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問) : [2월 17일에 경무청(警務廳)에서 취초(取招)할 때 고종주(高宗柱)의 2차 공초를 내어 보이며] 여러 가지 〈변고에〉 대비하는 얘기는 모두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공(供) : 이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나 제가 공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해 8월 28~29일 사이에 김유성(金裕成)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그대의 성명이 법무아문(法務衙門)에 갇혀 있는 죄인 허가(許哥), 허엽의 공초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지금 들었는데, 모르겠지만 무슨 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일단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바로 병을 무릅쓰고 이준용(李埈鎔)에게 가서 들은 얘기를 말했더니, 준용이 말하기를, “지금 있는 옥사(獄事)를 들었으나 영감(令監), 이태용의 성명이 노출된 것은 내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천일(天日)이 위에 있으니, 반드시 뜻하지 않은 변고가 닥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심하는 도리에 있어서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공연히 근거 없는 비방을 야기하는 것은 마땅치 않기에 9월 5~6일 쯤에 바로 광주(廣州) 팔당(八塘)의 고향집에 돌아가 있다가 이 달 24일 〈임금의〉 탄신(誕辰)을 맞아 문안을 하러 경성에 들어왔는데, 이보다 앞서 23일에 도헌(都憲)의 직함을 받았으나 평소에 병이 있어 벼슬자리에 나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26일에 가서 이보국(李輔國, 李載冕)에게, 그 다음에 이준용에게, 마지막에 외무대신(外務大臣)에게 그 이유를 말했더니, 모두 “그대가 지금 공무(公務)를 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의 병을 모르고 개화(開化)의 직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고 의심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저는 애써 〈그 말을〉 따랐습니다. 차차 그 전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허엽의 공초에서 저를 정승(政丞)으로 삼는다고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7월에 〈갑오경장을〉 실시한 뒤에 정승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총리대신 1명이 있을 뿐인데, 나를 여기에 추천하는 것은 얼마나 모호한 얘기인가”라고 하였더니, 그 얘기를 전한 사람도 그 말이 맞다고 여겼습니다.
문(問) : 그것을 전한 자가 누구인가?
공(供) : 그것을 전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누구인지는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일단 이 얘기를 들은 뒤에 매우 송구스러워서 다시금 이준용에게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문(問) : 이후에는 끝내 한 차례도 이준용에게 왕래한 적이 없는가?
공(供) : 그 뒤 10월 쯤에 정부의 도헌(都憲)으로 매일 출근할 때 법무아문에서 다시 허가(許哥), 허엽를 심문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퇴근하는 길에 이준용을 찾아가서 바로 자진 출두하여 대질(對質)하려는 뜻을 말했더니, 준용이 말하기를, “그대가 반드시 이처럼 가볍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내가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의 뜻을 전달한 뒤에 행동하는 것이 좋을듯하다”고 하고 바로 총리대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답장에서, “미친 놈의 난초(亂招)는 믿을 게 못되는데다가 조정의 체통에 있어서 그처럼 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습니다. 준용이 말하기를, “대신의 답장이 이와 같으니 그대는 우선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에 그 말대로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 10월 그믐에서 11월 초 쯤에 허(許)의 옥사(獄事)가 마무리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문(問) : 허(許), 허엽의 옥사가 마무리 된 뒤에 혹시 들은 얘기가 없는가?
공(供) : 달리 들은 얘기가 없으나 11월 23일에 도헌(都憲)의 〈직은〉 상소를 올려 25~26일쯤에 윤허를 받았고, 12월 7~8일쯤에 바로 고향집에 돌아갔습니다.
문(問) : 그 뒤에 언제 경성에 들어왔는가?
공(供) : 1월 25~26일쯤에 운현(雲峴), 운현궁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 때에 경성에 들어왔다가 2월 6일에 다시 고향집으로 갔습니다.
문(問) : 네가 성명이 드러난 것을 듣고 조심하는 도리에 있어서 경성에 오랫동안 머물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9월 5~6일 쯤에 바로 광주(廣州)의 팔당(八塘) 고향집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이후에 영원히 준용과 관계를 끊은 것이 신하의 당연한 도리이거늘 그 뒤 9월 26일에 준용을 보러 갔고, 10월쯤에 허엽의 공초를 듣고 나서 다시 준용을 보러 갔다. 그 뒤 1월 25~26일쯤에 운현궁의 부대부인 생신 때에 고향에서 경성에 들어와 다시 준용을 만났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네가 이준용과 관계를 끊으려 하지 않았고, 고향집에 칩거하지 않으려 한 것이니 어찌 의심할만한 사정이 없겠는가?
공(供) : 그 사이에 몇 차례 경성에 들어와서 이준용을 보러 간 것은 실제로 사대부의 삼가는 도리에 흠이 되니 그 뒤에 이와 같은 왕래는 사정을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10월 20일 이후에 허엽의 공안(供案)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더 이상 의심할만한 단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問) : 네가 자진 출두하여 대질하려는 논의를 이준용과 할 때에 준용은 혹시 그가 하는 말과 함께 허(許), 허엽와 이(李), 병휘 두 명의 공초를 보여준 적이 없었는가?
공(供) :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고, 허(許)와 이(李)의 공초도 보지 못했습니다.
문(問) : 네가 만약 허(許)와 이(李)의 공초를 보고,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너의 수상한 사정이 아닌가?
공(供) : 만약 허(許)와 이(李)의 공초를 보고도 보지 않았다고 하면 책임을 진실로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問) : 만약 네가 허(許)와 이(李)의 공초를 분명히 보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이준용과 서로 교유했다면 비록 벌을 받더라도 한이 없겠는가?
공(供) : 그렇습니다.
문(問) : 네가 이준용과 함께 허(許)와 이(李)의 공초를 보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지금 이(李)의 공초에 있는데도 너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공(供) : 이준용과 대질을 하면 명확히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룀
특별법원(特別法院)
판사(判事) 장박(張博)
주사(主事) 김기조(金基肇)
주사(主事) 기동연(奇東衍)
주사(主事) 정훈교(鄭勳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