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議政府) 개탁(開坼)
갑오년 12월 16일 충청감사 신(臣) 수결 근봉(謹封)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공주목사(忠淸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公州牧使) 신(臣) 박(朴, 박제순) 수결.
전에 도착한 의정부의 관문내에 계하(啓下)한 하교와 의정부의 계사(啓辭)에서 지금 충청감사 박제순(朴齊純)의 장계(狀啓)를 등보(謄報, 원본을 베켜서 보고한 것)한 것을 보니, “태안(泰安) 전 부사(前 府使) 신백희(申百熙)와 서산(瑞山)전 군수(前 郡守) 박정기(朴錠基) 및 종부 파원(宗府派員) 김경제(金慶濟)에게 휼전(恤典, 특전)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어수선한 가운데 갑자기 죽어 매우 참담하나 죽은 사유가 아직도 명확하지 않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해서 등문(登聞, 임금에게 상주하는 것)한 뒤에 품처하고, 반인(返靷, 시신을 고향에 옮겨오는 것)할 때에 연로(沿路)에 담군(擔軍, 운구하는 인력)을 제급(題給)하고 호상(護喪)에 신경을 쓰도록 양도(兩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윤허하라”고 전교(傳敎)하셨습니다.
전교에, “뜻을 잘 받들어 살펴서 시행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태안 전 부사 신백희와 종부파원 김경제가 죽은 근본원인을 해당 관아의 수이향(首吏鄕)에게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글을 지어 태안 겸임 홍주진 전 영장(泰安 兼任 洪州鎭 前 營將)에게 관문(關文)으로 지시를 하였더니, 지금 해당 진(鎭)의 영장(營將) 홍건(洪楗)의 첩정에, “태안 관아의 좌수(座首) 명광삼(明光三)과 이방(吏房) 김주하(金柱河)를 바로 잡아들여 상세하게 심문하였는데, 그 보고에, ‘9월 26일에 종부파원이 본 관아에 행차하여 일제히 귀화하도록 각 면(面)과 리(里)에 효유(曉諭)하였습니다. 그달 그믐날에 본부(本府)의 서북 5개 면 등지에서 모인 수백명의 비류(匪類)가 관아에 들어와서 어둠을 등지고 밝은 데로 향해 선(善)으로 나아가 귀화한다는 뜻으로 일제히 다짐을 하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10월 1일에 접주(接主)라고 하는 5명을 염탐해서 잡아들여 온갖 방법으로 타이르고 바로 풀어주었더니 그 다음날 2일 진시(辰時, 오전 7시~9시)쯤에 저들 1만 여명이 각자 총과 창을 소지하고 관아에 돌입하여 사방을 포위할 때에 방어사(防禦使)와 종부파원이 이 광경을 보고 잠시 하리(下吏) 김원섭(金元燮)의 집으로 피신하였는데, 저들이 바로 동헌(東軒)에 올라와서 찾아도 없자 관사(官舍)와 각 건물을 태운 뒤에 사방의 마을을 끝까지 뒤져 방어사와 종부파원이 끝내 잡혀서 창으로 마구 찌르고 끝내 칼로 흉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방과 좌수는 한꺼번에 잡혀 여러 번 묶여서 형벌을 받았으나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요를 겪은 뒤에 길이 막혀 제때에 순영문(巡營門)에 빨리 보고하지 못해 매우 황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산(瑞山)의 경우는 신임 군수가 지금 부임하였기 때문에 전 군수(前 郡守) 박정기가 죽은 사유를 상세히 보고하도록 역시 관문으로 지시하였더니, 지금 받은 해당 군수 성하영(成夏永)의 첩정에, “전임 군수 박정기가 부임한 지 겨우 1달 만에 교화를 널리 펴서 경내에 동도가 거의 귀화를 하였습니다. 뜻밖에 10월 1일 태안과 해미(海美)의 비류(匪類)수천 명이 함성을 지르고 사방에서 모여들자 군(郡)의 아전이 위급함을 보고해서 피할 것을 청했으나 전임 군수는 태연한 안색으로 말하기를, ‘어려움에 직면해서 구차하게 사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고 칼 1자루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방(吏房) 송병훈(宋秉勳)이 곁에서 호위를 하다가 적에게 먼저 죽고 전임 군수는 혼자 문루 아래에 기대어 칼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해서 죽은 흉도가 몇 명이었고 부상을 입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가려고 했으나 아! 저 좌수(座首) 유선일(柳善一)과 사령(使令) 이삼달(李三達)·정차복(鄭次卜) 및 관노(官奴) 금돌(今乭)이란 놈이 함께 모의하고 안에서 호응하여 때리고 욕을 하며 수없이 곤장을 때렸습니다. 연달아 총을 쏘아 1방에 죽지 않자 2방을 쏘았으나 죽지 않아 3방·4방을 쏘아도 낯빛이 변하지 않고 입에서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다음날에 흉도(凶徒)가 억지로 입을 열어 총을 쏘아서야 죽었습니다. 다시 《시신을》 염(斂)할 때까지 40일이나 오래되었으나 안색과 기품 있는 모습이 늠름하여 적을 꾸짖는 때와 같았습니다. 그 바른 충성과 탁월한 절개는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방이 호위하다가 목숨을 버린 것도 매우 가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해당 군(郡)의 유생들이 연명(聯名)으로 정장(呈狀)한 뜻이 대략 같다고 합니다. 그 연유를 아울러 치계합니다. 이런 연유로 장계를 올릴 일.
개국(開國) 503년 12월 12일.
개국 503년 12월 16일에 계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