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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을미년[乙未年, 1895년] 여름 4월에 친척을 이별하고 분묘(墳墓)를 버리고서 공주(公州)에서 한양에 이르렀는데, 성안의 인민이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에 분연히 탄식하기를, “왜놈이 모두 조선을 얻었는가? 검은 색이 어찌 많은가”라고 하였다. 그 안에 흰옷을 입은 사람은 인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부(丈夫)가 지금 세상의 일을 한번 보고 말하려고 한다면 한심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심장이 떨릴 것이다. 독수[禿首, 대머리]를 없애려고 하지만 혼자 맨손으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천운(天運)이어서 그런 것인가? 지금의 액운이 그런 것인가? 또한 사람이 똥을 피하는 것은 그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더러움을 피해서이다.

이 날에 눈물로 한양성을 이별하고 바로 서강(西江)의 화정동(花亭洞)에 이르러 선영(先塋)을 찾아가서 절을 했는데, 하루 종일 통곡을 하여 황혼이 산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억지로 제각[祭閣, 무덤 근처에 祭廳으로 쓰려고 지은 집]에 내려와서 마침내 여주(厲州)의 종인(宗人), 종씨인 경순(敬順) 형제를 만나 침상을 함께 하고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에 바로 강을 건너 인천(仁川)에 이르렀는데, 해가 저물려고 하였다. 다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광해(曠海)에 이르러 남문(南門) 옆 참빗가게에 묵고 하루 종일 인심을 살펴보았더니, 이곳도 왜놈의 세상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아문(衙門)에 명함을 넣었더니 유상[留相, 임금의 거둥 때에 도성을 지키는 留都大將] 신정희(申正熙)가 합문[閤門, 편전의 앞문]에서 맞이하였다. 바로 들어가서 배례(拜禮)한 뒤에 서로 여러 가지 얘기를 물었으나 감히 속내를 말하지 못하다가 그의 후대(厚待)를 보고 나서야 일추[日雛, 일본을 낮추어 표현한 말]의 일을 말하였다. 따라서 묻기를, “상공(相公)은 나라의 주춧돌과 같은 신하인데, 어찌 넘어지는 집을 다시 수리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상공이 대답하기를, “지금 동량(棟梁)과 같은 인재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어찌 동량이 없습니까? 원컨대 상공께서 덕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훌륭한 선비를 맞아들이면 동량과 같은 인재가 오히려 남아날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상공께서는 어찌 없다고 하십니까? 선왕(先王)과 선정[先正, 이전의 훌륭한 사람]의 영혼이 어찌 분통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더니, 신공[申公, 신정희]이 말없이 있다가 한참 만에 말하기를, “이처럼 매우 엄한 세상에 그대는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하는가? 만약 다시 이런 말을 하려면 속히 문밖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재배(再拜)하고 나오면서 말하기를,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대인[大人, 상대에 대한 경칭]께서 취할 얘기가 못됩니다”라고 하였더니, 신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노여운 마음을 가지고 바로 가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저 같은 미친 사람을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라고 하고, 나와서 서쪽으로 40리를 가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미포(姑未浦)에 이르러서 뭍에 내렸는데, 이곳이 바로 황해도 연안(延安) 땅의 경계지역이었다.

청단[靑丹, 지명]을 지나 벽성(碧城)에 이르러서 지팡이에 신을 신고 남산(南山)을 거닐었는데, 그 산의 남쪽에 푸른 물이 넘실대고 그 북쪽에는 푸른 산이 솟아있었다. 그래서 시(詩)로 감탄하기를, “만고의 수양산 아래 땅에, 사람은 가고 청풍 같은 절개만 남았네”라고 하였다. 이 땅은 바로 상고 시대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꺾던 곳이었다. 회전해서 내려와 부용당(芙蓉堂) 1채에서 한가롭게 놀았다.

며칠 뒤에 우연히 신천(信川)에 이르렀는데, 청계동(淸溪洞)에 사는 안태훈[安泰勳, 安重根의 아버지]이 동도[東道, 동학군]를 잡으려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수천 명이 결진(結陣)하고 있었다. 그 동(洞)에 병기(兵器)와 정교한 총이 있었고, 곡식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들어가서 의병장 안태훈을 만나보고 그 진영 안에 머무르며 며칠 동안 기식(寄食)을 하였다.

우연히 거기서 종인[宗人, 종씨]인 창수(昌洙)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왜놈에게 패하여 깊은 산속에 숨어 있었다. 그 때의 나이가 20세였다. 함께 종씨(宗氏) 집으로 돌아가서 고통과 기쁨을 같이 하며 서양과 왜(倭)를 물리칠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때가 1895년 여름 5월이었는데, 함께 중원(中原)에 들어가려고 청계동에서 길을 떠나 재령(載寧)을 지나니 그 동남쪽에 여물평(餘物坪)이 있었다.

석해(石海)에 이르러 나루터를 지나고 봉산(鳳山)을 거쳐 황주(黃州)에 도착했는데, 성안에 왜적 300여 명이 우리 백성과 섞여 살고 있었다. 인륜(人倫)과 풍속이 망가지고 무너진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어서 차마 볼 수가 없었으나, 강산은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아! 시(詩)로 탄식하기를, “옛사람은 떠나고 주인도 없는데, 이곳에 덧없이 황죽루(黃竹樓)만 남았네”라고 하였다. 그 아래에는 적벽(赤壁)과 푸른 파도가 있어 물결이 넘실대었고, 그 서쪽에는 월파루(月波樓) 1채가 있어 그 광경이 적막하였다. 지금 이 강산에서 옛날 현자(賢者)와 준걸(俊傑)들이 한가롭게 거닐던 모습이 눈에 가득하여 쓸쓸하였다.

중화(中和)를 지나 평양(平壤)의 마두령(馬頭嶺)에 이르렀는데, 그 위에 토성(土城)이 몇 겹을 에워싸고 있었고, 그 사이에 종종 영루[營壘, 보루]가 있었다. 이곳이 청나라와 왜(倭)가 대치했던 곳이었다. 바로 영제교(永濟橋)를 건넜는데, 그 높이가 10길이나 되었고, 그 아래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배위에 올라 5리를 가서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대동문(大同門)에 들어가니 1폭의 강산이 역력히 보이고 장성(長城)의 한 면에 물이 넘실대며 큰 들판의 동쪽머리에 점점이 산이었다. 아! 이 강산이 옛날에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都邑)을 한 곳이었는데, 그 강 옆에 왜선(倭船)이 있었고, 6~7척(尺) 크기의 어선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이때에 서질[鼠疾, 흑사병인 듯]이 대단하여 죽은 사람을 셀 수가 없었다.

다음날 길을 떠나 연광정[練光亭, 정자]을 지나 장경문(長慶門)을 나갔는데, 성안에 왜적 수천 명이 있었다. 북쪽으로 70여 리를 가니 인파장(咽波場)이 있었는데, 이곳은 강동(江東)의 경계이었다. 이때에 큰비가 내렸기 때문에 재(齋, 齋閣)에 들어가서 묵다가 완악한 부류에게 욕을 당했는데, 이것도 장부(丈夫)의 괴로움이었다. 바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서 강동(江東)을 지나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니 두옹정(杜翁亭)이 있었는데, 이곳은 천곡[泉谷, 安省의 호]이 예(禮)를 강론하던 곳이었다.

다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서 성천읍(成川邑)에 이르렀다. 인심이 순박하고 넉넉하며 산천은 아름다워서 정말로 서관[西關, 황해도와 평안도를 함께 부르는 말]의 명승지였다.

다시 북쪽으로 가니 매목동(每睦洞)이 있었는데,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으며 나무가 울창하였다. 다시 40여 리를 가니 장림점(長林店)이 있었고, 가창(佳倉)을 지나 내평촌(內坪村)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어질고 마음은 넉넉하였다. 다시 북쪽으로 가니 이현점(泥峴店)이 있었고, 다시 50여 리를 가니 기린령(麒獜嶺)이 있었는데, 옛사람이 말하던 험난한 촉도[蜀道, 험난한 길을 상징하는 길]이었다. 하루 종일 오르며 끝내 먹지 못하여 허기와 갈증이 더욱 심하였고, 겨우 걸어 험난함을 건널 때에 마침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오디가 익어있었다. 그 오디를 따서 먹으니 배고픔을 모면할 만하였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서 수십 리를 가니 장동(長洞)의 도시암(道視庵)이 있었는데, 산은 높고 나무는 무성하였다. 거기에 묵점(墨店)이 있고 1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 처소를 보았더니 거의 처사(處士)의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50리를 가니 고원(高原)의 하창(下倉) 고관동(高串洞)이 있었다. 그 지형은 마치 병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산의 기세는 선명하여 청룡(靑龍)이 완전하게 돌고 백호(白虎)가 높게 솟았으며, 좌청룡[左靑龍, 지세를 표현하는 말] 우백호(右白虎)가 그 끝에서 기운을 합치하고 그 봉우리는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국내[局內, 그 구역 내를 가리킨다]의 고관동은 수십 리를 둘러싸고 그 속에는 수십 호의 인가(人家)가 있었다.

다시 수십 리를 가서 고원읍에 도착하였다. 평양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산천이 험준하였고,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들을 보게 되었다. 다시 30리를 가니 영흥읍(永興邑)이 있었는데, 이곳은 외졌으나 들판이었다. 다시 10리를 가니 용흥강(龍興江)이 있었고, 수십 리쯤 되는 곳에 소진강(沼津江)이 있어 나루를 건너니 바로 고산역(高山驛)이었다. 인물은 탈속(脫俗)하여 혼연히 기호[畿湖, 경기도와 충청도]지방의 모습과 같았다. 다시 북쪽으로 40리를 가니 정평읍(定平邑)이 있었고, 다시 20리를 가니 지경점(地境店)이 있었는데, 인가 수백 호에 인물이 훌륭하였다. 다시 북쪽으로 30리를 가서 함흥(咸興)에 이르러 만세교(萬歲橋)를 건넜는데, 높이가 수십길이고 넓이가 5리나 되었다. 낙민루(樂民樓)를 지나 1,000리까지 보려고 억지로 서쪽 문루(門樓)에 올랐는데, 사방이 넓고 아득하며 가로로 끝이 없었다. 동문(東門)을 나와 덕산관(德山館)에 이르니 해가 지려고 하였다. 1,000리 길에 주머니는 이미 비어버려서 마을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각자 나누어 묵었다.

다시 다음날 아침에 잘못되어 서로 만나지 못하였고, 서로 찾으며 그리워하였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는데, 마치 꿈인 듯 취한듯, 마치 날개 없는 새와 같았다. 황급하게 가서 함관령(咸關嶺)을 넘어 내려가니 길옆에 태조대왕[太祖大王, 이성계]의 승전비각(勝戰碑閣)이 있었다. 고개 아래에 주막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 서로 만나게 되니 기쁨도 끝이 없었다. 이곳은 홍원(洪原)의 경계이었다. 홍원읍을 지나갔는데, 태산(泰山)이 그 북쪽에 있었고, 큰 하천이 그 남쪽을 지나고 있었다.

다시 북쪽으로 15리를 가니 방진(方津)이 있었는데, 인가가 수백 호였고, 이곳은 북어(北魚)가 나오는 곳이었다. 푸른 섬이 앞에 거꾸러져 있고 푸른 파도가 솟아오르고 있어 정말로 절경이었다. 북쪽으로 60리를 가서 원포점(元浦店)에 이르러서 마을에 들어가 밥을 빌어먹고 주점(酒店)을 빌어서 잤다. 구경하는 사람 중에 욕하는 자도 있고 대접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밥을 빌어먹는 나그네를 비웃지 말라. 마음속에 관찰사(觀察使)가 있다”고 하였다. 창수(昌洙)에게 말하기를, “너는 지금 밥을 빌어먹는데 마음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걸식(乞食)해서 서로 양보를 하니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남모령(南暮嶺)을 넘어가니 고개 아래에 점막(店幕)이 있어 거기서 싸온 밥으로 요기를 하였다. 다시 30리를 가니 종고대(鐘鼓臺)가 있었고, 장씨(張氏)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뒤에 종과 북의 형태로 유좌묘향[酉坐卯向,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모양]에 부귀(富貴)가 날 곳인데, 장씨는 제자리에 묘를 쓰지 못하였다.

다시 50리를 가서 바로 북청읍(北靑邑)으로 들어가 남문(南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은 북쪽에서 용처럼 서려있고, 들판은 남쪽에서 넓고 아득하였다. 그 광경이 아름다운데 어찌 나그네의 심회(心懷)를 돕겠는가? 다시 북쪽으로 50리를 가니 용동(龍洞)이었는데, 인가가 수백 호이고 모두 전씨(全氏)가 터를 잡아 집을 지은 곳이었다. 그 서쪽 산기슭에 비룡고등형(飛龍高登形)이 있는데, 내룡(內龍)은 웅장하고 안대(案臺)는 광활하였다. 해좌사향[亥坐巳向,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에 유득병파(酉得丙破)로서 부귀가 대대로 끊이지 않고 자손이 많이 날 곳인데, 정선(旌善) 전씨의 선영(先塋)이었다. 북쪽으로 40리를 가니 반송재(盤松齋)가 있었는데, 큰 들이 앞에 있고 들밖에 큰 바다가 있었다. 다시 북쪽으로 30리를 가서 평리동(平里洞)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재실[齋室, 제사를 모시는 곳]이 있는데 관사(官舍)보다 나았다.

북쪽으로 30리를 가니 절호하리포(絶湖下里浦)가 있었고, 인가는 1,000호가 넘었다. 푸른 바다의 1개 포구에 닭과 개가 〈우는 소리로〉 마을을 이루었고, 어부들의 뱃노래 소리와 함께 어선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 산세(山勢)가 돌출한 속에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이 있어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자손이 많이 날 곳이었는데, 이곳도 전씨(全氏)의 선영이었다. 그러나 묘혈(墓穴)은 판별하지 못하였다. 북쪽으로 30리를 가서 이원읍(利原邑)에 이르렀는데, 아침 전에 비가 물을 붓는 것처럼 와서 휴식을 취하였다. 잠시 뒤에 바람은 경쾌하고 구름은 맑아져 오시(午時)에 가까워졌으므로 길을 떠났다.

다시 10리를 가니 마운령(摩雲嶺)이었고, 고개위에 성황당(城隍堂)이 있었기 때문에 축원을 하였다. 5리를 내려가니 다시 산령당[山靈堂, 산신령을 모시는 집]이 있었고, 그 옆에 다시 집 1채가 있어 거기서 묵으며 산신령 앞에 축원을 하였다. 그리고 내려가서 복귀사(福貴社)에 이르렀고, 단천읍(端川邑)을 지나갔다. 집에서 떠나온 뒤에 지나온 길이 3,500리이었고, 바로 서쪽 갑산(甲山)으로 향하였다. 다시 70리를 가서 신동령(新洞嶺)을 넘어가니 고개 아래에 매덕촌(每德村)이 있었는데, 감지(甘芝)가 나는 곳이었다. 다시 20여 리를 가니 금창(金倉)이 있었는데, 이곳은 금을 캐는 곳이었다. 북쪽으로 50리를 가서 천수령(天秀嶺)을 넘었는데, 그 고개가 높아서 마치 하늘을 받치는 듯하였고, 그 북쪽으로 들이 펼쳐졌으며 땅은 비옥하였다. 원포(院浦)에 도착하니 인가는 수백 호가 되었다. 다시 천산(天山)을 넘고 가좌령(加佐嶺)을 넘어 암회평(巖回坪)에 이르렀다. 이때가 6월 19일이었다.

갑산읍(甲山邑)에 도착하였는데, 신천읍(信川邑)에서 갑산까지의 거리가 2,000리가 넘었다. 다시 북쪽으로 70여 리를 가서 동인촌(同仁村)에 이르렀는데, 인가는 100여 호가 넘었다. 재[齋, 재각인 듯]에 들어가서 3일을 묵으며 세탁을 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40리를 가니 이곳이 백두산(白頭山)의 첫 낙맥이었다. 간맥(艮脈)의 가장 높고 정결한 곳에 제향당(祭享堂)이 있는데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노끈을 맺아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어 보니, 백두산 산신령의 신위(神位)였다. 4번 절을 하며 소원을 빌었다. 그런 뒤에 4번 절을 하고 나와 다시 문을 잠갔다. 이 때 붉은 기둥 왼쪽에 두 사람의 이름을 크게 적었다. 다시 쓰기를, “간신(奸臣)이 조정에 가득하여 왜복(倭服)을 입은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울적한 이 마음을 감출 곳이 없어 여기에 이르러 발원(發願)을 하고 중원[中原, 중국]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10여 리를 내려가니 혜산영(惠山營)이 있었고, 성 안팎에 100호가 있었다. 그 앞이 바로 압록강이고, 건너편이 바로 요동(遼東)이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점막에 들어가서 묵었다.

다시 다음날에 남쪽으로 향하여 망동령(望東嶺)을 넘었는데, 고갯마루에 국사당(國師堂)이 있고, 거기 걸린 글씨에, “6월에도 설색(雪色)과 산색(山色)으로 산은 머리가 흰데 바로 구름과 안개에 덮힌 것이고, 만고(萬古)에 흐르는 소리는 물이 오리털처럼 푸르면서 세차게 치솟는 북쪽으로 중원과 통하고 남쪽으로 조선에서 끝난다”라고 하였다.

삼수읍(三水邑)에 이르니 성 안팎에 인가는 30호에 불과하였다. 남쪽으로 청산령(靑山嶺)을 넘어 장진(長津)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어서 200여 리를 혼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 왕청산(王淸山)의 일행 수십 명과 동행하여 장진에 이르렀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장진읍에 도착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후창(厚昌)에 도착하니 인가는 30여 호가 되었다. 다시 자성중강(慈城中江)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니 바로 모아산(帽兒山)이었다. 이곳은 통화현(通化縣)에 속한 읍이었다.

북쪽으로 수백 리에 노인령(老人嶺)이 있었고, 고개위에 관황묘[關皇廟, 관우를 모신 사당]가 있었기 때문에 향을 피우고 4번 절을 한 뒤에 내걸린 글씨를 살펴보았는데, “형은 현덕[玄德, 유비의 字]이고 동생은 익덕[益德, 장비의 자]으로 덕스러운 형에 덕스러운 아우였네, 스승은 와룡[臥龍, 제갈량]이고 친구는 자룡[子龍, 조자룡]으로 용의 스승에 용의 친구였네. 한실[漢室, 한나라의 왕실]을 도와 천하를 3분(三分)하였네. 대청[大淸, 청나라]을 보전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사람이 없는 100여 리를 가서 파지강(芭芝江)을 건넜고, 또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바로 통화현(通化縣)이었다. 서문(西門)밖에 마침 조선객점(朝鮮客店)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을 찾아들어갔더니 1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이 때에 갑자기 고국 사람을 보고 형제처럼 대우하여 며칠 머물렀다.

다시 길을 떠나 통화현에서 북쪽으로 1,000리를 넘게 가서 심양(瀋陽)의 서쪽 금주(錦州)에 도착했는데, 사방 100리 안에 많은 군대가 진(陣)을 친 곳이었다. 창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만군(萬軍)의 진을 보고 어찌 무심하게 지나가겠는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그 대장을 만나보고 싶은데, 이처럼 엄중하게 금지하여 반드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그 대장을 보려고 한다. 만약 철륜[鐵輪, 쇠로 된 바퀴]이 정수리를 지나도 뜻이 더욱 견고해지고, 칼과 창이 목을 찔러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남아가 곤경을 경험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진중(陣中)에 들어가서 정말로 관병(官兵)에게 체포되었더니 병사들이 말하기를, “너희 조선인은 모두 왜(倭)와 개화(開和)를 하여 우리 진영의 허실을 탐문할 것이다”라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장군의 영(令)에, ‘아무개 조선인을 막론하고 조선인을 보면 죽이라’고 하였다. 너희들이 어찌 살아 돌아가겠는가”라고 하였다. 바로 쇠철사로 사지(四肢)를 묶고 혹은 창으로 찌르려고 하고 혹은 총으로 때리려고 하였으나 안색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 통사[通辭, 통역]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너희 대장을 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사람을 괴롭게 하는가”라고 하고, 바로 글을 써서 보여주었더니 관병이 바로 대장에게 보고하였다.

대장이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리기를, “조선인을 결박하여 장막 아래에 데려오라”고 하니, 병사가 잡아서 장대(將臺)앞에 데려가기에 살펴보았더니, 바로 마통령(馬統令)이었다. 마대인(馬大人)이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무슨 일로 감히 진중에 들어왔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의병을 모아 왜적을 좇아 싸우다가 강포한 왜적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외로운 이 몸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겠습니까? 상국[上國,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기 때문에 망명을 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살벌할때에 정대인(鄭大人)도 군중에 명령을 내려 온 군(軍)이 물처럼 들끓고 좌우전후에서 일제히 대포를 쏘아 하늘과 땅이 진동하였다.

어떤 관병이 바로 잡아가려고 하기에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박차며 크게 질책하기를, “너희들이 아직도 믿지 못하는 단서가 있는가? 내가 너희 대장과 말했는데, 어찌 감히 이처럼 소란스럽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웃으면서 정대인과 마대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상국에 인재가 많다는 것을 실컷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것이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더니, 마대인이 직접 결박을 풀어주며 말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내가 대야[大爺, 대인]의 마음을 알려고 한 것이다. 내가 이미 안 지 오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곳서 며칠동안 머물렀다.

곧 발길을 돌릴 때에 문자[文字, 글]를 서로 주고 받아 훗날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나 통화현에 이르렀다. 남쪽으로 노인령(老人嶺)을 넘어 운산읍(雲山邑)을 지나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가에 도착했는데, 왜추(倭酋)가 기둥을 세워 전보선(電報線)를 설치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데, 일비[日匪, 일본군] 수십 명이 배에 올라 건너려고 하였다.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이 급히 부르기를, “빨리 배에 올라라. 빨리 올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갔더니, 왜놈이 〈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참으로 불량한 사람이다”라고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서 내가 창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저들을 거절하려고 했는데, 저들이 오히려 먼저 거절하니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조심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배를 타고 건너 저물녘에 안주에 이르러 성안에서 묵었다.

새벽에 길을 떠나 숙천(肅川)과 순안(順安)을 지나 며칠 뒤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성안에 왜적 수천 명이 ‘갑오승전일(甲午勝戰日)’이라고 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고 술자리를 벌려 성대한 모임을 가졌다. 일월기(日月旗)와 대장기(大將旗)가 모란봉에 높게 세워져 있었고 의기양양하게 장막안을 출입하고 있었다. 대장부가 저들을 보고 어찌 분통해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거기에 묵지 않고 바로 대동강을 건넜는데, 이 때가 을미년 가을 7월 그믐날이었다.

청계(淸溪)에 도착하니, 전의 종가(宗家)가 다른 데로 피신하고 없었다. 이 청계동에는 이름이 석규(錫奎)인 고선생(高先生)이 계셨는데, 평생 마음으로 왜와 서양을 배척하여 서양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는 서양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 아! 서질[鼠疾, 흑사병]로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죽어 사람들이 조문을 했을 때에 반드시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명(明)나라의 일을 언급하자 서글퍼서 눈물을 흘리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말로 바르게 배운 군자였다. 늘 서로 교유하면 반드시 뜻이 통하였다.

서쪽으로 장연(長淵)에 갔더니, 장산(長山)의 정상이 끝난 곳에, 전후좌우로 석벽이 이어져서 비록 날으는 새라도 출입하기가 어려웠다. 그 안에는 수십 리에 걸쳐 수십 호의 인가가 있었다. 동구(洞口)에 석문(石門)이 있었고, 석문 밖에는 큰 바닷물이 드나들어 마음대로 출입할 수가 없었다. 또한 동구 안에는 식량을 마련할 땅과 염정(鹽井)이 있어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괴질(怪疾)로 사람 목숨이 크게 손상을 입었으니 이것이 바로 덕(德)에 있고 험준한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동구 안에 성이 허씨이고 이름이 성렬(成烈)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키가 7척이고 제법 큰 뜻을 가지고 있어 서로 만났을 때에 마음이 통하였으니 정말로 관서(關西)의 영웅호걸이었다. 또 그 산중에 탄옹(炭翁)이라는 분이 있어 성은 김씨였는데, 성렬(成烈)이 스승으로 섬겼다. 재차 가서 만나보았으니 시를 지어 나에게 들려주기를, “밝게 우리 집의 길을 비추니, 병주(幷州)를 가리켜 고향이라 하지 말라. 땅은 궁벽하지만 향기 오히려 오래 있고, 골짝이 차가우니 벌과 나비가 전연 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처소를 보았더니 반 칸 띠집은 깊은 골짜기에 치우쳐 있었고 송등(松燈), 소나무의 관솔로 만든 등불인듯은 빛나고 있었다. 이별할 때에 성렬에게 준 시에, “위수(渭水), 이별을 상징하는 곳에서 한 잔의 술을, 그대에게 권하노니 뜻은 아득하네. 도림(桃林), 이상향에 봄이 이미 깊더니, 무릉(武陵), 무릉도원의 배를 만들고 싶네”라고 하였더니, 성렬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와 같은 광인(狂人)이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 무릉의 배를 잘 만들어 저를 가르쳐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종가(宗家)로 돌아가서 한 달 넘게 머물렀다. 그 때에 왜놈의 화(禍)가 날로 달라지고 달로 극성스러워졌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킬 계책을 의논했으나 계획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창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만일 여비가 있다면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좋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 한사람도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물건이 없으면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창수의 재종조[再從祖,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가 이런 뜻을 알고 안악(安岳)사람 최창조(崔昌祚)에게 가서 말을 하였더니 바로 종장[宗長, 집안의 어른]과 함께 왔는데, 나이는 20살이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창수에게 묻기를, “제가 듣기에 존군[尊君, 상대에 대한 경칭]에게 두 분이 비록 먼 길을 떠날 계획이 있으나, 매우 곤란한 게 여비라고 하니, 그 말을 듣고 짜릇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비록 집이 가난하지만 약소한 물건으로 여비에 보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청동(靑銅) 100여 냥을 주었다.

그래서 가을 9월 12일에 길을 떠나 문화(文化)와 안악을 지나 창조(昌祚)의 집에 이르러 며칠 동안 머물렀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니 바로 평안도 삼하(三河)의 경계였다. 용강(龍岡)과 강서(江西)를 지나 평양 감영에 도착하니 왜놈 양놈이 섞여 있었다. 모란봉에 올라갔더니 기자릉(箕子陵) 앞에 그 도두[挑頭, 비의 앞부분인 듯]를 깨어 애도비(哀悼碑)가 세워져 있어 그것을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전쟁에서 죽은 왜적의 공신비(功臣碑)였다. 그것을 보고 너무 분하여 손으로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기를, “모란봉의 신령이 어찌하여 무심합니까? 기자(箕子) 성인의 영혼이 어찌 분노하는 마음이 없습니까”라고 하였다. 서로 울고 웃으며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의 눈물로 왜놈 양놈을 제거하고 조정의 간사한 적당을 벨 수가 있겠는가? 오늘 우리의 눈물은 아녀자에 가까워서 이처럼 하기에 부족하다”고 하고, 마침내 칠성문(七星門)을 나가 순안(順安)과 숙천(肅川)을 지나 안주의 경계 서릉(西陵)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다.

그래서 큰 마을에 들어가 손님을 치르는 집을 물었더니,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손님을 치르는 것을 묻는가”라고 하기에, 말하기를, “지금 날이 저물어서 저희들이 묵고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그런 곳이 없습니다.”라고 하기에, 다시 말하기를, “식사는 그만두더라도 협방[挾房, 곁방]을 빌리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없습니다. 지금 비록 매우 추운 겨울이나 저 빈집에 들어가서 밤을 지내고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빈집에 들어가서 땔나무로 자리를 만들어 밤을 지낼 때에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인심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어떻게 일생을 살겠는가?”라고 하였다.

새벽에 길을 떠나 안주성을 지나 청천강을 건너며 시를 지어 슬퍼하기를, “큰물은 천심(天心)과 짝하고 청산(靑山)은 사람의 뜻을 이끈다”라고 하였다. 삭주(索州)를 지나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왜놈의 우두머리가 군사를 집결하고 있어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도망하여 〈강을〉 건너 귀룡성(龜龍城)에 이르니 병기(兵器)가 예리하였다. 그 날을 〈거기서〉 묵고 공문(公文)을 얻어 서금주(西錦州)로 향하였다. 이때가 을미년 가을 9월 21일이었는데, 왜적이 모두 떠나가서 별다른 일이 없었고 군졸도 모두 휴식을 하고 있어 며칠 동안을 머무르다가 심양(瀋陽)에 다시 도착하였다. 관동(關東)의 연왕(燕王)은 성(姓)은 이(李)요 이름은 극강(克康)이며 아인(阿人)인데, 비록 연로하였으나 충절과 대의(大義)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군중(軍中)에서 숙식을 하고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를 많이 만났다.

강서(江西)의 최연순(崔蓮淳) 및 해주(海州)의 김성찬(金聖贊 )등과 함께 연왕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조선국의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들은 삼가 100번 절을 하고 연왕 전하(殿下)에게 편지를 올리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봄에 〈만물이〉 생겨나고 가을에 시드는 것은 하늘의 상도(常道)이고, 임금에게 마음을 다하고 집안에 효도를 하는 것은 사람의 인륜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덕(德)을 지녀 바람・이슬・서리・눈이 그 순서를 바꾸지 않고, 사람은 선량한 명을 받아 예악형정(禮樂刑政)이 모두 그 쓰임새에 합치되었습니다. 순(舜)임금이 4흉[四凶, 순임금 때의 악인 4명]을 처벌하고, 공자(孔子)가 정묘[正卯, 少正卯]를 베어죽인 것은 진실로 천하의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고 개인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동방이 비록 바닷가 귀퉁이에 있으나 대대로 공비(貢篚), 공물을 담는 대바구니를 집행하고 풍속은 예의(禮義)를 높여 문물(文物)과 교화(敎化)가 중화(中華)에 걸맞게 되었습니다.

아! 통탄스럽습니다. 시운(時運)이 많이 어긋나서 갑신년[甲申年, 1884]의 역적에는 4흉(四凶)이 있는데, 영효[永泳孝, 박영효]와 광범[光範, 서광범]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일본에 도망을 가서 왜놈을 꾀여 그 병화(兵禍)가 번성[藩城, 우리나라]에 맺히고 상국(上國)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천리 강산에 〈그 병화를〉 막을 사람이 없고, 500년 사직(社稷)을 보필할 사람은 누가 있겠습니까? 영효와 광범 같은 대역죄인은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 완악한 4명의 원흉은 선동하여 8명의 간신(奸臣)을 만들고 안으로는 문무(文武), 밖으로는 목백[牧伯, 지방관]에 퍼졌습니다. 무리들이 영[營, 감영이나 병영]과 읍에 있으면서 권력을 농단하여 맹렬한 기세를 쫓았습니다. 정삭[正朔, 중국의 달력]을 쓰지 않고 관제(官制)를 바꾼 것은 영효와 광범이 급속히 한 것이고, 밖으로는 왜놈의 옷을 입고 안으로는 도적에게 양식을 싸주는 일은 목백[牧伯, 목사와 감사]이 기꺼이 한 것입니다. 심지어 병정(兵丁)을 많이 설치하여 인민을 그물질하였습니다. 왜(倭)를 격퇴하는 자는 비류(匪類)라고 하고, 왜놈에게 붙은 자는 충량[忠良,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 점점 물든 재앙이 위를 가리고 아래를 해치게 되었으니, 싸움터에선 백골귀신의 말소리가 시끄럽고, 공당[公堂, 관아]에서 할 일 없이 〈국록을〉 먹는 왜놈이 때를 살피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산하(山河)를 보니 이전의 수레바퀴 자국이 벌써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조선은 왜와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는 원수입니다. 신민(臣民)이 된 자라면 누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비록 노둔하지만 분노가 치미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의기(義氣)를 불러 모아 투구를 쓰고 병기(兵器)를 들게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부터 올 봄까지 왜와 수십 차례 싸움을 해서 수천 명의 왜놈을 죽이고 식량 길을 끊었으나, 기계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 늘 한탄스러웠습니다. 또한 농사일이 한창인 때를 맞아 우선 진영(陣營)을 거두고 천병[天兵, 청나라의 군대]의 토벌을 기다렸다가 크게 정성과 힘을 내어 적에게 달려가려고 하였습니다. 현재 왜적은 몇 명 없고 추수도 끝나가니 이때가 바로 군사를 일으킬 시기인데다가 병법(兵法)에, “예기(銳氣)의 적을 피하고, 태타(怠惰)하게 돌아가는 적을 공격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바로 왜와 각국의 요충지입니다. 그 근원을 끊고 그 양식을 막으면 이것이 진실로 그 목을 조르고 그 등을 누르는 것이어서 중국의 소요는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병가(兵家)의 훌륭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피눈물을 흘리며 성대한 덕과 빛나는 공적 및 자애롭게 구휼해주시는 천조(天朝,) (청나라)에게 일제히 호소합니다. 살펴보신 뒤에 이 물과 먼지처럼 하찮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특별히 위엄을 펴서 4흉(四凶)을 죄주고 소정묘를 베죽였던 대의(大義)를 드러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천병(天兵)이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오고 의사(義士)가 서쪽에서 맞이한다면 하찮고 더러운 〈왜놈들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을 정도로 석권(席卷)하는 기세와 같을 것입니다. 융의[戎衣, 군복]로 〈천하를〉 한 번에 정하여 하늘을 받들어 사람을 따르며 먼저 소동[小東, 우리나라]을 경계하고 사해(四海)를 편안하게 하여 만세 동안 주춧돌에 세우며 큰 공훈을 이루어 바닷가의 창생(蒼生)들이 입으로 그것을 전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왕이 그 상소를 보고 크게 기뻐하고 바로 명당문(明堂門)을 열어 우통령(右統令) 왕창종(王彰鐘)에게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그래서 미복(微服)으로 중경정(中慶庭)에 들어가 연왕의 좌우(左右)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저희처럼 소국(小國)의 이름 없는 장수가 어떻게 전상[殿上, 궁궐이나 전각의 위]에 오르겠습니까”라고 하니, 연왕도 일어나서 맞이하며 말하기를, “대국(大國)과 소국으로 거론한다면 큰집과 작은집의 구분이다. 그대와 과인[寡人, 자신을 지칭]은 의(義)로는 형제인데,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상에 올라 배례(拜禮)한 뒤에 연왕이 말하기를, “대야[大爺, 대인으로 존칭]의 풍모와 성함은 서금주(西錦州)의 유진장(留陣將) 마(馬)와 정(鄭) 두 명에게서 들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 상소의 뜻을 보고 대야의 충의(忠義)가 만고(萬古)에 걸쳐있으니 대국에게도 다행이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무지하고 쇠잔한 목숨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황공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벼슬이 없는 대야(大爺)들이 형제와 처자를 돌보지 않고 수천 리 먼 길에 괴로움을 겪으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넌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장부가 집에서 생업을 도모하면 부자가 될 수 있으나 죽을 때에 몸이 모두 묻힐 것이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연왕이〉 말하기를, “장하도다.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 소국에 있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고, 바로 술과 고기로 융숭히 대접하였다.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어느 날 성안이 어수선하고 군사들이 놀라서 동요하기에 그 이유를 몰라 장수들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라고 하니,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회회[恢恢, 위구르족을 부르는 다른 이름]가 거의 성을 침범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회회는 어떠한 적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본래 인종(人種)이 아니고 당나귀와 돼지가 서로 관계하여 새끼를 낳아 그 모습이 사람과 같으나, 그 뿌리는 당나귀와 같아서 이것으로 그 겉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래 천역(賤役)으로 소를 잡고 양을 때려죽이는 일을 하였으나, 지금 그 무리가 강성하여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켜서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상하(上下)가 어수선하며 동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왕이 바로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다시 군오(軍伍)를 정하고, 통령(統令) 추굴환(鄒屈鐶)에게 5,000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요새를 나가 성화(星火)처럼 〈그들을〉 꺾게 하였다. 그 때에 창을 끌고 일광전(日光殿)에 들어가서 연왕을 보고 말하기를, “소장(小將)이 비록 재주와 용기가 없어 상국(上國)에 공적이 없으나 추대인(鄒大人)을 따라 그 진세(陣勢)를 보려고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연왕이 허락하며 말하기를, “과인의 장수가 용병술이 능하지 못하니, 대야께서 그 뒤를 따라가서 먼저 적진(賊陣)의 계획을 탐문하고 지세(地勢)를 미리 살핀다면 절대로 실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전마(戰馬) 한 쌍을 내어주고 그 추장수(鄒將帥)에게 말하기를, “군중(軍中)의 일은 소국의 김(金)옹과 언제나 의논하라”고 하였다.

두 번 절을 하고 2일 동안 행군하여 호피동(虎皮洞)에 이르렀는데, 70리 양쪽 산의 골짜기에 회회족 수천 명의 군사가 위아래에서 매복하고 관병(官兵)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병이 오자 매복한 군사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일어나니 군마(軍馬)가 크게 어수선해져서 서로 잃어버렸고, 추장군도 크게 겁을 먹어 조금도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크게 추장수를 불러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왕명(王命)을 받아 출정하여 중도에 적을 만났는데, 어찌 싸우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니, 추장수가 말하기를, “적병이 산위에 있고 우리 군사는 골짜기에 있어 싸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것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니 신속히 싸우라”고 하였더니, 추장수가 돌아보며 도리어 꾸짖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 연왕이 그대에게 나와 힘을 합해 행군하게 하였는데, 어찌 나를 이와 같이 하는가? 그렇다면 나에게 병권(兵權)을 빌려달라”고 하였더니, 추장수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좌우영장(左右領將)에게 말하기를, “군중에서 나의 지휘를 듣지 않으면 군법(軍法)으로 〈목을〉 벨 것이다. 우리들은 전진해 싸워도 죽고 후퇴해 도망가도 죽는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번 싸우는 것이 당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좌통장(左統將) 장학윤(張學允)은 1,000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왼쪽 골짜기 산 위로, 우통장(右統將) 편동규(片東圭)는 1,000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오른쪽 골짜기의 산위로 올라가서 각각 낙화진[落花陣, 진법의 일종]으로 배치하였다.

나는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말로 쫓아 들어가서 싸움을 하다가 패배하여 달아나니 저들이 반드시 내 뒤를 쫓아왔다. 추장수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매복하였다가 적들이 나를 따라 이르자 전후좌우에서 모두 소리를 크게 지르며 한꺼번에 일어나니 회회족이 비록 신통한 재주가 있어도 어디로 가겠는가? 갑자기 말위에 앉아 한 번 소리를 지르니 군중에서 일제히 대포를 쏘아 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청나라 군대는 나를 믿었으나 나는 대국의 사람이 아니었다. 회적(恢賊)이 나와 싸울 때에 내 자신이 위심하기를 내가 도주하려고 해도 저들이 나를 따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군대를 돌려 달아나니 회회적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와서 추장수가 군사를 매복한 곳까지 왔을 때에 매복한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회회적과 서로 뒤엉켜서 서로간에 구분이 되지 않는 중에 산위에 주둔한 군사들이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니 회회적이 크게 패배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이었고, 군량(軍糧)과 병기(兵器) 및 말・당나귀를 버리고 모두 도망하였다. 그래서 얻은 군량이 수백 석이었고, 포가 100여대이며 말은 100여필이 되었다. 그러나 180리 밖에 회회족의 대군(大軍)이 집결하고 있어 감히 멀리 추격하지 못하고 군대를 돌려 영(營)에 돌아왔다. 생포한 자가 수십여 명이었다.

연왕이 명당전에 나와서 맞이하고 크게 기뻐하며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장군이 아니었다면 출정한 이 5,000명의 〈군사가〉 어찌 살아서 돌아왔겠는가”라고 하기에, 두 번 절을 하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애초에 전하께서 출전하는 명령이 없었는데 감히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례(謝禮)하여 말하기를, “출전하는 명령이 없었던 것은 바로 과인의 잘못이다”라고 하고, 전내(殿內)에 들여 큰 잔치를 열고 군졸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좌우의 조관(朝官)과 아래의 군졸들 중에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비록 그러하나 지난 병자년[丙子年, 병자호란]의 선조[先祖, 조상] 청음[淸陰, 金尙憲의 호]의 일을 기억하면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어찌 마음이 상쾌하겠는가?

며칠 뒤에 돌아갈 계획을 세우니 좌우가 모두 놀라서 만류하며 말하기를, “나중에 함께 나가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기에, 말하기를, “제가 무지하여 소국(小國)의 일에 어둡기 때문에 먼저 가서 왜놈의 내부를 탐지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추대인이 말하기를, “근래에 회회적과 싸울 때에 대야(大爺)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목숨을 보존했겠는가”라고 하며 수없이 잔을 들어 사례하였다. 좌우에서 각각 은보[銀輔, 금전을 말하는 듯함]와 반전[飯錢, 식비]을 주었고, 연왕은 진동영(鎭東營) 서경장(徐敬章)에게 공문을 보내 의논하여 보군도통령(步軍都統令)의 명목과 금자영기(金子令旗) 1쌍을 내어주며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나중에 동국[東國, 조선]에 반드시 나갈 것이다. 서로 통할 문자로 어느 글자를 신표로 삼자”고 하였다.

진동영(鎭東營)에서 설을 쇠었다. 서경창은 호가 청천(靑天)이었는데, 바로 심양(瀋陽)・뇌양(雷陽)・길림(吉林)의 3도도통령(三道都統令)으로 흥부도태(興部道泰)를 겸임하고 있었다. 그 사람됨이 관대한 장자(長者)와 인민이 모두 하늘로 여겼기 때문에 천자가 청천이라는 호를 주었다.

병신[丙申, 1896]년 1월 4일에 길을 떠났는데, 10리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말을 타고 200여 리를 가서 통화현(通化縣)을 지나 남쪽으로 노인령(老人嶺)을 넘어 옛 황성(皇城)에 도착하였다. 황성은 바로 옛날 남송(南宋) 때에 여진(女眞)족이 강성하여 군대를 이끌고 와서 남경[南京, 남송의 수도]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잡아와서 송나라 황제가 갇혔던 곳이었다. 며칠 뒤에 강을 건너 황해도 신천(信川)의 청계동(淸溪洞)에 이르렀는데, 처사(處士) 박덕로(朴德路)씨가 죽어서 축문(祝文)으로 애통해하고 제(祭)를 지냈다.

그 제문(祭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력[永曆, 1647~1662년 동안 명나라의 연호] 250년 병신(丙申)년 봄 2월에 처사 박공(朴公)이 청계동의 셋집에서 작고(作故)하여 소제[小弟, 자신을 지칭]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영전에 한 잔의 술을 올리며 글로 아룁니다.

아! 형에게 제사를 지내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제가 형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저를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텅 빈 것이 마치 병풍을 치우고 의탁한 것을 버린듯하여 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대군자(大君子)의 성대한 덕이 사람에게 감화된 것이 정말로 이처럼 깊습니까? 공은 성(誠)과 경(敬)이 금석(金石)을 꿰뚫었고, 효(孝)와 제(悌)는 신명(神明)과 통하였습니다. 시묘(侍墓)할 때에 무덤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고 밤낮으로 쉬지 않아 몸이 수척하여 뼈만 앙상했으나 조금도 병이 없이 묘정(墓庭)을 오르내렸습니다. 걸음마다 자취를 남겨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두 신명이 감동하여 그런 것입니까? 아침저녁으로 감실[龕室, 사당 안에 신주를 모신 곳]에 찾아가서 절을 하였고, 초하루와 보름에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이것이 모두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 점이었습니다. 공의 지순한 효성은 비록 옛사람의 지극한 효라도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공을 말하는 사람은 단지 비할 데가 없는 독실한 효를 알지만 그 효를 미루어서 그 행실을 넓힌 것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진리가 없어지는 방과(放過)는 때를 맞아 서양의 옷을 입지 않았고 집안에 서양의 물건을 들이지 않아 사람과 짐승・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을 일상생활에서 저절로 터득하였습니다. 마치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 것처럼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품성에서 나와 그런 것이고 선각[先覺,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후로 1차례씩 왕래했고, 편지와 직접 대면해서 의심나는 것을 교대로 물었으며, 소원(疎遠)한 점을 서로 경계하였습니다. 동도(東徒)가 소요를 일으켰을 때에 함께 피신하였고, 오랑캐 옷으로 외형을 훼손할 때에 동굴에서 죽을 것을 맹서하였습니다. 안에서 자신을 수련한 것이 매우 바르고 독실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난 것이 마치 한겨울의 큰 소나무와 추운 강의 가을 달과 같았습니다. 공이 어릴 때에 협기(俠氣)가 지나쳤으나 그 뒤에 자신을 거두고 단속하여 기질을 크게 바꾸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따뜻하고 공손하며 자애롭게 사람을 상대하였고, 지성(至誠)과 측은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엄정하고 매우 깨끗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 진실을 가리지 못하고 그 허점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지만 유명(幽明)간에 감히 물을 수가 없습니다. 허물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제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에 뜻을 두어 일찍이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마치 큰물의 지주(砥柱)를 얻은 것처럼 의지할 데가 있어 위태롭지가 않았습니다. 누가 공(公)에게 합치된 뜻이 도리어 천고(千古)에 영원히 끊어졌다고 합니까? 누가 저에게 원대한 계획이 어찌 순간처럼 짧게 되었다고 합니까? 도(道)가 막히고 명(命)이 궁박한 것입니다. 공의 높고 두터운 〈덕을〉 그리워하며 제가 의지하고 위로가 될 만한 점은 공의 훌륭한 아들이 공을 이어 종사하고 동문[同門, 제자]이 계(契)에 의탁하여 뜻을 모으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혼백은 위에서 여전히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아! 슬프다. 흠향하소서

주석
여주(厲州) 여주(驪州)를 잘못 쓴 듯하다.
창수(昌洙) 김창수(金昌洙)로, 훗날의 김구[金九, 1876~1949]이다.
천곡[泉谷, 安省의 호] 이 호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이 있으나 여기서는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진 안성(安省)인 듯하다.
병주(幷州) 당(唐)의 가도(賈島)가 병주(幷州)를 싫어하면서도 오래 살다가 떠난 뒤에 시를 지어 그곳을 고향처럼 그리워했다는 고사가 있다.
4흉[四凶, 순임금 때의 악인 4명] 순임금 때의 4명의 악인으로 공공(共工)・환도(驩兜)・삼묘(三苗)・곤(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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