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선원(承宣院) 개탁(開坼, 개봉)
갑오년 11월 25일 충청감사 신(臣) 수결 근봉(謹封)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공주목사(忠淸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公州牧使) 신(臣) 박(朴, 박제순) 수결.
각 읍의 비도(匪徒)가 소요를 일으킨 연유는 연이어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지금 청풍부사(淸風府使) 조관재(趙寬在)의 첩정을 받아보니, “지난달 23일에 동도(東徒) 1만 여명이 본읍의 원서면(遠西面) 서창(西倉)에 모여 있다가 충주 덕산면(德山面)으로 이동했으나 같은 달 23일에 통사(通詞, 통역) 4명과 일본군 43명이 나중에 해당 마을에 이르러 포를 쏘고 불을 질러 민가(民家) 76채가 모두 소실되었고, 서창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환미(還米) 57석 11두도 타버렸으며 주민 홍대용(洪大用)이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막혀서 지금에서야 치보(馳報)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영동현감(永同縣監)오형근(吳衡根)의 첩정을 받아보니, “지난달 14일에 동도 6만여 명이 각자 총과 창을 소지하고 읍내에 와서 주둔하여 군기(軍器)·환미(還米)6석·탁지아문(度支衙門)에 납부할 계사조(癸巳條) 전세목(田稅木) 16동(同) 29필(匹)·친군영(親軍營)에 납부할 계사조 삼수목(三手木) 6동 16필을 모두 빼앗아서 19일에 옥천(沃川) 등지로 갔는데, 이달 7일에 경군(京軍)이 일본군 130여명과 함께 청산현(靑山縣)에서 본읍에 도착하여 생업에 안정하도록 주민을 타이르고 그 다음날 8일에 전라도 금산(錦山)으로 떠났습니다. 그날 병영(兵營)의 교졸(校卒)과 병정 및 상민(商民)을 모두 합해 250여명이 다시 청산현(靑山縣)에서 본현에 이르러 동도 3명을 잡아 쏘아죽이고 10일에 황간현(黃澗縣)으로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목천현감(木川縣監)정기봉(鄭基鳳)의 첩정을 보니, “현감이 기전소모관(畿甸召募官)으로 의병과 백의포수(白衣砲手)를 불러 모아 바로 본현의 동리(東里)에 이르러 세성산(細城山)에서 흩어진 나머지 무리의 뒤를 밟아 17명을 잡아 모두 참작하여 처리하였고, 다시 비류 수백명이 작성산(鵲城山)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바로 토벌을 나가 11명을 쏘아 죽이고 이달 15일에 비류가 모여 있는 청주로 향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모두 치계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11월 20일.
개국 503년 11월 25일 계(啓)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