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
제 69장 갑오동학란(第六十九章 甲午東學亂)
철종(哲宗) 11년 개국(開國) 469년 경신(庚申) 4월에 경주인(慶州人) 최제우(崔濟愚)가 천신(天神)의 영감(靈感)으로 대도(大道)를 시작하여 밝히고 궁을부도(弓乙符圖)로 사람의 질병을 건지고 스물 한자 주문(呪文)으로 통신감응(通神感應)하여 대도를 깨달아 이루고 만사가 뜻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조화가 끝이 없다. 가까운 고을 인사가 바람을 듣고 오는 자가 그 수를 알지 못하더라.
제우가 강화(降話)로 주문을 받아 친히 제자들에게 전해 주니
초학 주문(初學呪文)
“한울님을 위하고 우리의 정서를 돌아보면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만 가지 일이 마땅하다.”
강령 주문(降靈呪文)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니 원컨대 크게 내리소서.”
본 주문(本呪文)
“천주를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만 가지 일을 알 수 있다.”
제우가 또 시를 읊으니 그 시에 말하기를,
“황하가 맑아지고 봉황이 우는 것을 누가 능히 알리요, 운수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지 내 알지 못하노라. 평생에 받은 천명은 천년 운수요, 성덕의 우리 집은 백세의 업을 계승하였노라.”
제우는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넓게 펴니 그 교를 동학(東學)이라 함은 제우의 기사(記事)에 말하되 “나 또한 동(東)에서 태어나 동을 받으니 도는 비록 하늘의 도나 배움은 즉 동학이니,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나뉘니 서를 어찌 동이라 말할 것이며 동은 어찌 서라 말할 것인가?” 하였으니 동학은 곧 동방을 배우라 함이오. 당시 서학(西學) 즉, 천주교(天主敎)가 동방에 두루 가득 참을 우려하여 동학을 시작하여 밝혀서 서학에 대치함이었다.
이때에 제우는 우주의 대세를 관찰함에 유도(儒道) 불도(佛道)는 운이 또한 다하여 세도(世道)는 물과 같이 내리고 인심은 바람과 같이 쓰러져서 무격음사(巫覡淫祀)의 불경(不經)한 말은 심술(心術)을 현혹케 하고 화족(華族) 관리(官吏)의 탐학한 정치는 생령(生靈)을 벗기고 쪼개어 한 세대의 사람이 각자 마음으로 하여 하늘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하늘의 명령을 돌아보지 않아 천하가 매우 어지럽고 인심이 뒤섞이고 천박한지라. 탄식함이라! 오늘날은 요순(堯舜)의 정치로도 족히 베풀어 하지 못하겠고 공맹(孔孟)의 덕화(德化)로도 족히 말하고 논하지 못할지라. 백성[蒼生]이 가히 슬퍼함이 저 구렁텅이 안에 밀어 넣음과 같도다. 제우가 이와 같이 탄식하고 불쌍히 여기고 막힌 가슴 속에 느끼는 마음이 오장 내에 단단히 묶임을 막고자 하나 막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그런 고로 제우는 사람은 곳 하늘이라는 진정한 이치로 동학을 선전하니 용담(龍潭) 앞길에 사람의 오고 감이 끊어지지 아니함으로 시골 마을이 떠들썩하게 움직여 자자한 풍설이 전파되어 혹은 서학(西學)이라 하고 혹은 선술(仙術)이라 하고 혹은 환술(幻術)이라 하며 용담에는 유명한 사람이 나서 용도 되고 범도 되어 끝없고 끝없는 조화를 가졌다 하여 세상 사람의 이목을 현혹하고 어지럽히고 놀라서 움직이게 하였다.
이때에 경주영장(慶州營將) 김(金) 아무개가 그 친지 선달 윤봉구(尹先達 鳳求)의 지시와 부탁을 듣고 이익을 취할 계교로 영졸(營卒)을 내어 최제우를 사로잡아 죄를 묻다가 제우의 당당한 태도가 엄숙하고 언사가 바르고 곧음을 보고 다시 묻지 못하고 곳 돌려보냈다。이때에 본 경주부의 부윤(府尹)이 동학 선생이 사람의 질병을 잘 고친다는 말을 듣고 예리(禮吏)를 보내어 그 부인의 병을 물으니 제우가 묵묵히 생각하더니 예리에게 일러 가로대 “병이 이미 다 나았으니 너는 돌아가서 이대로 고하라” 하니 예리가 돌아가서 부윤에게 그 말대로 고하니 부윤이 가로대 “병이 과연 완전히 나았다” 하더라.
이때에 정부에서 동학은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어지럽히는 무리라 지목하여 선전관(宣傳官) 정구용(鄭龜鎔)을 명하여 보내 최제우를 임금의 명령으로 체포하여 서울(京師)로 잡아 올리더니 그때에 철종(哲宗)이 승하하여 중외에 발포되니 대구영옥(大邱營獄)으로 돌려보내 가두었다. 이때에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이 상주목사(尙州牧使) 조영화(趙永和)로 명사장(明査官)을 정하여 문초하여 말하게 하였다. 철종 이후에 고종(高宗)이 즉위함에 나이 어림으로 그 아버지 하응(昰應)이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니 즉 대원군(大院君)이라. 대원군은 강하고 사나운 성질로 폐단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 시작하여 약간의 혁신이 있었고 따라서 서학(西學) 곳 천주학(天主敎)를 박멸코자 함에 동학도 사학(邪學)이라 하여 또한 그 무리를 모두 없애기로 결정하고 그 선생 최제우를 고종 원년 ‘갑자(甲子)’ 3월 10일에 참형(斬刑)을 집행하게 되었다.
이때에 대구 부근에는 동학 선생을 참형에 처한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이날 관덕정(觀德亭) 부근에는 남녀노소가 모여들어 사람으로 산과 바다를 이루어 송곳 세울 땅이 없었다. 감사 서헌순이 관덕정에 일을 시작하고 50~60명의 나졸(羅卒)이 좌우에 벌여 늘어서고 휘자수(揮刺手) ‘망난이’가 쌍쌍이 칼을 들고 참형장에 나와서 최제우의 앞으로 나올 때에 수없이 모인 군중은 모두 최 선생의 위엄과 힘을 들었던 것이라 장차 어떠한 큰 일이 있으리라 하여 조마조마한 가운데에 일각일각을 지내다가 휘자수의 머리 위에 번쩍이는 칼날이 아무리 내리쳐야 최제우의 목에는 닷지도 아니하여 몇 시간 동안을 형을 집행하지 못하였다. 감사 이하가 다 불안에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에 제우가 말하되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울님께 기도하리니 너희들은 청수(淸水) 한 그릇을 가져오라” 하니 휘자수들이 너무 겁나고 두려운 중에 다행히 청수 한 그릇을 갖다가 최제우의 앞에 놓았다. 제우는 묵묵히 마음으로 고함을 마치자 제우의 머리는 백 자나 되는 장수 기(旗)의 대롱 끝에 달리고 몸은 관덕정 앞 넓은 흰 모래 땅에 뉘어 있게 되었다. 모인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저절로 솟아나고 푸른 하늘의 태양은 빛이 없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라. 그 동시에 같이 잡힌 동학인들은 혹 사형도 되고 혹 옥중에서 죽고 혹 정배도 되고 그 후에 잔인하고 독한 금압 아래에서 견디지 못하여 깊은 산 중으로도 도망하고 동학의 그림자는 영영 끊어지고 구미(龜尾) 용담(龍潭)은 빈 터가 되고 말았다.
그의 제자 중 최시형(崔時亨)이 그 선생이 대구 옥중에서 전해준 유서(遺書)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의심할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를 받고 그 즉시로 나아가 피해 태백산(太白山) 중으로 들어가 몇 명의 동학인과 남몰래 서로 따르며 동학을 몰래 선전하여 그 후 8년 사이에 믿고 따르는 자가 수백 여인에 달하였다.
고종 8년 신미(辛未)에 영해(寧海)의 이필제(李弼濟)가 최수운 선생의 제자라 하고 그 선생의 억울함을 펴서 씻는다며 스스로 칭하고 각 처에 있는 동학인을 유인하였다. 이때는 고종의 즉위 초이라. 대원군이 집권하여 인민을 많이 함부로 죽이고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인하여 인심이 한층 흉흉한 가운데 이른바 원납령(願納令)과 경복궁(景福宮) 토목(土木) 역(役)과 지방 관리의 재물을 탐함과 가혹한 정치와 반족(班族)과 부호(富豪)의 압박과 토색에 견디지 못하는 인심은 극도로 들끓어 여러 사람이 의견을 한가지로 말하여 이 세상은 틀이 바뀌게 된다, 진인(眞人)이 나온다 하는 예언서와 말 다툼 뿐이요, 향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이때이라. 이필제의 선동에 끌려 향하게 되어 숨어 있던 동학인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필제의 규모와 설계가 최시형의 동의를 얻은 연후에야 큰일을 잘 이루리라 하여 동학인을 수 삼차 시형에게 꾀어 보내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편다는 말로 혹 권고도 하고 혹 위협도 하니 최시형이 그 제자의 마음과 뜻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필제를 가서 보니 필제가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갑자(甲子)의 변을 듣고 선생을 위하여 억울함을 펼 뜻이 있음이 이미 오랜 지라. 대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 재앙을 받나니 내가 지금 하늘의 명을 받은 바이라. 하나는 선생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하나는 백성의 고통스러운 지경을 널리 구제할지니. 그 제자된 자 뉘가 능히 같이 행동하지 아니하리오” 하니 시형이 따뜻한 말로써 타일러 깨우쳐 가로되 “자네가 선생을 위하여 억울함을 펴고자 함은 실로 감격하나 세상의 만 가지 일이 빨리 하고자 한 즉 다다르지 못하나니. 그 기회의 날이 있으리니 오직 자네는 숨어 살면서 도를 닦아 아직 시기를 기다리고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하니 필제가 공손하지 못한 언사로 대답하여 말하기를 “운은 다시 오지 않고 때는 다시 이르지 아니 하나니 3월 10일은 즉 선생이 형을 받으신 날이라. 이날에 큰일을 이룬 즉 이것이 어찌 춘삼월 호시절이 아니리오.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고 일반 도인도 다 약속하였으니 다시 발언치 말라. 만일 기어이 응하지 않는다면 큰일은 이미 결정한 것이니 중지할 이유는 전혀 없고 당신 개인에 대하여는 조금도 용서할 수 없으니 깊이 헤아리라” 하였다.
이필제가 김낙균(金洛均)이라는 자와 더불어 야반에 군중을 지휘 선동하여 영해(寧海) 부중(府中)에 갑자기 뛰어들어 부사 이정(李土+政)을 강제를 끌어와 죄를 하나하나 들추어 말하기를 “네가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써 읍정(邑政)을 흐려 어지럽히고 백성의 재산을 학대하여 빼앗아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에 넘치니 네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라 하고 곧바로 살해하였다. 이때에 본 영해부의 포군(砲軍)이 급히 취군령(聚軍令)을 발하여 부내의 인민 수천이 일제히 서로 싸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이 모두 흩어지니 필제와 낙균이 세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성을 나와 도주하여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안으로 들어가니 영양 원님이 군병(軍兵)을 보내어 포위하고 세차게 공격함으로 각자 흩어졌다가 그 후에 또 필제가 다시 문경(聞慶) 등지에서 다시 일어났다가 인하여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다. 이때에 경상감사 김공현(金公鉉)과 안핵사(按覆使) 안동부사(安東府使) 박재관(朴在寬)이 각 처에 숨어 있는 동학인을 일망타진함에 영해(寧海), 영덕(盈德), 영양(英陽), 경주(慶州), 울진(蔚珍), 흥해(興海)로 널리 퍼져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까지 쉽게 발을 허용할 여지가 없었다. 정배된 동학인은 그 수를 알지 못하고, 참혹하게 살해를 당한 동학인은 수백인 이더라. 최시형이 강수(姜洙)와 더불어 흔적을 숨기고 자취를 그윽하게 하여 태백산 안으로 들어가 바위구멍 안에서 13일을 먹을거리를 끊고 겨우 살기를 도모하였더라. 이때에 관리의 학정과 반족(班族)의 토색함이 더욱 극심하게 되어 동학인을 모조리 잡아다가 돈과 재물을 빼앗아 취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참혹하게 살해하기를 곤충 죽이는 것 같이 하는 중에 시형은 더욱 비밀리에 동학을 선전하며 동학의 진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여 점점 동학의 큰 단체를 이루게 되니 그것은 당시 사상계, 물질계가 크게 혼돈 쇠약한 중에 일반 평민은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때라. 최시형이 비밀리에서 더욱 활동을 계속하여 확장함에 이에 반족에게 압제받는 평민과 반가에게 학대받는 노예와 반가의 천대받는 서족(庶族)과 불평이 많은 모든 민중이 구름같이 모여드니 전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때에 대원군이 이 정권을 가지고 아무리 혁신을 하려 하나 본래 조선의 국가 세력이 너무 쇠하여 약한 그 때이라. 용이하게 구제치 못하고 왕후 민씨(閔氏)와 권력을 다투다가 죄없는 생명만 살해하고 결국에는 민씨에게 정권을 잃어버리고 물러감에 민씨가 정권을 가지고 민가(閔家)의 일족을 끌어 정사를 좌우하니 당시 정부의 탐학무도함은 실로 극도에 달하였다. 이른바 정부대관은 오직 관작(官爵)을 팔아먹고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자기를 살찌우고자 하는 것을 채우고 지방관리는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수도 없는 학정에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고 아무개 아무개 반족(班族)은 평민의 돈과 재산을 자기 집 창고의 물건으로 알고 심지어 관례배까지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으니 이에 정치는 큰 혼란을 일으키고 민중은 도탄에 빠져 생활할 수 없으니 전국의 중등 이하 인민은 모두 ‘이 날은 언제 없어질까?’ 하고 망국가(亡國歌)를 일삼았다. 겸하여 당시에 외국 세력은 점점 반도 강산을 부추기게 되었나니 중국과 일본이 서로 조선에서 세력을 쟁투하여 이른바 정부관원이 중국에 아부한 자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장코자 하고 일본에 아부한 자는 일본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며 그 밖에 구미 열국도 차차 조선에 손을 뻗치게 되어 이에 조선이 일본과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공사(公使)가 내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기회로 중국과 일본이 조선에서 충돌이 크게 일어나 조선은 호시탐탐하는 열국 사이에서 운명이 점점 위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대소 관원은 국가의 시급한 운명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동학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하고 혹독하여 한 동안을 부지하기 어려운 고로 서인주(徐仁周), 서병학(徐丙鶴) 두 사람이 교도를 공주군(公州郡)으로 모으고 소장(訴狀)을 만들어 충청감사(忠淸監司) 조병식(趙秉式)에게 바치니 그 글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있고 사람의 무리가 있으면 스스로 도덕이 있어 유지되어 편안하게 안정되나니 이런 연고로 요순우탕(堯舜禹湯)이 하늘의 뜻을 이어 바탕을 세워 도덕으로써 천하의 만백성을 다스려 깨우치고 공맹안증(孔孟顔曾)이 가르침을 전하고 교의를 풀어 밝혀 또한 도덕으로써 틀을 천하 후세에 세웠더니 송(宋)에 이르러 도덕이 다시 떨치고 다행히 우리 동(東)이 중화(中華)를 본떠서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이 여항(閭巷)에 소리가 들리며 상서(庠序)가 주(州)와 군(郡)에 성하게 일어난지라. 의관 제도와 예악 문물이 밝다고 설명할 만하여 천하에 으뜸이 되고도 더함이 없는 것이 이전 성왕(聖王)의 권하고 징계하는 정치와 현명한 재상과 큰 유학을 북돋아 기르는 은택에 연유하여 교화가 미친 바에 나옴이거늘, 무릇 어찌 근래 이후로 성현의 학문이 연기처럼 폐하고 오랑캐의 풍습이 거리낌 없이 행하여 기강이 물에 잠기고 법이 섞임에 큰 육지가 가라앉아 넓은 물이 되고 사람의 무리가 화하여 사나운 짐승이 되려더니 어찌 다행스럽게 하늘이 도우셔서 동쪽을 돌아보아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짐이라. 지난 경신(庚申) 4월 5일에 상제(上帝)가 친림 강화(降話)하여 무극대도(无極大道)로써 경주(慶州) 수운재(水雲齋) 대선생 최제우(崔濟愚)에게 주시니 높고 높은 큰 도는 살아있는 백성으로부터는 없었던 종교요, 참되고 참된 성학(聖學)은 넓은 동토(東土) 끝이 없는 도덕이라. 세 가지 가르침을 합하여 하나로 하니 유불선(儒佛仙)이 범위 안에 원래 있고 세 과목을 만들어 가르치니 성경신(誠敬信)이 공부의 도에 열어 봄이라 하고 또 말하기를 선생이 서학(西學)이 널리 퍼져 큰 도가 다급하게 잠식됨을 미리 알아 가히 그 자신이 홀로 선하지 못할지라. 고로 자리를 펼치고 도를 익혀 문인과 제자로 하여금 하늘의 법을 잡고 참된 본성을 지키시더니 뜻밖에 갑자(甲子) 3월에 오히려 사학(邪學)으로써 무고를 입어 선생이 구차하게 면함을 꾀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대구에서 의로움을 좇으시니 오호라! 우리들의 하나를 섬기는 뜻에 그 뼛속까지 억울하고 피가 끓는 분통이 마땅히 어떠하다 하리오. 우리들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외에 결단코 다른 뜻이 없으니 어찌 조금(毫釐)이라도 바르지 못할 이치가 있으리오.
지금 각하가 북궐(北闕)의 걱정을 함께 나누고 남토(南土)의 풍속을 살피니 신명(神明)의 아래에 윤리를 거역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무리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간계를 팔아먹고 사악함을 조장하는 무리가 스스로 두려워 복종하리니 어찌하여 의혹을 이 도(道)에 두어 우리들을 속이는 학문의 분류에 돌리니이까? 우리들이 성문훈도(聖門薰陶)의 힘으로써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고 의무를 준행하여 공문(公門) 납세(納稅)와 사가(私家) 채액(債額)을 잠시도 미루지 아니하고 전의 허물을 깊이 뉘우침에 밤낮으로 주의하여 두렵고 송구하오나 스승의 가르침을 혹 저버릴까 이것이 근심이라. 밭가는 자는 밭을 갈고 글을 읽는 자는 글을 읽어 거친 옷과 채소를 먹음으로 다만 제 분수를 지켜 도를 닦음을 알리거늘 어찌 소인배가 각하에게 화를 전가시켜 허물이 없는 조잔한 백성으로 하여금 추위를 기원하는 매서운 겨울에 떠돌며 죽을 지경이 되어 남의 부인을 홀어머니 되게 하며 남의 아버지를 홀아비가 되게 하며 남의 아들을 홀로 되게 함을 이와 같이 이름을 뜻하였으리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단단해야 나라가 편안하나니. 만약 각하의 기약하여 살핌으로 평범한 아낙네와 사내의 제자리를 얻지 못함도 앓는 것이 이미 있음과 같이 하시려든 하물며 허다한 허물없는 도인이리오. 반드시 모두 풀어 보내고 이유를 갖추어 임금(天陛)에게 의견을 아뢰어 하여금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씻으소서.”
감사 조병식이 제사(題辭)에 말하기를,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조가(朝家)의 처분에 있는지라. 영문(營門)이 또한 조정의 영을 따를 뿐이니 모두는 모름지기 이를 잘 알아서 곧바로 물러가라.”하고 거듭 각 읍에 관자(關子)를 보내어 말하기를, “동학을 금하는 신칙이 이미 감결(甘結)한 바 있으나 그러함에 금하고 범하는 자를 죄함은 이미 금(禁)을 설(設)하여 양(良)을 화(化)하는 뜻이거늘 지금에 그렇지 않아 심한 즉 수재(守宰)된 자가 동학을 보기를 함정(陷井)과 같이 하여 살림이 넉넉한 백성을 꾸며 모함하여 그 재물을 토색하고 각 읍 교예(校隷)의 빙자하고 침어함이 10에 8, 9에 있는 지라. 진실로 이미 지키기 어려우니 죄를 어찌 다시 논하며 비록 과오를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나 어찌 가히 얻으리오. 이 무리들도 또한 우리 성상의 화육(化育) 중의 하나의 종류이라. 비록 이교(異敎)에 깊이 빠졌으나 그 성정을 궁구한 즉 가히 용서할 것이오. 지금 모두의 호소는 실로 어찌할 수 없는 성정에서 나옴이니 지금부터는 교예를 모두 단속하여 함부로 침학함을 절대로 말게 하며 깨달아 능히 돌아오는 자는 무거운 상으로써 베풀고 끝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내리는 회답을 기다려 또한 고치고 따르는 길을 열게 하라.”
이때에 각 군 수재가 영문 관자(關子)에도 불구하고 동학인을 압박함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충청, 전라 양도의 동학인으로 이름을 하는 자는 버티어나갈 방도가 없었다. 그런 중에 또 이노임(李盧林 : 모두 이름을 알 수 없음) 세 사람이 명을 받들어 안렴(安廉)한다 칭하고 남도에 내려와서 위협하고 꾸짖으며 재물을 징수하며 방자하게 불법을 행하는지라. 시형이 이를 듣고 제지에게 글을 보내니 말하기를,
“법이라는 것은 즉 천하의 공(公)이요 한 사람의 사(私)가 아니거늘 지금 들으니 이(李), 노(盧), 임(林) 세 사람이 남도어사(南道御史)라 스스로 칭하고 무뢰배를 얽어서 매어 교인 중 조금 넉넉한 자를 위력으로 공갈하여 재산을 빼앗아 마음을 편안할 수 없으니 이 세 사람이 과연 명을 받든 신하라면 공정하고 곧게 살펴 왕명(王命)을 받들어 널리 알리는 것이 일의 이치에 당연한 것이거늘 지금에 공을 빙자하고 사를 경영하여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무엄(無嚴)하니 어찌 놀라고 의혹하지 아니하리오. 차차 그 동정을 보아 장차 분명한 판단의 방책을 행하리니 오직 우리 교인은 나의 말을 한결같이 따라 비록 작은 돈[分文]이라도 절대로 요구에 응하지 말라.”
이때에 서인주, 서병학 등이 시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각지의 교인이 버티어 나갈 방책이 없으니 완영(完營)에 또 호소하기를 청하니 시형이 허락하고 각지 제자에게 통유(通諭)하니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도가 죽고 글이 해어진 나머지 황천(皇天)이 돌아보고 도우사 우리 대선생을 하늘에서 내리시고 무극대도를 주심은 덕을 천하에 펼치고자 함이러니. 불행히 갑자(甲子) 봄에 사도(邪道)의 무고를 받아서 대구에서 목숨을 바치셨으니 제자된 자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억울함을 풀 길을 생각할 것이오. 만약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원컨대 천대(泉臺)의 아래에 따르고 교화하고 훈육하는[薰陶] 반열에 편안하고 한가롭게 있는 것이 당연히 행할 뜻이거늘. 오호라. 재앙을 만난 후 30년에 큰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도인된 자는 혹은 큰 뜻을 버리고 작은 이익을 탐하여 바라는 것은 자기 배를 채우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뿐이고 바라는 바는 오랜 병이 스스로 나는 것뿐이라. 알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무엇이 심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것이 이보다 무엇이 있으리오. 오직 여러 도인은 억울함을 풀 방편을 능히 생각하여 감히 혹 게으르지 말지어다.”
시형이 또 글을 내어 말하기를,
“무릇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서서 선사의 은덕을 받아서 도유(道儒)된 자 누가 억울함을 풀 마음이 없으리오. 그러나 지금까지 삼십여 년에 지목이 매우 심하여 두려워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한 자 또한 하늘이오. 지금에 금영(錦營)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완부(完府)에 탄식하며 부르짖고자 하는 자 또한 하늘이라. 각 포(包)의 여러 두령은 포 안의 도우(道友)를 관장하여 일제히 삼례역(參禮驛)에 와서 모여라. 이 타이르는 글을 보고 와서 모이지 않으면 이는 스승의 은혜를 홀로 저버리고 사문(師門)에서 스스로 내보냄이오, 신과 하늘에 어그러짐이니. 사사로운 마음으로 의를 해함을 엄히 반성하여 간사한 사람의 그릇된 말을 듣지 말지어다.”
11월 2일에 각지에 동학 두령이 포 내의 사람을 대동하고 삼례역에 오니 그 때 회에 모인 자가 수천인이라. 또 소장을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바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 스승 용담 최 선생은 상제의 명을 받아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로써 장차 천하에 큰 덕을 베풀고 백성들을 이미 빠진 땅에서 널리 구제하더니 불행히 몸소 사악한 학문이라는 무고를 받아 대구에서 순도하시니 오호 통재라! 우리들은 함께 이 최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라. 원한을 풀려는 한 가지 마음으로 잘 때에는 꿈을 같이 하고 먹을 때에도 같이 삼키니 한 순간이라도 늘 이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 뜻이 어찌 쉽게 풀어지리오? 백이와 숙제를 일러 탐하였다 하면 옳을지라도 서교(西敎)로써 우리 스승을 의심하면 우리들이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맹세코 장차 그 억울함을 푼 후에 그칠 것입니다. 분함을 참고 분통을 견딘 지 30여 년에 지극한 억울함을 이직 풀지 못하여 커다한 도를 밝히지 못하였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리오. 우리들의 정성스럽지 못하고 민첩하지 못한 까닭이라. 세상 사람이 이런 속내가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고 남의 말만 따라 입을 쫓아 이단으로 지목하니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공자의 학문이 아니면서도 따로 이 도라고 하는 것이 하나가 아님에 족하거늘 전혀 거론하지 않고 우리 동학에 이르러서는 공격하고 배척하여 다른 힘이 남아있지 아니할 때 문득 서학(西學)이라 부르나 우리 스승은 동에서 태어나 동에서 배우시니 어찌 동이 서가 되며 또 하늘에서 배우고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거늘 어찌 하늘을 허물하여 우리 선사를 죄 주리오?
여러 읍의 수령들이 우리를 서학의 한 부류로 지목하여 조사하여 줄줄이 옥에 가두고 돈과 재물을 빼앗아 사상자가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고 시골구석의 세력가들이 소문을 듣고 침학하여 집을 부수고 재산을 빼앗아 가지 않는 곳이 없으니, 도유(道儒)로 이름을 한 사람들은 거의 떨어지고 뿔뿔이 흩어져 머물러 살 곳이 없습니다. 비록 금하는 이단으로서 말할지라도 말로써 양주와 묵적을 물리치는 자는 성인의 제자라 하였으니, 말로써 물리치는 것은 오히려 옳을지라도 양주와 묵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탐하는 자도 성인의 제자 된다 함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함께 이 조정의 가르침을 받은 백성으로서 옛 성인의 책을 읽고 임금의 땅에서 먹어 이 학문에 뜻을 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개혁하여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기를 위할 뿐입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오직 나라에 보답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과 덕을 천하에 펴려는 큰 소원일 뿐입니다. 특히 자애를 베풀어 이런 뜻을 임금님께 글로 올려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푸시고 각 읍에 공문을 보내 조잔한 백성을 죽을 지경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감사 이경직이 제사(題辭)에 말하기를,
“동학은 조가(朝家)의 금하는 바라. 이미 떳떳한 성품을 갖추었으면 어찌 바른 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 가서 스스로 빨리 죄를 범하리오. 곳 물러가 다시 우둔하여 알지 못하지 말라.”
이때에 동학인이 이 제사를 보고 다시 호소하기로 논의하여 7일에 다시 호소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들이 글을 바친 지 이미 여섯 날을 지난지라. 각하의 백성들의 괴로움을 널리 살핌을 삼가 기다릴 때 풍찬노숙(風餐露宿)하여 굶주림과 추위가 살갗을 끊고 구렁텅이가 닥치되 매일매일 기대하는 바는 오직 억울함을 풀고 폭압을 금하여 줌에 있더니 각하가 오히려 ‘바른 것을 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스스로 빨리 죄를 범하리오. 곳 물러가 다시 우둔하여 알지 못하지 말라.’ 하니, 우리들이 하늘을 우러러 길게 부르며 땅에 엎드려 크게 한숨지어 무엇으로 연유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지킨바 뜻은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풀려 함이오. 선사에게 배운 바는 오직 유불선의 도를 합하여 충군효친(忠君孝親)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니 우리들의 우매함이 어떤 것이 이단이며 어떤 것이 정학(正學)이 아닌 줄 알지 못합니다. 지금 각 읍 지목의 재앙이 물과 같이 더욱 깊으며 불과 같이 더욱 치열하여 수재(守宰)로부터 이서(胥吏) 군교(軍校)와 향간(鄕奸) 토호(土豪)까지 가산 탈취하기를 자기의 가진 것처럼 보고 때리고 능멸하고 학대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는 바니 가련한 이 중생이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각하는 가엽게 생각하여 임금님께 장계로 아뢰고 각 읍에 관문을 보내 선사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씻어버리고 아전들의 폭행을 금하고 그만두게 하여 주소서.”
감사 이경직이 제사를 주지 아니하고 각 읍에 관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동학은 조가에서 금하는 바라. 영읍이 마땅히 조정의 칙령을 받들어 금할 따름이거늘. 지금 들으니 각 읍이 금단을 빙자하고 돈과 재물을 빼앗아 취하며 사람의 목숨을 상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하니 정법(政法)을 헤아림이 어찌 이와 같음을 용서하리오. 감결(甘結 : 지금의 훈령)이 도착하는 즉시 경내에 영으로 단속하여 만일 미혹하고 잘못 이해하는 백성이 있거든 그 마음을 바로잡아 정학(正學)을 닦게 하고 관속배(官屬輩) 이 한 항목은 낱낱이 금단하여 비록 푼문(分文 : 엽전 1푼[分])이라도 혹 빼앗아 취하지 못하게 하라.”
영문의 관문이 이 같은 고로 시형이 글을 보내어 곧바로 해산케 하고 12월에 시형이 충청도 보은군 장내(帳內)에 동학도소(東學都所)를 설치하니 이때에 각처 동학인이 나날이 몰려들어 종일 맞이하고 보냄에 겨를이 없었다. 도소에서 각지 동학인의 정형을 들어 정부에 글을 올리니 말하기를,
“도는 사람이 하는 바 이름이니 같고 다름을 막론하고 그 마음씨의 실제 있었던 일에서 이를 구함을 따라 헛된 이름을 만들지 않을 따름이라. 고로 공자와 맹자의 도를 행하는 자는 양묵을 가리켜 이단이라 하고 양묵의 도를 따르는 자는 공맹을 보되 이단이라 하나니. 공맹이 바른 학문이 되고 양묵은 사악한 학문이 됨이 아니라. 대개 이단이라 함은 당세에 숭상하는바 도와 더불어 같지 않다 칭하는 이름이라. 그럼으로써 예전에 또한 유학의 이름으로 묵(墨)을 행하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유를 숭배할 때에 그 숭배하는 바를 가림은 세상에 따라 이름만 좇는 자라. 진실로 공정한 눈으로써 보면 반드시 이름의 다르고 같음이 있음으로써 그 마음의 바름과 사악함을 판단함이 아니라 지금에 유가의 흐름과 불가의 흐름과 선가의 흐름이 각각 한 끝으로써 그 옳음을 스스로 뽐내나 그러나 쇠락하고 폐한 지 이미 오래된 지라. 하늘이 우리 동쪽을 도우사 경신 4월 5일에 경주부 구미산 아래 용담 최 선생이 친히 상제의 강화를 받아서 무극대도를 비로소 세우시니 대개 그 원리를 듣건대 이르기를 사람이 사람됨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진 것이라. 몸의 묶인 것을 제거하고 나의 하늘로 돌아오면 사람이 곳 하늘이요 하늘이 곳 사람이라 하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합하여 하나 됨의 뜻이요. 또 유불선(儒彿仙)이 비록 문호를 각기 세워 서로 밀쳐 배척하나 그 근원을 궁구하면 모두 하늘을 뿌리로 하여 도가 된 것이라. 나는 이 세 가지 도에 대하여 그 지나침을 덜고 그 부족을 보하고 그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을 취하면 유문의 인륜대강(人倫大綱)과 불교의 보제중생(普濟衆生)과 선가의 청정자수(淸淨自修)가 족히 우리 도의 삼과(三科)될 만하다. 우리 도는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문호를 정하며 포덕광제(布德廣濟)로써 목적을 삼은지라. 그 가리키는 바는 지극히 간략하되 그 품는 바는 지극히 넓도다. 다만 법도를 세우고 가르침을 말함이 당세의 숭상하는 바와 더불어 다르고 같음이 없지 않으나 평소 읊는 바 삼칠 성주(聖呪)에 천주(天主) 두 자가 있어서 한 세상의 지목의 큰 사건이 된지라. 그러나 그 지극한 정성과 하늘을 모시는 뜻과 지나쳐 귀한 신령의 오묘함은 실로 일반의 성정에 가히 예측할 바 아니라. 고로 지나치는 곳과 살고 있는 시골마을에 따르는 자가 구름과 같아 골짜기에 있으면 골짜기에 차고, 들에 있으면 들에 차는지라. 제자가 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습관을 변하지 않아 하늘을 섬기기를 집안사람 섬기듯 하고 사람을 숭배함을 하늘을 숭배하듯 하니 만약 그 공덕이 사람에 있음을 논할진대 몰락한 시기(叔季)를 잡아당겨 아늑한 옛날(元古)을 의지하며 구천(舊天)을 고쳐 신천(新天)을 연다고 가히 일컫겠거늘. 세상에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아니하는 자는 옛 허물을 굳게 지키고 헛된 생각을 짜내며 무고함을 만들어 못에 빠지게 하고 또 돌을 던지는지라. 마침내 갑자 3월 10일에 몸을 바쳐 대구에서 순도(殉道)하니 그 지극한 억울함과 지극한 고통은 사람과 신령이 더할 수 없이 처참하고 하늘과 땅이 참담하다 가히 일컬을 지로다. 아무개 등이 눈물을 마시고 한을 먹은 삼십년에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아직 펴지 못한지라. 예전 날 금영(錦營)의 억울하여 움과 완부(完府)의 호소는 억울함을 풀고 폭압을 금하는 뜻에서 나왔거늘 어지럽고 얄팍한 세상 풍속이 그 속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지 않고 따라서 동학으로 지목하며 당고(黨錮)로써 당하여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개인의 일을 도모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고 아버지와 관계시켜 자식을 잡아가며 집을 부수고 재산을 다 빼앗으니 동학으로써 이름을 하는 사람은 거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지경에 있어 목숨을 의지할 곳이 없는지라. 대개 동학이라 일컬음은 다른 뜻이 없는지라. 다만 선사가 세상에 계시던 날에 동에 살고 동을 배움으로써 동학의 이름을 제창하여 서쪽에서 온 학을 막았거늘 뜻밖에 오늘날에 다시 동학금고가 일어나 도리어 서교의 왼 팔을 도우니 요원한 하늘아 이 어떤 사람이 이 같으리오. 충청도 관찰사(錦伯)가 즉 동학은 조가(朝家)에서 금하는 바요 내가 함부로 편하게 할 바 아니라 제결(題決)하니 진실로 조정의 명령이 이러할진대 팔로가 같겠거늘. 어찌 홀로 금영(錦營)이 이 같으며 완부(完府)는 어떠한가. 완부는 즉 다만 윤영기(尹榮起)의 말을 믿어 백성들의 정서는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침학을 일삼으니 이로 인하여 수재(守宰)가 탐폭하고 향호(鄕豪)가 마음대로 학대하여 호서에 있어서는 영동, 옥천, 청산군수가 백성을 어지럽히고 재산을 빼앗는 것과 호남에 있어서는 김제, 만경, 정읍, 여산 아전이 사람에게 허물 씌우고 생명을 상하게 함이 더욱 극심하고 참혹하고 독한지라. 슬프다 무고한 억울한 소리가 하늘에 넘쳐나고 눈물이 빗물같이 땅에 넘치니 대개 한 사내가 그 하는 바를 얻지 못함은 묘당(廟堂)의 고통이오, 지극한 억울함을 얻어 펼 수 없음은 조가(朝家)의 흠 되는 일이니, 바라건대 이 정형(情形)을 장차 임금에게 올리소서” 하였더라.
고종 30년(개국 502년) 계사(癸巳) 정월 서병학이 다시 선사의 억울함을 펼 일로 글을 올려 대궐문 앞에 나아가 하소연하기를 청하니 시형이 말하기를, “스승을 높이는 방법에 있어 정성스럽게 힘씀을 끝까지 다하고 가히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 거리낄 바 아니라” 하고 허락하였다. 청주 송산(松山) 손천민 집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정하고 각처 제자에게 글을 보내니 줄여 말하기를,
“황하의 운이 느리게 맑아지고 하늘의 발걸음이 많이 어려워 서교(西敎)가 바야흐로 치성함에 우리 가르침이 알아 눕고 쇄하니 우리 선사(先師)의 무극대도(无極大道)로써 세상에 뚜렷하게 밝힘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그 재앙을 입으니 애통하여 어찌 말로 참을 수 있으리오? 무릇 우리 스승이 옷을 걷어 올리고 학문을 따른 것은 선사의 억울함을 펼 일을 어찌 먹거나 쉴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리오? 바야흐로 상소를 펼쳐 억울함을 부르짖는 움직임을 의논하여 정하기로 이에 널리 고하노니 각처 교도는 일제히 모임에 와서 협상 시행하라” 하고 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선사의 억울함을 펴는 큰 뜻은 천지에 세워도 패악함이 없고 귀신에 물어도 의심이 없는지라. 돌아보건대 이 늙은이가 각 포에 이미 통지하여 고하여 하여금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나 또한 뒤 따라 용감하게 나가고자 하였더니 마침 중도에 함궐(銜橛)함에 따라서 연이어서 묵은 허물이 그 틈을 타서 마음대로 함으로 능히 정성껏 할 수 없게 되니 한스럽고 부끄러움이 어찌 말로 하리오. 오호라. 큰 운이 바야흐로 열림에 우리 도가 다시 밝아져 중생을 지극한 재앙의 형편에서 구제하고 큰 뜻을 장차 견주고자 할 때에 떠받치고자 하나 가히 걱정하는 바는 아직도 즐겁게 펼치지 못한지라. 대궐에 엎드려 상소로 부르짖는 움직임을 바야흐로 의논하여 정할 것이니 먼저 힘을 내어 재물이 기울고 재산을 써서 없앰이 실로 측은한 바이나 집에 있으면서 이리저리 오가면서 따뜻함과 배부름을 구하는 자는 어찌 마음을 편안히 하리오. 원근이 힘을 합쳐 조금도 딴 마음을 품지 않고 충분히 경계하여 이 바람을 돕게 하라.”
2월에 시형이 강시원(姜時元),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을 명하여 교도 수만 인을 이끌고 초 8일 융희주(隆熙主) 탄신과(誕辰科) 과거 유생으로 꾸미고 만들어 일제히 서울로 올라가 11일에 광화문 앞에 상소를 받들어 올리고 나아가 엎드리니 상소의 우두머리는 박광호(朴光浩)요, 상소를 만든 것은 손천민이요, 상소를 쓴 것은 남홍원(南弘源)이요, 상소를 받든 것은 박석규(朴錫奎), 임국호(任局鎬), 손병희, 김낙봉(金洛鳳), 권병덕(權秉悳), 박원칠(朴元七), 김석도(金錫道) 등이더라. 그 소에 간략히 말하기를,
“유학 신 박광호 등은 진실로 황공하옵게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목욕재계하고 통천융운(統天隆運) 조극돈윤(肇極敦倫) 정성광의(正聖光義) 요준순휘(堯峻舜徽) 우무탕경(禹謨湯敬) 응명입기(應命立紀) 지화신열(至化神烈)한 주상 전하께 절을 백번하며 아뢰옵니다.
엎드려 질병과 고통에 부모를 부르며 죽음에 임해 하늘과 땅을 부르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오 이치의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 지금 전하는 즉 신하의 하늘과 땅, 부모이시고 신하는 또한 전하가 기르시는 적자(赤子)입니다. 이 질병 고통과 죽음에 임하는 지경에 즈음하여 외람되이 죄를 돌보지 아니하고 목소리를 같이 하고 길을 떠나 하늘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 아래에서 호소하는 것이 참람되고 망령되어 두려운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지극한 억울함과 극심한 고통의 형상을 천지 부모께 호소할 수 없으니 천지간에 다시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옛적부터 성제명왕(聖帝明王)과 현상양좌(賢相良佐)가 사문(四門)을 열고 사총(四聰)을 달(達)하여 음과 양을 다스리고 사시(四時)를 순하게 하여 천하를 태산(泰山)의 편안함에 두는 것이 하늘의 명을 공경하며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람의 윤리를 밝히고 기강을 세울 따름입니다.
요 사이에는 도를 행하는 것을 실천하는 진유(眞儒)는 거의 없고 표장응문(表章應文)하여 겉 치례를 헛되이 숭상하니 경전을 표절하고 거짓으로 명예를 구하는 선비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선비의 습상을 말하고 생각함에 덕성(德性)을 가지고 학문을 인도함이 이같이 업신여김이라 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이 나라의 다스림에 관계하니 실로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므로 비통하고 한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여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려니. 다행하게도 하늘의 운이 순환하여 한번 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지난 경신년 4월에 황천(皇天)이 묵묵히 도우시고 귀신이 은연중 복을 내리니, 경상도 경주의 고 학생 신 최제우가 하늘의 명을 비로소 받아 사람들을 가르치고 덕을 베풀었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진유(眞儒)요 곳 창관(創觀)의 종학(宗學)이라 가히 일컬을 것입니다. 최제우는 곳 병자공신(丙子功臣) 정무공(貞武公) 진립(震立)의 7세손입니다. 도를 행하고 덕을 편 지 불과 5년에 위학(僞學)의 이름으로써 무고와 업신여김의 화를 졸지에 받아 갑자(甲子) 3월 10일에 영영(嶺營) 대구(大邱)에서 정형(正刑)을 결국 받았으니 이때의 광경은 가만히 생각하면 하늘과 땅이 서운해 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컬을 것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일을 범하였으면 법이 있어 마땅히 죽음을 어찌 감히 치욕을 벗을 것을 도모하리오만은 사람의 꾸밈으로 무고를 당해 이 둥글고 가득 찬 티가 없는 큰 도로 하여금 예전에도 있지 않았던 횡액을 졸지에 입었으니 어찌 마음이 차갑지 않겠습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이거늘 만일 결함의 일이 있다면 감히 도학(道學) 두 자로 입을 놀리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어찌 감히 억울함을 푼다는 등의 말로써 임금의 귀에 거짓으로 이르게 할 것입니까? 그 글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요, 그 법은 예악형정(禮樂刑政)이요, 그 도는 온량공검(溫良恭儉) 효우목인(孝友睦婣) 임휼지인(姙恤智仁) 성의충화(聖義忠和)로써 기질을 변할 따름입니다. 선사 최제우의 말에 이르기를,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오직 내가 다시 정한 것이라.’ 하고 또 이르기를 ‘공부자(夫子)의 도를 깨달아 보면 하나의 이치가 정한 바요, 오직 나의 도를 논하면 크게 같고 조금 다르다 하였으니 조금 달리 말하는 것은 또한 다른 일이 아니라 성경신(誠敬信)의 세 가지 바름으로써 하늘과 땅을 공경하게 받들어 섬기는 것 마다 반드시 고하기를 부모와 같이 섬기니 이 하나의 도리가 선성이 아직 펴지 못한 일에 실제로 관계하였느니라. 대체로 이 종지(宗旨)는 하늘은 부모와 같고 유불선 세 개의 가르침은 하나로 통합되는 이치가 없는 고로 조금 다르다. 그러나 그 아우르는 원인을 궁구한 즉 또한 머리카락을 자르고 승복을 입고 오랜 동안 뒤 돌아보지 않고 임금과 아비에게 등을 돌림이 아니라 선불(仙佛) 두 개의 가르침의 자비수련으로 서로 합한 이치를 겸하였으니 실로 공부자의 광명정대한 도의 체면에 흠이 없고 또 동학이라 말하는 것은 그 배움의 이름이 본래 동학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와 동쪽에서 창시되었는데, 당시 사람이 서학으로 잘못 지적하여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 선사 최제우가 제자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도는 즉 하늘의 도이나 학은 즉 동학이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갈리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하고 동을 어찌 서라 하리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나 추나라에서 사셨으니 추와 노나라의 풍모가 이 세상에 전해졌다. 내 도는 이곳에서 받아 이곳에 베푸니 어찌 서(西)로 이름하리요? 그러니 너희들은 서학으로 배척하고 동학으로 밀쳐대도 안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영에서 읍에서 잡아들여 죽이고 유배하여 용서하지 않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수심정기(守心正氣)하고 경천순인(敬天順人)하여 각기 그 본질을 따르면 성스런 자는 성스럽고 어진 자는 어질 것이니, 공자의 도도 또한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조금 다르다 칭하여 이단으로 지목하오리까? 대저 이 도는 심화(心和)로 근본을 삼으니, 심화는 기화(氣和)요, 기화는 형화(形和)하고, 형이 화하면 천심(天心)이 바로 되고 사람의 도가 서게 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즉, 선사 최제우는 전성(前聖)이 내지 못한 큰 도를 창시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이치의 본원을 느껴 알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동학의 이름으로써 천하의 끝없는 큰 도로 두었으리오? 신들이 어찌 감히 아첨하고 휘는 말로 임금께 거짓 아뢰어 위로는 속이는 죄를 짓고 아래로는 외설의 형벌을 재촉하리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는 이 기르는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시어 신들의 스승의 억울함을 빨리 풀어 주시고, 종전에 유배된 교의 무리들을 용서하여 덕음을 크게 내리시고 화기(和氣)를 맞으소서. 신들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소본을 받든지 3일에 사알(司謁)이 칙령을 받들어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각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그 생업을 편안히 하면 원하는 바에 따라 베풀리라” 하였다. 도유(道儒)가 이 명을 듣고 일제히 해산하니 이후로 도에 대한 침학이 더욱 심하여 지탱하기 어려웠다. 이때에 해월이 교인에게 글을 보내니 그 글에 말하기를,
“이번에 상소본을 받들어 궁궐에 호소한 것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뜻에서 나옴이라. 무릇 혈기가 있으면 그 누가 광명정대하지 아니하리오. 궐문에서 호소한 지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 직업에 편안히 하라는 주상 전하의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그 넉넉하고 두터우신 성은을 어찌 보답하지 못하리오. 밤중에 둘러싸인 벽에 더욱 더 절실하게 경계하여 삼가 조심할지라. 오직 바라건대 여러 분들은 더욱 죄가 없더라도 죄 지은 것처럼 하라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가슴에 품어 묵은 허물을 참회하고 선을 이루기를 노력하고 닦아 하늘의 명을 공경하고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면 같고 같은 배움의 맛은 생각마다 같아 바른 설명과 묘한 이치가 또한 그 안에 바깥을 하지 아니할지라. 대개 좋은 징조와 나쁜 징조는 마음의 바르고 그른 것에 오로지 달려있으니, 떼를 지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나의 간난 아기 같은 마음을 잃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자연스런 화기가 자연의 이치에 거의 그 요령을 얻을 것이 있으니 요상한 말에 속지 말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되돌아보아서 무궁한 진리에 들어가고 무극의 큰 운에 참여함이 옳도다.”
이때에 동학인에게 압박이 더욱 심하여 지탱할 수 없어 다시 보은 장내로 모두 모이게 되었다. 시형이 각지 도인에게 글을 보내니 그 대략에 말하기를,
“무릇 우리 도는 음양(陰陽)으로써 하늘을 몸으로 삼고 인의(仁義)로써 사람을 세워 하늘과 사람이 덕을 합쳐 무위화기(無爲化氣)한 것인 즉 사람의 자식이 된 즉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고 신하된 즉 목숨을 다해 임금을 섬기는 이것이 떳떳한 윤리의 큰 것이라. 우리 동방이 단군과 기자 이래로부터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더니 몰락한 시기에 이르러 안으로 내정을 닦고 외적을 막는 정치가 없고 밖으로 무력으로 공격하는 형세가 있어 관리는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을 싫어하지 않아 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 강호(强豪)는 거두고 막는 것을 힘으로서 하는 습성을 함부로 행하여 눈앞에 다가오는 재앙과 해자가 무너지는 재난이 아침저녁으로 급박하되 편안하게 움직이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뜻을 가진 자가 숨어서 걱정하고 길게 탄식할 바라. 우리들은 모두 사문(師門)의 재앙의 틈에 있는 남은 생명이요, 선조가 북돋아 기른 나머지 백성이라.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승의 억울함을 펼치지 못하였으되 조화가 장치 이를 시기를 다시 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더니 성상이 큰 은택을 특별히 내리셔서 하여금 그 생업을 각기 편안하게 하고 그 원하는 바를 베풀어 돕겠다고 하시거늘 어찌하여 사랑으로 다스려야 하는 관은 성상의 은덕을 잊어버리고 백방으로 침어함이 전날보다 넘쳐 자기를 처음으로 추천해 준 사람과 서로 같이 망하여 생명을 희생함에 이르게 하니 편안히 지내고, 편안히 생업을 하고, 즐겁게 생업을 하고자 하나 그것을 가히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을 얻지 못하여 장차 다시 크게 소리내어 꾸짖어 글로 설명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할 일로 이같이 널리 고하오니 각 포 교도는 기한이 이르면 일제히 모여 하나는 도를 지키고 스승을 우러르는 방법을 만들고 하나는 보국안민(輔國安民)하는 방책을 만들기를 이같이 간절히 크게 바람이라.”
다음날에 시형이 보은 장내에 도착하니 각 포 교도가 바람이 불듯 조수가 밀듯 모여드는 군중이 며칠이 못되어 수십만에 이른지라. 각기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을 삼고 자갈을 모아 성을 만들고 서로 공경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위엄과 격식 크게 있고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암송함에 서로 응하는 기운이 화기애애한지라. 시형이 각 포의 규모를 조직하니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는 손천민이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는 손병희요 충경대접주(忠慶大接主)는 임궁호(任弓鎬)요 문청대접주(文淸大接主)는 임정준(任貞準)이요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는 박석규(朴錫奎)요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는 이철우(李哲雨)요 호남대접주(湖南大接主)는 남계천(南啓天)이요 상공대접주(尙功大接主)는 이관영(李觀永)이러라. 각기 장내에 접소(接所)를 정하고 군중의 음식 차림과 기거를 일률로 하였다. 도접소(都接所)에서 장차 묘당(廟堂)에 건백(建白)하여 선사의 억울함 풀기를 기약하고자 하더니 청주병사(淸州兵使) 홍계훈(洪啓薰)이 병정 6백 명을 이끌고 보은군 읍내에 와서 진을 치고 선유사(宣諭使) 어윤중(魚允中)이 칙명(勅命)을 받들고 내려 와서 교도의 동정을 시찰하니 수만 교의 무리가 손에 한 마디의 쇠붙이도 없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예절이 있으며 단연코 한 가지 뜻이 스승을 위해 억울함을 펴고자 함이라. 어윤중이 곳 실제 일을 들어 임금에게 알리니 묘당에서 더불어 다시 어윤중으로써 선무사(宣撫使)에 임명하고 왕이 윤음을 내리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아! 너희 무리들은 나 한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들어라. 우리 열성조(列聖朝)는 훌륭한 분들이 대를 이어 나와 나라의 정사를 크게 빛내었으며 윤리를 밝혀서 기강을 세우고 바른 학문을 높여서 나라의 풍속을 우러러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각기 자기 직업에 편안하게 하여 온 지 지금까지 50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이 타락하고 풍속이 야박해져 쫓고 향하는 것이 각기 달라서 허망한 무리들이 저주를 비는 술책으로 우리의 온 세상을 속이고 현혹시키며 우리의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뜨려 마치 술에 만취한 사람이 땅에 쓰러진 것처럼 깨우칠 수 없듯이 만들었다. 하물며 또 너희들이 이르는바 학(學)이라는 것은 스스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의 이른바 공경한다거나 다만 존중한다는 것은 오만하고 속이는 것이 없지 아니한지라. 무리를 끌어들이고 불러 모으는 그 의도는 어디에 있으며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깃발을 세우고 서로 호응하면서 이에 감히 글로 하여 가로되 의리를 제창한다 하여 혹 통문(通文)을 내기도 하고 혹은 방(榜)을 붙여 인심을 선동하니 이것은 의리를 제창하는 것이 아니라 곳 난리를 제창하는 것이라. 너희들이 무리를 모아 차지하고 있으면서 무리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국가의 정사도 미치지 못하게 하고 명령도 시행할 수 없게 하는 데에 이르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리오? 이것은 다 나 한 사람이 능히 인도하고 편안하게 하지 못함에 있고 또 오직 각 고을의 원들이 피땀을 긁어내어 매우 괴롭게 함이라. 탐오한 아전들과 고집스러운 수령은 장차 징벌을 행하리라. 오직 나는 백성의 부모가 된 지라. 그 어린아이가 스스로 옳지 못한 길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며 가슴 아파하면서 어둠을 열고 밝은 데로 향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아니 하리오? 이에 호군(護軍) 어윤중(魚允中)으로 하여금 선무사(宣撫使)로 삼아 나를 대신하여 달려가게 하여 이에 깨우침을 선포하노니, 이것은 또한 먼저 가르치고 뒤에 형벌(刑罰)하는 뜻이라. 너희들은 반드시 해산하되 위협을 받고 따르는 무리들은 다 이 선량한 백성이라. 만일 혹 괴수를 사로잡아 바치거나 혹 그 비밀리에 고하는 자는 따라서 후한 상을 줄 것이요 만약 한결같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큰 처분이 있으리니, 너희들은 즉시 허물을 고치고 나라의 법이 스스로 나오게 함에 이르지 말지어다.”
4월 2일에 어윤중이 윤음을 받들고 모임 안에 들어와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으로 하여금 윤음을 낭독케 하니 교의 무리가 다시 어윤중에게 진정서를 드리니 윤중이 가로대 “각 군에 글을 보내어 침어의 사단이 없게 하고 장차 묘당에 아뢰어 그 선생의 억울함 씻어 펴게 하리니 곳 해산하라” 권고하니 교도들이 허락하고 3일 후에 차례로 해산하였다. 그 후에 각 군 관리와 교예의 침학이 전날보다 더욱 심하여 급함이 사나운 불과 같은 중에도 동학은 점점 전하여 펴지게 되었다.
이듬 해 갑오(甲午) 정월에 동학교도가 각처에 각 포소(包所)를 설치하니 보은 장내에 임국호(任局鎬)요 청주 송산에 손천민이요 충주 황산에 손병희요 옥주(沃州)에 박석규(朴錫奎)요 예산에 박희인(朴熙寅)이요 홍성에 박인호(朴寅浩)요 문의에 임정준(任貞準)이요 청산에 박원칠(朴元七)이요 부안에 김낙철(金洛喆)이요 청풍에 성두환(成斗煥)이요 홍천에 차기석(車基錫)이요 인제에 김치운(金致雲)이요 상주 공성(功城)에 이관영(李觀永)이요 무장에 손화중(孫華仲)이요 남원에 김개남(金開南)이요. 그 밖에 곳곳에 각 해당 포소가 설립되어 교무를 집행하며 동학을 선전하니 바람을 따라 날로 도를 전하게 되었다. 장소가 좁아서 집 밖에 차일(遮日)을 치고 삼십 명 씩 입도(入道)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남녀노소, 귀천을 논하지 않고 입참하며 향촌의 반족(班族)이 도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억지로 들어오게 시켰다.
이때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권을 잃고 민왕후(閔王后)가 정권을 잡고 민씨 일파를 끌어 정권을 오로지 행하니 내정이 날로 글러가며 참혹한 정부 아래에 지방 관리의 횡포함에 백성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다. 전라도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탐학하고 잔폭하여 백성의 재물을 여지없이 빼앗으니 본군 이속(吏屬) 전봉준(全琫準)의 아버지가 민중을 일으켜 군수를 쫓아내려 하다가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관군에게 체포되어 참혹한 형장(刑杖) 아래에서 죽었다. 이 비참한 광경을 본 봉준은 그 분개함이 극도에 사무쳐서 의분(義憤)의 피가 끓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원수도 갚으려니와 당시의 부패한 정부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에 봉준이 전국 도처에 치성하는 동학에 참여하고 자기의 주의를 선전하며 동학당을 선동할 새 무장접주 손화중과 남원접주 김개남 등 17인과 더불어 결의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평범한 여행객으로 서울로 몰래 들어가 당시 귀족계급의 대표적 인물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집에 머물며 귀족계급의 조직 내용을 빈틈없이 정탐하였다. 그리고 당시 세력을 잃고 불평하는 대원군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려 하여 경성에 오래 머물면서 적정(敵情)의 정탐과 내응자[대원군]가 완전히 정해짐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혁명란(革命亂)을 일으킬 준비를 팔방으로 힘을 다할 새, 동학당을 선동하여 시기가 좋음을 설명하며 격문(檄文)을 포고하니 아래와 같다.
“오호라. 나라가 나라 됨은 진실로 백성으로 말미암음이라.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옛날의 성제명왕(聖帝明王)이 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다스림에 먼저 백성을 가르치고 백성을 보호함으로 정치를 하여 예의(禮義)가 위에서 행해지고 인애(仁愛)가 아래에 널리 퍼져 이에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어찌 바르지 아니 하리오? 우리나라가 시작된 지 오백년에 성신(聖神)이 서로 이으셔서 다스리는 것과 가르침이 밝게 빛나시니 조정에는 밝고 어진 사람이 재상을 돕고 재야에는 백성(黎民)이 때를 기뻐하며 스스로 다스리고 고을에서 다스리니 아! 또한 왕성하도다.
오호라. 어찌하여 근래에 오면서 조정의 기강이 풀어지고 백성의 기율이 방자하여 하늘의 재앙과 때의 변화가 나오지 않는 해가 없고 아전의 폐해와 백성의 질고가 날마다 함께 깊어 위태로움이 장차 조석으로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니 이는 어찌하여 그런 것인고? 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노안비슬(奴顔婢膝)의 무리가 사랑방과 집을 차지하고 이리의 마음과 개의 행동을 하는 무리가 주(州)와 군(郡)에 널리 깔려 성총(聖聰)을 속이고 지나치게 탐하는 것을 일삼으며 왕정(王政)을 가볍게 여겨 쓸모없는 것으로 되돌리고 권세가 있는 중요한 자리를 확실히 알고 오히려 혹시나 잃을까 두려워하여 원망을 뒤로 돌리고 자기만을 살찌움에 빼앗고 빼앗음을 근본으로 하여 이러한 극함에 이르니 아아! 비통한지라. 진실로 그 죄를 궁구하면 만 번 죽음을 당해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로다. 만약 또한 그치지 않으면 불쌍한 우리 생령(生靈)의 형세가 장차 모두 죽게 될 따름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 하리오? 바야흐로 지금 열강이 틈을 엿보기를 호시탐탐(虎視耽耽)하고 이학(異學)이 온 나라에 들어와 기와 세를 빚어 이루니 이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시기라. 비록 그러나 조정의 위에는 닦고 기르는 계책이 없고 오직 직무를 게을리 함을 일삼으니 뒤 돌아보건대 이는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라. 무릇 우리 동포와 형제자매는 무엇을 믿고 이 세상에서 얻어 살 것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스스로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노라.
오호라. 우리 수운(水雲) 최선생(崔先生)이 천에 하나의 운을 받아 우리 동쪽에서 탄생하여 세상의 대세를 비추어 보시고 동양(東洋)의 쇠락한 판국을 살피심에 만약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이 늦으면 그 어찌 이 세상을 구제하리오 하여 소원을 발하여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 늘 여기에 있더니 이내 상제(上帝)의 밝은 명을 받아 무극대도(无極大道)를 처음 만드시니 즉 이른바 도는 하늘의 도요 학은 즉 동쪽일 따름이라. 무릇 동학이라 말하는 것은 가로되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배우는 것이라.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막아 못하게 할 수 없으니 선생이 이에 나라의 정신을 하나로 합쳐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고뇌를 주입하게 하시니 그 배움이 일상과 다른 별도의 물건이 아니라. 즉, 유불선(儒佛仙) 세 가지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니, 유교의 이륜(彝倫)과 불교의 자비(慈悲)와 선문의 청정(淸淨)을 모두 취해서 수련한다면 하늘이 백성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을 내린 이유에 대해 하나의 흠결이 없이 완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몸은 만 가지 형상을 포괄함에 갖추지 않은 물질이 없고 그 쓰임은 천하에 덕을 펴서 광제창생(廣濟蒼生)함이 이것이라. 도의 뜻을 한번 펼침에 붉고 푸른 기운이 함께 깨우치니 지금 우리 무리가 이처럼 번창하여 천하에 가득차서 덮어도 백만을 넘지 않게 헤아리리라.
오호라. 지금 우리 민생이 이와 같은 생존경쟁의 시기를 만나 결코 포악한 정치 아래 몸을 담기 어려운 즉 우리들이 예와 의로 방패삼고 충과 신으로 갑옷과 투구를 삼아 의로운 깃발을 인도하여 들어 탐관오리를 쫓아내어 우선 민생을 엎어지고 매달리는 급함에서 풀고 빨리 서울로 나아가 임금 주위의 악을 완전히 뽑아버려 조정을 깨끗하게 하고 오직 현명하고 오직 재주있는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해서 우리 성상을 보필하여 내치와 외교에 함께 그 마땅함을 얻어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어 스스로 강해짐을 힘써 도모하면 간교와 교활함이 자취를 감추고 열강이 두려워 그만두리니 그런 즉 나라의 운이 크고 창성하여 가히 우리 도와 더불어 오만년 다함이 없으리라.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봉준이 까마득히 적고 재주없이 민족(民族)의 하나로 늘어서서 우러러 받드는 나라의 가장자리에서 움직임에 차마 보지 못할 뿐이 아니라. 또한 몸이 다하도록 하늘을 궁구히 하는 기구한 억울함을 품은 즉 의로움에 조용히 있을 수 없음이요 또 사문(師門)의 가르침을 받은 즉 또한 감히 사양하고 피할 수 없음이라. 이에 감히 동지 수만 인을 불러 이끌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먼저 고부군으로 향하고 이에 글을 써서 널리 고하노니 우리 일반 교우는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말고 기약에 따라 올 것이려니와 그 외의 무릇 혈기 있는 무리들도 또한 모름지기 큰 뜻으로 분발하여 아버지는 그 아들을 부르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손을 끌고 같이 와서 함께 큰일을 도모할지어다. 나라 안의 여러 군자는 꼼꼼히 생각하여 이때가 어느 때이며 이 움직임이 어떤 움직임인가 국가의 위태로움이 다시 평안해지는 것이 진실로 이 날에 있음이요 인민이 죽어서 다시 태어남이 진실로 이 움직임에 있으니 어찌 뜻이 있는 선비가 가히 온 얼굴이 피눈물을 뒤집어쓰지 않을 것이고 온 힘을 다해 공을 세울 때가 아닌가? 오직 바라건대 나라 안의 여러 군자는 각자 떨쳐 일어나 한 마음과 한 힘으로 같이 왕실을 돕고 같이 백성(蒼生)을 구제함을 절실하게 바라는 일이라.”
당시의 관리와 반족에게 압박을 혹독하게 당하는 동학당이 봉준에게 수없이 붙여 합하게 된다. 봉준의 당파가 점점 확대하여 혁명의 대업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때에 정부에서 권세를 잃은 대원군은 자기의 심복인 박완남(朴完男)이란 책사(策士)를 은밀하게 봉준에게 보내어 내응(內應)이 되게 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년) 갑오(甲午) 정월에 봉준이 동학당을 고부군에 모이게 할 새 무장접주 손화중과 남원접주 김개남과 교도 김기범(金箕範), 최영선(崔榮善), 정일서(鄭一瑞), 김도삼(金道三) 등으로 본군 마항시(馬項市)에서 모인 군중이 약 5천여 인이었다. 16일에 봉준이 교도의 무리를 지휘하여 고부군을 돌격하고 다음 날에 백산(白山)에 옮겨 진을 치고 손화중으로 하여금 그 교도 무리 수천을 이끌고 태인(泰仁), 부안(扶安), 정읍(井邑) 등지를 순회함에 고질적으로 쌓인 군의 폐막을 과감하게 개혁하고 빼앗은 백성의 재물을 찾아 돌려주니 이르는 곳마다 민중이 환영하지 않는 이 없었다. 봉준이 용감한 군을 이끌고 고부군 내로 곧바로 들어가 관리를 쫓아내고 군아(郡衙)를 점령하며 군기(軍器)를 탈취하며 창곡(倉穀)을 점령하며 양반을 쳐서 징계하고 군정(軍政)을 실행하니 고부인민의 환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도처에 횡행하여 조금도 거침이 없이 진행하였다. 이때에 전라도 각 군 각 처에 봉준을 붙어 따르는 동학당이 바람을 따라 벌떼같이 일어나니 혹 수천 혹 수백명 씩 일어나니 몇 달이 되지 못하여 호남 일대는 수라장으로 되어 떠들썩하였다. 봉준이 수만의 동학군을 지휘하여 매우 빨리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처럼 하여 각처에 벌떼같이 일어남에 지방 관리와 중앙정부의 대관들은 크게 우려하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의논을 거듭하고 전 고부군수 조병갑 대신 박원명(朴源明)으로 고부군수를 하게하고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로 안핵사(按覈使)를 하게하니 원명이 내려가 난민에게 잔치를 베풀고 조정의 덕의(德意)로써 타일러 알리니 난민이 다 흩어져 돌아갔더라.
4월 7일에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난후통장(攔後統將) 이재한(李在漢)과 전 사천군수(泗川郡守) 송봉호(宋鳳浩) 등과 더불어 포군(砲軍) 수천과 부상배(負商輩) 천여 명을 이끌고 고부군 우덕면(優德面) 황토현(黃土峴)에서 동학군과 충돌하여 관군이 크게 패하여 죽거나 다친 자가 매우 많았다. 10일에 봉준이 도의 무리를 이끌고 정읍, 함평(咸平) 등지를 순행하여 장성(長城)에 이르니 되돌아와 따르는 자가 날로 더하여 무리가 십만에 달하였다. 군오(軍伍)를 편성하여 장성 백양산(白羊山)에 진을 치니 그 진법(陣法)은 삼삼오오로 하늘에 가득 찬 별의 형상을 만들고 깃발의 표지는 청홍흑백황(靑紅黑白黃) 다섯 가지 색을 써서 깃발의 표면에 오만년대의(五萬年大義)라 특별히 글을 써서 앞에 세우고 이르는 곳에서 포(砲)와 말을 거두어 모으고 대나무를 깎아 창(鎗)을 하고 봉준은 흰 갓을 쓰고 흰 옷을 입고(아버지의 상[喪]을 나타냄) 신장이 7자[尺]에 미치지 못하고 손에 105개의 염주(念珠)를 가지고 입으로 삼칠 주문(呪文)을 외우고 각 포사(砲士)는 바랑[鉢囊]을 지고 어깨에 궁을(弓乙) 두 자를 붙이고 등에 동심의맹(同心義盟) 네 자를 표시하였으니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기세이며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장졸(將卒)이더라. 여러 읍의 인심이 바람 따라 그림자가 붇는듯하여 한편으로 도를 익히며 한편으로 병을 훈련함에 그 세가 점점 확대되어 전국에 떠들썩함에 마침내 동양의 풍운을 야기하였다. 이때에 부사과(副司果) 이설(李偰)이 상소를 올려 가로대, “동학의 무리와 난민의 당이 사납게 날뜀이 방백수령(方伯守令)의 백성을 학대하고 자기를 살찌움에 연유함이니 조필영(趙弼永), 김창석(金昌錫), 조병갑, 이용태, 김문현, 민영수(閔永壽) 등의 죄를 다스려 백성을 애휼하는 정치를 베풀고 애통의 조서를 내려 여러 방책을 거두고 원병(援兵)을 마소서” 하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여 따라서 전사(轉使) 조필영을 유배의 법을 시행하였다. 이때에 전라도 각 군의 동학군이 전봉준과 더불어 서로 합하여 전주로 중심지를 삼고 사방으로 종횡함에 수백년 압제정치 아래에 구속받던 민족(民族)이 하루아침에 자유를 절규하여 한 가지로 동학군이라 스스로 칭하고 무리를 이루고 당을 선동하여 관아를 습격하며 관리를 살륙하며 전일 토호가 백성의 산에 억지로 장사한 것을 곳 파서 옮기게 하며 돈과 재물을 억지로 빼앗은 것을 곳 되돌려 주게 하며 또 수재(守宰)가 부민(富民)을 매질하고 가둔 것을 곳 풀어주게 하고 반족에게 압제받는 노비를 곳 허속(許贖)하여 자유롭게 시집가고 장가들게 하고 평민을 조예(皁隷)로 하대하던 것을 곳 공평하게 대우하고 비밀리에 행하는 정사와 추한 습속을 일률적으로 개혁함에 인민이 송사(訟事)할 일이 있으면 관정(官庭)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동학당 모인 곳으로 와서 송사하니 민심이 물과 같이 흘러내려 방어할 수 없었다.
이때에 조정에서 동학당을 토벌하기로 결정이 될 새 홍계훈(洪啓薰)으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를 임명하여 관병 6백 여명을 거느리고 삼남으로 내려가니 왕이 하교하여 말하기를,
“근일 남녘에 먼저 고부에서 백성의 소요가 있으니 수재(守宰)의 탐학을 바야흐로 지금 자세히 조사할 것이고 이어 무장현에서 무리들을 불러 모아 병기를 가지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여러 읍을 함부로 다니며 혹은 수령과 아전을 침학하고 핍박하고 혹은 어리석은 백성을 살해하니 전해 들리는 말을 참고하고 그 정세와 형편을 궁구하건대 분명히 소민(小民)의 도리가 아니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너희는 남으로 치러 가는 날에 우선 병사를 어루만져 움직이지 말고 그 사정과 형편을 물어 그들이 만약 교화를 방해하여 끝내 침탈하고 모반하고 방해하거든 즉시 쳐서 없애고 그들이 만약 슬프게 호소하고 하소연을 고하거든 곧바로 편하게 마땅히 시행하여 조가(朝家)의 넓고 어진 뜻을 힘써 남겨라” 하시고 또 이에 앞서 되풀이 하여 타이르시니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포용해 주는 은덕은 비록 교활한 백성이나 어지러운 무리들이라도 또한 마땅히 창을 내던지고 돌아와 화할지니 너희들은 생각하라. 충역(忠逆)은 단지 한결같은 마음이 미약함과 관계하니 따르면 곳 충(忠)이 되고 막으면 곳 역(逆)이 되니 너희들은 생각하라. 너희들의 충을 하고 역을 하는 것과 죽고 사는 것이 즉 한결같은 마음이 만드는 것에 관계되니 한 마디로 말하니 너희들은 삼갈지어다. 분명히 생각건대 너희들은 또한 일의 형세를 조금 알아 자못 의리를 깨달은 것인데 내가 이 지경에 이르기부터 아직 한 사람을 보내 어루만지고 타이르지 않고 만약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토벌하면 즉 또한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과 같으니 끝내 마음에 근심이 남느니라. 고로 사람을 보내 거듭 타이르노니 너희들은 스스로 병력이 강하다고 말하지 말라.
본영(本營) 대장(隊長) 이승학(李學承)과 이두황(李斗璜)과 교장(敎長) 이문구(李文九)와 양성록(楊聖祿)과 최성정(崔聖禎) 등은 2소대의 병을 거느리고 대관(隊官) 오건영(吳建泳)과 오원영(吳元泳)과 원세록(元世祿)과 교장 윤희영(尹喜永)과 추광엽(秋光燁)과 김대유(金大有)와 한응연(韓應淵)과 김진풍(金振豊)과 홍명석(洪明錫) 등은 3소대 병을 거느리고 곳 인천항(仁川港)으로 나아가 원세록은 한 대의 병을 거느리고 창룡선(蒼龍船)을 타고 이두황은 한 대의 병을 거느리고 한양선(漢陽船)을 타고 홍계훈은 5소대 병을 거느리고 중국 평원군함(平遠軍艦)을 타고 군의 위세를 엄정히 하고 군산항(群山港)에서 하륙하여 전라남도로 향하였다. 홍계훈이 남하할 즈음에 통위사(統衛使) 민영준(閔泳駿)이 김시풍(金始豊)을 추천하여 군정(軍政)의 제반 일을 서로 논의하라 하여 계훈이 완영(完營)에 이르러 김시풍을 불렀더니 위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랫사람으로 굽히지 아니하고 또 동학당과 내응이 되었다는 비밀 통고가 있어 계훈이 시풍을 불러다가 묻고 따라서 장살(杖殺)하여 효시(梟示)하였더라. 민영준이 여러 번 김시풍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여 개인적으로 글을 계훈에게 보냈으나 듣지 않음으로 영준이 이러한 언짢은 뜻으로써 왕께 알려 고하여 강진(康津), 해남(海南)으로 내러가라는 조칙의 명령이 내리니 계훈이 어쩔 수 없이 전라남도로 내려가니 이때에 또 내전(內電)으로 윤음(綸音)이 있었으니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적에는 그들이 살기를 바란 것이니, 비와 이슬, 서리와 눈이 모두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 왕정에는 죄에 따라 죽이는 형벌이 있고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니 흉악한 해악을 없애야만 일반 백성이 곳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음이라. 설사 한 사내가 거칠고 어긋나서 한 마을이 근심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가히 징계하여 그치게 할 것이요 만약 혹여 그 하나를 참아내지 못하면 또한 장차 십과 백에 미칠 것이라. 그리하여 금번 초토사(招討使)를 임명하여 보낸 것이 참으로 까닭이 있음이라. 요사이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소리를 내고 편안히 지낼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백성과 가까운 아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이는 상처입은 사람 돌보듯이 하고 갓난아이 보호하듯이 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잔인하고 포학한 정치를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백성으로 하여금 힘입어 살 수 없게 하니 이로서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이 있고 분수를 넘고 기강을 범하는 자가 종종 있으니 그 습속에 가히 놀라노라. 그 성정은 또한 가히 마땅히 생각할 바니 법의 기강을 보여 그 고질적인 폐단을 바로잡고 탐오(貪汚)를 물리쳐서 감독에 힘쓰면 조정으로부터의 처분이 있을 것이다. 오직 저 반란의 무리 가운데에 곳 거짓으로 속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어리석고 알지 못하는 사람을 꼬드겨 기만하여 무리를 불러 모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사납게 날뛰어 부르짖고 호소함을 핑계하나 실상은 배반함과 관계된 것이요. 무리의 많음을 기대어 믿고 오로지 물리치고 빼앗음을 일삼고 관장(官長)을 억지로 겁박하기에 이르렀고 향리에서 잔인하고 포학하여 형상과 자취의 포악하고 오만함을 가히 멈출 수 없어서 소란을 일으키는 백성(鬧民)으로 논할 지로다. 무릇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라. 그 누가 그 편안하고 즐거운 업을 버리고 죽고 망하는 곳에 가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달게 받으리오? 그 강제로 빼앗음에 괴로워하여 편안하게 있을 수 없고 꼬임과 협박에 닥쳐 따라서 함께 움직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리오. 참으로 내가 간이 작아지고 매우 근심하여 한가한 날이 없고 다만 백성을 위하는 한 가지 일만을 담당하였지만, 아름다운 법도는 위에서 행해지지 않고 은택은 아래까지 미치지를 않아 설날이 되었어도 뿔뿔이 흩어지는 것처럼 허둥대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내가 실로 탄식하는 이유인 것이다. 백성이 터무니없는 말에 어지러이 홀려 스스로 교화의 바깥에 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이 또한 어찌 그것이 일상의 성정이란 말이냐? 요는 어리석고 깨닫지 못해서 나온 것이 아니면서 그런 것이라.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차마 보면서도 물을 푸지 않고 도와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관찰사와 수령에게 명을 하여 은혜와 위엄이 어느 한 쪽을 버릴 수 없음을 소상하게 깨우쳐 타이름을 밝혀서 각기 뉘우치고 깨닫게 하여 빨리 돌아가 땅에 안착하여 다시 그 생업을 편안하게 하면 옳고 그름을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가엽게 여겨 슬퍼하고 어진 것 쌓는 바로서 먼저 가르칠 것이니라. 혹 가산이 다 없어지고 의지할 수 없는 자는 어루만져 편안케 하고 위로 구휼하여 정착하여 살 수 있게 하고 다시는 이미 고친 행적을 들어 논하지 말고 편안히 정돈하는데 노력하여 다 함께 새롭게 고침에 같이하라. 이 같은 고시를 반포한 이후에 바로 해산하는 것은 그 예전의 물들음에서 벗어나 다시 그 마음을 되돌린 것이요 좀이 되고 해가 되어 도리어 백성의 이익을 해하는 자는 백성의 논의를 듣고 군(郡)의 소식을 참작하여 좇아 확실히 정해서 모두 편리하게 바로잡고 고친 후에 사실을 들어 임금에게 알리게 하고 만약 그럼에도 다시 저항하고 물러나지 않는 자는 이 어찌 가히 구휼하는 백성으로 그를 상대하리요. 또한 일상의 법이 있어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느니라. 초토사(招討使)에 맡겨 법으로 일을 따를 것이라. 무릇 백성의 편안함과 근심이 백성을 다스리는 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능히 진심으로 직무를 다하여 백성을 근심없게 하며 먹는 것을 달게 하고 그 땅에서 즐겁게 만든다면 곳 마땅히 집집마다 깨우쳐 알아듣게 말하고 권하는
전라감사 김문현은 우선 간삭지전(刊削之典)으로 시행하고 남쪽 백성의 기뇨(起鬧)가 고부에서 시작함으로 연유하여 이곳으로 옮겨지니 어찌 몹시 탄식하지 않으리오. 마땅히 한 번 깊이 살펴 밝힐 것이니라. 전 군수 조병갑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부사(府事)와 도사(都事)를 보내어 격식을 갖추어 잡아들여 법의 뜻을 자세히 조사하여 살피는 것이 또 어떤 긴요하고 급함이 있건대 끝내 조사하여 아뢰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 소요를 초래하니 일의 체면이 풀어지고 개을러짐에 잘못하고 그릇됨이 또한 많으니라. 고부안핵사 이용태는 찬배지전(竄配之典)으로 시행하고 인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난이 일어난 읍의 수령을 낱낱이 조사하여 살펴 논하여 아뢰면 조정이 또한 마땅히 그 가볍고 무거움을 따져서 빨리 해당하는 율문을 시행하여 백성의 마음을 들어주며 위로하고 또한 마땅히 백성들에게 보이게 하는 일들을 묘당으로 하여금 글을 만들어 공문으로 내릴 것이다.”
홍계훈이 대관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 오원영 등과 더불어 관군을 거느리고 장성으로 내려가서 월평(月坪) 황룡촌(黃龍市)에서 동학군과 교전하다가 관군이 크게 패하여 이학승과 윤음선유종사관(綸音宣諭從事官) 이교응(李敎應), 배은환(裵垠煥) 등이 다 해를 입으니 계훈이 적을 막지 못할 줄 알고 삼십 리를 물러가서 대포(大砲) 3문을 동학군에게 빼앗기고 영광군(靈光郡)으로 진을 물려 성을 굳게 지키고 응전치 아니하였다.
이달 28일에 봉준이 도의 무리를 이끌고 전주부에 돌입하니 부사가 성문을 굳게 닫고 막으니 봉준이 민중의 가산집물을 성 아래에 쌓아 두고 성을 넘어 들어가니 감사 김문현과 통판(通判) 민영직(閔泳稷)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니 봉준이 급히 들어가 네 문을 굳게 지키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며 군정(軍政)을 시행하여 안도함을 타일러 깨우치니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계훈이 영광군에 있다가 봉준이 전주부를 점령하였다 함을 듣고 곳 관군을 이끌고 밤새도록 말을 달려 전주로 향할 새 장위영병(壯衛營兵) 3백명은 칠봉산(七峯山)에 진을 치고 청주 진위영병(鎭衛營兵) 2백명은 용두치(龍頭峙) 동쪽에 진을 치고 심영병(泌營兵) 5백명은 남고산성(南古山城)에 주둔하고 부내 동학군을 접근하여 나아가 공격하니 이때에 연일 큰 비에 7일을 교전하다가 계훈이 승리하지 못할 줄 알고 밀사(密使)들 보내어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봉준이 백성의 폐막을 바로잡을 수 십 조항을 들어 계훈에게 보내니 계훈이 회답하되 마땅히 주(奏)를 올려 실시한다고 서약하고 진을 물리니 봉준이 또한 군중을 이끌고 북문으로 나와 삼례역(三禮驛)으로 진을 물리니 이는 곳 봉준이 계훈의 청구에 의하여 정부의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하고 일시 휴전함이었다. 이때에 경기 죽산부사(竹山府使)와 충청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泳)을 보내어 경병(京兵) 천여 명을 이끌고 삼남대토벌(三南大討伐)를 시작할 새 왕이 교를 내려 가라사대,
“백성의 소요가 일어난 것이 애당초 탐학의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것에 연유하니 그 정서가 가히 슬프다. 따라서 나라가 참을 수 없어 토벌을 가하고 오로지 어루만지고자 일삼았더니 지금 듣기에 이 무리가 난리를 부르짖는 바가 있어 괴상한 소리로 무리를 현혹하고 군기(軍器)를 몰래 훔쳐 성을 공격하고 백성을 약탈하여 항상 돌아보고 꺼리지 않아 패악과 거스름이 날로 심하니 이는 선량한 백성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 지금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보내니 만약 해당 비도가 군사를 버리고 귀화하여 각자 다시 그 생업으로 돌아가는 자는 마땅히 죽음을 면하게 하고 만약 오히려 무리를 믿고 복종하지 않고 왕명에 감히 거부하거든 모두 죽여 용서하지 말라.”
또 교를 내려 말하기를, “요사이 비도가 더욱 소요하여 군주의 명에 항거하고 의병(義兵)이라 칭하니 이를 참을 수 있겠는가 누가 참을 수 없으리요? 지금 인심이 정해지지 않은 때를 당하여 또 어떤 그른 짓으로 남을 속이고 간사하고 도량이 적은 무리가 있어 문적(文籍)을 거짓으로 만들어 비도 무리와 서로 통하는 것이 종종 들려오니 매우 마음 아픈지라. 이다음에 만약 이런 일상을 흩트리는 무리가 있어 혹은 밀지(密旨)라 말하고 혹은 분부(分付)라 칭하여 백성들 사이에서 부추겨 일으키고 장관(長官)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자는 나타나는 데로 잡아들여 먼저 목을 밴 뒤 죄를 묻도록
동학군이 홍천(洪川), 지평(砥平) 등지에 모여 진을 치니 전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가 토병(土兵) 8백여 명을 모집하여 보(堡)를 쌓고 병을 훈련하며 본군 교도를 참혹하게 살해함이 수가 없는 고로 부근 동학당이 편히 보존하기 어려워 충주(忠州) 황산(黃山) 동학도소(東學都所)로 돌아와 의지하고, 진천(鎭川) 용수동(龍水洞) 허문허(許文許)와 조백희(趙百熙) 등이 또한 토병 5백여 명을 모집하여 동학당을 모조리 없애버린다 소리 높여 말하고 원근 각처에 격문을 보내어 경기, 충청, 강원 3도의 동학당을 침학하고 처참하게 살해함이 여지가 없는 고로 동학당으로 이름을 하는 사람은 거의 도주하여 황산도소(黃山都所)로 돌아가니 기약 없이 모인 자가 수십만에 달하였다. 이때에 조정이 충주 등지에 동학군이 모여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정경원(鄭敬源)으로 호서선유사(湖西宣諭使)를 임명하니 경원이 포군 5백여 명을 이끌고 충주 사창리(社倉里)에 주둔하니 동학두령 이종훈(李鍾勳), 이용구(李容九) 등이 경원에게 글을 보내어 만나 담판하되 하나같이 신민(臣民)으로 이 나랏일이 매우 험한 때를 당하여 서로 살해함이 도저히 타당치 아니한 뜻으로 통쾌하게 설명하니 경원이 그 말뜻에 감동하여 즉시 십리 허성산(許星山)으로 진을 물렸다. 지방 관리와 반신(班紳) 토호(土豪)가 무고한 평민을 압박함에 동학당을 더욱 탐학함으로 한 사람도 집에 있어 편히 보존하기 어려워서 곳곳에 모여 진을 치게 되니 정부에서 군사를 내어 토벌하기 시작하고 충청, 경상, 강원 3도의 전일에 평민을 압박하고 돈과 재물을 강제로 빼앗던 자들이 또한 곳곳에서 토병을 모집하여 동학당을 공격하니 자연히 한데로 모이게 되었다.
동학당이 아직까지 호남의 전봉준의 선동에 따라 일부분만 일어났더니 이제는 전국 동학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종훈(李鍾勳), 이용구(李容九)는 각처의 두령을 연락하여 일어나니 홍병기(洪秉箕), 신수집(辛壽集), 임학선(林學善)은 여주에서 홍재길(洪在吉), 신재연(辛載淵)은 충주에서 임명준(任命準), 정경수(鄭璟洙)는 안성에서 고재당(高在堂)은 양지에서 이근풍(李根豊), 전규석(全奎錫), 전일진(全日鎭)은 이천에서 신재연(辛載淵)은 양근에서 김태열(金泰悅), 이재연(李在淵)은 지평에서 염세환(廉世煥)은 광주(廣州)에서 이화경(李和卿), 임순호(林淳灝)는 원주에서 윤면호(尹冕鎬)는 횡성에서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은 홍천에서 일어나서 모두 충주 황산으로 모여드니 합친 무리가 수십 만인에 달하고 손천민은 각처 두령을 지휘하여 서오순(徐虞淳), 김상일(金相一), 한창덕(韓昌德), 장승환(張承煥), 강주영(姜周永), 모재곤(牟在坤)은 청주군 쌍교시(雙橋市)에서 일어나니 무리가 만여 인에 달하였고 박석규(朴錫奎)는 옥천에서 강건회(姜健會)는 태전(太田)에서 김경삼(金敬三), 곽완(郭玩)은 신창에서 김명배(金蓂培), 이종고(李鍾臯)는 서산에서 김병두(金秉斗)는 태안에서 한응구(韓應九), 최준모(崔俊模)는 홍주에서 이창구(李昌九)는 면천에서 주병도(朱炳道)는 안민도(安民島)에서 추용성(秋鏞聲)은 남포에서 일어나서 해미에 모이니 무리가 수만 인에 달하고 권병덕(權秉悳)은 신필모(申泌模), 지찬규(池粲奎)를 지휘하여 각처에서 일어나니 정정갑(鄭貞甲)은 진천에서 전귀섭(全龜燮)은 목천에서 임정준(任貞準)은 문의에서 일어나서 청주 미원시(米院市)에서 모이니 무리가 수만에 달하고 박희인(朴熙寅)은 예산에서 박원칠(朴元七)은 청산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에서 김치운(金致雲)은 인제에서 성두환(成斗煥)은 청풍에서 일어나고 호남에도 전봉준에게 따르며 쫓지 아니한 동학당이 또한 일어나니 김낙철(金洛喆), 김낙봉(金洛鳳)은 부안에서 오경도(吳景道)는 익산에서 고덕삼(高德三)은 함열에서 유원술(劉源述)은 임피에서 김숙여(金淑汝)는 장수에서 조철태(趙徹泰)는 김제에서 송태섭(宋泰燮)은 금구에서 김공광(金公光)은 만경에서 최란선(崔鸞仙), 김갑동(金甲東)은 여산에서 박준관(朴準寬), 이근상(李根尙)은 고산에서 조재벽(趙在璧)은 진산에서 박능철(朴能哲)은 금산에서 서영도(徐永道), 박상순(朴相淳)은 전주에서 이병춘(李炳春)은 임실에서 이규순(李奎淳), 장남선(張南善)은 남원에서 강종실(姜宗實), 방진교(房鎭敎)는 순창에서 이인환(李仁煥)은 장흥에서 유형로(柳亨魯)는 창평에서 기우선(奇宇善), 박진동(朴振東)은 장성에서 문장렬(文章烈)은 능주에서 박성동(朴成東)은 광주에서 문장형(文章衡)은 보성에서 전유창(全有昌), 오중문(吳仲文)은 나주에서 양빈(梁彬), 신성(申檉)은 영광에서 임봉춘(林奉春)은 구례에서 김도일(金道一)은 해남에서 조석하(趙錫夏)는 곡성에서 오정운(吳正運)은 영광에서 송년섭(宋年燮)은 흥양에서 박낙양(朴洛陽)은 순천에서 일어나니 그 수를 계산하지 못하였다. 황해도 각처에서도 동학당이 일어나니 최유현(崔琉鉉), 오응선(吳膺善)은 해주에서 원용일(元容馹), 한화석(韓華錫)은 신천, 재령 등지에서 일어나서 해주 취야시(翠野市)에 모이니 무리가 만인에 달하고 임종현(林鍾賢)은 옹진, 강령, 문화 등지에서 일어나니 무리가 만여인에 달하였다.
조선팔도에 함경도 이외에 어느 곳 할 것 없이 동학의 세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방에 벌 떼 같이 일어나니 관리의 악정과 양반의 압박을 받던 평민들은 물론이요, 경향 간에 협잡배와 살인강도 놈까지 라도 동학에 투입하여 거침없이 세력을 불렸으니 그때 현상이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관리를 쳐서 징계하는 동시에 양반을 타도함에 그 양반을 타도하던 현상이야 참으로 기괴한 사건까지 있었다. 그것은 곳 동학당이 양반의 불알을 깠다는 이야기다. 물론 원래부터 양반의 무리가 너무 평민을 학대하여 평민의 인권을 박탈하고 평민의 생활을 침해하여 평민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였음으로 이때 동학당이 기회를 만나 평민의 분을 푸는 이때이라. 그는 평일에 그 양반의 횡포한 세력 아래에서 울던 민중의 무리가 양반의 종자를 없애기 위하여 양반의 불알을 깐 것이라. 그때의 민중이 양반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뼛속까지 사무쳤던 것은 이런 사실을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곳 충청남도 홍주군 갈산리(葛山里) 안동 김씨 사일(士一 : 가명)이 그 행랑 아래에 동학인 문천금(文千金), 이영범(李永範)이 사일을 큰 대추나무에 발가벗겨 달아매고 불알을 까려다가 까지는 아니하고 불알에 자물쇠(鐵鎖)를 채웠다 한다. 동학당이 이와 같이 세력을 함부로 행할 이때에 관리와 양반은 그 황패와 공포가 더할 수 없었다. 그네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금준미주(金樽美酒)와 청가묘무(淸歌妙舞)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다가 졸지에 청천벽력 같은 큰 변란을 만나 그 어수선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양은 참으로 가히 우스웠을 것이다.
각 도 각 군에 동학당이 보은 장내(帳內)로 기맥을 서로 통하니 그 기세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손에 조그만 쇠붙이도 없고 염주만 들고 일어나서 관군과 교전할 때는 관군의 양총탄환(洋銃彈丸)이 비와 같으나 수만 교도가 빠른 조수같이 진군하면 관군이 총과 창을 버리고 도주하고 각 군 관아를 점령하며 사람이 없는 지경과 같이 하고 또한 추측하지 못할 일은 칠팔 세 어린 아이를 그 부모가 동학진중에 보내고 싶어 하고 어린아이가 항상 진의 앞에 서니 관군은 이를 의심하고 무슨 조화가 있다 하여 감히 쏘지 못하고 또는 동학군과 관군과 교전하는 중에 관군의 총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하는 말이 전하는 말이 되어 관군은 그를 의심하고 동학당도 이것을 믿었다. 그 사실은 알 수 없으나 다만 순연한 선전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참으로 사실화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곳 동학군과 관군이 예산 신례원(新禮院)에서 교전할 때에 관군이 신례원에 포대(砲臺)들 묻고 동학군을 엄중히 방어할 새 교전 날에 총구멍 대포구멍에서 물이 나와서 총과 대포를 놓지 못하고 패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때에 관군과 일반인민은 과연 동학군은 바람을 부르고 비로 바꾸는 꾀가 있어 대포구멍에 물이 나오게 한다고 하여 관군은 총을 놓지 못하고 자꾸 달아났다. 그는 무슨 조화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때에 관군의 밥을 해 주던 노파가 동학군과 내응이 되어 관군이 피곤이 잠든 기회를 타서 포문(砲門)에 물을 길어 붓고 도망한 것이다. 관군은 그를 보고 그저 놀래서 동학군의 조화라고만 하고 도망한 것이다. 그런 일을 보면 그 때 일반민중이 얼마나 관군을 미워하였으며 이른바 관군이 얼마나 부패무능한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학군은 총을 놓아도 맞지 않는다 하여 동학군은 참으로 그런 조화가 있다 하였다. 그는 그럴듯한 사실이다. 동학군 수만 명이 진을 치고 모인 곳에 관군이 들어가서 보면 산과 들을 덮은 동학군이 군기(軍器)를 가지지 않고 다만 손에 염주만 들고 입으로 주문만 읽고 무궁불측한 조화가 있는 줄 알고 얼른 공격하지 못하는 동시에 동학군은 분개함이 극도에 달할 뿐 아니라 불평한 무리들로 나락에 빠져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의분만 가지고 일제히 소리를 치며 빠른 조수같이 쫓아 들어가면 관군은 겁만 내고 정신없이 달아나며 사방으로 총을 놓으니 맞을 리가 있으리오. 또한 진중에 붉은 옷을 입은 동자(童子)가 있는 것을 본 상대 밖의 사람은 소년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있어 만 사내가 당할 수 없는 용기가 있다고 서로 전하여 세상 사람의 이목을 착각하고 덮게 하여 동학군은 천신(天神)의 도움을 받아 바람을 부르고 비로 바꾸는 꾀가 있다 하여 세상 사람도 많이 동학군의 승리를 예측하였고 동학당 자체에서도 다소 그것을 믿고 관군과 교전할 때를 당하면 양총탄환(洋銃彈丸)이 빗발 같은 중에도 먼저 천사(天師)께 기도하고 전장의 급한 경우이면 관군의 총구멍에 물이 나오게 하고 관군의 마음을 감복시켜 총을 놓지 않게 하라고 기도하였다 한다. 이때에 경기, 충청, 경상, 강원 4도 각 군의 동학군이 소리와 기운을 서로 응해 혹 수천 혹 수만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서 보은 장내로 모이니 해월 선생이 각 포 두령을 불러 보고 위안하야 가로대 이것도 또한 하늘의 때라 하고 대통령(大統領) 기호(旗號)들 친히 써서 손병희를 주고 정경수 포로 하여금 선봉을 삼고 전규석(全奎錫) 포로 하여금 후군(後軍)을 삼고 이종훈(李鍾勳) 포로 하여금 좌익(左翼)을 삼고 이용구(李容九) 포로 하여금 우익(右翼)을 삼고 손병희가 중군(中軍)이 되어 각 포를 지휘하니 무리가 육십여 만인이었다.
손병희가 도의 무리를 통솔하고 척왜척양(斥倭斥洋) 창의 기를 앞세우고 보은 논돈리(論敦里)에 이르러 보은군 수비대병과 교전하여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그리고 동학군이 두 대(隊)로 나누어 한 대는 영동(永同), 옥천(沃川)으로부터 공주로 나아가 전봉준과 서로 합치게 하고 한 대는 회덕군(懷德郡) 지명장(芝明場)에 이르러 청주진위대 병과 교전하여 관군이 패하고 동학군이 논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치고 여러 곳의 동학군이 합하여 공주로 나아가니 감사 박제순(朴齊純)이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泳)과 안성(安城) 원님 홍운섭(洪運燮)과 경리영관(經理領官) 구상조(具相祖) 등을 불러 동학군을 막으니 참모장(參謀將) 구완희(具完喜)가 병사를 이끌고 먼저 기다렸다. 동학군이 빠른 조수같이 전진하여 이인역(利仁驛)에서 교전하여 관군이 패하고 효포(孝浦)에서 또 교전하여 육박혈전 십여 차례에 양군의 죽거나 상해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관군이 그 앞으로 진공하고 일본병이 뒤를 따라 나무처럼 둘러싸고 총을 쏘며 서로 화응하고 구완희가 연월촌(連月村)으로 들어가 삼면으로 공격하니 동학군이 화병산(華屛山)으로 물러나 진을 치고 관군이 이인에 들어가 주둔하니 새벽에 박제순이 홀연히 허황되게 전한 말을 듣고 퇴군코자 하거늘 일본 육군소위 스즈키 쇼우(鈴木彰)가 그 대열에 임하여 병사를 흩트림에 노하여 다음 날에 경성으로 돌아가니 동학군이 효포의 방비가 없음을 알고 사람이 없는 지경같이 들어가니 그 기세가 크게 떨쳐 산과 들을 덮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하영(成夏泳)이 대관 윤영성(尹泳成) 등과 더불어 효포 후령(後嶺)에 올라가 아래로 향하고 포를 쏘아 공격하니 동학군이 조금 약해졌다. 다음 날 이규태(李圭泰)가 앞길을 막고 공격하니 이때에 박제순이 봉대(烽臺) 아래에 있으면서 전투를 독려할 새 이날 밤에 동학군 사이의 횃불이 수십 리를 휘황찬란하게 빛나더라. 이에 홍운섭(洪運爕), 구완희 등을 나누어 보내 우금치(牛金峙)를 막아 지키니 아침이 밝을 무렵에 일본 육군대위 모리오(森尾)가 또한 병사를 이끌고 웅치(熊峙)에 와서 진을 쳤다.
이때에 호서의 손병희와 호남의 전봉준이 회합하여 군을 정돈하여 공주성을 함락코자 할 새 손병희는 옥녀봉(玉女峯)을 점령하고 공주성으로 들어가게 하고 전봉준은 봉황산(鳳凰山)을 점령하고 공주로 들어가기로 하여 만일 약조를 위반하면 군율(軍律)로 베풀기로 서약하였다. 손병희는 옥녀봉을 점령하고 전봉준은 봉황산을 점령하지 못함으로 공주성을 진격 함락하지 못하였다. 손병희가 군율을 베풀려 하니 봉준이 즉시 스스로 복종하였다. 병희가 가로대 스스로 복종하면 군율은 이미 실행한 것이라 하고 당(堂)에서 내려 봉준의 손을 끌고 자리에 들어 군사를 협의하였다. 봉준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도 동학의 본진인 손병희에게는 복종하였다. 이때에 면천군(沔川郡) 승전곡(勝戰谷)에 동학군이 진을 치고 모이니 관군이 나가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모두 죽고 덕산군(德山郡) 구마리(九馬里)에서 관군이 또 크게 패하고 홍주에서 또 접전하여 군관(軍官) 김병돈(金秉暾), 이창구(李昌九), 주홍섭(朱弘燮), 한기경(韓基慶) 등이 모두 해를 입었고 동학군은 한 사람도 상한 자가 없었고 예산군 신례원(新禮院)에서 관군이 패하였고 덕산(德山) 역촌(驛村)에 또 관군이 크게 패하여 다시는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태전(太田)에서는 강건회(姜建會) 진영과 청주진위대 병이 교전하여 초관(哨官) 염도희(廉道希) 이하 군사 칠십여 명이 몰사하고 겨우 다섯 명이 살아 돌아왔다. 처음에 손천민은 교도를 이끌고 청주로 들어갔다가 청주병사(淸州兵使) 이장회(李章會)가 막아 공격함으로 동학군이 패하여 죽고 상해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홍천(洪川)의 차기석(車基錫)이 동학군을 모았다가 전 감역(監役) 맹영재(孟英在)가 나아가 공격하여 동학군의 죽고 상해를 입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불을 지르고 갑작스럽게 격파함으로 홍천 서석(瑞石) 일대는 사람의 자취가 영원히 끊겼다. 진주(晉州)에서 손은석(孫殷錫)이 동학군을 모으니 영장 박희방(朴熙房)이 공격함으로 동학군이 패하고 하동군(河東郡)에서 김인배(金仁培)가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교전하여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황해도 신천(信川)의 원용일(元容馹)이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海州), 송화(松禾), 안악(安岳), 재령(載寧), 봉산군(鳳山郡)을 점령하고 장차 서흥(瑞興), 개성(開城)을 점령하고 경성으로 향하려 하다가 일본병이 기습 공격함으로 그만 패하였다. 옹진(甕津), 강령(康翎), 문화(文化) 등지에서 임종현(林鍾賢)이 기포(起包)하였다가 관군과 교전하여 동학군의 죽고 상해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고 평안도 용강군(龍崗郡) 등지에서 동학군과 관군의 충돌이 크게 일어났다. 동학군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각 도 각 군을 거침없이 점령하고 탐학한 정치를 하던 관찰사와 군수를 쫒아 내고 군정(軍政)을 시행하니 간 곳마다 민중의 환심을 얻어 그 형세가 크게 떨쳤다.
10월 25일에 손병희와 전봉준이 수십만 무리의 동학군을 이끌고 충청도 수부(首府)인 공주성을 점령하고 장차 경성으로 곧바로 올라가려 하여 공주성으로 들어가는 요새인 우금치, 견준봉, 주봉(周峯), 웅포(熊浦), 금진 등지에서 여섯 낮 밤을 계속 교전하여 양군(兩軍)의 죽거나 상해를 입은 자가 수만에 달하였다. 이때에 경리청(經理廳) 영관(領官) 이진호(李珍鎬)가 지도대장(指導隊長)이 되어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의 명령으로 출전하니 대관(隊官) 이민홍(李敏弘), 이승칠(李承七), 이겸제(李謙濟), 최승학(崔承學), 별군(別軍) 임형준(任炯準), 임병학(林炳學), 이건원(李建源), 지로관(指路官) 남만리(南萬里), 주사(主事) 강원로(姜元魯), 일본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少四郞), 중위 시라키(白木), 소위 미야모토(宮本), 접응관(接應官) 정난교(鄭蘭敎) 등과 더불어 남하하여 문의군(文義郡) 주원장(周院場)을 지나다가 동학군과 크게 싸워 동학군의 죽고 상해를 입은 자가 수천에 달하였다. 동학군이 할 수 없이 논산으로 진을 물려 각 두령이 전봉준과 더불어 적을 이길 방책을 협의하고 11월 3일에 전봉준이 군사를 정돈하여 다시 병을 움직여 이인역에서 성하영과 맨 몸으로 싸워 관군이 크게 패하고 봉준이 매우 빠르게 관군을 추격하여 계속 혈전 십여 합에 관군과 일본군이 맹렬히 추격함으로 봉준의 군이 크게 패하여 시체를 산처럼 쌓고 흐르는 피가 개울을 이루었다.
봉준이 즉시 논산으로 진을 물려 패하여 다친 남은 무리와 더불어 전주에 들어가 며칠을 머무니 관군과 일본병이 힘을 합쳐 진격함으로 전주성 아래에서 크게 충돌하여 동학군이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남은 무리는 금구군(金溝郡) 토성(土城)에 이주하니 관군과 일본병이 나아가 공격하여 또 대패하고 다음 날에 태인(泰仁), 정읍(井邑) 등지에 다시 모이니 관군이 급히 나아가 추격할 때 동학군이 장성군(長城郡) 북노령(北蘆嶺)으로 넘으니 관군이 사방으로 추격하여 동학군이 진퇴유곡이라. 순창(淳昌)으로 진을 돌려 임실(任實)에 가서 이르니 무리가 떠들썩하더라. 동학군이 연전연패하여 동학란이 평정됨에 충청, 전라, 경상, 강원 4도의 수재(守宰)가 다시 정권을 잡음에 양반의 토호(土豪)와 백성 중의 패악한 무리가 동학군의 처자식과 토지 가산과 돈과 재물, 가축을 모조리 빼앗아 가고 호서초토사(湖西招討使) 이승우(李勝宇)와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민종렬(閔種烈)과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가 삼남의 대토벌을 행하여 모조리 죽여 없애고도 남음이 없으니 그 참살(斬殺), 교살(絞殺), 매살(埋殺), 분살(焚殺), 포살(砲殺), 몰수살(投水殺)한 참혹한 현상과 그 부모처자 형제에 연결하여 죄를 논함이 만고에 없는 대학정이었다.
봉준은 순창(淳昌) 구로리(龜老里)에서 촌민에게 잡혀 나주에 갇혀 있다가 경성으로 압송되니 일본군이 공사관으로 대려다가 백방으로 꾀어 관직으로 말하니 봉준이 크게 꾸짖으며 가로대 “너희들은 나의 원수요, 나는 너희들의 원수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나를 죽일 뿐이라. 여러 말 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일본공사가 법부로 도로 보내니 고종 32년 ‘을미(乙未)’ 3월 13일에 교형(絞刑)을 받으니 이때 나이가 42세라. 봉준이 교수대[絞臺]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옥리에게 전하니 아래와 같다.
“기자(箕子)가 세운 예의의 나라 삼천리에
명나라의 풍속[明制衣冠]이 오백년을 이어왔건만
남방의 송을 망친 진회(秦檜)와 같은 사람이 있고
진병(秦兵)을 물리친 동해의 노중련(魯仲連)같은 선비가 없구나.“
충청, 전라, 경상, 강원 4도에 동학두목으로 이름을 한 자는 대부분 참혹하게 살해를 당하니 동학군의 죽고 상해를 입은 것이 십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동학의 선생 최제우가 동학을 만들어 밝히고 5년 만에 참형(斬刑)을 당하고 동학의 자취가 끊어지게 되었더니 그의 뛰어난 제자 해월 최시형이 다시 비밀 비밀히 동학의 선전에 마음을 쓰고 힘을 쓴 결과로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이 해월의 뛰어난 제자가 되어 30여 년에 동학이 확장되니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동학을 이용하여 그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씻어 버린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동학당을 일으켜 동양에 풍운을 크게 일으켰으니 그럼으로 동학당에는 전봉준을 알고 최해월을 알게 되고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 최해월은 송경인(宋敬仁)에게 잡혀 경성으로 압송하여 경성감옥 ‘종로(鍾路)’에서 교형(絞刑)을 받으니 고종 35년 ‘무술(戊戌)’ 6월 2일이다.
그 후 ‘신축(辛丑)’에 손천민은 청주에서 잡혀 경성으로 잡아 올려 교형(絞刑)에 처하였고 김연국은 인제에서 잡혀 경성으로 잡아 올려 종신역을 받고 5년 만에 석방되고 손병희는 청국으로 들어갔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오동학란과 전봉준에 대하여 동요(童謠)가 있으니 동학에 대한 동요는 이러하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이 동요는 동학란이 갑오년에 성공을 하여야지 만일 갑오년이 지내고 을미, 병신에 다다르면 동학은 실패된다는 말이다. 전봉준에 대한 동요는 이러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어이 나왔느냐
솔잎 대입 푸릇푸릇키로 봄철인가 나왔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린다 저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이였네.”
또 봉준에 대한 동요가 있으니 이러하다.
“아래녁 새야 웃녁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박아지 뚝딱위여.”
조선에 또 이러한 결구(訣句)가 있으니 아래와 같다.
“산작(山雀)이 모일조(謀一釣)하니 혈광(血光)이 염삼추(染三秋)라.”
산작은 최씨(崔氏)란 말이오, 혈광염삼추는 갑오년 일을 말한 것이니 최씨의 일조(一釣)는 곳 세상을 낚는다는 의미이니 세상을 낚기 위하여 많은 피로 물들인 다는 것이 아닌가?
또 이러한 결구가 있으니 아래와 같다.
‘갑오상설후(甲午霜雪後)에 만지창이자(滿地蒼耳子).’
창이자(蒼耳子)는 약의 이름이다. ‘독구마리씨’ 일명은 도인두(道人頭)라. 도인의 머리가 땅에 많이 떨어짐은 갑오동학란을 예언한 것이라. 창이자는 땅에 떨어져서 1년을 묵어야 종자에 싹이 나온다. 싹이 틀 적에 한 개 종자에서 여러 싹이 나온다. 동학군이 많이 죽은 후에 도인은 1년을 묵어서 다시 많이 나오리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