 아문에 보내는 공문)을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8월 21일에 내어 차례대로 도착한 남원부(南原府) 공형(公兄)등이 빠르게 보고한 문장(文狀)에, “8월 21일 인시(寅時, 오전 3시~5시)쯤에 본부(本府) 읍의 군기(軍器)와 산성(山城)의 군기를 흥양(興陽)·보성(寶城)·태인(泰仁)·본읍 산동방(山東坊) 부동(釜洞) 등지의 동도 1,000여명이 창고의 열쇠를 부수고 모두 빼앗았으며, 이들은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있고 포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성안의 주민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연유를 급히 보고하고 아울러 문장(文狀)을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9월 20일에 내어 차례대로 도착한 낙안 군수(樂安郡守) 장교준(張敎駿)의 첩보에, “9월 15일 술시(戌時, 오후 7시~9시)쯤에 동학배(東學輩)1,000여명이 순천(順天) 선암사(仙巖寺)에서 각기 총과 칼을 소지하고 본군의 이교청(吏校廳)에 난입했는데 포소리가 진동하였고, 그들 중에 수 백명은 아전과 백성의 집에 흩어져 들어가서 재산을 약탈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쏘거나 찌르려고 하여 대부분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들이 바로 군기고(軍器庫)로 향해가서 문을 부수어 총·칼·탄환 등의 긴요한 물건을 일일이 찾아내어 가지고 나서 성문을 잠그고 성 머리를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밤새 포를 쏘아 군(郡) 전체가 들끓는 듯하였습니다. 다음날 새벽녘에 본읍(本邑)의 의소(義所, 의병이 모인 곳인 듯)에서도 성(城)을 구하려고 성밖에 모여 며칠 동안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18일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쯤에 저들이 문을 열고 맹렬하게 나오는데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졌고 함성은 땅을 울렸습니다. 본읍의 의소는 그들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여서 달아나서 각자 숨었습니다. 그사이에 포에 맞거나 찔려 죽은 자는 아직 그 수를 모르고, 저들이 도망하는 자를 추격하여 각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의복·농우(農牛) 등을 일일이 찾아내어 빼앗았습니다. 본읍 의소(義所)의 김형수(金炯洙)를 잡아가서 닫힌 문루에 이르러 목을 베어 장대에 내거니 아전과 백성은 얼굴빛이 달라졌고 온 성이 텅비었습니다. 19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에 무기고에 불을 지르고 서문(西門)을 활짝 열고서 많은 사람들이 선암사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나머지 무리들이 각 마을에 흩어져 들어갔으나 아직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순천접(順天接)·고산접(高山接)·남원접(南原接)·태인접(泰仁接)·금구접(金溝接)이라고 하여 그 명칭이 자주 바뀌고 무리들을 불러모아 의롭지 못한 큰 변고를 멋대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군수가 부임한 지 1달에 불과한 데, 이런 환난을 겪었습니다. 직분을 잃어버린 책임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며 군기 약간과 남은 집물(什物)을 다시 거두어 들이고 소실된 집과 죽은 사람의 이름을 차례대로 조사하여 적어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하고 또한 첩정(牒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낙안군수의 첩보에, “9월 15일에 1,000여명의 동학배가 본군에 난입하여 군기를 빼앗고 사람을 죽였으며 각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한 연유는 벌써 치보(馳報)하였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고을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여러 차례 환난을 겪은데다가 흉년을 만나 모양새를 갖출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이번의 참혹한 피해에 읍과 촌(村)이 적막합니다. 직분을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면 실제로 낯을 들어 백성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19일 저들이 나간 뒤에 군(郡)안의 각 청(廳)과 각 면(面) 및 리(里)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과 소실된 집 및 빼앗긴 재산 등을 차례대로 조사하였습니다. 그 중 교궁(校宮)이 얼마나 존엄한 곳인데도 저들이 난입하여 문을 부수고 서책과 기명(器皿, 그릇)등을 별 어려움 없이 찾아내어 가져갔고 교임(校任)을 구타하여 9명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교청(吏校廳)의 창과 벽이 모두 망가졌고, 각종의 문적(文蹟)을 닥치는 대로 태웠습니다. 이민(吏民)의 집에서 재산과 의복을 약탈하여 상자에 담아 소와 말에 실은 것이 50여바리가 되었고, 사람을 붙잡아서 억지로 짐지게 한 것이 40여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값으로 말한다면 몇 만 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3명이고 소실된 집은 149채이며 빼앗긴 농우는 55마리입니다. 그밖에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지경이 된 자가 수십명이 되지만 이민(吏民)이 흩어지고 인연(人煙, 인가에서 불을 때어 나는 연기)이 거의 끊어져서 정말로 어떻게 읍을 다스려야 할 지 몰라 근심스럽고 절박합니다. 이 연유를 첩보하고 아울러 첩정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구현(金溝縣)과 능주목(綾州牧)2개 읍에서 군기(軍器)를 저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끝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중한 말로 관문(關文)을 보냈습니다. 조사를 하러 무장(茂長)과 금구의 2개 읍에 신영(臣營, 전라 병영)의 장교 김행오(金幸五)를, 남원(南原)·낙안(樂安)·능주(綾州)의 3개 읍에 신영(臣營)의 장교 명봉권(明奉權)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동도(東徒)가 각 주(州)와 군(郡)을 점거하고 1,000명 또는 100명씩 무리를 이뤄 길을 막고 있어 지금에야 조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금구현령 정해원(鄭海遠)의 첩보에, “지금 도착한 절도사의 관문에, ‘이번에 그 본현(本縣)의 군기(軍器)를 상세히 조사하러 병영의 장교(將校)를 다시 보내니 잃어버린 물건을 일일이 상세하게 함께 조사한 뒤에 적어 성책(成冊)해서 갑절의 속도로 빨리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본현은 본래 치우쳐 있는 작은 읍으로 동도의 난입을 막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소중한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을 4월 26일에 처음으로 잃어버렸고, 다시 6월 11일에 빼앗긴 연유는 전임 수령이 갑자기 파직을 당하고 이민(吏民)이 모두 도망가 흩어져서 미쳐 갖추어 보고하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현령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루 살피지 못했으나 직접 군기를 살펴보니 문은 부서지고 남아있는 집물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망가져있어 보이는 것마다 매우 참담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약간의 집물은 파손된 《정도를》 막론하고 일일이 거두어들인 뒤에 지금 병영에 갖추어 보고를 하는데, 정중하게 관문으로 하교하신 뜻을 받들어 함께 온 장교가 다시 상세하게 조사한 뒤에 적어서 성책(成冊)하여 올립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고 파손된 것이 비교할 데가 없어 사체(事體)를 생각하니 매우 한심합니다. 그 연유를 첩보하고 아울러 첩정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능주목사 조존두(趙存斗)의 첩보에, “지금 도착한 병사(兵使, 병마절도사)의 감결(甘結)에, ‘이번에 소중한 군기(軍器)를 잃어버리고 보고하지 않아 이처럼 막연하니 병영의 장교와 함께 조사한 뒤에 잃어버린 물건을 일일이 적어 성책(成冊)하여 보고하고 해당 감색(監色)도 바로 압송하여 올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감색을 잡아들여 엄중하게 사정을 조사하였더니, 총 28자루·화약 20근·연환(鉛丸) 300개·환도(環刀) 3자루를 정말로 7월 초에 동도에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적어서 보고하려고 초안(草案)을 만들어 볼 수 있게 들였으나, 잠시 두라고 하여 아랫사람의 처지에서 거행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일은 비록 전임 수령에게 관계되지만 지금 새로 부임한 자로서 어찌 송구스럽지 않겠습니까? 철저히 직접 살핀 뒤에 잃어버린 집물은 따로 2가지 안건을 갖추어 성책(成冊)해서 수정해 올려 참고하는 데에 대비할 것입니다. 《일을》 소홀히 한 《죄의》 조목에 귀결되었으나 실제로 하인(下人)이 범한 게 아니어서 감히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보고를 합니다. 해당 감색을 올려 보내라는 일은 다시 처분을 기다려서 거행할 것입니다. 그 연유를 첩보하고 아울러 첩정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갈수록 더욱 더해져서 계속 버티니 분노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있는 대로 잡아없앨 일에 힘쓰도록 각 읍(邑)과 진(鎭)에 관문을 보낸 뒤에 그 사정을 차례대로 치계(馳啓)할 계획입니다. 무장(茂長) 등 5개 읍의 잃어버린 군기와 소실된 집물을 따로 책자를 만들어 치계를 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10월 29일.
개국 503년 12월 2일에 계하(啓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