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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경상도관찰사가 올린 장계 [1894년 11월 4일]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11월 04일
일러두기

승선원(承宣院) 개탁(開坼)

갑오년 11월 25일 경상 감사 신(臣) 수결 근봉(謹封).

정헌대부(正憲大夫) 행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대구도호부사 친군남영외사(行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都巡察使 大邱都護府使 親軍南營外使) 신(臣) 조(趙) 수결.

진주(晋州)등지에서 출몰하는 난류(亂類)를 쫓아 체포한 사정과 일본군을 접대한 일은 보고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나중에 등문(登聞)할 계획이고, 그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 이어서 도착한 곤양군수(昆陽郡守) 송휘로(宋徽老)의 첩정(牒呈)에, “10월 16일에 본군(本郡)에 주둔한 일본군 170여명이 진주 백곡리(栢谷里)로 떠났고, 18일에 일본군이 진주의 시용리(矢用里)에서 하동(河東)관아로 향해 갔습니다. 20일에 광양(光陽)등지에 모여 있던 동도(東徒)와 접전을 하여 동도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21일에는 토포사(討捕使)가 포군(砲軍) 140명·영관(領官) 2명·순사(巡査) 1명·수종(隨從) 9명을 인솔하여 진주에서 군(郡)에 들어와 묵고 22일에 하동을 향해 떠났습니다. 24일에는 토포사가 포군 140명·영교(領校) 2명·수종(隨從) 15명·동래감리서 서기관(東萊監理署 書記官) 2명·순사 1명을 인솔하여 200여명의 일본군과 하동 관아에서 본군에 들어와 묵고 26일에 사천현(泗川縣)으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병사(右兵使) 이항의(李恒儀)의 첩정에, “동도를 토벌하는 일은 관문(關文)으로 한 지시대로 특별히 뒤를 쫓아 잡도록 하였고 본주(本州) 북평산(北坪山)에 흩어진 나머지 무리를 철저하게 정탐했더니, 지난날에 상처를 입고 도주한 자 가운데 길에서 죽거나 집에 돌아가서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 병이 나지 않은 나머지 놈들이 동남쪽으로 도망을 가려고 하면 본영의 포군과 일본군이 험준함을 근거로 진(陣)을 치고 있고, 북쪽으로 달아나려고 하면 단성(丹城)·산청(山淸)·함양(咸陽)·거창(居昌)·안의(安義)에서 군병이 요새를 나누어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서쪽 하동으로 달아나서 광양으로 넘어간 자들만 하동 관아가 난리를 겪은 뒤에 군제(軍制)가 미비하여 법망에서 빠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10월 20일에 본영의 포군 100명을 군교(軍校) 박두각(朴枓珏)으로 하여금 인솔하게 해서 해당 관아로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도착한 박두각의 치고(馳告, 빨리 보내는 보고)에, “22일 새벽녘에 하동 관아에 도착했더니 일본군은 벌써 모두 광양으로 떠났고, 하동 관아에 남아있는 자는 6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도 1,000여명이 마침 동남쪽에서 관아를 포위했기 때문에 본영의 포군을 관아 뒤의 양쪽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첫 번째 포를 쏘자 저들 중에 깃발을 잡고 있는 2명이 죽었고 두 번째 포를 쏘자 7명이 죽었으며 세 번째 포를 쏠 때에 일본군이 합세하여 부딪히니 저들이 한꺼번에 도망을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격하여 9명을 사로잡았는데, 그날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토포사가 관아에 들어와서 《죄를》 참작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연유를 갖추어 치보(馳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동부사 홍택후(洪澤厚)의 첩정에, “10월 18일에 일본군 140명이 관아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아침에 곤양(昆陽)으로 떠날 때에 동도가 광양의 귀등산(龜嶝山)위에 모여 있다가 본읍의 팔조면(八助面)목도촌(牧島村)을 향해 가서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려는 것을 멀리서 보고 7명을 쏘아 죽이고 다시 관아에 돌아왔습니다. 20일에는 광양 등지를 건너가서 쏘아 죽인 동도가 30여명이었고, 그밖에 탄환을 맞고 피신한 자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 해산시킨 뒤에 관아에 들어와서 쉬었습니다. 22일에는 다시 광양의 섬거역(蟾居驛)에 가서 동도와 싸움을 하여 쏘아 죽인 자가 7~8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1대(一隊) 1,000여명이 광양의 사평촌(沙平村)에서 배를 타고 본읍의 마전면(馬田面) 신방촌(新芳村)에 내려 그날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쯤에 관아에 난입하였으나 우병영(右兵營)의 포군 100명이 마침 제때에 와서 관아에 있던 일본군 6명과 함께 힘을 합해 저항을 하니 저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습니다.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쯤에 토포사가 행군을 하여 관아로 들어오는 길에 저들을 만나 해산을 시키고 또한 많이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아직도 광양 등지에 있기 때문에 포군과 일본군이 지금 본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토포사 대구판관(大邱判官) 지석영(池錫永)의 첩정에, “9월 26일에 대구 관아에서 출발하여 28일에 부산항 감리서(監理署)에 도착해서 일본 영사관(領事官)을 찾아가 《적을》 토벌할 방도를 충분히 상의하였습니다. 29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에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통영(統營)에 이르러 포군 100명과 영솔군관(領率軍官) 신철회(申徹會)·정인식(鄭仁植) 등을 뽑았습니다. 10월 2일에는 고성(固城) 관아를 향해 출발을 해서 거기에 묵고 여러 읍들의 보고를 접해보니, 비류(匪類)가 창궐하는 정도가 곳곳마다 모두 마찬가지여서 잠시도 편안하지 않아 한편으로는 이교(吏校)를 파견하여 정탐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병을 보내 《비류의》 뒤를 추격하였습니다. 5일에는 힘을 합치자는 일본군의 곡진한 부탁 때문에 곤양으로 향하다가 지나가는 길에 진주(晋州)의 구해창(舊海倉)에 이르러 해당 동(洞)의 괴수(魁首)임석준(林石俊)을 잡아 곤양군에 들어가서 취초(取招)를 하였더니, 지은 죄가 용서를 할 수 없고 그가 자백을 했기 때문에 8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쯤에 크게 민인(民人)을 모으고 성(城)의 북쪽 시장에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때에 함께 잡은 17명을 일일이 취초하였더니, 《동학의》 무리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온 자이거나 위협을 받아 강제로 따른 자들이어서 모두 심하게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가볍게 처벌하고 타일러서 풀어주었습니다. 9일에는 밤에 동도(東徒) 몇 백명이 하동(河東)의 안심동(安心洞) 뒷산기슭 금오산(金鰲山)위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마침 칠흙 같은 밤이어서 토벌을 하러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10일 새벽녘에 영솔군관 신철회와 정인식으로 하여금 본군을 인솔하고 일본군과 함께 출발하게 하여 저들과 싸워 8명을 쏘아 죽였고, 본군(本郡)에서 21명을 생포했으며 일본군은 9명을 잡았습니다. 그밖에 탄환을 맞고 도주하다가 죽은 자는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군(本軍)과 일본군은 한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일본군이 빼앗은 기계(器械)는 나팔 1쌍·총 3자루·대쟁(大錚) 하나·북 하나·도끼 1자루·광이(光耳, 괭이를 말함) 1자루·백미(白米) 5말이었고, 본군이 탈취한 것은 소 1마리였기 때문에 호궤(犒饋, 병사들의 음식접대)하는 데에 내어주었습니다. 11일 밤에 동도 몇 백명이 지금 진주의 시천면(矢川面)과 수곡면(水谷面)등지에 모여 있다는 진주 목사의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12일 새벽녘에 진주로 행군하였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쯤에 파송한 장리(將吏)의 보고에, ‘시천면의 동도는 해산했으나 진주와의 거리가 50리 되는 수곡면에 수 천명의 동도가 점점 무리를 모아 성(城)을 함락시킬 근심이 있고 그 절박함이 아침저녁 사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군으로 하여금 남아서 진주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진군하여 저들과 싸워 쏘아죽인 자가 186명이었고, 부상을 입고 도주한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으며 생포한 자는 2명이고 죽은 말은 2필이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일본군 병사는 3명이었습니다. 탈취한 기계는 총 136자루·창 50자루·깃발 3개·나팔 3쌍·연환(鉛丸)과 화약 1포·소 2마리·말 17필·환도 18자루이었습니다. 이어서 진주 목사의 보고를 받아보니, ‘동도의 괴수(魁首)로 3남도도성찰(三南都都省察)인 전라도 익산포(益山包)의 김상규(金商奎)와 같은 무리인 문쌀순(文㐘順)·박범이(朴凡伊)등 3명을 읍에서 잡아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3놈을 바로 잡아들여 엄중히 조사하였더니, 그중에 김상규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데에 관계되었고 그가 자백했기 때문에 바로 진주의 장시(場市)에서 목을 베고 메달아 경계하였습니다. 문쌀순은 김상규의 창귀(倀鬼, 앞잡이)가 되어 전후에 《저지른》 흉악한 짓도 자백을 하였고, 금오산 전투에서 잡혀 진주에 이송되어 갇혀있던 최학원(崔學元)도 그 죄가 같은 형률에 관계되어 모두 바로 쏘아 죽였습니다. 박범이는 거지[流丐]로 잠시 김상규의 사환(使喚)이 되었으나 따로 흉악을 저지른 행적이 없기 때문에 우선 진주 감옥에 엄중하게 가두었습니다. 일본군으로부터 진주의 덕산(德山)등지에 동도가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16일 새벽녘에 본군과 일본군 100여명이 뒤를 쫓아 조사를 했으나 그들의 정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동(河東)에 모여 있다는 얘기를 이어서 다시 들었고, 또 본병(本兵)과 합세를 해서 토벌을 하자는 《일본군의》 긴급한 기별이 있었기 때문에 17일 새벽녘에 일찍 출발하여 하동의 황토치(黃土峙)에 이르러 탐문을 하였더니, 일본군은 어디에 머무르는지 아직 경내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이 저물어 전진하지 못하고 군대를 돌려 진주에 돌아왔더니, 주진(州鎭)에서 잡아서 바친 동도 10여명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문초를 한 뒤에 주(州)의 옥에 가두었습니다. 21일에는 일본군이 하동 섬거진(蟾居津)의 동도와 싸운다는 기별을 듣고 먼저 병영의 포군 100명을 보내 힘을 합쳐 호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행군하여 곤양에 들어가서 묵었습니다. 22일에는 하동을 향해 가는 길에 50리 떨어진 갈록치(渴鹿峙)에 이르렀는데, 동도 몇 백명이 일본군에 쫓겨 배를 타고 광양 등지로 향해 가거나 흩어져서 산의 골짜기로 도주할 때에 갑자기 만나 서로 싸워서 11명을 쏘아죽이고 17명을 생포하였으며 탈취한 기계는 총 2자루·창 2자루·환도 2자루였습니다. 사로잡은 동도 중에 김달덕(金達德)과 김성대(金性大) 및 일본군이 잡은 김재희(金在僖)가 전후에 《걸쳐》 저지른 악행을 자백했기 때문에 모두 쏘아 죽였습니다. 일본 육군 대위의 편지를 받아보니, ‘하동의 섬거진 싸움에서 제 1차에 쏘아 죽인 자가 3명이고 부상을 입고 도주한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으며 사로잡은 자는 2명이고 탈취한 기계는 깃발 5개·총 4자루·창 2자루·칼 1자루·소 2마리·말 2필이었고, 제 2차에 쏘아 죽인 자가 7명이고 사로잡은 자는 5명이며 탈취한 기계는 갑옷과 투구 각 1건·진우치(陣羽幟, 깃발) 1통·큰북·기(旗) 3개·총 5자루·나팔 1쌍·인(인) 하나·화약과 활 및 화살 창등 약간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23일에는 그대로 해당 관아에 머물며 포군을 사방으로 보내 추격하여 9명을 잡아 심문하였더니, 모두 억지로 들어간 자들이어서 끝까지 조사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모두 곤장 10대를 때리고 풀어주었습니다. 일본군 진영에서 은밀히 광양 등지에서 《저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정형을 탐문했더니, 모두 순천 등지로 달아나서 한사람의 흔적도 없다고 했지만, 요충지의 방비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병사(右兵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우병 영의 포군 100명으로 하여금 잠시 하동에 머물며 해당 부사의 지휘를 따라 요새를 지키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24일에는 일본군이 곤양군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고, 본군(本軍)은 날씨가 추운데 옷이 얇아 병이 든 자가 많아서 머무르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차례로 회군하였습니다. 26일에 본군이 일본군과 함께 곤양에서 출발하여 사천(泗川)에 도착한 뒤에 일본군은 창원(昌原)마산포(馬山浦)로 향해 가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다다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토포사는 통영을 향해 출발하여 포군을 보내고, 바로 배를 타고 잠시 부산항에 정박하며 함께 고생한 일본군을 위문한 뒤에 대구부(大邱府)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전후에 지나는 읍에서 가져다 쓴 식량의 수효는 읍의 보고가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적어 보고하라고 하는 것 모두 첩정(牒呈)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하동 등지에 창궐하는 비류는 모이고 흩어지는 대로 여러 번 탐문하여 잡아 그 우두머리를 죽인 게 많고, 빼앗은 기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서 숨은 나머지 무리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 많은 군사를 오랫동안 주둔할 수가 없어 우병영(右兵營)이 보낸 포군 100명은 우선 방비를 하게 하고, 아군과 일본군은 차례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어서 토포사 지석영의 보고가 있었으나 하동은 영남과 호남이 경계를 접하는 데에 있고 그 후의 사정을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경비를 더욱 단속하도록 특별히 해당 부사 홍택후(洪澤厚)에게 거듭 지시를 했습니다. 또한 부근의 영과 읍에 관문을 보내 서로 나누어 정탐을 하고 시기에 따라 호응해서 힘을 합쳐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11월 4일

개국 503년 11월 25일 계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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