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각진장졸성책 各陣將卒成冊
  • 기사명
    금산피화효상별구성책갑오(甲午) 12월(十二月) 29일(二十九日)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12월 29일
일러두기

금산피화효상별구성책[錦山被禍爻像別具成册]갑오(甲午) 12월(十二月) 29일(二十九日)

무릇 이 비류(匪類)들의 흉역(凶逆)한 속마음은 참으로 차마 말할 수도 없고 또한 낱낱이 고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본군(本郡)의 동도(東徒)가 일으킨 재앙은 3월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보부상(褓負商) 두목(頭目)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 그리고 사인(士人) 정두섭(丁斗燮) 등이 힘을 합쳐 이들을 막아내 겨우 참혹한 화를 벗어났습니다. 다만 5월 보름 사이에 동도배(東徒輩)들이 이미 모두 귀화(歸化)하여 방어(防禦)할 일이 별로 많지 않게 되자 순영문(巡營門)에서 감칙(甘飭)을 내렸습니다.

거괴(巨魁) 전봉준(全琫準)이 진영(陣營)에서 보낸 사통(私通)이 이따금씩 와 닿았는데, 각읍(邑)에 임명한 집강(執綱)의 이름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었는 바,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위안(慰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사나운 불길은 이전에 비하여 조금도 줄어든 바가 없었습니다. 맨처음 임명한 집강(執綱)은 용담(龍潭)에 사는 김기조(金己祚)였으며, 그 다음에 임명한 집강(執綱)은 본읍(本邑)에 사는 조동현(趙東賢)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빙탄(氷炭)의 땅과 같으니 그 유혹에 빠져 함께 경화(梗化)의 지경에 돌아가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읍촌(邑村)의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고 가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 한 고을이 온통 비게 되었습니다. 유독 퇴리(退吏) 정지환(鄭志煥)이 읍(邑)에 남아 의(義)를 앞세워 공형(公兄) 및 외촌(外村) 사인(士人) 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 박승숙(朴勝淑)・전첨사(前僉使) 박항래(朴恒來)와 함께 의논하여 전참판영감(前參判令監) 정숙조(鄭䎘朝)를 맹주(盟主)로 삼았습니다.

의로운 깃발을 처음으로 높이 세우고 통문(通文)을 돌려 모임을 여니 곧 김치홍(金致洪)・임한석(任漢錫)・정두섭(丁斗燮)이 곧바로 들어와서 함께 수성(守城)의 군무(軍務)를 맡으니 절제(節制)가 있었고 인심(人心)이 점점 안정되어 갔습니다. 이 5개월의 기간 동안 농사짓는 자는 농사를 짓고 장사하는 자는 장사를 하게 되어 사람들은 복된 땅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타도(他道)에서 난(亂)을 피하여 온 사람들과 이웃 고을에서 평안을 좇아 온 백성들이 길을 메우며 들어와서 오막살이 집조차 빈 곳이 없었습니다. 또한 풍년이 들어 저축할 여력이 생겨 힘을 합쳐 마을을 굳게 지켰습니다. 오로지 바라는 것은 비도(匪徒)들이 바른 법에 따라 초멸(勦滅)되는 것이니, 이를 어찌 분수에 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朝廷)의 일을 듣자옵건대, 도순무영초기(都巡撫營草記)에 정두섭(丁斗燮)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하고 정지환(鄭志煥)을 본영군관(本營軍官)에 임명하였다고 하니, 임금의 은혜를 입은 뒤에 더욱 실효(實效)를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지난 10월 22일 진산(珍山)의 보발(步撥)을 보니 진산(珍山), 고산(高山) 등 여러 고을과 충청도의 비류(匪類)들이 서로 호응하고 세력을 합쳐서 이곳 금산(錦山)에 들어와서 도륙(屠戮)할 계획이라고 하므로, 소모관(召募官) 정두섭(丁斗燮)이 포수(砲手) 200명을 거느리고 군관(軍官) 정지환(鄭志煥)이 무사(武士) 및 군병(軍兵)을 통괄하여 진산(珍山)의 경계 15리(里)되는 곳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저 무리들은 먼저 진산(珍山) 경계의 제일 높은 산 위에 진영을 설치하였는데, 그 수가 수만을 넘었으며, 포(砲)와 창(鎗)으로 무장한 진세(陣勢)에 법도와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량을 운반하고 밥을 짓는 일은 모두 진산(珍山)에서 담당하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개미 같이 모이고 물고기 같이 나아가는 듯하여, 진산(珍山)의 남녀노소(男女老少)가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일 오시(午時) 무렵 양측이 접전(接戰)했을 때 아군과 서로 인접한 지역은 금성산(錦城山), 삽치(挿峙), 민치(民峙) 등 세 곳이었습니다. 쳐들어와서 아군과 충돌한 적들은 또한 수만(萬數)을 헤아렸고, 대적하여 죽이기를 다섯 낮, 밤 동안 하였습니다. 제24일 사시(巳時) 무렵에 이르러 적을 막지 못하고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적들의 기세는 거센 물결과 같아서 도저히 멈출 수 없었습니다.

군관(軍官) 정지환(鄭志煥)이 창검(槍劍)을 들고 적을 맞이하여 계속 꾸짖으면서 홀로 전장(戰場)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형제(兄弟)와 부자(父子) 4명이 그의 곁에 있었는데, 난당(亂黨)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해치려고 하자 그가 큰 소리로 꾸짖어 물리쳐 여러 차례나 난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불량(不良)하고 무도(無道)하며 흉학(凶惡)한 저 적(賊)들은 힘을 합하여 정지환을 붙잡았으며, 포탄으로 갑옷이 만신창이가 되고 창검(鎗釰)이 뼈를 뚫었지만, 오호라 그 일신(一身)은 참으로 굳세었습니다. 그러나 그 살갗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적들이 이내 그를 결박하여 본읍(本邑)의 관정(官庭)으로 끌고가서 마침내 해를 당하기에 이르렀지만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정지환의 아들 정집종(鄭集鍾)은 아버지를 지키면서 곁을 떠나지 않다가 창포(鎗砲)에 다쳤으며,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장에서 죽었습니다. 정지환의 동생 정영백(鄭永白)은 본읍(本邑) 사기점(沙器店)의 동학배(東學輩)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정지환의 둘째아들 정회종(鄭晦鍾)은 힘을 다하여 아버지를 지켰으며 또한 난군(亂軍)에게 다쳐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생환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國家)의 적(賊)은 여전히 목전에 있고 부형(父兄)의 원수(怨讐)는 아직도 갚지 못하였습니다. 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아직도 차출되지 못했으며, 그림자와 형체가 서로 조문하여 잠시 정신(精神)을 잃었습니다.

맹주(盟主)인 참판(參判) 정영감(鄭令監)은 성정(性情)이 본디 완후(完厚)하였습니다. 금산(錦山)을 5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 치정(治政)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늙어갈수록 임금을 향한 마음에 더욱 더 간절히 은혜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항상 존중(尊重)하는 마음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였으며, 조금도 사사롭게 이득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그를 비호하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해를 당한 후에 이곳 금산 지역에서는 비록 어리석은 사내나 아녀자라 하더라도 눈물을 흘려 탄식하면서 하루라도 편히 숨을 쉴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다시 본댁(本宅)에 (시신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악도(惡徒)들이 또다시 방화(放火)하여 잿더미 속에 유해(遺骸) 몇 조각이 겨우 남았고 수령(官司主)은 난도(亂徒)들에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패망(敗亡)하여 다 기울어져가는 판국에 수습할 계책은 전혀 없었으며, 대군(大軍)이 지나간 후에 과연 본댁(本宅)에 행차(行次)한 것은 소모관(召募官) 정두섭(丁斗燮) 무인(武人)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패전한 장소를 바라보고 검(釰)을 뽑아 탄식하면서 만회(挽回)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남은 포군(砲軍) 수십명을 거느리고 아직은 견고한 용담(龍潭)에 가서 다시 떨쳐 일어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다만 그 용담(龍潭)의 군정(軍情)을 살펴보니, 갑자기 금성(錦城)이 함락되는 것을 보며 놀라고 겁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놀라고 겁을 내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미 함락된 다른 읍(邑)을 되찾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예전에 같은 일을 맡은 경상도(慶尙道) 초포사(招捕使) 박항래(朴恒來)의 영문(營門)을 향해 가는데 무주(茂朱)를 경유하는 길을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부(同府) 유가면(柳加面) 오동리(梧桐里)에 사는 비류(匪類) 송석준(宋石俊)과 김성운(金成云) 등에게 붙잡혀 금산(錦山) 장대(場垈)에 다시 되돌아 와 마구 쏘아대는 포탄을 맞고 살해되었으며, 비적들이 그 몸에 불을 질러 지금은 유해(遺骸)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밖에 남은 군졸(軍卒)들과 양민(良民)들은 포탄을 맞고 칼에 찔려 살해되었는데, 시신을 우선 수습한 자가 64명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이들 이외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생사(死生)를 알 수 없는 자들은 그 수를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모두 타 버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집들이 502호가 되며, 무너져서 단지 서 있을 뿐 자리잡고 살 만한 집이 없으니 곳곳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비적들은 또 성전(聖殿)에 쳐들어가 다섯 성인의 신위를 모신 궤를 부수었고, 또한 동헌(東軒)의 각 공사(公舍)도 모두 부수었으며, 군적(軍糴)과 전적(田糴)의 장적(帳籍) 등 갖가지 고금(古今)의 공사문적(公私文蹟)을 찢고 불을 놓아, 이후에 근거로 삼을 것이 한 조각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사(公私)의 전목(錢木), 군기(軍器), 의복(衣服), 기명(器皿), 우마(牛馬), 곡물(穀物) 및 이듬해에 뿌릴 종자(種子)까지 수많은 물건들을 어깨에 메고 등에 짊어지고 가서 도로에 줄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10월 24일부터 11월 초9일까지 그 날짜를 헤아려보니 한눈에 다 내려다 보입니다. 과연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게 있었겠습니까? 진산(珍山)과 고산(高山)은 원래 성(城)이 함락되었을 때 백성들이 함께 결속하기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여러 적들로부터 맨먼저 약탈(掠奪)과 살육(殺戮)을 당했습니다. 또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한 바 있으며, 맞이하고 보내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 이를 도맡아 다스린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영동(永同), 옥천(沃川), 무주(茂朱) 등 각 읍(邑)의 적도(賊徒)들은 차례로 들어 왔지만 무주에서는 도적질을 하며 여러 적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 나머지는 곧 개남포(介男包)요 연산포(連山包)라 하였으며, 또 공주포(公州包)요 강포(江包)라고 하였는데, 들어왔다가 또 나가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잔혹한 해를 끼치며 약탈하고 나갔으니 그 해꼬지를 서로 따라가지 못할까 염려할 지경이었습니다.

같은 11월 초9일 일병(日兵)과 경병(京兵)이 경내에 들어와서 살펴보니 온 지경에 남은 것이라고는 단지 한 구릉에 온통 불타버린 땅덩어리뿐이요 곡식이 없는 텅빈 집뿐이었습니다. 의리를 따른 사람을 포상하여 드러내고 다시 퍼트리며 역도배(逆盜輩)들을 법에 따라 정죄(正罪)하여 금산(錦山) 백성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사인(士人) 박승호(朴勝鎬)・고제학(高濟學)・박승숙(朴勝淑) 및 김치홍(金致洪)・임한석(任漢錫) 등이 점차 고향에 돌아와서 바야흐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금산을 수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일(前日)에 사용하던 기계(器械)가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잠시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힘을 써서 그들을 어루만지며 위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관군(官軍)이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기필코 또다시 패망하게 될 것이며 관아도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군무(軍務)와 민심(民心)은 날마다 흔들려 안정되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연유를 보고하는 바입니다.

고(高) 화압(花押)

기관(記官) 김(金) 화압(花押)

호장(戶長) 김(金) 화압(花押)

(번역 : 유호석 ・ 유바다)

주석
빙탄(氷炭) 얼음과 숯. 전하여 서로 정반대가 되어 조화(調和)되지 못하거나 용납되지 못하는 관계, 또는 그러한 사물을 비유하는 말.
경화(梗化) 덕(德)이나 예(禮)에 의한 교화(敎化)가 통하지 않음.
보발(步撥) 조선 시대 급한 공문의 전달을 담당하던 통신수단. 말을 이용한 기발과 함께 파발(擺撥)의 일종으로, 각력(脚力)으로써 전달하던 제도임
성전(聖殿) 대성전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