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거주. 이역(吏役), 아전
피고 국재봉(鞠在奉). 나이 33세
전라남도 담양군 거주. 이역(吏役)
피고 국재준(鞠在俊). 나이 31세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거주. 농민
피고 송내춘(宋乃春). 나이 50세
위의 피고 국재봉・국재준・송내춘에 대한 사건을 검사(檢事)의 공소에 따라 이것을 심리하였다. 피고 국재봉과 국재준은 그의 아버지 국홍묵(鞠弘默)이 지난 갑오년 8월 3일에 같은 군(郡)의 용귀동(龍歸洞) 비괴(匪魁) 김형순(金亨巡)과 김문화(金文化) 등에게 피살되었는데, 김형순과 김문화 등이 그대로 도피하여 복수하지 못하였다. 음력으로 올해 1월 22일에 해당 도(道)의 수의(繡衣), 암행어사가 위의 비괴 김형순을 정읍에서 잡아 담양군에 압송하였기에, 피고 국재봉 등이 복수할 연유를 본(本) 군수(郡守)에게 말하였더니, 군수가 말하기를, “암행어사가 잡은 죄인이어서 관(官)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되고 다시 하교(下敎)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호장청(戶長廳)에 가두었는데, 김형순이 피고 국재봉 등에게 말하기를, “정인악(鄭寅岳)이 내가 잡힌 것을 안다면 도주할 염려가 있다”고 하니 피고들이 그의 종제(從弟), 사촌 동생 기동(基同) 등을 보내어 정인악을 잡아와서 호장청에 가두고 관아에 고(告)하였다. 그래서 하교(下敎)하기를, “마땅히 조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수교(首校)에게 명하여 간수(看守)하게 한 뒤에 관찰부(觀察府)에 갔다. 피고 등이 김형순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를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갑오년 7월쯤에 정인악이 자신을 훈련청(訓鍊廳)앞 재인(才人), 광대 집에 보러 왔을 때와 우도(右道), 전라 우도의 동도(東徒)가 정가(鄭哥), 정인악네 집에 왔을 때에 자신을 초청하여 맞이해서 부탁하기를, ‘국홍묵을 제거해야 훗날의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그 해 8월 2일에 송내춘을 그 집문앞의 길가에서 만나서 거듭 부탁하기를, ‘국홍묵이 동학의 집강(執綱) 〈자리를〉 얻어 용귀동(龍歸洞)의 접(接)을 없애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통문(通文)을 내어 사람을 모아 그 다음날 3일에 사정(射亭)에서 쏘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음력으로 그 해 1월 24일에 광주부(光州府)에서 순검(巡檢)을 파송하여 김형순과 자백한 죄인들을 모두 압송하라는 훈칙(訓飭)이 있어 정인악도 압송하게 되었는데, 피고 등이 순검에게 정(鄭), 정인악과 김(金), 김형순 2명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1차례 대질 심문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해당 군수가 불월루(拂月樓)아래에서 정과 김을 대질하니, 김형순이 정인악에게 앞의 말로 말을 하였는데, 그 대답을 피고 등이 듣지 않고 홍전문(紅箭門), 홍살문앞 길위로 끼고 들어와서 피고 국재봉이 칼로 배를 찔렀고 피고 국재준은 칼로 목을 베었다.
피고 송내춘은 갑오년 8월 2일에 담양군의 장시를 가는 길에 정인악을 그 집문 앞의 길가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국홍묵이 동학의 집강을 얻어 읍포(邑包)를 세우고 용귀동의 접(接)을 타파하려고 하니 시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이 일의 기미를 용귀동의 집강에게 전해 미리 막게 하라”고 하여 그의 말대로 가서 전하였다. 그래서 해당 집강 김형순 등이 그 다음날에 일제히 사정(射亭)에 모이라는 뜻으로 통문을 내었더니 정말로 그 다음날에 수백명의 무리가 사정에 모여 국홍묵을 잡아와서 바로 쏘아 죽인 것을 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이 사실은 피고들이 자백한 진공(陳供)과 해당 도(道)의 문진원(文振元) 등의 증공(證供), 증인 진술에 증거가 명백하다. 피고 국재봉은 대전회통(大典會通)의 살옥조(殺獄條)에, “그 아비가 살해된 사건의 재판에서 죄상을 따져서 밝히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원수를 제멋대로 죽인 자는 사형(死刑)을 감해 유배(流配)에 처한다”라는 조문(條文)에 따라 태형(笞刑) 100대에 종신(終身) 징역형에 처하고, 피고 국재준은 같은 조(條)의 같은 형률로 대명률(大明律)의 각례공범죄분수종조(各例共犯罪分首從條)에, “만약 집안 사람이 공범(共犯)으로 남에게 손상을 입혔으면 수범(首犯), 주모자과 종범(從犯)으로 논죄(論罪)하라”고 하였고, 또한 같은 조(條)에, “공범의 경우 종범은 1등급을 감하라”는 조문에 따라 태형 100대와 3년 징역형에 처하며, 피고 송내춘은 같은 형률의 인명편(人命編) 모살인조(謀殺人條)에, “살인을 모의하는 것을 따랐으나 공(功)을 더하지 않은 자”의 형률에 따라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할 것을 법부(法部)에 문의하였더니, 지령(指令)하기를, “귀소(貴所), 고등재판소의 의헌(議)〈(言)+(獻)〉, 심리을 보니 직접 담당하지 않은 듯하니 피고 국재봉은 대명률 인명편의 투구급고살인조(鬪毆及故殺人條)에 고의로 살인을 한 자의 형률에 비추고, 피고 국재준은 국재봉의 본래 형률에 종범은 1등급을 감하라는 형률에 비추어 처리할만하나 그 아비가 원통하게 죽어 빨리 복수하려고 이런 죄를 지었다. 일이 착오에 관계되어 그 사정을 참작하여 본래 형률에서 각각 1등급을 감하여 피고 국재봉은 태형 100대와 종신 징역형에 처하고 피고 국재준은 태형 100대와 15년 징역형에 처하라. 피고 송내춘은 정(鄭), 정인악의 부탁이 비록 살인을 모의한 실정은 없더라도 선하지 않은 말을 함부로 전한 책임이 없지 않다. 해당 범인은 대명률 잡범편(雜犯編)의 불응위조(不應爲條)에, ‘범죄 행위에 대한 규정은 없으나 범죄를 저지른 사정이 무거운 자’의 형률에 비춰 태형 80대에 처하라”고 하였다.
이것에 따라 피고 국재봉은 태형 100대와 종신 징역형에, 피고 국재준은 태형 100대와 15년 징역형에, 피고 송내춘은 태형 80대에 처한다.
광무(光武), 대한제국의 연호 2년 11월□일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검사 함태영(咸台永)과 김낙헌(金洛憲) 및 검사시보(檢事試補) 정석규(鄭錫圭)가 입회(立會)하였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재판장(裁判長) 윤웅렬(尹雄烈)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이근호(李根澔)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박이양(朴彝陽)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신재영(申載永)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피상범(皮相範)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주사(主事) 이인상(李麟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