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해월신사(第二編 海月神師)
신사(神師)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시형(時亨)이요 첫 이름은 경상(慶翔)이요 자는 경오(敬悟)요 호(號)는 해월당(海月堂)이니 아버지의 이름은 종수(宗秀)요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포덕 33년 전(조선 개국 4160년) 정해(丁亥) 3월 21일에 경주 동촌(東村) 황오리(皇吾里)에서 태어나시다.
신사가 5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시고 12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시니 홀로 한 몸이 정령(丁零) 외롭고 괴로워 먹고살 방책이 없으실 때 동쪽에서는 시중들고 서쪽에서 담살이[東傔西雇] 하시며 아침에 절구질하고 저녁에 가축을 기르면서[朝舂暮牧] 몸에 누더기를 면하지 못하시고 입에 지게미와 쌀겨를 그만두지 못하시되 형상과 기운이 순수하고 아름다우시고 몸가짐의 머무름이 크게 특출 나심은 여러 사람의 귀와 눈을 이끌어 놀라게 하더라.
신사가 17세에 생활의 가난하고 구차함으로 인하사여 몸을 조지소(造紙所)에 들여 겨우 살아나갈 방도를 꾀하시더니 이웃에 오씨(吳氏) 여자가 일찍 홀로된 사람이 있어 가산이 자못 넉넉하더니 신사의 용모가 훌륭하고 큼을 보고 중매쟁이를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사가 말하기를 “사람에 의지하여, 갑자기 부자가 됨은 상서롭지 않은 조짐이라” 하시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시다.
신사가 19세에 부인을 손씨(孫氏)의 집안에서 맞이하시다.
포덕 6년 전 갑인(甲寅)에 신사가 흥해(興海)로부터 경주 검곡(劍谷)으로 옮겨 사시니 동네 사람이 신사의 공변되고 검소하며 위엄이 있으심을 보고 뭇 사람의 신망으로 특별히 추천하야 한 마을의 풍강(風綱)의 임무를 맡겼다. 신사가 재임 6년에 백성들의 억울함(民隱)을 깨끗하게 제거하시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기리고 칭찬하여 한 동네가 덕을 보니 동네 사람이 비(碑)를 세워 기념하더라.
포덕 2년 신유(辛酉) 6월에 신사가 도를 대신사에게 받으시니 그 나이가 35세이라. 신사가 도문(道門)에 들어가실 때에 흰 종이 세 묶음으로써 폐백(幣帛)을 바치시다.
신사가 도문에 들어가신 후에 대신사께 알현하시기를 매월 서너차 시라. 안으로 마음으로 전하는 비밀을 받으시며 밖으로 위엄과 몸가짐의 법을 얻으셔서 이같이 칠팔 개월에 이름에 마음으로 스스로 도리를 깨달아 곧바로 대종가의 맨 앞에 뛰어넘어 이르시다.
신사가 집안사람의 일을 하는 것에 전념하지 않으시며 세상 사람의 이익을 도모함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방문을 닫고 깊이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하고 자기를 이기는 공부로 밤을 새우고 잠을 자지 않으시고 주문을 외우시다.
신사가 일찍이 스스로 마음 속 말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공부에 부지런히 힘쓰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말씀을 듣는다 하니 나는 반드시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하시고 날마다 목욕재계 하실 때 이때가 바야흐로 몹시 추운 겨울이라. 얼음을 쪼게고 몸을 씻으시니 처음에는 매우 추워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이 있으시더니 이같이 2, 3개월에 이르러서는 점차 물 온도의 느낌이 있고 컴컴한 밤 또한 밝더라. 어떤 날 밤에 신사가 목욕하시는 연못 위에 계시더니 문득 창공으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따뜻한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은 찬 샘물에 급히 들어가 앉는 것이니라” 함을 들으시고 마음에 매우 두렵고 기이하여 마침내 얼음물 목욕을 그치시다.
포덕 3년 임술(壬戌) 2월에 신사가 밤새도록 공부를 계속하실 때 반 종지의 기름으로써 스물 하루 밤을 지내되 기름이 줄어들지 아니하더니 영덕(盈德) 사람 이경중(李敬仲)이 한 병의 기름을 가지고 와서 바치거늘 한 종지의 기름으로써 시험하시니 밤이 다하지 못하여 기름이 이미 마르더라.
3월에 대신사가 전라도 은적암으로부터 돌아오실 때 박대여 집에 조용히 거처하시더니 이 때 신사가 대신사의 객지 안부를 알지 못해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밤을 못 드시다가, 뜻밖에 갑자기 마음에 느낀바 있으셔서 묵묵히 생각을 모으시더니 대신사가 완연히 박대여의 집에 있으신지라. 마음이 의아하야 백대길(白大吉)과 더불어 그 집을 방문하시니 대신사가 아닌 게 아니라 여기에 계신지라. 마음이 놀라고 기뻐서 찾아뵈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공경하고 깨달음에 가까우니 가히 아름답도다.”
신사가 말하기를 “함연(函筵)으로 떨어져있음으로부터 과연 기이한 일을 보게 됨이 있으니 등불의 기름이 줄어들지 않고 공중에서 말씀이 있고 얼음 목욕이 차지 않더이다.” 대신사가 기쁘게 말하기를 “하늘 문이 같이 어울리는 것은 때가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으니 너는 이미 하늘의 이치와 스스로 그러함의 증험을 받았도다.” 인하여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주시며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점점 더욱 올 것이라” 하시다.
6월에 신사가 수덕문(修德文), 몽중가(夢中歌)를 대신사께 받으시다.
7월에 신사가 덕을 펼칠 뜻이 있으시되 그 밑천이 없음을 근심하시더니 친구 김이서(金伊瑞)가 150석(石) 증표[票紙]로서 기증하거늘 신사가 가져다 쓰시다.
이에 신사의 덕을 펼침이 매우 많았으니 신사의 심법(心法)을 받아 서로 따르며 친하게 사귀는 제자▣ 김이서, 영덕군(盈德郡)의 오명철(吳明哲), 유성운(柳聖運), 박춘서(朴春瑞)와 상주군(尙州郡)의 김문여(金文汝)와 흥해군(興海郡)의 박춘언(朴春彦)과 예천군(醴泉郡)의 황성백(黃聖伯)과 청도군(淸道郡)의 김경화(金敬和)와 울진군(蔚珍郡)의 김욱생(金旭生) 등이 날로 도를 강의하고 덕을 펼치는 일에 종사할 새 검악포덕(劍岳布德)의 이야기가 비로소 인구에 회자하더라.
10월 5일 밤에 신사가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묵묵히 생각하시더니 서로 거리가 25리 되는 조복동(鳥伏洞) 친구 이상권(李相眷) 집에 도둑이 있어 벽을 뚫는 지라. 신사가 마음에 기이하고 의심스러워 사람을 보내어 찾아 알아내시니 과연 효과가 있었더라.
26일에 신사가 흥해(興海)로부터 돌아오시다가 서촌(西村) 종숙(從叔) 집에 들르시니 그 종수(從嫂)가 위급한 병에 걸려 살고 죽음이 극히 짧은 시각에 있는지라. 집안사람이 신사에게 향하여 그 의술로 병을 고치기를 청하거늘 신사가 묵묵히 생각하고 손으로 병든 사람을 어루만진 지 오랜만에 병이 곧 나으니 집안사람이 그 신기한 술법을 물으니 신사가 말하기를 “나 또한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이는 하늘의 이치가 마땅히 그러한 것이라” 하시더라.
10월에 경주부 군사(卒) 30여 인이 검곡(劍谷)에 와서 신사를 체포하거늘 신사가 그 관의 신칙[官飭]이 없음을 아시고 생마(生麻) 한 묶음으로 그 무리를 결박하였다가 잘 깨우쳐 보내니라.
11월에 신사가 대신사를 따라 설법하시니 각지 도인이 날로 와서 도를 물으니 신사가 이에 대신사에게 여쭙고 각지 포덕접주(布德接主)를 정하시다.
포덕 4년 계해(癸亥) 1월에 신사가 대신사의 명을 받들어 사방 도인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시찰하시다.
이때에 신사의 숙부가 신사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주문을 외우나 강령(降靈)치 아니함은 무엇이뇨?” 신사가 말하기를 “비록 나무 배게라도 오히려 강령하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하시고 신사가 드디어 강령주문을 외우시니 숙부가 곧 강령되어 몸을 떨고 알지 못하더니 급히 신사를 부르며 말하기를 “내가 하늘의 신령의 지극한 기운을 알지 못하였더니 지금에 과연 증험을 보니 청컨대 그칠지어다.”
신사가 한울님에게 고하니 신들림이 곧 그치더라.
7월 23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명으로써 북접 대도주(大道主)가 되시다.
이때에 대신사가 좌우를 둘러보시며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각지 도인이 먼저 북접 대도주를 가서 본 연후에 나를 와서 봄이 가하다” 하시다.
때마침 영해 이진사(李進士)가 검곡에 와서 신사를 삼가 뵈니 신사가 말하기를 “내가 실로 덕이 없거늘 공이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예의가 지나침이 아니뇨?” 이진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요사이 용담에 갔더니 대신사가 검곡에 머무르지 않고 지나쳐 왔음을 꾸짖더이다.” 신사가 더욱 황송하고 감격스럽게 여기시더라.
8月 13일에 신사가 절구(絶句)를 대신사에게 받으시다.
신사가 대신사를 모시고 묵을 때 대신사가 손과 발의 굽혔다 폈다 함의 조화로써 보이심을 받으시다.
14일에 신사가 대신사에게 도의 계통을 넘겨받으시다.
신사가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자와 영부(靈符)와 ‘수명(受命)’ 두 자를 대신사에게 받으실 때 대신사가 신사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한 후 하늘에 알리시고 이별의 시를 받게 하시니 이는 전하여 주는 근본의 뜻(宗旨)을 명하심이니라.
15일에 신사가 우리 도는 유불선(儒佛仙)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는 이치를 대신사에게 물으시다.
11월 1일에 신사가 대신사를 찾아가 뵈었는데 대신사가 말하기를 “북방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으니 지금부터 북방에서 반드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오리라. 너는 마음에 새겨 두어라” 하시니 신사가 이로부터 북방의 덕을 펼침을 노력하여 힘쓰시니라.
12월 10일에 신사가 용담에 가시더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오늘 밤에 일이 있으니 너는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신사가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못 주저하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너는 빨리 돌아가서 신의 기략을 어기지 말라.” 신사가 마지못해 돌아갔더니 이날 밤에 대신사가 잡히시니라.
포덕 5년 갑자(甲子) 2월에 대신사가 잡히신 후 신사 또한 그 혐의로써 관헌의 수색이 심하여 영장(營將) 교졸(校卒) 50여 인이 뜻밖에 검곡에 들어와 신사를 엄히 수색하거늘 신사가 옷을 바르게 하고 단아하게 앉아 주문을 묵묵히 외시되 교졸이 신사를 보지 못하는지라. 신사가 천천히 걸음을 움직여 문에 나오시되 교졸이 또한 한 사람도 분별하는 자가 없더라.
3月 3일에 신사가 대구에 가서 옥리의 모양으로 꾸미시고 밥을 바치시고 옥에 들어가서 대신사께 아뢰었는데 대신사가 담뱃대 한 개를 주시거늘 신사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받아서 보시니 담뱃대 속에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의심할 틈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도다’ 라는 한 구절의 시와 ‘고비원주(高飛遠走 : 높이 날고 멀리 뛰어라)’ 네 자를 쓴 마음의 종이가 있는지라. 대신사가 큰 도의 장래를 말씀하시다가 마치면서 말하기를 “하늘의 운이 너에게 임하였나니. 너는 하늘이 준 직분을 위하여 재앙을 피하라” 하시거늘 신사가 명과 가르침에 의해 마침내 몸을 태백산 안에 숨어있으시다가 대신사 처형을 당한 후에 초상을 손수 거행하시다.
이때 신사가 이무중(李武仲) 집에 몸을 기탁하였더니 꿈에 대신사가 알리며 말하기를 “재앙의 징조가 장차 닥쳤으니 너는 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라.” 신사가 크게 이상하여 결국 몸을 일으켜 평해군(平海郡) 황주일(黃周一) 집에 이르러 황주일과 더불어 몸을 붙일 계획을 논의하시니 황주일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갖추고 마련하여 신사의 가족으로 하여금 와서 머물게 하는지라. 신사가 이곳에 있으면서 짚신을 만들면서 업으로 삼으시다.
안동(安東) 교졸(校卒)이 이무중 집에 이르러 신사를 찾으면서 말하기를 “최모가 지금 어디에 있느뇨?” 이무중이 마음속에 주인된 자가 체포됨을 면하지 못할 사실이라 스스로 알고 이에 그 밭과 땅을 팔아 많은 돈으로써 드리니라.
포덕 6년 을축(乙丑) 정월에 신사가 부인과 아들을 거느리시고 평해로부터 울진군 죽병리(竹屛里)에 옮겨 사실 때 대신사 부인 박씨를 모셔 가서 함께 사시시더니 이때에 도인으로 서로 돕는 자가 없으며 혹 서로 만나는 사람이라도 길 위의 사람과 같되 오직 상주(尙州) 도인 아무개(그 성과 이름은 잃어버림)가 힘을 써서 도와주어 그 은근함을 정성스레 하더라.
신사가 각지 도인에게 하루 네 때에 네 차례(四時四度) 기도식을 행하게 하되 49일로 한 회를 정하시다.
먼저 번에 동경(東經)과 유사(遺詞)가 대신사가 해를 입게 되심을 거치면서 이미 불타 잿더미에 속하고 남음이 없는지라. 신사가 오래 생각하고 영감을 모으시다가 곧 동경과 유사를 입으로 읊으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하시다.
10월 28일에 대신사의 생신 제사를 검곡에서 거행하실 때 각지 도인이 와서 모인 자가 매우 많은지라. 이때에 신사가 제자에게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은 곧 하늘이라. 고로 사람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사람됨으로써 부귀와 빈천을 나눔은 이것이 하늘에 거슬림이니. 우리 도인은 모두 부귀와 빈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선사(先師)의 뜻을 따름으로써 으뜸으로 삼기를 바라노라” 하시고 일반 제자와 더불어 선사 앞에 영원히 맹세하시니라.
포덕 7년 병인(丙寅)에 신사가 제자를 이끄시고 도를 익히시다
3월 10일은 대신사의 재앙을 만난 두 번째 그날이라. 신사가 상주 도인 황문규(黃文奎), 한진립(韓振立), 황여장(黃汝章), 전문여(全文汝) 등과 더불어 예식을 정성껏 차리시다.
신사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우리 도인은 적자와 서자의 나눔이 있지 않고 대동평등(大同平等)의 뜻을 진실로 지켜라” 하시다.
8월에 서양의 군함이 강화(江華)에 들어오니 전국이 소란한 지라. 각지 도인이 그 수단(方便)을 묻고자 하여 신사의 거처를 가서 찾아보니 신사가 어느 곳에 계심을 끝내 알지 못하였더라.
10월 28일에 대신사의 생신 제사를 거행하실 때 제자 강수(姜洙), 박춘서(朴春瑞) 등이 와서 모인지라. 신사가 말하기를 “이 생신 제사를 당하여 각지 도인이 길이 멀음을 돌아보지 않고 이같이 와서 참석하니 이는 우리 도가 장래에 일이 차차 이루어질 조짐이라. 내년부터는 대신사를 위하여 계(禊)를 세우고자 하오니 뭇 의견이 어떠하뇨?” 강수가 말하기를 “쫓아 느끼는[追感] 도는 이보다 지나침이 없나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대신사의 생일, 기일 두 번에 우리 도인이 4전(錢)씩 각기 내어 향사(享祀) 비용을 마련함이 가하다.” 하시고 곧 이 뜻으로 각지에 통문(通文)하시고 인하여 계안(禊案)을 만드시니 이때 계에 들어온 자는 김경화(金慶化), 김사현(金士賢), 이원팔(李元八), 유성원(劉聖元), 김용여(金用汝), 임일조(林晩祚), 구일선(具一善), 신성우(申性祐), 정창국(鄭昌國) 여러 사람이요, 강정(姜錠)으로 계장(禊長)을 선정하니 정(錠)은 수(洙)의 아버지러라.
포덕 8年 정묘(丁卯) 봄에 신사가 주문을 묵묵히 읊으시더니 대신사가 영혼으로 나타나서 말하기를 “네가 도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짐이 하늘의 마음에 있으니 너는 비록 세상에 받아들이지 못할까 괴로워 말아라. 하늘의 마음의 신의 계산에 오직 정한 바 있다” 하시니 신사가 명령을 따르시다.
2월에 신사가 죽병리(竹屛里)로부터 예천 산수리(山水里)에 옮겨 사시니 이때에 대신사 부인 박씨는 상주 동관암(東關岩)에 나누어 사시다.
10월에 신사가 흥해에서 도를 강의하시니 말하기를 “나의 핏덩이가 아니니 어찌 옳고 그름의 마음이 없지 아니하리오 마는 만일 피의 기운을 만든 즉 한울님의 마음을 상하는 고로써 이를 하지 아니하노라. 내 또한 오장(五臟)이 있거니 어찌 육체의 쾌락을 구하는 욕망(肉慾)을 알지 못하리오 마는 그러나 내가 이를 하지 않음은 한울님을 공양하는 까닭이니라. 나는 비록 부녀, 어린 아이의 말이라도 또한 가히 배울 것은 베우며 스승 삼을 것은 스승 삼으니 이 같은 착함은 모두 한울님의 말씀이므로써니라. 그러나 지금에 자네들을 본 즉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높인 자가 많으니 가히 한스럽도다. 내 또한 육신이 있거늘 어찌 이런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그러나 내가 이를 하지 않음은 한울님을 공양치 못할까 두려워하노라.
생각하라. 교만하고 게으르고 분수에 넘치는 사치의 마음이 길어져 결국 무엇을 하고저 하나뇨. 내가 사람을 본 바 많되 도를 좋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노라. 무릇 바깥을 단속하는 자는 도에 아득하고 거짓이 없고 참된 자는 도에 가까우니라. 내가 바깥 단속을 피하고 안의 참됨을 주로 함은 한울님을 공양함으로써니라.
어지간한 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어찌 통하였다 말하리오. 반드시 시(侍) 자의 본뜻을 환하게 깨달아 성스러운 마음과 정성을 들여 작용하는 교묘함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능히 가까우니 기연(其然)을 아는 자와 기연을 마음에 흔쾌히 두는 자는 그 정도의 서로 떨어져 있음이 매우 머니 그대들은 시천주(侍天主)의 본뜻을 마음 가득 즐겁게 둔 연후에야 처음으로 도를 알았다고 말할지니라.
내가 나의 마음을 정하면 천하에 특별한 사람이 없나니 내가 어린 시절에 옛날 성인(聖人)은 반드시 특별한 모양의 점이 있는 줄로 생각하였더니 내가 선생을 따라 마음을 배운 후부터는 성인이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나니. 요순(堯舜)의 마음을 베풀면 뉘 요순이 아니며 공맹(孔孟)의 마음을 베풀면 뉘 공맹이 아니리오. 자네들은 이 말을 근본으로 하여 스스로 굳세고 쉬지 않아야함이 가하다” 하시다.
포덕 9년 무술(戊辰) 3월에 신사가 조용하게 도를 닦기 위해서 영양(英陽) 일월산(日月山) 죽현(竹峴)에 옮겨 살아 나무숲으로써 가옥을 삼으시고 생활의 방편은 짚신을 짜는 것에 의지하시며 주문을 욈으로써 일과를 삼으시다.
포덕 10년 기사(己巳) 2월에 양양군(襄陽郡) 도인 최혜근(崔惠根), 김경서(金慶瑞)가 와서 신사께 고하여 말하기를 “저희들이 도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도를 닦는 절차를 알지 못하였더니 선생이 이곳에 오심을 듣고 왔나이다.” 신사가 그 연원을 물으시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른바 연원은 알지 못하오나 공생(孔生[이름은 잊음])이라는 사람이 있어 도에 들어오기를 권하는 고로 그 말에 의해 도에 들어오고 도를 닦는 절차를 물은 즉 공생이 말하기를 ‘오직 주문 열세자만 알면 족할 것이오. 그 나머지는 알고자 할 필요가 없다’ 하더이다”. 신사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서 주문의 뜻과 도를 닦는 절차를 매우 정성스럽게 설명하시니 두 사람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선생은 한 차례 왕림하심을 청합니다.”
3월에 신사가 마침내 박춘서(朴春瑞)와 더불어 양양을 향하여 최(崔) 김(金) 두 사람의 집에 이르시니 매우 반갑게 맞이하더라. 인하여 부근 사람이 도에 들어온 자가 30여 호더라.
포덕 11년 경오(庚午)에 신사가 산중에 기거하여 오직 하늘에 기도하고 주문을 욈으로써 일을 삼으시다.
10월에 공생이란 자가 와서 대신사의 큰 아들 세정(世貞)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양양 도인 다수가 선생의 문하를 보호코자 하니 만일 동관암(東關岩)으로부터 영월에 옮겨 기거하면 오고가는 것이 매우 편할 것이오. 또는 생활의 방도가 여기에서보다 나으리라” 하니 세정이 그 말을 달게 듣고 신사와 상의하지 아니하고 곧 영월 소밀원(蘇密院)으로 옮겨 기거한지라. 신사가 들으시고 근심의 기색이 있으시더라.
이전에 이필(李弼)이란 자가 있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영해(寧海) 지방에 몸을 숨겨 도인이라 거짓 핑계대고 대신사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로써 같은 군 사람 이인언(李仁彦)을 보내 신사께 고하여 말하기를 “왕년 계해(癸亥)에 용담(龍潭) 장석(丈席)에셔 가르침을 받다가 지목(指目)의 혐(嫌)으로 지리산 가운데 숨어 살았더니 지금에 대신사가 재난을 만나심을 듣고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기필코 억울함을 씻고자 하노니 원컨대 선생은 친히 지도하소서.” 한대 신사가 속마음에 용담 제자 중에 그런 사람이 당초 없었음을 아시고 마음에 매우 의심스럽고 이상해서 거절하시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다.
포덕 12年 신미(辛未) 정월에 이필이 또한 영해, 영덕, 상주, 문경 등지 도인을 선동하여 공언하여 말하기를 “용담 문도된 자는 하루라도 갑자조난(甲子遭難)의 억울함을 잊을 수 없다” 하고 여러 차례 신사에게 면회를 강하게 요구하되 신사 더욱 거절하시다.
2월에 이필이 또 도인 권일원(權一元)을 보내 신사에게 한번 만날 것을 강하게 요구함이 전후 무릇 다섯 차례라. 신사가 그 억울함을 밝힐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음을 분명히 알았으나 이필로 하여금 믿고 복종케 하기 위해서 인하여 가서 보시니 필이 놀라고 기뻐 말하기를 “제가 선생과 우아한 연분이 비록 없으나 정의는 같은 문도에 관계된지라. 선사를 위하여 숭배하여 받들고 억울함을 밝히는 마음은 속으로 생각건대 마찬가지일 것이오. 또 3월 10일은 선사께서 재난을 당하신 날이라. 이날로 기한을 정해 의거를 일으키고자 하노니 원컨대 선생은 다시 끌지 마소서.” 신사가 따뜻한 말로 달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스승을 위하여 억울함을 씻고자 함이 실로 감격스럽지만 우리의 도는 무위이화(無爲而化)요. 또 하늘을 모시고 스승을 받드는 도는 성경신(誠敬信)과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주요한 뜻을 삼나니 이같이 지극히 비색하면 반드시 그 날이 있을지라. 오직 너는 숨어 살며 도를 닦아 아직 시기를 기다리고 망령되이 행동하지 말라” 하시고 곧 되돌아가셨다. 그 후 3월 ▣일에 필이 무리 5백여 인을 불러 모아 이날 밤 한 밤중에 부중(府中)에 갑자기 뛰어들어 군기(軍器)를 빼앗아 취하고 필은 스스로 따르는 무리 몇 명을 이끌고 청내(廳內)에 곧바로 들어가 군수를 잡아들여 죄를 들어 말할 때에 본 부의 별포(別砲)가 맞아 치며 총을 쏠 때 해당 군수는 마침내 해를 입고 필은 인하여 영양 일월산으로 도망쳐 달아나니 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진지라. 이 때 영졸군예(營卒郡隷)가 사방으로 흩어져 기미를 보아 체포하여 참혹한 죽음을 뜻밖에 당한 교인이 백여 인이오 그 외에 유배 혹 도망하여 살아남은 교인은 그 수를 알지 못하겠더라.
신사가 대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매우 어렵게 단양군(丹陽郡) 정석현(鄭錫鉉) 집에 이르러서 성과 이름을 바꾸시고 남의 고용살이가 되시다. 5월에 강수가 영춘(永春)으로부터 와서 신사의 가난하고 구차하심을 보고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여 이에 신사를 모시고 영월군 정진일(鄭進一) 집에 가서 의지할 때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결의(結義)하여 형제되시고 또 영양 사람 황재민(黃在民)과 더불어 친교를 맺으시다. 이때 신사의 부인 손씨가 홀로 집에 있더니 하루는 많은 수의 관례(官隷)가 와서 신사를 찾음이 매우 급하여 마을이 떠들썩한지라. 부인이 나가 관례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죄가 남편에게 있거니 화가 마을 사람에게 미침이 불가하고 남편의 소재를 나 또한 알지 못하니 차라리 내가 옥에 스스로 가리라” 하고 마침내 본군에 들어가 옥에 갇히게 되다.
8월에 이필이 다시 정기현(鄭基鉉) 등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한 남은 무리를 불러 모아 문경에서 다시 일어나다가 마침내 형벌을 받아 죽으니 이로부터 이필의 화가 영남, 충청, 강원, 경기 각도에 차차 미쳐 여러 도인이 두려워 떨며 편안히 살 겨를이 없었더라.
신사가 강, 황 두 현인과 더불어 깊은 산에 몰래 숨어들어 베고픔과 추위, 위태롭고 어려움을 골고루 맞보지 아니함이 없더니 있은 지 몇 달에 황재민을 영남에 보내어 문경의 일을 탐지하시고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약을 채취하는 사람으로 거짓 꾸며 소밀원(蘇密院)에 가셨는데 박 부인이 놀라 물어 말하기를 “행색이 어찌 이 같으뇨?” 신사가 묵묵히 있으면서 말이 없으시거늘 강수가 말하기를 “지금에 문경의 변은 우리들이 관계한바 조금도 없는지라. 그러나 뜻밖의 재앙의 화가 없지 않을까 두려운지라. 고로 몸을 숨겨 여기에 이르니이다.” 세정(世貞) 형제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느낌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말하기를 “내일에 우리 형제가 혼인 예식할 절차로 양양에 가리니 온 집안이 주인이 없는 지라. 공들은 여기에 머물기가 불가하다” 하거늘 강수가 말하기를 “자네의 형제가 혼례에 가고자 할진대 우리 두 사람이 모시고 따라감을 거짓으로 만들어 한 사람은 말의 고삐를 잡고 한 사람은 폐백 상자를 등에 지면 누가 능히 알리오. 이것이 난리 가운데의 일이라. 이같이 융통성 있게 처리함이 자네 뜻은 어떠하뇨?”
세정은 대답하지 않아 무슨 생각이 있는 듯하고 세청(世淸)은 분노한 기색이 풀어지지 않더니 밤중에 미치지 못하여 급하게 밥을 짓고 빨리 제사 지낼[錣] 것을 청하거늘 강수가 말하기를 “지금은 밤으로 새벽이 아니요. 닭 또한 울지 아니한지라. 밥이 어찌 이와 같이 빠른고?” 세청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 머무름이 오로지 장기서(張基瑞)의 힘인가? 장 군이 문경의 변을 듣고 공들로 하여금 빨리 가게 하여 누를 우리 집에 미치지 말게 하라 하는지라. 고로 밥이 이같이 빠르니 공은 괴이하게 보지 말지어다.” 강수가 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일이 진실로 이와 같을 진대 우리들이 내일에 가지 않을 뿐 아니요. 장차 자네 집에 머무르리요. 대체로 느림과 빠름은 사람의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바요. 트이고 좁은 것은 자네의 마땅히 마름질할 바라. 우리들이 바야흐로 위급한 지경에 있거늘 자네가 물리쳐 쫓아냄이 이같이 냉담하니 스승 문하의 오랜 교의는 고사하고 주인이 되어 손님 대접함이 이와 같음은 부당한지라. 어찌 사람의 마음씨리오. 던져 주는 음식도 옛 사람이 받지 않거늘 하물며 이같이 발로 차서 주는 밥이랴.” 따라서 밥 광주리를 들어 세청을 향해 던지고자 하거늘 신사 잡아당겨 말리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재난을 당해 궁하고 괴로움이 이와 같음이 하늘로부터인 것이라. 누구를 원망하리오. 우리가 약간의 돈이 있으니 제사를 마련할 것을 준비하라. 여러 날을 지나면 체포의 영이 오래지 않아 그치리니. 다행히 자네는 헤아려 용서하라.” 세정은 애타게 생각하며 차마 버릴 수 없는 정이 생겨서 그 아우를 달래되 세청은 강경하여 끝까지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행장을 갖추어 가더라. 신사가 강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의 이런 행동은 진퇴양난이니 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춤만 같지 못하다” 하시고 마침내 박 부인과 헤어지고 태백산 중으로 향하시다.
이때 황재민이 바위 아래에서 오래 기다리며 불을 피우고 앉았다가 신사와 강수가 오심을 보고 놀라 기뻐하며 말하기를 “어디로부터 오시나뇨?” 신사가 말하기를 “소밀원으로부터 왔노라.” 황재민이 말하기를 “지금에 지목의 혐의가 아직 잠잠해지지 않았는데 세 사람이 이곳에서 같이 모였으니 사생고락을 하나같이 함이 가하도다.” 신사가 강, 황 두 사람과 더불어 산중 여러 곳을 두루 살피고 편안히 쉴 곳을 찾으실 때 손을 들어 벼랑을 오르다가 한 큰 바위 아래에 구멍이 뚤린 것이 있음을 보시고 인하여 세 사람이 오래 머물 계획을 결정하시니, 뒤 이어 황재민은 산을 내려오다.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태백산 바위구멍에 있으셔 14일을 음식을 들지 않으시고 나뭇잎을 씹으면서 목숨을 이어가시더니 큰 호랑이가 있어 와서 비호하되 낮과 밤으로 떨어지지 않거늘, 신사가 호랑이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산신령이라. 어찌 와서 나를 비호하는가?”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소리에 응해 매우 기뻐하는 생각이 있는 듯하더라. 이때에 한 나무꾼이 있어 등에 새끼자루를 지고 와서 신사께 일러 말하기를 “공은 누구며 무슨 일로 인하여 여기에 머무느뇨?” 신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본시 영남인이요. 양백(兩白)을 유람하다가 길을 잃고 여기에 이르러 매우 험한 고통을 맛본지 여러 날이라.” 나무꾼이 그 말을 듣고 새끼자루 안에서 좁쌀 밥 한 덩어리를 꺼내어서 먹이거늘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나누어 드시니 굶주린 창자가 조금 배부른지라. 신사가 나무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남의 곤란을 구함이 선(善)에서 가장 큰 것이요. 또한 이를 이어 구제할 길이 있느뇨?” 소년이 응낙하고 가더니 다음 날 그 사람이 아닌게 아니라 밥을 마련하여 왔는지라. 신사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디에 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이뇨?” 나무꾼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는 박용걸(朴龍傑)이니 영월군(寧越郡) 직곡리(稷谷里)에 사노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여기에서 몇 리가 되느뇨?” 박용걸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10리 정도로소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여러 날 후에 내가 자네 집을 향하리니 자네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느뇨?” 박용걸이 말하기를 “내러주시는 가르침을 받들리이다” 하고 곧 내려갔니라. 여러 날 후에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산을 내려가서 직곡리를 향하시니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더라. 이때에 박용걸은 다른 곳에 나가있고 늙은 주인이 있어 나와 맞이하는 지라. 날씨의 춥고 더운 인사를 마친 후에 주인이 안 뜰에 들어갔다가 나와 그 부인의 말로 펴서 말하기를 “갑자기 창틈을 따라 엿본즉 손님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이는 때를 만나지 못한 군자로다. 양인[良人]은 옛날 돌아가신 시아버지 임종 시의 유언을 잊었느뇨?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몇 년의 밤에 걸객(乞客)이 찾아올 것이리. 이 손님은 신인(神人)이라. 너희들이 마음을 다해 구제하면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오. 복록이 반드시 이르리라.’ 하더니 오늘 밤 오신 손님이 어찌 그 사람이 아님을 알리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말이 귀에 아직도 있거늘. 공은 잊었나뇨? 하거늘 내가 소상히 자네의 말을 듣고 나의 아버지 임종 시의 유훈(遺訓)을 방금 깨달았노니. 오늘 밤에 귀한 손님이 비루한 오두막집에 찾아오심은 실로 큰 도움이라. 원컨대 형제의 의를 체결하여 더불어 즐거움과 고생을 같이 하고자 하노니 선생의 뜻은 어떠하뇨?” 신사가 주인의 말에 감동하여 곧 허락하시고 이날 밤에 청수 한 그릇을 준비하여 서로 향해 하늘에 맹세한 후에 마침내 형제의 정의를 체결하시고 인하여 49일의 재(齋)를 그 집에 베푸시니 한 해가 이미 저물었더라.
이때 각지의 두목이 직곡리에서 신사를 찾아뵈었는데 신사가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 뜻으로 제자에게 보여 말하기를 “하나. 성인의 덕화(德化)는 봄바람에 크게 응하는 원기(元氣)가 초목과 모든 생물에 널려있음과 같아 만물이 이런 만들어 기르는 중에 나서 자라느니라. 어짐에는 대인의 어짐이 있으며 소인의 어짐이 있으니 먼저 자기의 기를 바르게 하여 남의 기를 되게 함은 어진 사람의 마음이며 성인의 덕이니라. 고로 덕으로써 사람을 되게 하는 자는 하늘을 따르는 자요 힘으로 사람을 따르게 하는 자는 이치에 거슬린 자니라.
둘. 대체로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숨기고 잘된 것은 드러내는 것을 으뜸으로 삼되 남이 사납게 성내면서 나를 대하거든 나는 어짐과 용서로써 남을 대하고 그가 간교한 속임수로 내 말을 덮어 가리거든 나는 진실로써 그를 대할지라. 그가 기세와 이익으로서 나를 욕하거든 나는 지극한 바름과 공정한 뜻으로서 그를 순하게 받아들인 즉 비록 천하라도 자연히 되어 돌아오느니라.
만 가지 일이 말하기는 쉽되 행하기 어렵나니. 이 경계(地頭)에 서야 가히 도의 힘을 볼진저. 그 혹 도의 힘이 채워지지 못하여 급작스럽게 어려운 참아야 할 일을 당하면 주문 2, 3회를 생각하라.
무릇 어떤 일에 갑자기 대처하기에 이르러 우(愚), 묵(默), 눌(訥) 세 자로써 본보기를 삼을 지니 만일 경솔히 말을 뱉고 일을 행하면 반드시 사람답지 못한 사람의 헐뜯음에 빠질지니라. 요순의 세에 백성은 모두 요순이 되니라 하니 백성이 어찌 다 요순이 되리오 마는 그 훈육하는 덕화에 의하여 바람 앞의 풀과 같음으로서니라. 고로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라도 바로 이를 사람답지 못한 사람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먼저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봄 바람의 온화한 기운과 같은 기운과 모양으로 그를 대접하면 나무와 돌이 아닌 자 어찌 이에 바뀌지 아니하랴. 성인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그 되어 가는 풀과 나무에 미치고 군자는 성내지 아니하여도 그 위엄은 도끼(斧鉞)보다 낫나니. 이런 고로 군자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도 그 가르침이 나라에 이루어짐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으랴? 한 사람이 착하면 천하가 착하여짐으로써니 이와 같은 이후라야 가히 덕을 천하에 펼칠진저.
기(氣)로서 기를 새김질하고 기로서 기를 다스리고 하늘로서 하늘을 새김질하며 하늘로서 하늘을 받들며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선으로 선을 되게 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도의 크게 되는 것이니.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말하지 말고 하늘이 오신다 말하라.
실질은 기운이며 쓰임은 마음이니 고로 일에 처하여 능히 마음의 자취를 보나니 하늘의 쓰이는 일은 재앙과 풍년의 곡식 쌓임 사이에서 봄과 같이 사람의 마음 씀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이에서 보이나니. 이는 하늘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의예지가 된지라. 고로 말하기를 만물은 나의 동포이며 백성은 나의 동덕(同德)이니 천지신명은 만물과 더불어 같이 따라 옮겨가는지라. 고로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을 감동시킨다 하고 마음이 합쳐져야 느낌을 받아 움직인다 한다. 고로 말하기를 깨끗한 명(命)이 스스로에게 있으면 그 앎이 신과 같다 하며 고로 말하기를 남이 알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배움이 이르지 못함을 두려워할 것이라 하나니라.”
이때에 영월군 포청(捕廳) 향수(鄕首) 박(朴) 아무개가 포교(捕校)에게 일러 말하기를 “들리는 즉 임금의 재가를 받은 죄인 최, 강 두 사람이 직곡리 박용걸 집에 자취를 숨겼다 하니 내일에 곧 체포하라 하니 수리(首吏) 지달준(池達俊)이 박의 말을 꾸짖어 그 일이 곧 그치니 이에 신사가 화를 면하시다.
이달 초에 소밀원 도인 장기서(張基瑞)의 꿈에 대신사가 위엄있는 몸가짐이 엄하고 바르게 하여 그 집을 지나거늘 장씨가 찾아뵙고 그 향하는 바를 물으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내가 영월군 지달준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 고로 그 집으로 향하노라.” 장씨가 음식을 차려 드리고자 하다가 끝맺지 못하였다 하거늘 신사가 장기서의 꿈 설명을 들으시고 옛날 화를 면함은 오로지 대신사의 그윽한 도움인 줄을 아시다. 그 후에 또 지달준의 말을 듣건대 꿈에 한 선관(仙官)이 손에 녹색 옥 모양을 가지고 그 집에 내려오니 의관이 학과 같고 풍채와 태도가 옥과 같은지라. 달준이 놀라 엎드려 절하니 선관이 말하기를 “나의 제자 최경상, 강수는 죄가 없이 지목에 걸려 지금 직곡리 박용걸 집에 숨었으니 설령 적발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네가 잘 보호하라. 내가 반드시 후히 보답하리라.” 이미 깨달을 때에 매우 이상하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향수가 포교를 보내는 일이 나왔다 하더라.
이때 해가 다 감이 멀지 않은지라.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북어(北魚) 한 두름을 마련하여 지달준에게 가서 사례하니 달준이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을 구함은 사람의 당연할 바라. 두 분이 어찌 이같이 굽히며 사례하느뇨?” 대접하기를 매우 정성을 극진하더니 헤어질 때에 돈 200문(文)과 붓 2자루와 먹(墨) 2개로써 신사께 마쳐 작별하여 보내는 밑천을 삼더라.
포덕 13년 임신(壬申) 정월 5일에 신사가 재앙을 풀 뜻으로써 축문(祝文)을 지어 한울님께 고하시다.
신사가 강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세정, 세청은 비록 나를 저버렸으나 선사의 은혜를 추억할진대 우리들이 잊을 수 없다” 하시고, 곧 강수와 더불어 소밀원으로 박 부인을 가서 보시니 박 부인이 말하기를 ”지금 어느 곳에 계시면서 생명을 도모하느뇨? 우리 아이의 옛날 일은 사람의 정이 아니니 다행히 마음속으로 서운해 하지 말지어다.” 신사가 말하기를 “나이 어린 무리가 설혹 지나친 행동이 있을지라도 무슨 남은 감정이 있으리오. 우리들의 마음에 두지 않음은 오늘에 온 것을 보아 명백하다” 하시다. 이때 박 부인이 병석에 바야흐로 있어 양식이 끊어진지라. 신사가 세정의 집안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순흥(順興)에 약간의 쌀이 있으니 사람을 그곳에 보내면 반드시 쌀을 짊어 오리니 병중 몇 달의 밑천을 삼으라” 하시다.
다음날 신사가 직곡리에 돌아오시다가 또 순흥에 가서 세정의 집안사람을 대하시더니 그 집안사람이 아닌게 아니라 소밀원으로부터 오는지라. 쌀을 등에 지여 보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집안사람이 또 와서 만면에 근심하는 기색이 있는지라. 신사가 물어 말하기를 “자네가 여기서 간 것이 오래되지 않았거늘 지금에 무슨 일이 있어 이같이 급히 왔느뇨?” 그 사람이 묵묵히 있다 오랜 만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세정이 양양에서 잡혀 갇혔으니 장차 어찌 하리오?” 신사와 강수가 그 말을 들으시고 놀라 탄식을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시다.
다음날에 신사가 세정의 집에 가시니 박 부인의 놀라 두려워 편안하지 않은 기색과 세청의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며 실성한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더라. 이때 전성문(全聖文)이 그 곁에 있거늘 박 부인이 말하기를 “재앙의 징조가 장차 임박한지라. 몸을 피할 방도는 다만 자네들에게 있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강수가 말하기를 “집안사람들을 먼저 박용걸의 집으로 옮기고 서서히 멀리 피신할 방도를 도모함이 가하다” 하고 내일 해가 질 때 실행하기로써 언약하였더니 정선(旌善) 도인 유인상(劉寅常)이 마침 오거늘 인상과 더불어 그 일을 상의하여 세청에게 물어 말하기를 “동과 서로 옮겨 살기를 너는 가히 뜻에 따를 것이나 그러나 정선은 아직 급하게 가지 못하리라.” 한 대 세청이 조용하거늘 인상이 말하기를 “일이 가까이 닥쳐왔으니 내가 빨리 내 집에 가서 스승과 집을 보호할 방책을 궁리하리니 도인 중 한 사람을 우리 집에 보내면 내가 약간의 쓸 밑천을 마련해 보내서 일시의 급함을 도우리라” 하고 이에 돌아가다. 그날 저물 무렵에 집안의 여러 물건을 수습하여 길을 떠날 때, 박 부인은 남자의 옷을 거짓으로 꾸미고 여자 두 사람은 남자 아이의 옷을 바꿔 입고 임(林) 아무개가 이끌고 도울 때 신사는 강수, 전성문과 더불어 박 부인을 모시고 가서 박용걸의 집에 이르시니 모든 식구들이 환영하여 꺼리는 기색이 조금도 없더라.
신사가 강수, 유인상, 전성문과 더불어 오고가며 상의하여 스승과 집안의 보호에 힘을 다하시니 그 때에 잇달아 서로 따르는 자로 홍석범(洪錫範), 안시묵(安時默), 김경순(金敬順) 여러 분이 있더라.
3월 10일은 대신사의 제삿날이라. 유인상이 와서 모였거늘 신사가 축문을 지어서 대신사에게 고하시다.
신사가 임(林) 아무개와 세청으로 하여금 양양에 몰래 가서 세정의 일을 알아보게 하니 아직 신문 중에 있어 어느 때에 판결될지 알지 못하더라.
23일에 신사가 세청과 임 아무개를 거느리시고 큰 영(嶺)을 넘어 인제군(獜蹄郡) 남면(南面) 무매리(舞梅里) 김병내(金秉鼐) 집에 이르셨는데 공교롭게 김병내, 김연순(金演淳)이 이사 차로써 짐을 싸는 중에 바야흐로 있는지라. 김병내가 말하기를 “이 때에 서로 만남이 실로 우연이 아니라. 일찍이 들으니 대소백산(大小白山)은 십승지지로써 나라 안에 이름을 나타냈으니 어찌 하면 갈 것이오?” 신사가 말하기를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나와 더불어 함께 가면 내가 잘 지도하리라” 하시고 다음날에 신사가 김병내, 김연순, 김용진(金龍鎭), 삼숙질(三叔侄)과 그 가족 남녀 10여 인을 거느리시고 홍천, 동사둔(東沙屯), 영춘(永春), 의풍(義豊) 등 장소에 이르러 그 길을 가르쳐 보내시다.
대신사의 셋째 딸과 세정의 부인이 장춘보(張春甫) 집에 있다가 아울러 인제 감옥에 잡혀 갇히게 되니 이는 도인 김덕중(金德中)이 포졸을 꾀어 시킨 것이라.
4월 5일에 신사가 박용걸 집에 있으면서 향례(享禮)를 베푸실 때 박 부인이 세청을 기다려 마음을 능히 안정하지 못하는 지라. 신사가 박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성정을 안정한 연후에 가히 써 편안히 제사할 것이라” 하여 위로하여 그 근심을 푼 후에 예식을 거행하였더니 다음 날에 세청이 그 부인을 맞아 돌아와 시어미를 보는 예를 행하다.
신사가 강수와 전성문과 더불어 정선군 무은담(霧隱潭)에 이르러 유인상을 찾으시니 인상이 기뻐하며 나와 맞이하거늘 신사가 인상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우리들은 지목 중인 사람으로써 향하여 가는 곳이 정해진 곳이 없어 구르고 굴러 자네의 집에 이르렀으니 만일 이곳에 오래 머물면 피해가 또한 자네 집에 미칠까 두렵도다.” 인상이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혹 지목으로 인연하여 행방이 탄로나면 가히 써 멀리 피할 것이오. 나를 죄안(罪案)에 정한다 할지라도 유배역(流役)에 미치지 못할 것이니 원컨대 선생은 편안히 계시소서.” 신사가 그 두터운 마음을 느끼시고 인하여 강수와 전성문과 더불어 그 집 뒤 아득하고 후미진 한 방에 들어가 49일의 재(齋)를 베풀게 하시다.
이때 정선 도인 신정언(辛定彦), 신치서(辛致瑞), 홍문여(洪文汝), 유계홍(劉啓弘), 최영하(崔永夏), 김해성(金海成), 방자일(房子一), 안순일(安順一), 박용걸(朴龍傑)과 인제 도인 김병내와 영월 도인 장기서(張基瑞) 기타 최중섭(崔重燮), 박봉한(朴鳳漢) 등이 신사의 거처에 몰래 서로 오고 가며 박 부인의 딱한 모습을 가련히 여기며 각기 힘을 내어 구하고 도왔다.
5月 12일에 세정이 양양 감옥에서 장형(杖刑)으로 사망하고 김덕중(金德中), 이일여(李逸汝), 최혜근(崔惠根)은 각기 유배형(流刑)이 되니 이때 이일여가 공초(供招)를 받을 때에 혀를 깨물면서 말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푸른 하늘을 가리킬 뿐이더라. 신사가 이 소식을 들으시고 강수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도를 아는 자는 가히 명(命)을 말할 수 없으나 그러나 이 때 이 소식은 실로 사람의 정서로는 참을 수 없는 바라” 하시다.
포덕 14년 계유(癸酉) 10月 20일에 신사가 강수, 유인상, 전성문, 김성해(金海成) 등을 거느리고 식량을 가져오시고 태백산 갈래사(葛來寺) 적조암(寂照菴)에 들으시니 주지승 철수좌(哲首座)가 포균외자(炰菌煨蔗)하여서 나가더라.
이날 밤에 신사가 철수좌에게 일러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예불(禮佛)하는 것과 조용히 나가 하늘에 기도하는 것은 승려와 속인이 마찬가지니 나의 하는 일은 다만 하늘을 생각하며 주문을 외는 것이라” 하니 승이 말하기를 “주문은 어떤 글이니잇고?” 신사가 말하기를 “윗분(上人)이 혹 동학(東學)을 들었느뇨?” 승이 말하기를 “들었나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높은 목소리로 낭독하리니 윗분이 꺼리지 않겠나뇨?” 승이 말하기를 “꺼림이 없습니다.” 신사가 이에 높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시니 승이 들을 때마다 매우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때 여러 사람이 염주(念珠)를 손에 잡고 하룻밤에 주문 3만회를 외우기로 법도를 삼으시다.
12월 5일은 기도 흘공일(屹工日)이라. 이날 새벽에 신사가 하나의 시 몇 구절을 얻으시니 말하기를
태백산 속에서 49일의 공부를 하고
내가 봉황 여덟 마리를 받아 각각 주인을 정하니,
천의봉(天宜峰) 위에 꽃핀 하늘이요,
오늘 오현의 거문고(五絃琴)를 갈고 닦고
적멸궁전(寂滅宮殿)에서 티끌 세상을 벗어나니,
49일의 기도 기간을 잘 마치게 되었네.
라 하시다. 이때에 유(劉), 전(全) 두 사람은 먼저 산에서 내려가고 신사가 강수와 더불어 여러 날을 머물러 부도(符圖)를 연습하시더니 철수좌가 그 옆에서 내려 바라보다가 매우 기뻐하여 합장하며 말하기를 “이는 조화의 자취이니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어째서 아느뇨?” 승이 말하기를 “조화가 부도에 있는지라. 빈도(貧道)가 보고 아는 것이 비록 얕으나 영부(靈符)를 봄에 마음에 스스로 깨달아 가히 증험할 바가 있으니 원컨대 선생은 삼가 간직하고 보여주지 마소서.” 승이 또 말하기를 “빈도가 예전 날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 살면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았는데 밤 꿈에 여래세존(如來世尊)이 나타나서 말씀하기를 ‘너는 소백산으로 가라’ 하거늘 깨어난 후 마음이 기이하여 올해 4월에 소백산 부석사(浮石寺)에 옮겨 살았더니 세존(世尊)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너는 태백산으로 가라’ 하거늘 빈도가 또 여기에 옮겨 산지라. 하룻밤 꿈에 두 손님이 부처 앞에 와서 앉음을 보았더니 지금에 두 어른(尊公)을 뵈니 용모가 완연히 꿈속의 사람과 같더이다.”
강수가 말하기를 “산에 들어간 밤에 내 또한 한 꿈을 꾸니 한 하늘의 신선이 맑은 하늘로부터 와서 벽(壁)을 등지고 앉음에 공경하게 절하여 예를 갖추었더니 지금에 불상(佛像)을 보니 꿈속의 신선과 흡사하더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나 또한 산에 들어간 처음에 한 꿈을 꾸니 여덟 봉황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차례대로 열을 지어 앉거늘 내가 그 셋을 품에 안고 옆 사람이 각각 그 하나를 품에 안았더니 하늘로부터 말씀이 있기를 ‘이 다섯 봉황은 각기 그 주인이 있으니 너는 반드시 깊이 감추어 그 주인을 찾아 주어라’ 하니 알지 못하겠으니 그 어떤 징조이뇨?” 철수좌가 듣고 더욱 기이하게 여겨서 신사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선(仙)과 불(佛)이 반드시 하나로 돌아갈 것이니 바라건대 다르게 판단하지 마소서.” 승이 또 말하기를 “단양 도솔봉(兜率峰)이 아늑하고 조용하여 가히 지내실만하니 선생은 반드시 가서 머무소서.” 신사가 마침내 승을 작별하고 무운담(霧雲潭) 유인상 집으로 향하시니 인상이 매우 기뻐하며 나와 맞이하는지라.
먼저 번에 대신사의 집을 같은 군 주천리(朱川里)로 옮겨 살았더니 신사가 물어 말하기를 “스승의 집이 안녕하뇨?” 하시니 유인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달 9일에 박 부인이 세상을 뜨셨나이다.”
신사가 박 부인이 세상을 떠남을 들으시고 곧 김계악(金啓岳)과 더불어 대신사 댁에 이르러 친히 시체를 수습하시고 장례를 끝마치는 절차를 하나하나 점검하시다.
이때에 신사가 영춘군(永春郡) 융항리(隆項里) 박용걸 집에서 한해를 넘기시다.
포덕 15년 갑술(甲戌) 2월에 신사가 철수좌의 의복 한 벌을 만드셔 친히 들고 적조암에 가시니 철수좌가 병석에 바야흐로 있는지라. 신사가 병을 물으시고 이어 옷을 주시니 이때 철수좌가 병의 형세가 비록 급박하나 옷을 주심을 고맙게여겨 겨우겨우 눈을 들고 슬픔과 기쁨이 서로 엇갈리더니 다음날에 승이 사망하거늘 신사가 직접 화장(火葬)을 하여 주시다.
19日에 신사가 스승 댁으로 가서 박 부인의 장례를 행하시니 장례에 모인 자는 홍순일(洪舜一), 전성문, 유인상, 최진섭(崔振燮), 신석현(辛錫鉉), 박봉한, 홍석범(洪錫範), 김두원(金斗源), 홍석도(洪錫道), 유택진(劉澤鎭) 여러 사람이더라.
3월에 신사가 홍순일, 김용진과 더불어 다시 49일의 공(工)을 행하실 때 이때에 공양을 주도한 자는 안동 권기하(權奇夏)더라.
신사가 김연순, 김용진을 단양 도솔봉 하사동(下寺洞)에 보내 살터를 보시다.
12월에 신사가 강수, 김용진을 보내 박 부인의 연제(練祭)를 행하시다.
포덕 16년 을해(乙亥) 2월에 신사가 송고동(松臯洞)에 옮겨 가시니 도솔봉 가까운 곳이더라.
8월 15일에 신사가 기도를 행하실 때 어육주초(魚肉酒草)를 쓰지 않을 뜻으로써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얻으시다. 이에 설법으로 말하기를 “나는 과거 여러 해에 각종 음식의 물건으로 기도의식의 표준 목표를 행하였으나 이는 아직 시대의 관계로부터 나온 소이니. 오늘부터는 모든 의식에 다만 청수(淸水) 한 그릇만 쓰는 날이 있으리라. 도에 들어온 처음에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만일 대상이 없으면 마음이 매우 어지러워 안정이 되지 않을지라. 고로 물(水)로써 표준을 정하노라” 하시며 말하기를 “물은 만물의 근원이니 옛말에 하늘과 땅이 아직 분명해지기 전에는 다만 북극(北極) 일육수(一六水) 따름이라 함은 또한 밝은 견해라 할지니라. 물에 음수(陰水)와 양수(陽水)의 구별이 있나니, 양수는 즉 형태가 있는 물이며 음수는 즉 형태가 없는 물 즉 공기니라. 고로 사람이 음수 안에 있음이 물고기가 양수 안에 있음과 같으니라. 고로 천지만물이 일육수의 원리 안에 포함하였음으로 나 또한 물로써 일체의 물건에 대신 사용하노라” 하시다.
10월에 신사가 설법행제(設法行祭)의 뜻으로써 정선 도인에게 통유(通諭)하시였더니 같은 달 18일에 이르러 도인 강수, 전성문, 유인상, 김용진 등이 모두 모인지라. 신사가 스스로 예복을 만드시며 축문을 지어서 한울님께 고하시니 이는 우리 교(敎) 발전의 일이라. 신사가 이름을 바꿀 뜻으로써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받으시고 이에 제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대체로 가르침은 때에 따라 생활 속에서 활용되는데 있나니. 시대와 진화에 부응치 못하면 이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는지라. 하물며 우리 교의 오만년 미래를 개괄(範圍)함이리오. 나는 지금 이 주의(主義)를 보여주기 위하여 먼저 이름으로써 이에 대한 만고의 규범을 세우리라” 하시고 이에 신사의 이름은 시형(時亨)으로 고치시고 강수의 이름은 시원(時元)으로 유인상의 이름은 시헌(時憲)으로 고치시다.
이때 세청이 장기서 집에 갔다가 우연히 병을 얻어 괴로움에 일어나지 못한지라. 이로부터 대신사의 탄신제와 기제사를 신사가 받들어 행하시다.
포덕 17년 병자(丙子) 4월에 신사가 설법행제 하실 때 의식은 전날과 같고 초(初), 아(亞), 종헌관(終獻官)과 집례(執禮), 대축(大祝), 봉향(奉香), 봉로(奉爐), 집사(執事) 등 여러 사람이 있었더라. 이때에 신사가 송고 본제에 계시면서 오로지 하늘에 제사지냄에만 몰두하시다.
포덕 19년 무인(戊寅) 7월 25일에 신사가 접소(接所)를 유시헌 집에 정하시고 각지 제자에게 접을 열었다는 뜻으로써 글을 보내시며 말하기를 “우리 도 안에 접을 열였다(開接)라 이름하는 것은 결코 요사이 글하는 선비가 서로 모여 시(詩)와 부(賦)를 만드는 예가 아니라. 대신사가 세상에 계실 때에 기(氣)와 수(數)가 서로 번갈아 활발하게 돕는 이치를 받들어 이미 접을 열고 접을 파하는 깨우침이 있었던 고로 나 또한 이로서 접을 여노니 자네들은 이 뜻을 체현하라.” 접을 열 때에는 각지 도인이 서로 모여 참된 이치를 연구하는 제도니 무인년 접을 열 때에 신사가 도를 강의하며 말하기를,
“우리 도는 넓으며 묶고(約) 순수하며 하나 됨으로써 기본을 삼나니 순수하여 섞임이 없는[精一] 성경신(誠敬信)이 아니면 능하지 못하니라. 믿음이 있은 연후에 능히 공경하고 공경이 있은 연후에 능히 통하는 지라. 고로 공경에 있고 사람에 있다 라 함은 하나는 사람에 있고 하나는 공경에 있다 함이니라.” 또 말하기를 “자네들은 시(侍) 자의 뜻을 아는가? 시 자를 어떻게 해석함이 가하냐.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를 즉 시 자의 뜻으로 풀음이 가하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 처음으로 시 자의 뜻이 성립될까 또는 대신사의 포덕강령의 날에 시가 시 됨이 가하랴. 자네들은 이 뜻을 연구하라.” 또 말하기를 “한번 제를 올릴 때 위패를 세우되 벽에 의지함이 가하랴 나를 향함이 가하랴. 또 사람의 행동을 마음으로써 함이 가하랴 기(氣)로써 함이 가하랴. 마음이 기를 시키는가, 기가 마음을 시키는가. 자네들은 하늘을 아는가 기를 아는가 귀신을 아는가. 나의 한 기운이 천지우주의 원기와 서로 통하였으며 나의 심신(心神) 활동은 모두 귀신이 시킨 바라. 고로 하늘은 나이며 나는 곧 하늘이니. 고로 마음을 속임은 즉 하늘을 속임이니라.
대신사의 주문 열세 자는 만물화생(萬物化生)의 근본을 발명한 것이오,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자는 다시 천지(天地) 손절(損絶)의 기운을 보완한 것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운이 화한 것은 사람이 사람된 이치라. 고로 도는 특별히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세 자로 만물화생의 근본을 알고 무위화기(無爲化氣)로써 사람의 사람된 이치를 깨달아서 수심정기로 천지태화(天地太和)의 원기에 돌아오면 능히 가까울진저.
매일 쓰임과 일을 행함은 도의 자취이니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에 들어맞으면 이는 도인의 근본 의무니라. 그러나 뭇 이치에 따르고 만 가지 일에 응하면 아는 덕이 그와 가까울진저.” 또 말하기를
“이 큰 운은 천황씨(天皇氏)의 근본원리를 다시 찾았도다. 천황씨라 함은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짐을 의미한 명사(名辭)니라. 고로 천황씨는 태초 원인(原人)을 의미한 것이니 천황씨는 선천(先天) 개벽(開闢)의 사람이 있을 처음에 신의 기능으로 사람의 원리를 포함한 자라. 이에서 만물이 모두 천황씨의 만들어 기르는 사이에서 나온 것이니 오늘날 대신사가 천황씨로 자처하심은 대신사 또한 신이자 동시에 사람이라. 고로 후천(後天) 개벽의 주인옹(主人翁)으로 후천 오만년에 이 이치를 전하게 함이니라.
개인의 각 개체가 능히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자아(自我)됨을 깨달으면 이는 곧 시(侍) 자의 근본이며 모심의 근본을 알면 능히 정(定)의 근본을 알 것이오. 마침내 지(知)의 근본을 알 것이니 아는 것은 곧 통(通)이며 달(達)이니 이에는 말도 필요없고 글도 필요 없느니라” 하시다.
포덕 20年 기묘(己卯) 3월에 신사가 강시원(姜時元)과 더불어 청송에 이르시니 대신사의 기신(忌辰)이 며칠을 남겼더라. 도인 심시정(沈時貞)이 신사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대신사의 기일이 박두하였음으로 약간의 제수품을 마련하여 왔나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이 가까운 곳에 정결히 제사지낼만한 곳이 없고 또 날마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 이 같으니 장차 어찌하리오?” 즉시 인도하여 두루 가서 90리를 가시니 날이 저문지라. 집에 이르지 못할 줄을 아시고 부득이 그 사위 집에 드시니 다음날은 즉 대신사의 기신이라. 이에 심시정이 준비해 온 제수품으로써 향사를 행하시다.
20년 기유(己卯) 3월 26일 영월 거석(巨石) 노정근(盧貞根)
3월 26일에 신사가 강시원, 김용진과 더불어 영서(嶺西)로 향하실 때 영월군 거석리(巨石里) 노정근(盧貞根) 집에 이르러 주무시더니 꿈에 대신사가 검은 관모에 푸른 옷을 걸치시고 3층 대(臺) 위에 앉으실 때 좌우에 동자 4, 5인이 모시며 섰으며 등 뒤에 한 깔끔한 노인이 있어 무릎 꿇어 앉고 한 노승이 가사(袈裟)를 걸치며 지팡이를 들고 그 옆에 서있는지라. 신사가 대 아래에서 대신사에게 절을 하니 대신사가 신사를 불러 대에 오르라 하시니 다시 십 여인이 대 아래에 있는지라. 대신사가 불러 모두 대에 오르게 하다. 대신사가 신사의 의복이 매우 남루함을 보시고 옆 사람을 둘러보고 가리키며 말하기를 “자네의 옷은 이같이 빛나고 아름답고 이 사람의 옷은 이같이 거칠고 남루하니 비록 마시고 입는 것이 각기 나누어 정해진 것이 있다 하나 어찌 서로 돕는 도리가 없으리오?” 하시니 그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수치스러운 기색이 있는지라. 이어 대신사가 일어서서 대 위에 발걸음하시거늘 신사가 대신사의 요대(腰帶)를 바라보시니 세 단으로써 서로 이어서 만드신지라. 신사가 물어 말하기를 “의대(衣帶)을 세 단으로써 함은 어떤 의미니있고.” 말하기를 “급작스레 만든 고로 이와 같도다.” 신사가 차고 있던 요대를 풀러 바치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좋다” 하시고 세 단의 요대를 푸시거늘 신사가 일어나 받고자 하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하시고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어떤 별은 이와 같고 어떤 조화는 이와 같고 또 어떤 별이 이와 같아 어떤 사람이 어떤 조화로서 이와 같고 또한 어떤 해에 어떤 조화로 어떤 사람을 주되 이와 같으리니. 세 사람이 특히 남보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그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년 모월에 여차 여차하고 그 나머지 20여 인은 뒷날을 기다려 차차 정해서 주리라” 하시고 마침내 대에서 내려오시니 네 개의 대문이 있어 활짝 열렸더라. 이때에 상대(上臺)로 들어오는 자가 20여 인이오 중대(中臺)로 들어오는 자가 백여 인이오 하대(下臺)로 들어오는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는지라. 대신사가 북문에 이르시더니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 : 하늘의 문이 자방의 문을 연다)’ 이라는 일곱 자를 문 위에 크게 쓰신 후 세 차례 입으로 읊으시고 또 북문을 세번 치시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은지라.
신사가 또 손으로 북문을 치시니 조용하여 소리가 없거늘. 신사가 그 연고를 대신사에게 물으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뒷날에 반드시 소리가 있으리라” 하시고 발걸음을 돌리시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어찌 빨리 돌아 가시 나니까?” 대신사가 말하기를 “내가 상제와 더불어 의논할 바 있는지라. 고로 빨리 돌아가노라.” 이때 어떤 사람이 밖으로부터 와서 옷깃을 미치면서 대신사에게 절하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어찌 이같이 공경하지 못하나뇨” 하시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책망하지 말라. 이 사람의 성은 아무개니라” 하시고 온한포(溫寒飽) 석 자를 써서 주시며 말하기를 “추우면 온(溫) 자를 사용하고 더우면 한(寒) 자를 사용하라. 배고프면 포(飽) 자를 사용하라.” 또 말하기를 “혹은 왕평(王平)으로써 주며 혹 팔지(八智)로써 주며 혹은 석씨(石氏)로써 주리라” 하시다. 신사가 깨달으시고 강시원, 김용진 두 사람을 불러 일으켜서 꿈에 나타난 일을 상세히 말하시니, 강시원이 말하기를 “이는 크게 길한 꿈이라. 실로 대도가 환하게 빛나는 증험이니이다.”
다음 날에 신사가 인제군 김현수 집에 가시니 근처 도인이 치성제(致誠祭)를 베풀기를 청하거늘 신사가 그 정성을 훌륭하게 생각하여 허락하시니 김계원(金啓元), 장춘보(張春甫), 김경식(金卿植), 김윤희(金允喜) 등이 제사에 참석하다.
4월에 신사가 강시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예전 날 꿈에 내가 선생의 가르침을 받되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함이라. 장차 설법을 행하고자 하노니 자네의 뜻이 어떠하뇨.” 강시원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직 선생은 자신의 의견대로 결행하옵소서. 도의 전통이 선생께 있고 도의 발전이 또한 선생께 관계하니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오늘날 도인의 상황을 관찰하니 갖추지 못한 것이 많은지라. 큰 설법은 아직 행하지 못할지니. 우선 작은 설법을 베푸는 것이 가하다” 하시고 마침내 유시헌, 홍시래, 최시경 등 여러 도인 집에 이르러 한 가지 예로 행하시다.
정선 도인이 대신사 위령제를 거론하여 관건(冠巾), 의복을 갖추고 주문을 암송하고 기도하거늘 신사가 그 진실로 공경함을 살피셔 곧 행하라 하시다.
신사의 재종제(再從弟) 최경화(崔慶華)가 치성제를 행하고자 하는지라. 고로 신사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허락하시니 그 때 제사에 참여한 자는 김필상(金弼商), 박언순(朴彦淳), 정기중(鄭基重), 김영순(金永淳), 김재문(金載文), 황재민(黃在民), 권성옥(權成玉), 정상중(鄭尙重) 등 여러 사람이더라.
11월 12일에 신사가 치성제를 조시철(趙時哲),홍석범(洪錫範)의 집에서 행하시다. 신사가 강시원, 유시헌과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대신사가 항상 포덕에 뜻을 기울여 우리들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천도(天道)의 운이 북방에 있으니 만약 남북접(南北接)을 택할진대 나는 반드시 북접(北接)이라 하겠다’ 하시며 또 말하기를 ‘이 도의 발전의 수는 옹치위후(雍齒爲候) 격이니 너희들은 뜻을 두어라’ 하시고 시험삼아 ‘도래삼칠자 강진세간마(圖來三七字, 降盡世間魔 : 삼칠자를 그려내니 세상 악마 다 항복하네)’ 열 자를 쓰시었나니 우리들이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깊이 새겨 간직함이 가하다” 하시다.
포덕 21년 경진(庚辰) 정월에 인제군의 접중에서 치성제를 행하고자 하여 신사께 고하거늘 신사가 강시원, 김시황(金時晄), 김용진과 더불어 김연석(金演錫) 집에 이르러 행하시다.
3월 10일에 대신사의 기제식(忌祭式)을 신사의 본제(本第)에서 행하시다.
4월 5일에 신사가 각 접으로 하여금 다 대신사의 향례를 거행케 하시다.
먼저 번에 대구참변 후에 대신사가 지은 책을 간행한 것이 화로(火爐) 안에 모두 타버리고 하나도 가히 참고할 것이 없더니 이때에 신사가 친히 닦고 모으실 새. 본래 글을 아는 것이 없음으로써 기록하여 서술할 수 없으시고 하늘의 스승께 고하여 강화의 가르침으로 이 경전을 입으로 읊어 글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하실 새. 5월에 동경(東經) 간행을 시작하여 6월 15일에 작업을 마치시다.
포덕 22년 신사(辛巳) 6월에 신사가 대신사의 지으신 노래와 말씀(歌詞)을 발간하여 도인에게 나누어 주시니 이때 간행소는 단양군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이더라.
8월에 유경순(柳敬順), 김은경(金殷卿)이 신사에게 와서 도를 닦는 절차를 묻다.
10월에 신사가 정선군 무은담 유시헌 집에 가서 특별한 정성으로 고천식(告天式)을 행하실 때 예를 마침에 신사가 말하기를 “우리 도인이 어육주초(魚肉酒草)를 금한지 해로 일곱 번 돌았노라. 비록 강화의 가르침을 받들음이 있으되 또한 지금 사람의 지목의 혐의가 없지 않은지라. 지금부터 일체 해금하노라” 하시다.
포덕 23년 임오(壬午) 3월 10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재난을 당한 19회 기념식을 거행하실 때 와서 참석한 도인이 매우 많은지라. 이민하(李敏夏)가 신사께 물어 말하기를 “올해 시운(時運)이 과연 어떠하리이까?” 신사가 말하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가 내부에서 무너지는 기미가 있으니 자네들은 다만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하늘의 명을 공경하며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망령되이 행동하지 마라” 하시더니 과연 서울에 훈국(訓局)의 군인소요가 크게 일어났다가 몇 달 만에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6월에 신사가 송고로부터 정선군 갈래면(葛來面) 장정리(長亭里)에 이사하여 본제에서 49일 기천식(祈天式)을 행하시다. 이때부터 각 포(包)의 도인이 더욱 증가하더라.
포덕 24년 계미(癸未) 2월에 신사가 간행소를 충청도 목천군(木川郡) 구내리(區內里) 김은경(金殷卿)의 집에 다시 세우시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천여 부를 발간하여 각 포에 나누어 주시다.
3월에 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박인호(朴寅浩), 황하일(黃河一), 서인주(徐仁周), 안교선(安敎善), 여규덕(呂圭德), 김은경, 유경순, 이성모(李聖模), 이일원(李一元), 여규신(呂圭信), 김영식(金榮植), 김상호(金相浩), 안익명(安益明), 윤상오(尹相五) 등이 차제로 신사에게 찾아뵈었는데 신사가 설법으로 말하기를 “1. 우리 도의 운이 바야흐로 지금 매우 번성하는지라. 청구팔역(靑丘八域)에만 널리 펼 뿐 아니라 장차 동서(東西) 양구(兩球)에 일어나 나아가리니 자네들은 성경신(誠敬信)으로써 으뜸을 삼아 덕을 펼침에 힘써 노력하라.” 또 말하기를
“2. 자네들이여. 내 도에 들어온 자가 많되 도를 아는 자가 적음을 한탄하노라. 그러나 사람이 어찌 도를 알고 도에 들어오는 자가 많으리오. 혹 운에 의하여 들어오며 혹 수에 의하여 들어오며 혹 기에 의하여 들어오나니. 내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하늘의 명을 받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래 만겁(萬怯)을 두루 섭렵하고 간신히 오늘날에 이름도 또한 운이며 수니라.
3. 내가 학업에 부지런히 힘쓸 때에 큰 비가 오더라도 옷과 탕건이 젖지 아니 하였으며 능히 구십리 밖의 사람을 보았으며 또한 능히 사악한 기운을 멈추게 하였으며 조화를 맡겨서 썼으나 깨달은 후는 별안간 이를 끊었노라. 지금은 깨달았노니, 이것들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의 작은 일이요 결코 큰 도의 마음의 이치가 아니라. 고로 대신사가 조화를 사용하지 아니하심도 또한 이에 원인하였느니라.
4. 도는 높고 멀고 가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 쓰임의 일을 행함이 도가 아님이 없나니. 천지신명이 사물과 더불어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지라. 고로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하니 자네들은 사람이 알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다만 배움의 이르지 못함을 걱정할진저”
하시고 이때에 신사가 포유문(布喩文) 11조(條)를 지어서 각 포에 나누어 퍼뜨리시니 그 대략에 말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며 스승을 높이고 형제가 화목하고 부부가 구별이 있고 친구를 믿으며 이웃 마을을 구휼하고 몸을 바르게 닦고 집안을 바로 다스려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접함에 힘써 노력하라” 하시다.
포덕 25년 갑신(甲申) 1월에 손병희가 신사를 삼가 뵈시고 천하에 덕을 펼치는 것과 백성을 널리 구제하는 방법을 물으시니 신사가 기쁜 마음으로 답하시다.
3월 10일에 대신사의 조난(遭難) 21회 향례식(享禮式)을 거행하실 때 와서 참석한 도인이 매우 많더라.
6월에 신사가 지목의 혐의로 익산(益山) 사자암(獅子庵)에 숨어 사실 때 박치경(朴致京)의 주선으로써 무릇 네 달 동안을 지내시다. 박치경이 상주(尙州) 전성촌(前城村)에 가옥 세 칸을 사들여 신사 댁 한집안 식구를 머물러 살게 하다.
10월에 신사가 손병희, 박인호, 송보여(宋甫汝)와 더불어 끌어들여 치성을 가섭사(迦葉寺)에서 거행하시다.
24일에 신사가 강서(降書)를 받으시니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리시어 임금을 내고 스승을 내었으니 오직 상제를 돕게 함이라” 하였으니, 임금은 교화와 예악으로 만민을 화(和)하고 법령과 형벌로 만민을 다스리고, 스승은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후생(後生)을 가르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후생을 이루게 하나니, 다 상제(上帝)를 돕는 것이니라. 아! 우리 도인들은 공경히 이 글을 받으라.
파경(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때 천명을 보존한다” 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공경함이오.
추성(鄒聖)이 이르기를 “함이 없이 되는 것은 하늘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믿음이니라.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여 하늘에 죄를 얻지 말고, 정성과 충성을 다하여 위에 죄를 얻지 말라.
만물이 나고 자람이여, 어떻게 그러하고 어떻게 그러한가. 조화옹의 거두고 저장함이여, 스스로 때가 있고 스스로 때가 있도다.
물의 근원이 깊음이여, 가물어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나무의 뿌리가 굳건함이여, 추워도 또한 죽지 아니하도다.
도깨비가 낮에 나타남이여, 저 어떤 마음이며 저 어떤 마음인가. 숨어있는 벌레들이 구멍에 삶이여, 또한 앎이 있고 앎이 있도다.
마른 나무가 봄을 맞음이여, 때요 때로다. 불상(佛像)이 성품을 봄이여, 정성이요 정성이로다.
알고 알았노라. 정성스러운 마음과 간교함과 박잡(駁雜)함을 알고 알았노라. 그 주인이 있으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 생각함이 이에 있어 상제를 도우면 심히 다행하고 다행 하리라.
만물의 조화여, 무극하고 무궁하도다. 놀라워라, 이 세상에 우리 도여. 어두울 때도 있고 밝을 때도 있도다.
경신년에 덕을 폄이어, 어찌 운이 아니며 어찌 명이 아닌가. 갑자년에 당한 일이여, 이 또한 운이요 이 또한 명이로다.
주인의 한 마음이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킴이로다. 두 글자(천주)를 보고 지목함이여, 어찌 서양 사람이 먼저 행한 것인가.
큰 운이 장차 넉넉함이여, 새 명을 받들어 열고 이루리로다. 아! 주인은 공경히 받아라. 공경히 받아라.
이때에 신사가 강서(降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손병희, 손천민을 둘러보고 일러 말하기를 “파경(葩經)은 어떤 책이며 추성(鄒聖)은 누구요?” 또 말하기를 “글 뜻이 어떠하오?” 하시다.
신사가 당시 사람이 천주(天主) 두 자로 지목함을 피하기 위하여 강서(降書)로 주문(呪文)을 개작하여 한때 권한으로 행하시니 “상제를 받들어 모시는 일로 한 조각의 마음으로 조화가 정해지고 모든 일을 알 수 있다”더라.
신사가 강서에 말하기를,
“슬프다, 이 세상 사람의 앎이 없음이여, 차라리 새와 짐승을 돌아보아 말하리라. 닭의 울음에 밤이 나누어짐이여, 개가 짖음에 사람이 돌아오도다. 멧돼지가 칡을 다툼이여, 창고의 쥐가 있을 곳을 얻었도다. 제나라 소가 연나라로 달아남이여, 초나라 범이 오나라에 오도다. 중산(中山) 토끼가 성을 차지함이여, 패택(沛澤) 용(龍)의 한수(漢水)로다. 다섯 뱀의 대가 없음이여, 아홉 말이 길에 당하도다.”
신사가 또 강서에 말하기를,
“아아! 밝은 것은 어두움의 변함이니, 해가 밝은 것은 사람마다 볼 수 있고 도의 밝은 것은 나 홀로 아는 도다.
명이란 것은 운을 짝함이니, 하늘의 명은 다하지 못하고 사람의 명은 어기기 어렵도다.
덕이란 것은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여 나의 도리를 행함이니, 사람의 돌아오는 곳은 덕이 있는 곳이니라.
도란 것은 갓난아기를 보호하듯이 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수련하고 도를 이룸을 일이관지(一以貫之) 함이니라.
정성이란 것은 마음의 주인이자 일의 요체가 되나니, 마음을 닦고 일을 행함에 정성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느니라.
공경이란 것은 도의 주인이자 몸으로 행하는 것이니, 도를 닦고 몸으로 행함에 오직 공경으로 종사하라.
두려움이란 것은 사람이 경계하는 바니, 하늘의 위엄과 신의 눈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도다.
마음이란 것은 허령(虛靈)의 그릇이요 화복의 근원이니, 공과 사 사이에 득실의 도니라.”
신사가 강서로써 육임(六任)을 정하시니 말하기를 “교장(敎長)은 바탕이 진실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삼고, 교수(敎授)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가히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삼고, 도집(都執)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기강이 분명하고 옮고 그름의 한계를 아는 사람으로 삼고, 집강(執綱)은 옮음과 그름이 분명하여 가히 기강을 잡고 벼리가 될 사람으로 삼고, 대정(大正)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고 부지런하고 후덕한 사람으로 삼고, 중정(中正)은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으로 삼는다.”
이달 28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탄신 향례식을 거행하실 때 와서 참석한 도인이 매우 많더라. 이때에 신사가 제사 의식을 새로 정하시니 참례인은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예관(禮冠)과 예복(禮服)을 걸친 후에 초학주문(初學呪文)과 강령주문(降靈呪文)과 본주문(本呪文)을 세 차례씩 낭독케 하시고 또한 축사(祝詞)를 지어 고하시니 그 축사에 말하기를,
“도를 받든 제자들은 교화하고 훈육하는 대열에 있으면서, 도를 전해 주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심학(心學)을 통하여 거의 수련의 방법을 익혔습니다. 경신년(1860) 여름의 운수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것이고, 갑자년(1864) 봄의 변고는 여지없이 원통함을 알린 것입니다. 끝없는 대도(大道)가 선생이 강령(降靈)한 날에, 한 조각 성심(誠心)으로 제자들이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마음을 다합니다”라 하시고 신사 또한 갑신 해에 대신사 탄강(誕降)하신 원인과 경신 해의 도를 받으신 창운과 갑자 해의 재난을 만나신 재앙의 가로막음과 다가올 도운(道運)이 크게 넉넉할 것을 설법하시다.
포덕 26년 을유(乙酉) 3월 10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재난을 만나신 22회 향례식을 거행하실 때에 제자 일러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산 지 12년이라. 그 사이에 다행히 하늘의 스승이 돌봐주는 큰 덕에 힘입어 무사하게 지내왔던지라. 지금 대신사가 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취를 피하라는 명을 받들었으니 오래지 않아 화가 이를지라. 자네들은 삼가라” 하시다.
5월에 신사가 보은군 장내(帳內)에 옮겨 사시다. 신사가 청주군 대주리(大周里) 서택순(徐垞淳) 집을 지나시다가 베를 짜는 소리를 들으시고 말하기를 “이는 한울님이 베를 자는 소리이라” 하시다.
6월에 충청도 관찰사 심상훈(沈相薰)과 단양군수 최희진(崔喜鎭)이 같이 도모하여 신사를 체포코자 하더니 신사가 밤 꿈에 대신사의 영혼의 가르침을 받아 장한주(蔣漢柱)를 이끄시고 공주(公州) 마곡리(麻谷里)에 가서 잠깐 자취를 숨기시니 이때에 도인 강시원, 이경교(李敬敎), 깁성집(金成集) 세 사람이 체포되었더라.
7월에 신사가 보은에 다시 돌아와서 김연국과 장한주를 이끄시고 영천군(永川郡) 화계동(花溪洞)에 가서 움막을 치고 땅 속에서 기거하시다.
9월에 신사가 집안사람들을 이끄시고 상주군 화령(化寧) 전성촌(前城村)에 옮겨 사시다. 이전에 신사가 떨어져 숨어계실 때 약간의 살림살이를 단양군수 최희진에게 모두 빼앗기고 어찌할 방법 없이 괴롭게 앉아있더니 제자 서인주(徐仁周)와 황하일(黃河一)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두루 힘써 겨우겨우 집안일을 지탱하시다.
11월에 신사의 옷이 엷고 몸이 추움을 근심하여 도인 이치흥(李致興), 박치경(朴致京)이 무명(白木) 7필(疋)을 바치다. 이때에 신사가 도를 강의하며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청주 서택순(徐垞淳 : 오순[虞淳])의 집을 지나다가 그 자부(子婦)가 베를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되 자네의 자부가 베를 짜느냐 한울님이 베를 짜느냐 하니, 서군이 내 말을 분별하지 못하였나니. 어찌 서군 뿐이리오. 한 시대의 사람이 모두 그러하도다.
대개 하늘과 땅은 귀신이며 귀신 역시 조화니라. 그러나 귀신이라 하며 조화라 함은 다만 한 기운이 시킨 바니. 어찌하여 꼭 그렇게 사람만이 한울님을 모셨으랴? 천지만물이 시천주(侍天主) 아님이 없나니. 고로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 것(以天食天)은 우주의 항상의 이치니라. 그러나 자네들은 하나의 살아있는 물체를 이유없이 해치며 하나의 살아있는 목숨을 이유없이 손상함은 한울님으로써 한울님을 손상함이라.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만물순응(萬物順應)의 도를 통한 연후에야 가히 앎에 도달할진저.
도가(道家)의 아낙네가 어린 아이를 때림은 이 한울님의 뜻을 손상하는 것이니 이를 경계할 것이며, 또 도가에 사람이 오거든 손님이 왔다 말하지 말고 한울님이 인간세계에 내려오셨다 일컬어라.
사람은 즉 하늘이며 하늘은 즉 사람이니 사람 외에 특별히 하늘이 없고 하늘 외에 특별히 사람이 없느니라. 마음은 어느 곳에 있느뇨. 즉 하늘에 있고 하늘은 어느 곳에 있느뇨. 즉 마음에 있나니. 고로 마음은 즉 하늘이며 하늘은 즉 마음이라. 마음 외에 특별히 하늘이 없고 하늘 외에 특별히 마음이 없나니. 이 이치를 통하면 가히 도에 가까울 지로다.
생각하라. 아이가 태어날 그 처음에 누가 큰사람이 아니며 누가 성인(聖人)이 아니랴. 그러나 뭇사람은 어리석어 마음에 뜻을 잃음이 많되 큰사람은 밝고 밝아 본래의 성정을 잃지 않고 그 마음, 그 덕, 그 됨이 모두 하늘과 더불어 크나니. 고로 하늘이 만드는 바틀 성인도 또한 능히 만드느니라.
예컨대 이에 병든 사람이 있다 하면 마음에 스스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능히 병을 생기게 하는 이치가 있으니 어찌 병을 낫게 하는 이치가 없으랴?’ 하는 큰 결심으로 마음을 합치고 기를 합치면 신이 느끼고 되게 응하여 만 가지 병이 약 없이도 스스로 효험을 보기에 이르나니. 우리 교의 영부(靈符)라 함은 마음이 합치고 기가 합침을 표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늘을 믿는다 함은 즉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믿는 것이니라.
또 생각하건데 사람의 행동이 마음이랴 기랴. 마음이 기를 시킬까 기가 마음을 시킬까. 또 마음이 기에서 나오는가 기가 마음에서 나오는가. 마음이 합치지 못하면 기가 그 법도를 이지러뜨리고 기가 바르지 못하면 마음이 그 경로를 벗어나니. 고로 그 뿌리를 궁구한 즉 귀신이라 하며 심성(心性)이라 하며 조화라 함이 모두 하나의 기가 시키는 바인저. 움직임은 기며 움직이고자 함은 마음이며 능히 구부리고 능히 펼치고 능히 변하고 능히 되는 것은 귀신이며 하루의 쓰임과 일을 행하는 것은 이런 조화니.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름은 한 가지 이치며 한 가지 이치 또한 여러 가지로 다름이니라. 사람이 모두 푸른 하늘을 우러르고 이를 하늘이라 하나니, 이는 하늘이 있음만 알고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알지 못함이라. 나의 보고 듣고 말하고 쓰는, 나의 굽히고 피는 동작이 어느 것이 귀신 아닌 것이 없으며 조화 아닌 것이 없나니. 결국 사람은 하늘의 영(靈)이며 사람은 하늘의 정기(精)이며 하늘은 만물의 정기이니. 고로 사람의 도는 즉 하늘의 도요 하늘의 도는 즉 사람의 도니라. 남편이 화평하고 아내가 따름은 우리 도의 첫걸음이니 도의 통하고 안 통함이 모두 안팎의 합치고 합치지 못함에 있느니라. 안팎이 합치지 못하고 어찌 한 가정을 합치며 한 가정을 합치지 못하고 어찌 남을 합치리오.
아내가 혹 남편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든 남편은 정성을 다하여 절하라. 따뜻한 말과 따른다는 말로써 한절 두절하면 비록 도척(盜跖)의 악이라도 반드시 감화가 되느니라.
아내는 한 가정의 주인이라. 아내가 합치지 못하면 비록 날로 삼생(三牲)의 쓰임으로써 한울님을 공양할지라도 반드시 감응할 바 없느니라.
우리 도는 큰 운이라. 장차 몸으로 가정으로 나라로 천하에 그 됨이 미칠지니. 우리 도 안에는 요순의 성인도 많을 것이오 공맹의 덕도 많을 것이라. 천하 각 마음의 수많은 조짐이 우리 도를 얻어 같이 한 몸으로 돌아가면 이것이 곧 도덕문명의 세계니라.
우리 스승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처음 만드시니 무극대도는 유(儒)가 아니며 불(佛)이 아니며 선(仙)이 아니니라. 천지우주의 절대 원기와 절대 영성(靈性)을 잡아 귀신, 기운조화의 근본을 처음 만들어 밝히시니 내 잠들어 있는 사이인들 어찌 선생의 남긴 가르침을 잊으리오. 선생의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본뜻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사람을 섬김을 하늘과 같이 하라 하셨다. 고로 우리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라도 역시 하늘의 말로 알고 이를 배울 것은 배우며 스승으로 삼을 것은 스승으로 삼아라. 지금 자네들을 보건대 스스로 높이는 자 많도다. 위가 미덥지 못하면 아래가 의심하고 위가 공경하듯 하면 아래는 반드시 뽐내며 건방지나니. 이는 선사의 경계한 바니라. 위에 있는 자 어찌 반드시 위에만 있으며 아래에 있는 자 어찌 반드시 아래에만 있으랴. 두목의 아래에도 반드시 싸움에서 모두 이기는 큰 두목의 바탕이 있나니 자네들은 이에 삼가라.”
포덕 27년 병술(丙戌) 4월에 신사가 제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올해에 고치기 힘든 질병이 크게 치성하리니 너희들은 도량(道場)을 맑고 깨끗하게 하고 마음이 응하고 기운이 응하면 질병의 액운을 가히 면하리라” 하시더니, 6월에 과연 악질(惡疾)이 크게 치성하여 전염에 4월 벗어난 자가 백에 하나로 희소하였으되 오직 도가에는 해를 입은바 없었고 신사가 거처하는 마을 40호에는 질병에 걸린 자가 하나도 없더니, 이때에 충청, 전라, 경상, 경기 등지의 사람들이 신사의 미리 가르침으로 질병을 벗어나심을 듣고 오는 자가 많더라.
포덕 28년 정해(丁亥) 정월 1일에 봄에 한번과 가을에 한번 각 49일로써 기도식을 거행케하시다.
이날에 신사의 강시가 있으시니 말하기를,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지으니 원통봉(圓通峰) 아래서 또 통하고 통하였노라.”
3월 21일은 신사의 회갑 날이라. 멀고 가까운 곳의 도인이 다수가 모두 모여 잔을 바치고 오래 살기를 기원하다.
이때에 신사가 서인주, 손천민과 더불어 정선군 유시헌 집에 가서 장차 77의 공을 행하고자 하실 때, 시헌이 말하기를 “갈래산은 일찍이 스승의 단을 열고 도를 강의하신 곳이라. 이곳에 와서 수련함이 어떠하니있가?” 신사가 즐겁게 허락하시고 곧 갈래산에 들어가 공 드리기 시작한 날부터 공이 끝내는 날까지 무릎을 모아 꿇어 앉아 자지도 눕지도 아니하시더니 공 드림이 끝나는 날에 신사의 강시가 있어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사월에 사월이 오니
금사(金士) 옥사(玉士) 또 옥사로다.
오늘 내일 또 내일
무엇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알리.
날이 가고 달이 오고 새 날이 오니
천지의 정신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도다.
이 달에 신사가 보은 장내에 되돌아와 사시면서 몸소 밭갈이 일을 하시다.
이때에 사방에서 도를 듣고자 하는 선비가 나날이 더하여 나와 상대하여 응함에 겨를이 없는 고로 신사가 육임소(六任所)를 정하여 각 두목으로 하여금 매달 한 차례씩 와서 강의를 듣게 하시고 또 규약을 정하되 제자가 만약 육임의 먼저 내려준 인허를 얻지 못하면 선생의 방에 와서 아뢰지 못하게 하니 지금부터 신사의
포덕 29년 무자(戊子) 1월에 신사가 전주에서 기천식(祈天式)을 마치시고 제자 십여 인과 더불어 삼례리(參禮里) 이몽광(李夢光)의 집에 가시니 그 집에서 이미 불을 때어 지은 밥이 다만 두 사람 분이오, 다시 남은 쌀이 없는지라. 주부가 그 부족함을 매우 근심스러워 하더니 남편이 말하기를 “먼저 신사께 바치고 다시 융통성있게 처리함이 가하다” 하여 신사께 밥을 드리더니 밥솥에 밥이 남은 것이 있어 십여 인이 먹고도 밥이 오히려 남았다.
3월 10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조난 25회 기도식을 거행하실 때 신사 그 당시 사람의 지목을 염려하여 도인의 많은 사람이 와서 참석함을 금하시고 다만 육임과 두목 몇 사람과 더불어 예를 행하시며 제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멀지 않아 반드시 서울(京師)로부터 화가 있으리니. 자네들은 서로 왕래하지 말고 제각기 스스로 삼가라” 하시며 또 각 포에 널리 알리시되 숨어서 도를 닦으라 하시다.
포덕 30년 기축(己丑) 7월에 신사가 지목의 매우 급함을 미리 아시고 교인의 오고 감을 금하시며 숨어서 하늘에 기도하시다.
이때에 신사가 육임소를 파하시고 괴산군 신양동(新陽洞)에 옮겨 사시니 강무경(姜武卿), 방동구(方東九), 정영섭(丁永燮), 조상갑(趙尙甲)은 지목의 의심으로 체포되다.
10월에 신사가 인제군 김연호(金演鎬)의 집에 피하여 이르셨더니 이때 포졸이 몰래 찾는지라. 다시 간성군(杆城郡) 왕곡리(旺谷里) 김하도(金河圖)의 집에 옮겨 이르러 그 후원의 한 방을 택하여 머무실 때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겨울을 지내시다.
11월에 신사가 경상도 김산군(金山郡) 복호동(伏虎洞) 김창준(金昌駿)의 집에 가서 친히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일반 부인에게 널리 퍼트리시니 이는 도를 닦는 근본이 부인에게 있는 까닭이더라.
1. 부모에 효도하며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며 형제자매에게 우애하며 아들과 부인을 애휼(愛恤)하며 노예를 자식과 같이 사랑하며 소와 말, 육축(六畜)이라도 학대하지 말라. 만일 이에 반하면 한울님이 노하시나니. 삼가 이에 범하지 말라.
2. 아침과 저녁밥 쌀을 내올 때에 한울님께 마음으로 고하고 반드시 청결한 물을 부어 음식을 청결히 하라.
3. 무엇이든지 묵은 밥을 새 밥에 함께 섞지 말라. 그리하면 한울님이 감응하지 아니하시나니라.
4. 아무 물이나 때마다 함부로 버리지 말고 반드시 버리는 곳에 버려라. 가래나 콧물을 아무데나 토하지 말라.
5. 취침할 때에 마음으로 고하며 나가고 들 때에 마음으로 고하며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한울님께 마음으로 고하라.
6. 모든 사람을 한울님으로 인정하라. 손님이 오거든 한울님이 오셨다 하라. 어린 아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
7. 아이를 뱀이 있거든 몸을 더욱 조심하되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지 말라. 만일 불결한 것을 먹으면 어린 아이에게 병독이 미쳐 태어날지라도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나니라.
8.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하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옳고 그름 함이니라.
9. 무엇이든지 탐하지 말고 다만 부지런할지라.
포덕 31년 경인(庚寅) 3월에 신사가 손병흠(孫秉欽)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손병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오래 거주함이 불가하니 자네의 가까운 곳으로 옮겨 살고자 하노라” 하니, 이때에 손병희, 손병흠 형제가 스스로 가마를 들고 맞이하러 와서 충주군 외서동(外西村) 복평(洑坪)에 있게 하시다.
5월에 신사가 사람을 잡아 가두고 벌하는 것이 점점 준다는 소식을 들으시다.
7월에 신사가 양구(楊口), 간성 여러 군을 두루 살피시고 인제군 남면(南面) 성황거리(城惶巨里) 이명수(李明秀)의 집에 이르러 잠시 머무시더니 이때 새 소리를 들으시고 말하기를 “저것 또한 시천주(侍天主)의 소리니라. 크도다. 천도의 신령스런 오묘함이 일에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만물의 이치가 아님이 없나니. 큰 하늘의 많은 별과, 큰 산과 티클 검부러기 모두 이 천도의 빛이니라. 지금 어리석은 습속이 산에 빌고 물에 빌어 복을 기원하는 자 또한 다른 효험이 없지 아니 하나니. 이는 천지의 신령스런 오묘함이 어느 곳이던지 비추어 임하지 아니한바 없는 증거이니라. 그러나 저 음험하고 간사함을 위하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받고자 함은 이 잘못 해석함이라. 화와 복은 결코 저쪽에서 오는 자만이오. 전혀 자기 마음의 만든 바뿐이라. 하나같이 만 가지 일의 화와 복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고 마음으로부터 없어지나니. 고로 마음은 화와 복의 틀이며 한울님의 권능이니라.”
이날에 신사의 강시가 있으시니 말하기를,
정성으로 마음을 지키되 혹 게으르면 사람의 변하는 것이 상전(桑田)이로다.
공경으로 마음을 지키되 태연히 하면 산하가 실로 푸른 바다로다.
민악(黽岳)에 봄이 돌아오니 상전이 벽해로다.
용이 태양주(太陽珠)를 전하니 궁을(弓乙)이 문명을 돌이키도다.
운이 열리니 천지가 하나요, 도가 있으니 물이 하나를 낳았도다.
물은 네 바다 하늘에 흐르고 꽃은 만인의 마음에 피었도다.
8월에 도인 장희주(張希周), 윤상오(尹相五)가 신사께 고하여 말하기를 “서인주가 지금 비록 보석(保釋)되었으나 재물이 있은 연후에야 가히 써 구하여 소생하겠나이다” 하니 신사가 손병희에게 명하여 500금을 마련해 보내게 하시고 제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서인주가 비록 석방되었으나 아직 죽음과 삶을 판단할 수 없다. 고로 내가 매번 식사 후에 하늘에 고해서 서인주의 회생을 비노니, 너희들도 매번 식사에 이로써 법도를 삼으라.”
포덕 32년 신묘(辛卯) 2월에 신사가 금성동(金城洞)으로부터 공주군 신평리(薪坪里)에 옮겨 사시다. 이때에 멀고 가까운 곳의 도유(道儒)가 나날이 더욱 나아가 의혹스럽고 어려운 것을 질문하더니 손병희가 하늘의 이기(理氣)를 물으시니, 신사가 하늘을 가리키시며 일러 말하기를 “이것만 하늘이 아니라. 사람의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즉 하늘과 땅이 원래대로 합쳐지는 하나의 기운이니 사람을 하늘로 본 연후에야 이와 기의 참된 모습이 더욱 분명하리라” 하시다.
3월에 신사가 제자와 더불어 교리를 묻고 답하실 때 신사가 물어 말하기를 “자네들은 강화(降話)의 이치를 아느뇨?” 손병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이치는 즉 하늘의 이치로 받은 바이니, 하늘과 사람은 그 마음속의 영혼이 하나이라. 고로 사람이 육체의 욕망을 걷어내고 순수한 마음속의 영으로써 말하면 그 말은 곧 하늘의 가르친 바니. 하늘의 말과 사람의 말의 구별은 다만 공과 사의 구별과 같니이다” 하니 신사가 조용히 계시고 또 물어 말하기를,
“무엇을 하늘이라 말하나뇨?” 김연국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날고 헤엄치고 동물과 식물이 다 하늘의 한 부분입니다” 하니 신사가 조용히 계시고 또 물어 말하기를,
“하늘과 마음과 기는 어떠한 것이뇨?” 손천민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마음은 즉 하늘이오 하늘은 즉 마음이니 마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마음이 없어 다만 큰 기운의 한 범위로써 활동할 뿐입니다” 하니,
신사가 또 조용히 계시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비슷하도다” 하시며 또 말을 계속하여 말하기를 “궁을(弓乙)은 우리 도의 부도(符圖)니라. 대신사가 도를 깨닫던 처음에 있어 세상 사람이 다만 하늘이 있음만 알고 하늘이 즉 마음속의 영혼임을 알지 못하는 고로 마음의 상징을 궁을로 표하여 한 세상의 사람이 각기 한울님을 모심을 가르쳤도다. 고로 나의 마음은 곧 상제의 궁전이니라. 만약 상제의 있고 없음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 하면 먼저 자기의 있고 없음을 의심할 것이오. 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을 방문하고자 하면 먼저 자기 마음 속 영혼의 오묘를 깨우칠 것이니. 사람의 말은 즉 하늘의 말이며 새가 우는 것도 한울님을 모시는 소리이니 우리 도의 뜻은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하늘로서 하늘을 화할 따름이니라. 내 마음의 공경하지 못함이 곧 천지의 공경하지 못함이며 내 마음의 안정되지 못함이 곧 천지가 안정되지 못함이니 만일 사람이 있어야 무엇이 불효의 큰 것이냐 물으면 나는 반드시 나의 마음을 공경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함이 불효의 가장 먼저라 말하리라. 고로 나의 마음은 곧 한울님과 부모를 영원히 모시고 잊지 않으며 지극한 효도와 지극한 정성으로서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를 다함이 도인의 첫걸음이니라. 세상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치며 나로써 나를 쳐서 그 섞이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한울님의 명령을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니 한울님은 즉 누구요. 나를 위한 것이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이때에 호남도인 김영조(金永祚), 김낙철(金洛喆), 김낙봉(金洛葑), 김낙삼(金洛三), 남계천(南啓天), 손화중(孫和中)이 신사를 찾아뵈니, 신사가 말하기를 “금일 도의 운이 동방으로부터 먼저 나오니 동방은 목운(木運)이라. 나무가 서로 마찰하면 불(火)이 생길 것은 필연의 형세라. 사람의 마음이 화합하여 따르면 하늘이 반드시 마음을 따라 느끼나니라.” 또 말하기를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도중(道中)의 일을 맡아 처리하게 하되 그 사람의 지휘를 하나같이 따르고 어기지 않으면 도를 스스로 빨리 이루리라” 하시다.
5월에 신사가 태인군(泰仁郡) 김낙삼(金洛三)의 집에 이르러 육임첩(六任帖)을 골라 뽑아내시고 또 부안군(扶安郡) 김낙철(金洛喆)의 집에 이르러 또한 육임첩을 골라 뽑아내시고 전주군(全州郡) 서영도(徐永道)의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무시더니 이날에 호남신사(湖南紳士)가 날로 문(門)에 이르는 자 많되 참된 이치를 묻는 자는 없는지라. 신사가 슬퍼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도를 아는 자가 적구나” 하시고 마침내 ‘한 기운을 꿰뚫어보니 마음을 바르게 한 곳’의 한 시구를 몸소 지으시고 제자에게 보이시다.
이때에 신사가 윤상오의 집에 이르시니 윤상오는 호남 우도 두령이오 남계천(南啓天)은 좌도 두령이라. 문지(門地)가 서로 걸림으로써 두 사람이 서로 받아들이지 않아 다툼의 실마리를 야기하더니 신사가 남계천으로써 호남 좌우도 편의장(便義長)을 삼으시니 호남 인심이 이같이 화합하지 않는지라. 김낙삼이 고하여 말하기를 “호남편의장을 남계천으로 정하셨다 하니 이 사람에게는 결코 응하여 그대로 따르지 못하리로소이다” 하니 신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잘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도는 오만년 개벽의 운을 타서 무극대도(无極入道)를 처음 만들어 밝힌지라. 문지의 낮고 높음과 늙고 어린 등급의 구분은 좁은 소견과 미혹한 습속이니 어찌 논하리오. 비록 문지가 낮고 작은 자라도 두령의 자격이 있으면 그 지휘를 한결같이 따라서 도의 이치를 드러내어 밝힘이 가하다” 하시니 김낙삼과 여러 도인이 순종하여 물러가다.
6월에 금구 도인 김덕명(金德明)이 여름 옷 다석 건으로써 신사께 바치다.
10월에 신사가 청주군 금성동에 계시더니 밤 꿈에 대신사가 계란 500개를 주시거늘 신사가 두 손으로 공경히 받아 그 계란을 쪼게 보시니 모두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어 한꺼번에 길게 울고, 다만 2개의 계란이 썩어서 부화하지 못한지라. 신사가 꿈을 깨시고 이상히 여겨서 제자에게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 도 중 후일 도를 이룰 사람이 마땅히 이 계란과 같으리라.”
이때에 신사가 통유문(通喩文) 10조항을 지어서 제자에게 가르쳐 경계하시니,
“첫째, 윤리를 밝혀라. 둘째, 믿음을 지키라. 셋째, 업무를 지켜라. 넷째, 일에 임하여 지극히 공정하라. 다섯째, 빈궁한 사람을 서로 구휼하라. 여섯째, 남녀를 엄하게 분별하라. 일곱째, 예와 법을 중히 여겨라. 여덟째, 연원을 바르게 하라. 아홉째, 참된 이치를 연구하라. 열째, 어지럽고 복잡한 것을 금하라.”
하시고 인하여 설명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이 순환하여 오만년 큰 도가 처음 만들어 환해진지라. 세상의 마귀가 다 굴복될 것은 오래도록 삼칠자 신령스런 주문을 믿으려니와 때를 기다려 숨고 운을 따라 나오라. 도를 인정하여 닦으라. 도는 오로지 성경신(誠敬信) 세 자에 있고 하늘을 받들어서 섬기라. 하늘은 반드시 시정지(侍定知) 세 자에 있느니라. 어찌 세월이 쇠하고 운수도 깜깜하고 도는 희미하고 거짓말이 흥하여 도를 전하는 자는 환하지 아니하며 도를 닦는 자는 믿지 못하여 망령된 말과 속이는 주문으로써 도를 어지럽히고 법을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느뇨.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편안히 있기가 겨를이 없는지라. 아! 너희 도인은 한마음으로 이 10조를 삼가 좇아 지나치지 마라” 하시다.
12월에 신사가 충주군 외서촌에 옮겨 사심은 모두 도인 신재련(辛在蓮)이 주선한 힘이리라. 이때 제자가 신사께 물어 말하기를 “우리 도의 운이 어느 때에 크게 누리리있가?” 하니 신사가 말하기를 “산이 모두 검게 변하고 길을 모두 비단으로 둘러 여러 나라와 더불어 통상(通商)할 때라” 하시다.
포덕 33년 임진(壬辰) 정월에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비밀히 도학(道學)의 금령을 발하여 도인을 해하고자 하는지라. 신사가 이를 염려하시거늘 손병희가 신사를 모셔 맞이하여 진천군(鎭川郡) 부창리(扶昌里)에 옮겨 사시다.
5월에 신사가 김주원(金周元)의 힘으로 상주군 왕실촌(旺實村)에 옮겨 사시다.
7월에 서인주, 서병학(徐丙鶴) 두 사람이 신사께 와서 찾아뵙고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우리의 당면 임무가 급한 것이 오직 대신사의 억울함을 풀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원컨대 선생은 각지 도유(道儒)에게 알게 타일러 소(疏)를 지니고 궁문(宮門)에 부르짖어서 대신사 만고의 억울함을 씻으소서.” 신사가 일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지 못할 줄 아시고 허락하지 아니 하시니 두 사람이 성난 마음이 있더라.
10월에 서인주, 서병학 두 사람이 신사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도인을 공주에 모아서 글을 관찰사 조병식에게 바치다.
이 달에 신사가 입의문(立義文)을 지어 각지에 두루 깨우치시니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도가 죽고 글이 해어진 나머지 황천(皇天)이 돌아보고 도우사 우리 대신사를 하늘에서 내리시고 무극대도를 주심은 덕을 천하에 펼치고자 함이러니. 불행히 갑자(甲子) 봄에 이르러 사도(邪道)의 무고를 받아서 목숨을 대구에 바치셨으니 제자된 자는 마땅히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억울함을 풀 길을 생각할 것이오. 만약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천대(泉臺)의 아래에 원하고 따라 교화하고 훈육하는[薰陶] 반열에 있는 것이 당연히 행할 뜻이거늘. 오호라. 조난 30년에 큰 억울함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도인된 자는 혹은 큰 뜻을 버리고 작은 이익을 탐하여 바라는바 자기 배를 채우고 이익을 많이 내는 것뿐이오. 바라는 바 오랜 병이 스스로 나는 것뿐이라. 알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리오. 오직 우리 도인은 능히 억울함을 풀 방편을 생각하여 혹 게으르지 말지어다.”
27일에 신사가 또 통유문을 지어 각지 도인에게 나누어 주시니 그 글에 말하기를,
“하늘을 떠받치고 땅에 우뚝 서서 선사의 은덕을 받아서 도유(道儒)된 자 누가 억울함을 풀 마음이 없으리오. 그러나 지금까지 삼십여 년에 지목의 독하고 엄함으로 인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한 자 또한 하늘이오. 지금에 금영(錦營) 공주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완부(完府) 전주에 탄식하며 부르짖고자 하는 자 또한 하늘이라. 각 두령은 포(包) 안의 도우(道友)를 관장하여 일제히 삼례역(參禮驛 : 전주역을 이름)에 와서 모여라. 이 글을 보고 와서 모이지 않으면 이는 그 죄가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고 사문(師門)에서 내보냄이오. 그 뜻이 신과 하늘에 어그러짐이니.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의를 해함을 엄히 반성하여 간사한 사람의 그릇된 말을 듣지 말라.”
11월 1일에 각지 두령이 포 안의 도인을 이끌고 삼례역에 나아가니 그 때 참석하여 모인 자가 수천이라. 논의를 마침에 신사가 의문(義文)을 지어 영(營)에 보내시니 그 글에 말하기를 “우리 스승 용담 최선생은 상제의 간곡한 명령을 받아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는 도로써 장차 덕을 천하에 펼치고 창생을 다 도탄에 빠진 형편에서 구하고자 하시더니 불행히 사학의 무고를 입어서 대구에서 몸으로서 순도(殉道)하였으니, 오호 슬프도다! 우리들은 모두 최선생 문하에서 덕을 배우는 사람이라. 억울함을 풀 한 가지 마음이 잠잘 때는 함께 꿈꾸고 밥 먹을 때는 함께 씹으니 한 목숨이 아직 남아있음에 이 뜻이 어찌 쉽게 태만하리오. 이제(夷齊)를 가리켜 탐하다 하면 오히려 가하려니와 서교(西敎)로써 우리 스승을 의심하면 우리들이 비록 주륙(誅戮)을 만 번이나 받을지라도 맹서코 깨끗하고 밝음을 푼 연후라야 그치리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원통함을 마시고 슬픔을 참은 지 30년에 지극한 억울함을 아직 풀지 못하여 대도를 밝히지 못하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뇨. 이는 실로 우리들의 정성스럽지 못함과 영리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세속의 사람이 그 속사정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고 바람 따라 입을 쫓아 이단으로써 지목하나 그러나 지금 세상에 공자의 학문이 아니라도 도가 된 자가 한 둘에 그치지 않거늘 전혀 실마리를 묻지 아니하고 오직 우리 동학에 이르러 공격하고 배척하며 밀치고 찌르기를 나머지 힘이 있지 않을 때 반드시 서학이라 칭하나 우리 스승이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배우시니 동이 어찌 서가 되며, 또 하늘에서 배움이오 사람에서 배움이 아니거늘 어찌 하늘을 허물하여 우리 스승을 죄 함이 가하리오” 하시고 또 말하기를,
“열읍수재(列邑守宰)가 우리 도를 서학의 나머지 파로써 지목하여 낱낱이 조사하여 잡아 가두며 돈과 재산을 빼앗아 취하여 죽은 자와 상한 자가 연이어 끊어지지 아니하고 향곡(鄕曲) 호민(豪民)이 듣는 대로 침학하여 집을 부수고 재산을 빼앗는 것이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도유로써 이름한 자는 거의 다 이곳저곳 떠돌아 머물러 살 곳을 정할 바 없느니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비록 이단으로써 금한다 말할지라도 말로써 양묵(楊墨)을 거부하는 자는 성인의 도라 말로써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혹 가하거니와 양묵을 거부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탐한 것도 성인의 도라 함은 듣지 못한 바이로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이 성조화육(聖朝化育)의 백성으로써 선성(先聖)의 글을 읽고 국군(國君)의 땅에서 밥을 먹되 오직 이 학문에 뜻을 둠은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효도하고 친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할 뿐이오. 이를 버린 밖에는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하시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도를 닦아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는 바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포덕천하(布德天下)의 큰 바람 뿐 이니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특히 가엽게 여기고 은혜를 배품을 더하여 임금님께 인도하여 듣게 하여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풀며 각 읍에 관문(關文 : 지금의 훈령)을 보내어 조잔한 백성의 죽어 감을 구하고자 하노라” 하시다. 관찰사 이헌직(李憲稙)이 제결(題決)로 말하기를, “동학은 조가(朝家)의 금하는 바라. 떳떳한 성품을 이미 갖추었으면 어찌 바른 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 가서 스스로 죄를 범하리오. 다시 우둔하여 알지 못하지 말라” 하였더라. 도유가 글을 바친 후 5, 6일에 비로소 이 제결이 나오니 모인 사람 사이에서 여러 논의가 더더욱 분하고 억울한지라. 다시 논의하여 정해서 이달 7일에 다시 호소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글을 바친 지 이미 여섯 날을 지난지라. 각하의 백성들의 괴로움을 널리 살핌을 삼가 기다릴 때 풍찬노숙(風餐露宿)하여 굶주림과 추위가 살갗을 끊고 구렁텅이가 닥치되 매일매일 기대하는 바는 오직 억울함을 풀고 폭압을 금하여 줌에 있더니 각하가 오히려 바른 것을 버리고 사악함에 가서 스스로 죄를 범한다 하며 또 돌아가서 다시 어지러이 현혹하지 말라 하니, 우리들이 하늘을 우러러 길게 부르며 땅에 엎드려 크게 한숨지어 무엇으로 연유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우리들의 마음에 지킨바 뜻은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풀려 함이오. 선사에게 배운 바는 오직 유불선의 도를 합하여 충군효친(忠君孝親)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이단이라 할진대 이와 같지 않은 것을 오히려 정학(正學)이라 하는지 우리들은 알지 못하노라” 하시며 또 말하기를,
“지금 각 읍 지목의 재앙이 물과 같이 더욱 깊으며 불과 같이 더욱 치열하여 수재(守宰)로부터 이서(胥吏) 군교(軍校)와 향간(鄕奸) 토호(土豪)까지 우리들의 가산 탈취하기를 자기의 가진 것처럼 보고 때리고 능멸하고 학대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는 바니 가련한 이 중생이 호소할 곳이 없는지라. 각하는 가엽게 생각하여 임금님께 장계로 아뢰고 각 읍에 관문을 보내 선사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씻어버리고 아전들의 폭행을 금하고 그만두게 하여 달라”
하고 수만 도유가 퇴거치 아니하고 관찰부 아래에 머물더니 9일에 이헌직이 전과 같이 제결하고 부득이 여러 읍에 관문을 보내니 그 글에 말하기를, “동학은 조가에서 금하는 바라. 영읍이 마땅히 조정의 칙령을 받들어 금할 따름이거늘. 지금 들으니 각 읍이 금단을 빙자하고 돈과 재물을 빼앗아 취하며 사람의 목숨을 상하고 해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하니 헤아리건대 정법(政法)에 어찌 이와 같음을 용서하리오. 감결(甘結 : 지금의 훈령)이 도착하는 즉시 경내에 영으로 단속하여 만일 미혹하고 잘못 이해하는 백성이 있거든 그 마음을 바로잡아 정학(正學)을 닦게 하고 관속배(官屬輩) 이 한 항목은 비록 푼문(分文 : 엽전 1푼[分])이라도 빼앗아 취하지 못하게 금단하라” 하였더라. 이때 도유가 신사께 헌호(軒號)를 올리며 말하기를 법헌(法軒)이라 하고 지금부터는 법헌의 지휘를 한결같이 따를 뜻으로 팔도(八域) 도인에게 두루 깨우치게 하고 곧 해산하니 그 통유문(通諭文)에 말하기를,
“지금 금(錦)·완(完) 양영(兩營)의 모두 부르짖음은 대신사 억울함을 풀 뜻에서 나옴이라. 황하수가 맑아질 운이 아직 더뎌서 도를 비록 드러냈으나 억울함을 펴지 못하였으니 우리 도인은 정성스런 마음을 곱절로 더하여 하늘에 기도하고 스승을 생각하며 다시 법사장(法師丈)의 지휘를 기다려 억울함을 푸는 것에 종사함이 곳 우리들의 도리요. 이 영의 제사에 이 같이 깨달았으니 도유된 자는 곧 집으로 돌아가 도를 닦아 길 위에서 방황하지 말라” 하다.
이전에 신사가 삼례역 모인 곧에 가서 참석코자 하시다가 중로에서 낙상하여 형세가 할 수 없어 회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손천민에게 부탁하여 모인 곳에 논의를 내어 놓으시니 그 글에 말하기를,
“금번의 큰 뜻은 천지에 건의할지라도 패악함이 없고 귀신에 질문할지라도 의혹이 없는지라. 돌아보면 이같은 늙은 물건이 각 접에 글을 보내 연이어 모두 나아가게 하며 물러난 후 모임에 가게 하다가 중로의 낙상에 묵은 허물이 그 틈에 일어나서 모임에 참석치 못하니 또한 한스럽고 또한 부끄럽도다. 아아! 큰 운이 장차 큼에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질 새. 중생을 지극한 재앙에서 구제하고 큰 뜻을 장차 뒤돌아가 떠받치고자 하나 그러나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아직 펴지 못하니 이는 곧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바라건대 자네들은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공경으로 자나 깨나 사이라도 늦추지 말고 마음과 기를 바르게 하여 신과 하늘에 죄를 짓지 말라. 세금을 냄에도 때가 있으며 교린(交隣)에는 서로 화목하며 행하기를 반드시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하며 금하기를 반드시 주색잡기(酒色技鬪)로 하고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기도하고 생명을 영원히 하며 성인의 도를 떠받들어 하늘을 받들고 이치에 순응하라.“ 또 말하기를 “양영(兩營) 관청의 제사(題辭)는 생각건대 반드시 열람하였으리니 한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타고난 천성과 도를 지키는 마음을 죽을 때까지 변하지 말라.” 또 말하기를, “복합(伏閤)의 건은 바야흐로 논의하여 다시 도모하노니, 마땅히 하회를 기다리면 지휘가 있으리라.” 또 말하기를 “전에 큰 뜻으로 나아갈 때 집이 기울고 재산을 다 잃은 자는 매우 불쌍한지라. 집에서 멀찌감치 보면서 잘 먹고 따뜻한 곳에 있던 자는 어찌 마음 편함이 가하리오.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도와 흩어지지 않게 하며 원근이 마음을 합쳐 이단에 이르지 아니하면 늙은 물건의 병이 또한 회생하리라”
하시고 또 제자에 통유(通喩)하여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도를 닦는 선비는 누구누구를 막론하고 그 스승을 존중하고 그 학문을 숭상하면 그 마음은 하나이거늘. 세간의 요원한 무리는 애매한 무분별한 말로써 우리 도를 사악한 학이라 지목하여 읍재(邑宰)와 향호(鄕豪)가 재물과 돈을 빼앗아 취할 계교로써 도인을 보기를 돈(貨泉)과 같이 할 새. 각지의 도를 닦는 선비는 한꺼번에 모두 잡혀 장치 이르는 곳에 빈틈이 없으니 우리 무리가 양 영(營)에 글을 바친 바는 장차 재앙의 기미를 조금 늦추고자 함이라. 우리 도인의 두 차례 간 모임에 모두 인의자비(仁義慈悲)로써 서로 도와 지나치는 곳에 조금도 해한 바 없거늘, 요사이 듣기에 서학의 사람이 이유 없고 근거 없는 말로 서로 움직이며 뜬 말을 하며 무리를 불러 모아 우리 도인을 해하고자 한다 하니 이는 실로 위기로다. 그러나 황천(皇天)이 하늘에 있어 신명(神明)이 환하니 선악의 나뉨에 길흉이 반드시 따르니라. 그들이 비록 빠른 포(砲)와 날카로운 칼이 숲과 산 같음이 있은들 우리는 착한 도를 닦고 착한 도를 행할 뿐이니. 우리가 어찌 그것을 두려워하리오. 더욱이 서학을 하는 자도 또한 하늘의 양심이 있으리니 어찌 근거없는 말들을 지어내어 헛되어 서로 해치리오. 이는 의지할 곳 없는 무리가 속이는 말을 지어내고 비방을 만드는 것에 불과함이니 취하여 믿지 못할지라. 오직 도인은 고생을 참아내고 공부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스스로 단단히 하여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하시다.
12월 6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억울함을 펴기 위해 장차 궁문에 호소하고자 하실 때 먼저 도소(都所)를 보은 장내에 정하시다. 이때 사방의 도인이 나날이 구름처럼 모여 일에 두서가 없는지라. 고로 도소에서 도인에게 통유(通諭)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법사(法師)의 지휘를 지켜서 팔역의 도유를 포괄하고 육임의 이름을 뽑아내어 도소(都所)를 이곳에 설치한 것은 대신사의 억울함을 펼 한 가지 일이 시급함으로 써라. 고로 장차 뭇 논의를 널리 가려내서 일에 임해서 일을 논의함이러니 각 지역의 여러 친구가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 대단히 복잡한지라. 종일 맞이하고 보냄에 틈이 조금도 없으니 지금부터는 해당 두령이 인정하는 서명을 얻지 못하면 마음대로 소(所)에 들어오는 것은 허가하지 않으니 이 약속을 한결같이 지켜라” 하였더라.
이때에 회소(會所)에서 각 지역의 정세와 형편을 근거로 하여 글을 정부에 보내니 그 글에 말하기를,
“도는 사람으로써 이름한 바이니 같고 다름을 막론하고 각기 그 마음씨의 실제 있었던 일을 따라 이를 구함이오 헛된 이름 뿐 아니라. 고로 공자의 도를 행하는 자는 양묵을 가리켜 이단이라 하고 양묵의 도를 따르는 자는 공맹을 보되 이단이라 하나니. 다만 공맹만 바르고 양묵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대개 이단이라 함은 당세에 우리의 숭상하는바 도와 더불어 같지 않다 칭하는 명사(名辭)니라. 그럼으로써 예전에 또한 묵(墨)을 행하면서도 유(儒)로 이름하는 자가 있었나니. 이는 유를 숭배할 때에 그 숭배하는 바를 가림은 세상에 따라 이름만 좇는 자라. 만약 공정한 눈으로써 보면 반드시 이름의 다르고 같음이 있음으로써 그 마음의 바름과 사악함을 나누어 판단치 못할지라. 지금에 유가의 흐름과 불가의 흐름과 선가의 흐름이 각각 한 끝으로써 그 옳음을 스스로 뽐내나 그러나 쇠락하고 폐한 지 이미 오래된 지라. 고로 하늘이 우리들을 도우사 경신 4월 5일에 경주 용담에서 최 선생이 친히 상제의 강화를 받아서 무극대도를 비로소 세우시니 그 도의 원리를 듣건대 이르기를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진 자라. 몸의 묶인 것을 제거하고 나의 하늘로 돌아오면 사람이 곧 하늘이오 하늘이 곧 사람이라 하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합하여 하나 됨의 뜻이오. 또 가로되 유불선이 비록 문호를 각기 세워 서로 밀쳐 배척하나 그러나 그 근원을 궁구하면 모두 하늘을 뿌리로 하여 도가 된 것이라. 나는 이 세 가지 도에 대하여 그 지나침을 덜고 그 부족을 보하고 그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을 취하면 유의 인륜대강(人倫大綱)과 선의 청정자수(淸淨自修)와 불의 보제중생(普濟衆生)이 족히 우리 도의 삼과(三科)될 만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도는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문호를 정하며 포덕광제(布德廣濟)로써 목적을 삼은지라. 그 가리키는 바는 지극히 간략하되 그 품는 바는 지극히 넓도다. 다만 법도를 세우고 가르침을 말함이 당세의 숭상하는 바와 더불어 다르고 같음이 없지 않으니 평소 읊는 바 삼칠 성주(聖呪)에 천주(天主) 두 자가 있어서 한 세상의 지목의 큰 사건이 된지라. 그러나 그 지극한 정성과 하늘을 모시는 뜻과 지나쳐 귀하고 비천함의 오묘함은 실로 일반의 성정에 가히 예측할 바 아니라. 고로 지나치는 곳과 살고 있는 시골마을에 따르는 자가 구름같아 골짜기에 있으면 골짜기에 차고, 들에 있으면 들에 차는지라. 제자가 되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습관을 변하지 않아 하늘을 섬기기를 집안사람 섬기듯 하고 사람을 숭배함을 하늘을 숭배하듯 하니 만약 그 공덕이 사람에 미침을 논할진대 몰락한 시기(叔季)를 잡아당겨 아늑한 옛날(元古)을 의지하며 구천(舊天)을 고쳐 신천(新天)을 바꾼다 가히 일컫겠거늘. 세상에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아니하는 자는 옛 허물을 굳게 지키고 헛된 생각을 짜내며 무고함을 만들어 못에 빠지게 하고 또 돌을 던지는지라. 마침내 갑자 3월 10일에 대구에서 순도(殉道)케 하니 그 지극한 억울함과 지극한 고통은 사람과 신령이 더할 수 없이 처참하고 하늘과 땅이 참담하다 가히 일컬을 지로다. 아무개 등이 피를 머금고 눈물을 마신 삼십년에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아직 펴지 못한지라. 예전 날 금영(錦營)의 억울하여 움과 완부(完府)의 호소는 오로지 억울함을 풀고 폭압을 금하는 뜻에서 나옴이로되 어지럽고 얄팍한 세상 풍속이 그 속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동학으로써 지목하며 당고(黨錮)로써 당하여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개인의 일을 도모하여 돈과 재물을 빼앗고 아버지와 관계시켜 자식을 잡아가며 집을 부수고 재산을 다 빼앗으니 동학으로써 이름을 하는 사람은 거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지경에 있어 목숨을 의지할 곳이 없는지라. 대개 동학이라 일컬음은 특별히 다른 뜻이 없는지라. 다만 선사가 세상에 계시던 날에 동에 살고 동을 배움으로써 동학의 이름을 제창하여 서쪽에서 온 학을 짝하여 칭함이거늘. 뜻밖에 오늘날에 다시 동학금고가 일어나 도리어 서교의 왼 팔을 도우니 요원한 하늘아 이 어떤 사람이 이 같으리오. 충청도 관찰사(錦伯)가 즉 동학은 조가(朝家)에서 금하는 바요 내가 함부로 편하게 할 바 아니라 제결(題決)하니 진실로 조령(朝令)이 이러할진대 팔로가 같겠거늘. 어찌 홀로 금영(錦營)이 이 같으며 완영(完營)은 즉 다만 윤영기(尹榮起)의 말을 믿어 백성들의 정서는 돌아보지 않고 침해를 오로지 일삼으니 이로 인하여 수재(守宰)가 탐폭하고 향호(鄕豪)가 마음대로 학대하여 호서(湖西)에 있어서는 영동, 옥천, 청산군수의 백성을 어지럽히고 재산을 빼앗는 것과 호남(湖南)에 있어서는 무장(茂長), 고창(高敞), 김제(金堤), 만경(萬頃), 정읍(井邑), 여산(礪山) 아전의 사람에게 허물 씌우고 생명을 상하게 함이 더욱 극심하고 참혹하고 독한지라. 슬프다 무고한 억울한 소리가 하늘에 넘쳐나고 눈물이 빗물같이 땅에 넘치니 대개 한 사내가 그 하는 바를 얻지 못함은 묘당(廟堂)의 고통이오, 지극한 억울함을 얻어 펼 수 없음은 조가(朝家)의 흠 되는 일이니, 바라건대 이 정형(情形)을 장차 임금에게 올리라” 하였더라.
포덕 34년 계사(癸巳) 2월에 여러 도인이 크게 모여 신사의 억울한 일로써 궁중에 호소하기를 청하거늘 신사가 이를 따라 이에 도인 수만 여인이 소장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9일에 광화문(光化門) 앞에 엎드려 상소하니 그 때에 상소의 우두머리는 박광호(朴光浩)더라. 그 글에 말하기를,
“엎드려 질병과 고통에 부모를 부르며 죽음에 임해 부모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오 이치의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 신들은 모두 성상부모(聖上)과 부모의 적자(赤子)로써 이 질병 고통과 죽음에 임하는 지경에 즈음하여 이 지극한 억울함과 극심한 고통의 형상을 말하노니 대개 군부(君父)의 앞은 실로 망령되이 말할 바가 아니라. 엎드려 빌건대 특별한 베풀어 살피심을 가하여 그 정(情)을 용서하고 그 굽음을 용서하면 신들이 장차 죽는 날이 이 재조(再造)의 때가 될지라. 옛적부터 성제명왕(聖帝明王)이 사문(四門)을 열고 사총(四聰)을 달(達)하여 물(物)로 하여금 그 성(性)을 이루지 못함이 없게 하며 한 사내라도 그 할 바를 얻지 못한 자가 없게 함은 오직 하늘의 명을 공경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르며 민은(民隱)을 동정하고 민정(民情)을 돌아봄에 있을 뿐이라. 요 사이에는 유행(儒行)으로써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가 도에 대하여 형(形)을 밟고 정성을 세우는 실(實)은 없고 경서와 서적을 표절하여 밖의 단속을 오로지 숭상하니 거짓으로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독차지함이 출렁이며 흐르는 것이 다 이렇습니다. 무릇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이거늘 선비의 습상(習尙)이 이와 같으니 실로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랴. 어찌하여 다행하게도 하늘의 운이 순환하여 한번 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경신 4월 5일에 상천(上天)이 하민(下民)을 드러나지 않게 돕는지라. 경주 고(故) 학생 신(臣) 최제우가 한울님의 강화(降話)를 받아 사람을 가르치고 덕을 펼치니 가히 이 세상의 진유(眞儒)요 곧 창도(創覩)의 종학(宗學)이라 일컬을지라. 도를 행하고 덕을 편 지 불과 5년에 서학(西學)의 이름으로써 무고와 업신여김의 화를 졸지에 받아 영영(嶺營 : 대구)에서 목숨을 바치니 이때의 광경은 가히 하늘과 땅이 서운해 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컬을지라. 진실로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일을 범하였으면 법이 있어 용서받기 어려우리니. 어찌 감히 치욕을 벗을 것을 도모하리오만은 사람의 꾸밈으로 무고를 당해 이 흰 옥과 같이 흠이 없는 지극히 바른 도로 하여금 예전에도 떨친 바 없는 큰 화를 졸지에 입었으니 신들은 모두 최 선생의 연원사숙(淵源私淑)이라. 그 뼈를 깎는 고통과 원통하여 가습이 막히는 한이 마땅히 어떠하리오. 신들이 감히 그 들은 바를 숨기지 못하고 해와 달 아래에 드러냅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선성(先聖)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오직 우리가 다시 정한 것이라 하며 또 이르기를 공부자(夫子)의 도를 깨달아 보면 하나의 이치가 정한 바요, 오직 나의 도를 논하면 크게 같고 조금 다르다 하며 또 이르기를 우리 도는 넓되 약속한 것은 오직 성경신(誠敬信) 석자에 있는지라. 저 석자를 환하게 깨달은 연후에야 가히 도를 알리라 하며 또 이르기를 속세의 생각이 저절로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이 느림을 두려워라 하며 또 이르기를 유불선(儒佛仙)이 비록 말류(末流)의 폐가 있으나 그 근원을 궁구하면 모두 하늘에 의거한다 하였으니 지금에 그 저술한바 동경(東經) 여러 편을 살펴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주는 근원을 거듭 되풀이하고 성품과 몸이 서로 품고 나아가는 공부에 힘을 써서 그 참된 앎과 오묘한 해석이 오로지 밝고 환함을 봄이니 가히 천지간에 수와 문자가 있고 일컬을 것이오. 그 사람을 가르침에 완전히 변화기질(變化氣質)로써 하여 습관을 제거하며 정성스런 마음으로 하늘을 받들어 자기를 낮추고 사람을 우러르는 것으로 주지를 삼은 지라. 고로 한 차례 훈자(薰炙)를 거친 사람은 그 덕을 스스로 새롭게 하며 그 바탕이 스스로 되지 않음이 없어 문득 예전의 모습이 아닌지라. 대개 그 설교의 방편이 당세의 높이는 바와 더불어 가히 조금 다른 것이 이것이오. 그 동학이라 하는 것도 그 연고가 있으니 도는 비록 하늘에서 나왔으되 동방으로부터 처음 시작하여 동쪽사람이 배우는 바 되고 또 신들이 스승의 생각으로써 하되 서교(西敎)의 형세가 매우 빨리 퍼지는 지라. 고로 동학으로써 이름하여 그 실리(實理)가 같지 않음을 분명하게 가림이거늘 당세의 사람이 서학으로써 배척하여 남은 힘이 있지 않으니 사람의 선량치 못함이 어찌 이에 그치느뇨. 신의 스승이 일찍이 문인(門人)에게 일러 말하기를 ‘도는 비록 하늘의 도나 학인 즉 동학이니라. 하물며 땅이 동과 서로 나누어있나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일컬으며 동을 어찌 서라 일컬으리오. 공자는 노(魯)에서 태어나고 추(鄒)에서 풍화하여 이 세상에 전하였나니, 우리 도는 동에서 받아서 동에 베푸는 지라. 어찌 가히 서로써 이름하리오’ 하니 이는 동학(東學)으로써 이름을 얻은 바요 신들의 따르고 섬긴 바니 추측컨대 동학을 가리켜 서학으로써 공격하지 말고 동포(同胞)를 몰아 이단으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 옳거늘. 도신수재(道臣守宰)는 백성과 가족 보기를 지푸라기(草芥)같이 하고 향간토호(鄕奸土豪)는 도인 보기를 돈(貨泉)과 같이 하여 얽어매거나 멀리 유배 보내며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요구하기를 일의 마지막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으니 억울함이 맺혀도 알릴 방법이 없어 푸른 하늘이 되어 색이 변하고 적자(赤子)가 화(化)하여 이물(異物)이 된지라. 대저 이 도는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본을 삼되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두려워 하며 사람의 기강을 삼가 지켜 착함을 따르고 사악함을 버려 어리석은 사내와 어리석은 아낙내로 하여금 하늘 이치의 근본을 알고 사람의 도의 바른 뜻을 지켜 마침내 성인될 자는 성인이 되며 밝은 자는 밝게 되며 어진 자는 어질게 되게 하면 분명히 공자의 도라 일컫는 것도 또한 이에 벗어나지 못하지 않으리니. 어찌 동학의 치우친 이름과 서인의 나라 가르침으로써 지목하리오. 과연 만세(萬世)에 폐가 없고 천하에 끝이 없는 큰 도라. 또한 신들이 만약 바르지 못한 도와 근거없는 일로써 전하께 어지럽게 고하면 이는 스스로 임금을 속이고 스승을 배반하고 인륜을 능멸하는 규정을 범함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천지부모는 이 화육중(化育中)의 적자(赤子)를 빨리 동정하셔서 선사의 지극한 억울함을 펼치게 하며 신들 죽을 목숨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13일에 사알(司謁)이 칙령(勅令)을 받들어 입으로 전하여 말하기를, “상소의 격식이 사마(司馬)의 표(票)가 있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바치는 게 옳다” 하거늘 서로 논의하여 표를 얻고자 하였더니 위로부터 또 칙교(勅敎)가 있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기 집으로 모두 돌아가 그 일에 각기 편안히 하면 원하는 바에 따라서 베풀리라” 하다. 이 명을 들음으로부터 일반 도인이 곧 물러가 그 고향으로 각기 돌아가다.
이때에 관리의 살인과 약탈이 나날이 심한지라. 신사가 각지의 도인에게 알려 깨우쳐 말하기를,
“금번 대궐에 나가 하소연 한 거조는 일상의 정서로 말하면 가히 때에 의지하고 의리에 부합하지 아니 못할지로되 한 때의 속세의 정서로 억울함을 말하고 펴는 것을 말함이 결코 우리 선사에게 들어 논함이 불가한지라. 그러나 팔역(八域)이 같은 정서로 하여 만인이 가서 상소하니 이 또한 하늘이라. 대궐에 하소연 한지 삼일 만에 사알이 입으로 전함에 이르러 각기 그 생업을 편안하라는 깨우침이 있으니 임금의 유시를 말하고 생각함에 황공스러움을 품어 어찌할 바를 모르리라. 말씀에 이르되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으리오 마는 고치는 것이 귀하다 하니 깊이 바라건대 여러 도인은 항상 사문(師門)의 죄 없는 곳에서 죄 지은 듯이 하라는 지극한 가르침을 생각하여 악을 징계하고 선으로 옮기고 과오를 반성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며 하늘의 명을 공경하여 우리 몸을 바르게 하면 같고 같은 배움의 맛은 생각마다 같은 참된 깨달음의 묘한 뜻인가. 또한 그 중에 벗어나지 못할지라. 대개 상서로운 조짐과 재앙의 화근이 오로지 자기 마음의 바르고 바르지 못함과 관계있나니.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말아 태고의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연후에야 비로소 무위화기(無爲化氣)의 자연의 이치에 거의 그 요령을 얻으리니. 순박한 말을 천하게 여기지 말고 두려워하고 스스로 되돌아보아 무궁(无窮)의 진리에 도달하며 무극(無極)의 큰 운에 들어감이 가하니라” 하시다.
이때에 의지할 곳 없는 자제(子弟)가 혹 도인이라 하여 백성을 어지럽히고 시끄러움을 만드는 자가 있고 혹 종제(宗徒)로 종사하던 자도 믿는 자를 도탑게 하지 않으며 도를 닦음에 정성껏 하지 않아 스스로 세상 사람의 지목을 부르는지라. 신사가 글을 지어 제자에게 타이르고 깨우쳐 말하기를,
“대개 나무의 뿌리가 단단하지 못하면 바람을 맞아 쓰러짐을 면하지 못하고 물의 근원이 깊지 못하면 능히 웅덩이를 채워 나아가지 못하나니. 사람의 마음이 또한 이와 같은지라.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여 일을 이루지 못하며 공(功)을 이루지 못하나니. 비유컨대 아래 땅의 사람이 장차 서울로 향할 때 행장을 갖추고 출발하여 혹 물에 임함에 건너기 어렵고 혹 영(嶺)을 만남에 넘기 어려워 갈림길을 보고 의심이 생기며 관문의 문지기를 보고 두려워하여 방황하여 나가지 않다가 물러서는 자는 그 마음이 서지 못한 자요. 혹 물에 임하여 능히 건너고 영을 만나 능히 넘으며 갈림길을 보고 능히 나가며 관문의 문지기를 보고도 능히 나아가나 그러나 날이 오래됨을 참지 못하여 길의 절반에서 그만두는 자는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한 자요. 그 중에 날이 오래됨도 꺼리지 않으며 힘들고 괴로움도 관계없이 나아가고 또 나아가 서울에 도달하는 자는 곧 심지가 견실하여 대업을 성취한 자라. 하물며 이 무극대도와 무궁진리를 어찌 박약한 심지로써 그 진정한 경지에 도달함을 얻으랴. 오직 우리 도인은 힘써 나아가고 물러나지 말아 아홉 길의 우물을 버리지 말며 한 삼태기의 산을 무너트리지 말라” 하시다.
때맞춰 호남 도인 수천명이 삼례역에 회집하여 관찰사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니 그 말의 듯은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 생명을 구하라는 것이더라.
호남 도인 이병춘(李炳春)이 김숙여(金淑汝)와 같이 와서 신사께 배알하니 신사가 이병춘에게 일러 말하기를 “뒷날에 너는 반드시 대두령이 되리라.” 이병춘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는 자가 어찌 대두령이 되리이까?” 하니 신사가 말하기를 “나도 어리고 배운 것이 없었나뇨” 하시다.
3月 10일에 신사가 청산군 포전리(浦田里) 김연국의 집에 가서 대신사의 조난향례를 거행하실 새 그 때에 참례한 사람은 손병희, 이관영(李觀永), 권재조(權在朝), 권병덕(權秉德), 임정준(任貞準), 이원팔(李元八)이더라, 예를 마친 후에 여러 사람들이 신사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선사의 기극한 억울함을 펴지 못하고 각지 도인이 모두 도탄에 빠졌으니 광명정대의 무극대도로써 어찌 분별하여 밝힘이 없으리오. 원컨대 선생은 보존하여 유지하는 방책을 가리켜 주소서.” 신사가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지금 보은 장내로 가려하니 자네들은 각처에 글을 보내 도인으로 하여금 모두 모이게 하라” 하시다.
11일 신사가 보은 장내에 이르시니 모인 자가 수만 인이라. 도인이 살육과 약탈을 독하게 받음으로써 재소(再疏)를 다시 논의할 때 장대를 세워 깃발을 만들고 돌을 쌓아 보루를 만들어 예를 갖추어 사양하는 절차가 가지런하고 엄숙하더라. 혹 모두 소리 내어 주문을 암송하며 혹 때와 기미를 토론하여 서로 응하는 기운이 화목하고 즐겁기를 몇 순(旬)을 헤아리더니 이때에 신사가 각 포(包)의 대접주와 포 이름을 명하시니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에 손병희, 충경대접주(忠慶大接主)에 임규호(任奎鎬),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에 손천민, 문청대접주(文淸大接主)에 임정준,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에 박석규(朴錫圭),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에 이원팔, 호남대접주(湖南大接主)에 남계천(南啓天), 상공대접주(尙公大接主)에 이관영(李觀永) 등이 장차 묘당(廟堂)에 건백(建白)하여 선사의 억울하고 분함을 펴고자 할 새 이때 나라의 말이 들끓고 바깥에서 들림이 낭자하여 임금이 듣기에 이른지라. 충청병사(忠淸兵使) 홍계훈(洪啓薰)이 병사를 이끌고 보은에 와서 머무르고 선유사(宣諭使) 어윤중(魚允中)이 칙령을 받들어 내려와서 비밀리에 도인의 동정을 탐지하니 손에 한 조각 쇠붙이도 없이 단연코 하나의 생각이 스승을 위하여 억울함을 펴서 씻고자 할 따름이라. 어윤중이 마침내 사실로 임금께 아뢰었더니 묘당에서 어윤중으로써 위무사(慰撫使)를 삼아 타이르고 깨우쳐 흩어져 가서 생업을 편안하게 하라 하니 4월 2일에 어윤중이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과 더불어 윤음(綸音)을 받들고 모임 안에 들어와 임금의 명령을 공포하며 도인을 타일러 깨우쳐 말하기를, “관리의 탐학과 죽이고 빼앗음은 반드시 마땅히 엄히 징계하리니 여러 도인은 각기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 그 생업에 편안케 하라” 하여 위로하고 타이르기가 극진하거늘, 도인이 듣기를 끝내고 북쪽을 향해 임금의 은혜에 절하고 거처한 지 3일 만에 스승의 명에 의해 풀고 돌아가다.
5일에 신사가 칠곡군(㭍谷郡) 과림리(果林里) 곽우원(郭祐源) 집에 계시더니 이철우(李哲雨), 신택우(申澤雨)가 와서 뵙다.
7월에 신사가 인동군(仁同郡) 배성범(裵聖範)의 집에 옮겨 계시더니 손병희, 손천민이 와서 뵈어 환난에 처한 방도를 논하다.
신사가 인동으로부터 김산군 편사언(片士彦)의 집에 이르실 때 손병희가 따라 가다. 이때 서병학이 와서 다시 억울함을 펼 일로써 말하고 또 이관영, 이해영(李海觀)과 한 통속이 되어 심지어 공경하지 못함으로써 신사에게 더하되 신사가 진중하여 흔들리지 않으시다.
10월에 신사가 상주 별서(別墅)에 돌아오셨다가 손병희, 이재벽(李在壁)의 주선에 의해 가족을 이끄시고 청산군 문암리(文岩里) 전성원의 집에 옮겨 사시다.
이때 관리의 도인 침학이 나날이 심해 급함이 세찬 불과 같더라.
포덕 35년 갑오(甲午) 1월 5일에 신사가 강의 자리를 문암리에 여시다.
이때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재물을 지나치게 탐하고 법을 무시하여 백성의 재산을 약탈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지라. 전봉준(全琫準)이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방책으로써 고부 마항리(馬項里)에서 포(包)를 일으켜 백산(白山)에 모이니 손화중, 최경선(崔景善) 등이 같이 거사하는지라. 이로부터 호남 여러 군이 일시에 향응하니 그 무리가 수천만인에 달하였더라.
4월에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이 강화병(江華兵) 6백명을 이끌고 도의 무리와 더불어 여러 차례 싸워 불리하다.
28일에 도의 무리가 승승장구하여 전주영에 들어가 근거하여 네 문을 굳게 지키고 식량창고를 크게 열어 인민을 안도케 하니 홍계훈이 그 세력을 가볍게 보지 못할 줄 알고 마침내 양조를 체결하고 강화(講和)하니라. 도인이 각 군에 집강소(執網所)를 개설하고 이전 날 토호가 백성의 산에 억지로 장사지낸 것을 파서 옮기게 하며 백성의 재물을 눌러 빼앗은 것을 되돌려 주게 하며 수재(守宰)가 곤장을 때리고 옥에 가두었던 부민(富民)을 풀어주게 하며 양반과 신사(班紳)가 압박하던 노예奴隷)를 풀어주게 하여 수백 년 압제하던 나쁜 폐단과 추한 습속을 모두 개혁하니 이로부터 옥(獄)의 송사를 하는 자가 관청에 송사하지 아니하고 교인 모인 장소에 와서 호소하여 민심이 물과 같이 아래로 흘러내려가더라.
이전에 신사가 글을 전봉준에게 보내어 경계하여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할진대 마땅히 효할지오, 백성의 곤궁함을 건지고자 할진대 마땅히 어질지라. 효의 느낀 바가 사람의 윤리가 가히 밝아짐이오, 어진 것을 받드는 바가 백성의 권리(民權)를 가히 되돌릴 수 있으니라. 더구나 경(經)에 말한바 깊고 묘한 이치를 드러내지 말고 마음을 급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이는 선사의 남긴 가르침이시라. 운이 아직 열리지 않고 시 또한 이르지 않았나니 망령되어 움직이지 말고 진리를 더욱 궁구하게 하여 하늘의 명을 거스르지 마라” 하시다. 이때에 각처 도인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소리쳐 말하고 서로 다투어 깃발을 걸고 일어나는 지라. 신사가 그것을 근심하여 각 포에 글을 보내 타일러 깨우쳐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 선사의 교법을 전해주는 은혜를 받들어 이 도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고 도리어 당시 사람의 지목을 졸지에 받아 여러 번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거친 골짜기에 숨은 지 어언 십 수년에 다만 지혜와 능력의 부족함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공경하며 하늘의 때를 기다리고자 하여 가리고 참기를 이에 이르렀더니 요사이에 들은 즉 우리 道人이 본분에 편안하지 못하며 바른 업에 힘쓰지 않고 각각 무리를 세우고 서로 소리로 도와 예전 사소한 원한까지라도 되갚지 않는 바 없어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밤낮으로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생령(生靈) 도탄(塗炭)의 걱정을 일으킨다 하니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전후 편 깨우침이 한 둘에 그치지 아니하되 오히려 깨닫지 못하고 한결같이 미혹함을 고집하여 같은 악이 서로 도우하니 이는 하늘을 거스르고 스승을 등 돌림이라. 단연코 마땅히 업보를 제거하리니. 모두 복종하여 거스르지 마라” 하시다.
신사가 각 포 도접주(都接主)로 도강장(都講長)을 겸하게 하고 부접주(副接主)로 부강장(副講長)을 겸하게 한 후 생각하여 달에 한 차례 대전(大全) 및 가사(歌詞)를 강의하여 그 의혹스럽고 어려운 문답의 글귀와 말을 부강장이 거두어들여 도강장에게 보고하고 도강장은 법소(法所)에 다시 보고하게 하시며 또 4개월에 각 포 도강장이 서로 모여 강연케 하시다.
이때에 정부에서 전봉준이 난을 주도함을 근심하여 경성에 주재한 청국총리사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더불어 협의하고 텐진(天津)에 있는 직예총독(直隷總督) 이훙장(李鴻章)에게 전보로 청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나오게 하였더니 일본에서 텐진조약(天津條約)이 있음을 칭하고 또한 병사를 파견하여 나와 마침내 청일전쟁[日淸戰役]이 일어 나니라.
8월에 도의 무리가 장차 북진할 때 전봉준, 김개남(金開南) 등이 삼례역에 이르러 엄히 도인으로 일어나지 않는 자를 독촉하니 신사의 유래 아래 곧 접(接)이 된 도인은 모두 응하지 않는지라. 전봉준이 그 응하지 않음을 미워하여 군량과 마료(馬料)를 구하고 찾음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때에 도인이 안으로는 도의 무리들의 업신여김에 몰리고 밖으로는 관리의 사납게 해침을 받아 편히 있을 수 없는지라. 김방서(金邦瑞), 오지영(吳知泳) 두 사람이 삼례역에 이르러 전봉준, 김개남을 보고 말하기를 “공들의 금일 의거를 일으킴은 곧 보국안민이거늘, 지금에 공의 휘하가 도인을 겁박하고 약탈함이 어육(魚肉)보다 심하니 이는 도로 도를 해함이 아니뇨?” 하니, 두 사람이 그 말에 굴복하여 마침내 맹서를 정하다. 오지영이 금방서, 유한필(劉漢弼)과 더불어 보은에 가서 그 사실을 신사에게 갖추어 보고하니 신사가 오지영으로 하여금 호남도금찰(湖南都禁察)을 삼아서 각 포에 법을 어지럽히는 자를 금하여 그치게 하시다.
이전에 여러 도인이 진산(珍山), 금산(錦山)에서 의거를 일으키다가 관예의 침해로 인하여 살상이 팔천 여에 달하다.
영남 두목 백낙도(白樂道)가 신사의 명을 받들어 각 군의 접을 돌 때 관군의 침해로 피살되다.
이에 여러 도인이 신사에게 입의(立義)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의 하늘을 믿고 도를 닦음이 실로 죄가 아니거늘. 지금 관리의 침학과 도 무리의 서로 침노함이 물과 불이 서로 용납되지 않음과 같아 우리 부모로 하여금 창과 칼에 죽고 우리 처자로 하여금 구렁텅이에 들어가게 하니 만일 이같이 그치지 않으면 장차 남는 무리가 없을지라. 우리들이 의를 기대어 일어나 저 액운과 재앙을 없애고자 하노니 신사의 뜻이 어떠하시니잇고?” 신사가 말하기를 “만의 하나 움직이되 의롭지 못하면 차라리 움직이지 않음만 못하니 망령되이 움직이기가 옳지 않다” 하시니 여러 도인이 말하기를 “제자가 신사를 모시되 하늘과 같이 하거늘 스승은 어찌 제자를 사랑하지 않아 제자로 하여금 팔짱을 끼고 스스로 죽게 하시나니잇고?” 신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나를 하늘로써 인정하면 움직임이 가하다” 하시다. 신사가 또한 여러 도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봄철에 소나무 땔나무를 쪼게 두었다가 여름의 소나기를 만나면 그 잎은 모두 빠지고 오직 줄기만 남나니 이 정사가 어지러운 날을 당하여 사람의 마음이 악하고 행동이 어그러진 것은 솔잎이 소나기를 지나 모두 빠짐과 같고 오직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을 모셔 세간 풍파에 연루되는 바가 되지 아니하는 것은 소나무 줄기가 역력히 스스로 있음과 같나니 너희들은 반드시 스스로를 사랑할지어다.”
이전에 신사가 호남의 소란을 근심하여 진정의 방책을 손병희와 더불어 상의하시다.
9月 18일에 신사가 도인 참살의 소식을 들으시고 장차 임금(天陛)에게 억울함을 부르짖고자 하여 통유문으로 각 포 도인을 불러 모으시니 각 처 도인이 청산(靑山) 장석(丈席)에 와서 이른 자가 십여 만인 이러라. 이때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경병(京兵) 천여 인을 이끌고 삼남(三南) 대토벌을 행하다.
서병학은 본래 도인으로써 잡혔다가 그때 포장(捕將) 겸 도무찰사(都巡撫使) 신정희(申正熙)에게 도리어 붙어 정탐을 비밀리에 행하여 교도를 체포하다.
10월에 신사가 각 포 도인을 불러 만나 보시고 손병희로 하여금 각 포를 통솔케 하시다.
이때를 전후하여 포를 일으킨 사람을 셈할진대 고부 정일서(鄭日瑞), 김도삼(金道三), 홍경삼(洪景三), 정종혁(鄭宗赫), 송대화(宋大和), 송주옥(宋柱玉), 정덕원(鄭德源), 정윤집(鄭允集), 전속팔(田束八), 홍광표(洪光杓), 주관일(朱寬一), 송문상(宋文相), 윤상홍(尹尙弘), 옥구 허진(許鎭), 정읍 임정학(林正[?]學), 차치구(車致九), 태인 김개남, 최영찬(崔永燦), 김지풍(金智豊), 김한술(金漢述), 김영하(金永夏), 유희도(柳希道), 김문행(金文行), 만경 진우범(陳禹範), 금구 김덕명(金德明), 송태섭(宋泰燮), 김응화(金應化), 조원집(趙元集), 이동근(李東根), 김방서, 김사엽(金士曄), 김봉득(金鳳得), 유한필(劉漢弼), 김윤오(金允五), 최광찬(崔光燦), 김인배(金仁培), 김가경(金可敬), 김제 김봉년(金奉年), 조익제(趙益在), 황경삼(黃敬三), 하영운(河永雲), 한경선(韓景善), 이치권(李致權), 임예욱(林禮郁), 한진열(韓鎭說), 허성희(許成羲), 고창 오하영(吳河泳), 오시영(吳時泳), 임천서(林天瑞), 임형노(林亨老), 무장 송문수(宋文洙), 강경중(姜敬重), 정백현(鄭伯賢), 송경찬(宋敬贊), 송진호(宋鎭浩), 장두일(張斗一), 무안(務安) 배규인(裵圭仁), 배규찬(裵圭贊), 송관호(宋寬浩), 박기운(朴琪雲), 정경택(鄭敬澤), 박연교(朴淵敎), 노영학(魯榮學), 노윤하(魯允夏), 박인화(朴仁和), 송두옥(宋斗玉), 전행노(全行魯), 이민홍(李敏弘), 임춘경(林春景), 이동근(李東根), 김응문(金應文), 임실(任實) 최승우(崔承雨,) 최유하(崔由河), 임덕필(林德弼), 이병춘(李炳春), 최우필(崔祐弼), 조석휴(趙錫烋), 이만화(李萬化), 김병옥(金秉玉), 문길현(文吉鉉), 한영태(韓榮泰), 이용거(李龍擧), 이병용(李炳用), 곽사회(郭士會), 허선(許善), 박경무(朴敬武), 한군정(韓君正), 남원 김홍기(金洪基), 이기동(李基東), 최진학(崔鎭學), 전태옥(全泰玉), 김종학(金鍾學), 이기면(李起冕), 이창우(李昌宇), 김우칙(金禹則), 김연호(金淵鎬), 김시찬(金時贊), 박선주(朴善周), 정동훈(鄭東薰), 이교춘(李敎春), 순창 이용술(李容述), 양회일(梁晦日), 오동호(吳東昊), 전치성(全致性), 방진교(房鎭敎), 최기환(崔琦煥), 지동섭(池東燮), 오두선(吳斗善), 진안(鎭安) 이사명(李士明), 전화삼(全化三), 김택선(金澤善), 무주(茂朱) 이응백(李應白), 윤민(尹汶), 갈성순(葛成淳), 부안 신명언(申明彦), 김낙철(金洛喆), 김낙봉(金洛葑), 김석윤(金錫允), 장흥(長興) 이인환(李仁煥), 이방언(李邦彦), 강봉수(姜琫秀), 담양(潭陽) 남주송(南周松), 김중화(金重華), 이경섭(李璟燮), 황정욱(黃正旭), 윤용수(尹龍洙), 김희안(金羲安), 창평(昌平) 백학(白鶴), 유형로(柳亨魯), 익산(益山) 오경도(吳京道), 김문영(金文永), 오지영, 정영조(鄭永朝), 소석두(蘇錫斗), 이조병(李祖秉), 정용근(鄭瑢根), 고(高 : 이름을 잃음), 함열(咸悅) 고덕삼(高德三), 장성(長城) 김주환(金㴤煥), 기우선(奇宇善), 박진동(朴振東), 강계중(姜戒中), 강서중(姜瑞中), 능주(綾州) 문장렬(文章烈), 조성순(趙鍾純), 광주(光州) 박성동(朴成東), 김우▣(金佑▣), 보성(寶城) 문장형(文章衝), 이치의(李致義), 나주(羅州) 전유창(全有昌), 오중문(吳仲文), 영암(靈岩) 신▣▣(申▣▣), 신난(申欄), 최영기(崔永基), 강진(康津) 김병태(金炳泰), 남도균(南道均), 안병수(安炳洙), 윤세현(尹世顯), 윤시환(尹時煥), 장의운(張儀運), 해남(海南) 김도일金道一), 김춘두(金春斗), 임피(臨陂) 유원술(劉原述), 김상철(金相哲), 진관삼(陳寬三), 홍경식(洪敬植), 장경화(張景化), 장수(長水) 황학주(黃鶴周), 김학종(金學鍾), 영광(靈光) 오정운(吳正運), 최재형(崔載衡), 최시철(崔時澈), 흥양(興陽) 구기서(具起瑞), 송연호(宋年浩), 정영순(丁永詢), 여산(礪山) 최난선(崔鸞仙), 김갑동(金甲東), 박동돈(朴東敦), 김현순(金顯舜), 조희일(趙熙一), 고산(高山) 박치경(朴致京), 전현문(全顯文), 유종춘(柳宗春), 김택영(金澤永), 김낙언(金洛彦), 최영민(崔永敏), 신현기(申鉉基), 이은재(李殷在), 서인훈(徐仁勳), 진산(珍山) 조경중(趙敬重), 최사문(崔士文), 최공우(崔公雨), 금산 박능철(朴能哲), 곡성(谷城) 조석하(趙錫夏), 조재영(趙在英), 강일수(姜曰洙), 김현기(金玄基), 전주 서영도(徐永道), 임상순(林相淳), 고문선(高文善), 이봉춘(李奉春), 허내원(許乃元), 박봉렬(朴鳳烈), 최대봉(崔大鳳), 송덕인(宋德仁), 강문숙(姜文叔), 강수한(姜守漢), 김춘옥(金春玉), 송창렬(宋昌烈), 박기준(朴基準), 오두표(吳斗杓), 구례(求禮) 임봉춘(林奉春), 순천(順天) 박낙양(朴洛陽), 흥덕(興德) 고영숙(高永叔) 등과 광주(廣州) 이종훈(李鍾勳), 염세환(廉世煥), 청주 손천민, 서우순(徐虞淳), 김상일(金相一), 한창덕(韓昌德), 강주영(姜周永), 윤행현(尹行顯), 신광우(申光雨), 권병덕(權秉悳), 장이환(張离煥), 이공우(李公雨), 충주 홍재길(洪在吉), 이용구(李容九), 신재▣(辛在▣), 안성 임명준(任命準), 정경수(鄭璟洙), 양지(陽智) 고재당(高在棠), 여주(驢州) 홍병기(洪秉箕), 신수집(辛壽集), 임학선(林學善), 이천(利川) 김규석(金奎錫), 전창진(全昌鎭), 이근풍(李根豊), 양근(楊根) 신재준(辛載俊), 지평(砥平) 전태열(全泰悅), 이재연(李在淵), 원주(原州) 이화경(李和卿), 임순화(林淳化), 횡성(橫城) 윤면호(尹冕鎬), 홍천 심상현(沈相賢), 오창섭(吳昌燮), 서산(瑞山) 박인호(朴寅浩), 이우설(李愚卨), 유현옥(柳鉉玉), 박동후(朴東厚), 최극순(崔克淳), 장세화(張世華), 최동빈(崔東彬), 안재봉(安載鳳), 안재덕(安載德), 박치수(朴致壽), 홍칠주(洪七周), 최영식(崔永植), 홍종식(洪鍾植), 김성덕(金聖德), 박동현(朴東鉉), 신창(新昌) 김경삼(金敬三), 곽완(郭玩), 정태영(丁泰榮), 이신교(李信敎), 덕산(德山) 김명배(金蓂培), 이종고(李鍾皐), 최병헌(崔秉憲), 최동신(崔東信), 이민해(李鎭海), 고운학(高雲鶴), 고수인(高壽仁), 당진(唐津) 박용태(朴瑢台), 김현구(金顯玖), 태안(泰安) 김병두(金秉斗), 홍주(洪州) 김주열(金周烈), 한규하(韓圭夏), 김의형(金義亨), 최준모(崔俊模), 면천(沔川) 박희인(朴煕寅), 이창구(李昌九), 한명순(韓明淳), 안면도(安眠島) 주병도(朱炳道), 김성근(金聖根), 김상집(金相集), 가영로(賈榮魯), 남포(藍浦) 추용성(秋鏞聲), 김기▣(金起▣), 진주(晉州) 손은석(孫殷錫), 박재화(朴在華), 김창규(金昌奎), 곤양(昆陽) 김성룡(金成龍), 하동(河東) 여장▣(余章▣), 남해(南海) 정용태(鄭龍泰), 해주(海州) 박종현(朴鍾賢), 김하형(金河瀅), 김유영(金裕泳), 오▣선(吳▣善), 김영후(金永厚), 송화(松禾) 방찬두(方燦斗), 김영하(金永河), 장응봉(張應鳳), 차익환(車翼環), 신천(信川) 유해순(柳海珣), 재령(載寧) 원용일(元容馹), 한화석(韓華錫), 최창우(崔昌祐), 문화(文化) 윤기호(尹基鎬), 이흥림(李興林), 풍천(豊川) 손두순(孫斗淳), 이달홍(李達弘), 장연(長淵) 정찬(鄭樑), 안악(安岳) 김봉하(金鳳河) 등 여러 대두령이 차례로 기의(起義)하였더라.
손병희 이하 여러 포가 공주에 도착하여 전봉준 등과 서로 만나 관군과 더불어 교전하다가 패하여 남으로 향할 때 논산, 여산, 익산, 전주, 금구, 태인, 정읍, 고부, 장성, 순창 등 여러 군을 지나 임실군 갈담시(葛潭市)에 이르다.
13일에 신사가 호남으로 가실 때 임실군 이병춘(李炳春) 집에서 9일을 유숙하시다가 다시 같은 군 오▣리(烏▣里) 조석휴(趙錫烋) 집에 도착하여 계속 머무르시더니 하루는 신사가 말하기를 “내가 다른 기미를 보았나니 도인을 돌려서 갈담시에 와서 보라” 하시다. 이때에 손병희가 과연 당도하거늘 맞이하여 돌아가 신사가 있는 곳에 찾아뵙게 되니 때는 11월 19일이러라.
이때에 각 포 도인이 폐를 일으킴이 있음을 들으시고 깊이 우려하여 도금찰(都禁察)로 하여금 그 연원을 물어서 금지케 하시다.
11월 그믐께쯤에 신사가 영동군 용산시에 이르시니 관군이 앞으로 나아감을 막는지라. 신사가 손병희와 더불어 솔밭에 들어가 앞으로 나아갈 계책을 서로 논의하실 때 신사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만일 하늘을 믿거든 반드시 한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라” 하시니, 여러 사람이 하늘에 고하고 나아 가하니 한 사람도 상한 바 없더라. 이때에 속인이 도의 무리라 빙자하고 몹시 난폭한 자가 매우 많아 남의 가산을 힘으로 빼앗는 것이 많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원망스럽고 분노하여 주군(州郡)의 백성이 의(義)를 들고 아울러 일어나 도의 무리를 공격하니 모의 무리가 많이 상하다.
영호(嶺湖) 도인 수십만이 하동군 섬진강(蟾津江) 상안에 모여 진을 쳤더니 문득 관군이 핍박하는바 되어 어지러이 명줄을 지켜내고자 할 때 물에 나아감을 평지와 같이 하는지라. 강물이 모두 희어져 수십 리에 걸쳤더라.
영남 진주에 회합한 도인 수십만 인이 본군 고시랑당(高是良堂) 위에서 관군의 핍박으로 죽거나 상하는 것이 매우 많았더라.
12월에 신사가 홍천에 계실 때 오직 손병희, 손병흠, 손천민, 김연국이 신사를 모시고 있었다.
포덕 36년 을미(乙未) 정월에 신사가 인제군 최영서(崔永瑞) 집에 숨어 사시며 손병희, 손병흠, 손천민, 김연국과 더불어 도의 이치를 강(講)하시다.
이때에 도의 두령으로써 직임을 맡은 자는 가히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 신사가 명하여 각지에 피신케 하시다.
신사가 숨어 사실 때 따르는 자의 곤궁한 처지가 매우 심함으로써 근심하는 기색이 있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군자가 환난에 처하여서는 환난의 도를 행하며 곤궁에 처하여서는 곤궁의 도를 행하나니. 우리들은 마땅히 하늘의 이치를 좇을 따름이라” 하시다.
조정에서 일본군을 빌려 토벌을 크게 행하니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못한 도인이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살상이 온 들에 가득하다.
김개남은 전주에서 피살되고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은 서울감옥에서 피살되다. 전봉준의 취조 시에 관인이 고관으로써 유혹하거늘 전봉준이 크게 책망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나의 원수요. 나는 너의 원수니. 너는 마땅히 나를 죽일 뿐이라. 말을 만이 할 것이 없다” 하고 마침내 피살되다.
고산군(高山郡) 도인 최공우(崔公雨) 등 수백인이 천둔산(千芚山)의 층층이 바위인 산에 올랐더니 경군(京軍)이 사다리를 세워 산으로 올라 어지러이 포(砲)을 쏘며 무찔러 멸망시키는 지라. 도인이 어지러이 뛰어 내리다가 땅에 떨어져 몸이 부서져 죽은 자가 있으며 혹 나뭇가지에 걸려 살은 자가 있더라.
각 군 수재가 다시 정권을 잡음에 도인을 죽임으로써 일을 삼으니 그 목 베어 죽임(斬殺), 목매어 죽임(絞殺), 땅에 묻어 죽임(埋殺), 태워 죽임(焚殺), 총을 쏘아 죽임(砲殺), 물에 던져 죽임(投水殺)의 참혹한 현상과 그 부모, 처자, 형제가 얽히게 되어 벌을 받음과 그 가산, 밭과 땅, 가축을 몰수함은 만고에 없는 큰 학정이더라[순도한 교인의 이름은 순교록(殉敎錄)에 상세히 기재함].
6월에 신사가 인제군 최우범(崔禹範) 집에 이르시었더니 도인 이성관(李成觀)이 여름 옷 위아래를 바치는지라. 신사가 천도의 진리와 수련의 절차로써 가르치시다.
7월에 신사가 손병희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으로써 공부하여 뒷날을 준비하라. 무릇 지극히 정성하는 자는 능히 하늘과 땅의 기를 마음으로도 보고 눈으로도 보느니라” 하시고 떠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말하거나 침목하거나 이치에 부합한 것은 모두 강화(降話)의 가르침이니라” 하시다.
이달에 이병춘이 인제 눌음정(訥陰亭)에서 신사를 찾아뵙고 갑오(甲午)의 일을 말할 때 신사가 말하기를 “일이 하늘에서 나왔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릴 뿐이오. 사람의 사사로움으로써 싫어함을 갚을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시고 “뒷날에 다시 서로 만날 날이 있다.” 하시다.
9월에 장수군 김종학(金學鍾)과 여주군 홍병기(洪秉箕)가 신사를 찾아뵈었는데 신사가 그 난리 중에도 믿음이 있음을 가상히 여기시다. 이때 신사가 객지에서 임시로 묵고 있어 잠자리와 먹을 것이 편안치 못한지라. 이종훈(李鍾勳)이 그 논 10두락의 땅을 팔아 겨울 옷 한 벌과 돈 200량으로써 신사에게 바치다.
12월에 신사가 인제로부터 원주군 수례촌(水禮村)에 옮겨 계실 때 손병희의 주선에 의해 세 칸 초가집을 독차지하시다.
포덕 37년 병신(丙申) 정월 5일에 신사가 손병희의 의절(義節)을 매우 칭찬하여 도호(道號)를 의암(義菴)이라 주시고 몰래 의암으로 하여금 충주에 가서 도유의 향배를 시찰케 하시다. 이때 호남도인 박치경(朴致景), 허진(許鎭), 장경화(張景化), 조동현(趙東賢), 양기용(梁琦容)이 신사를 찾아뵙다.
11일에 신사가 손천민은 송암(松菴)이라 김연국은 구암(龜菴)이라 도호를 주시고 거듭 의암 및 송암, 구암을 불러 자리에 앉게 하시고 손천민으로 하여금 붓을 잡아 “교화하고 훈육하여 교리를 전해주는[傳鉢] 은혜를 입었고 마음으로 교화하고 훈육하여 교리를 전해주는 은혜를 지킨다”의 구절을 쓰게 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즉 하늘의 뜻에서 나온 바이다. 고로 너희들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가 이 도를 근심코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 하시다.
이때에 삼암(三菴)이 이 뜻으로써 각지 도인에게 통유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교화하고 훈육하는 반열에 참여하여 교리를 전해주는 은혜를 받았기에 용담 수운 대신사와 검악 해월신사의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이어 삼가 통지하노라.” 하다.
18일에 신사가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운세를 능히 아느뇨?” 대답하여 말하기를 “알지 못하로소이다.” 신사가 말하기를 “이 운세 중에 요순공맹과 같은 인재가 많이 나오리러니 너희들은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닦아 요순공맹을 스스로 기약하라.” 하시다.
신사가 삼암에게 명하여 제자를 타이르고 깨우치게 하시니 삼암이 명을 받아 명심수덕(明心修德)의 뜻으로써 각지 도인에게 널리 깨우치다.
2월에 이병춘이 신사 계신 곳을 알지 못해 사방으로 두루 갔다가 하루는 상주 청계사(淸溪寺)에 이르러 묵더니 꿈에 신사를 삼가 뵙고 신사 계신 곳을 물으니 신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가까운 곳에 있노라.” 꿈에서 깸에 신기하고 이상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 가까운 산골짜기와 여러 마을을 집집마다 두루 찾을 때 고대촌(高垈村)에 이르러 보니 네, 다섯 집의 촌에 불과한대 우연하게 한 작은 집의 문을 열어 보니 신사가 앉아 계신지라. 이병춘이 한편으로 놀라면서 한편으로 절하니 신사가 말하기를 “너는 어찌 여기에 왔는가? 내가 꿈에서 너를 보니 네가 과연 도착함을 보게 된지라” 하시다.
3월에 신사가 의암으로 하여금 아내를 충주 외서촌(外西村)에 옮겨 살게 하시더니 의암이 도에 대한 재앙이 조금 진정되었다는 뜻으로 신사께 고하다.
신사가 각지 두령을 임명하실 때 해월장(海月章)으로써 임명첩에 찍으시다.
신사가 충주 본제에 이르시니 원근의 도인이 몰래 오고 가난 자가 많은지라. 의암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시다.
4월에 신사가 충주로부터 음성군 창곡(倉谷)에 옮겨 계시었다가 6월에 청주군 산막으로 또 옮기시니 이때 권병덕, 신형모(申灐模)가 찾아뵙다.
8월에 신사가 상주군 은척리(銀尺里)에 또 옮겨 사시니 이때 호남도인 손동규(孫東奎), 홍계관(洪桂寬), 최익서(崔益瑞)가 와서 포를 설치하는 일로써 신사에게 고하며 청하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이때에 포를 설치함이 묵은 불[宿火]을 다시 입으로 불어 지핌과 다르지 않으니 헛되이 인심을 어지럽게 할 뿐이오, 이로울 것이 없다” 하시다.
11월에 신사가 주문상(朱文祥)이 마음을 속이는 일을 근심하여 말하기를 “너는 이제부터 출입하지 말라” 하시더니 주문상이 며칠을 지나지 않아 홀연 죽게 되니 신사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도인은 사람을 대하여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하시다.
이달에 이병춘이 음죽(陰竹) 누근정(累勤亭) 성사 댁에서 신사를 찾아뵈었는데 신사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서로 찾음이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오늘부터는 무릇 일이 있어 서로 보는 것은 반드시 시한을 정하여 조금도 어기지 말라” 하시다.
이달에 황해도 도인 방찬두(方粲斗)가 신사를 찾아뵈니 신사가 네 가지 계명(誡命)으로써 교훈하시고 친히 짜신 미투리(麻鞋) 한 짝을 주시다.
포덕 38년 정유(丁酉) 정월에 이병춘이 음죽에서 신사를 찾아뵈니 신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말을 소홀히 내뱉지 말라. 나는 수년 후에 행할 일이라도 지금부터 생각하여 두었다가 말을 내노라” 하시다.
2월에 신사가 음죽군 앵산동(鸎山洞)에 옮겨 계실 때 의암과 송암과 더불어 함께 사시다. 신사가 지목의 의심이 다시 일어날까 염려하여 두령 임명첩을 아직 정지하시고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밭을 갈아 업으로 삼아 하늘의 명을 기다려라.” 하시다.
이때에 평안도 도인 홍기조(洪基兆), 홍기억(洪基億), 임복언(林復彦)이 신사를 찾아뵙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의 수련할 바는 오직 대성(大性) 대천(大天)이오, 실행할 바는 오직 성경신(誠敬信)이니, 번영과 쇠락, 화와 복은 가슴 속에 두지 마라” 하시다.
4월 5일에 신사가 창도기념식을 행할 때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늘 향사에는 사람이 각각 책상을 만들되 올리는 물품은 모두 나를 향해서 차림이 가하다” 하시니 이때에 향사를 모두 신사의 정한 바에 따랐더니 의암은 임순호(林淳灝) 집에 있어 신사의 정하신바 예식절차는 알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뜻으로써 향사를 지냈는데 의식이 신사의 정하신 바와 하나같이 같다.
이때에 신사가 나를 향해 위패를 세운 것에 대하여 설법으로 말하기를 “예전부터 향사의 때에 벽을 향하여 위패를 세우게 함은 이 선천(先天)의 일이니라. 지금 묻노니 부모의 사후 정령(精靈)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또 선사의 정령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생각하건대 부모의 정령은 자손의 심령(心靈)과 하나로 합쳤을 것이오. 스승의 정령은 제자의 정신(精神)과 하나로 합쳐졌을 것이라. 고로 선대 억조(億兆)의 정령은 후대 억조의 정령과 화합하였을지니. 그러면 내가 父母를 위하던지 선사를 위하여 향사할 때에 그 위패를 반드시 나에게 향하여 설치함이 가하니라. 누가 생각하든지 사람에게 죽은 후의 정령이 없다 하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있다 할진대 부모의 정령은 자손의, 선사의 정령은 제자의 산 정신을 버리고 어느 곳에 의지하여 있으리오. 고로 나를 향해 위패를 설치하는 것은 직접 신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게 됨을 표시함이니라” 하시다.
5월에 신사가 심신회수(心信回水) 네 자를 특별히 써서 각 포 도인에게 나누어 주시다.
7월에 황해 평안 양 도 두목이 덕을 펼칠 일로써 임명첩을 뽑아내심을 여러 번 청하니 신사가 마침내 허락하시고 그 임명첩 중 북접법헌(北接法軒) 네 자를 용담연원(龍潭淵源) 네 자로 고쳐 다시 정하시다.
신사가 좌우를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너희는 하늘의 말을 아느뇨?” 송암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말과 사람의 말이 다르지 아니하니잇가?” 신사가 말하기를 “사람의 말은 곧 하늘의 말이라” 하시다.
8월에 신사가 강원도 원주군 전거언리(前巨彦里)에 옮겨 계시다.
10月 28일에 신사가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거행하실 때 각지 도인이 많이 모인지라. 신사가 하늘로서 하늘을 먹고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로 설법하여 말하기를 “이 대우주는 하나의 기운이 시킨 바며 한 귀신의 관여한 바 이니라. 우리들의 눈앞에 비록 억천만 가지의 상(像)이 있어 각기의 위치, 동작의 이용이 각각 다르나 그러나 그 바탕이 된 점에 하나인 바와 그 마음된 점에 하나인 바는 동일하나니. 동일은 곧 하늘이라. 하늘이 각기 그 바탕에 따라 그 표현이 각기 다르나니. 비교컨대 동일의 비와 이슬이나 복숭아에는 복숭아열매를 맺게 하고 자두나무에는 자두를 맺게 하여 수많은 종자를 이루게 함은 그 성질에 관계한 것이요. 비와 이슬 그것의 성질이 아니니라. 우리들이 공기를 마시며 식물을 먹으며 마시거나 먹음을 행함은 이는 하늘로 하늘을 기르는 까닭이니 하늘이 아닌 자가 어찌 하늘을 길러 하늘케 하리오. 고로 무엇이든지 도가 아님이 없으며 무엇이든지 하늘이 아님이 없으며 그 도와 하늘이 각각 적응하여 다름이 있고 조화(調化)가 있고 피차가 서로 있어 우주의 이치가 이에 거스르지 않고 나가나니. 사람이 이를 따르는 것 이것이 바른 도요, 이에 거스르는 것 이것이 도가 아니니라.
내가 도를 닦을 때에 하늘의 말을 여러 번 들었으니 지금 생각건대 이는 아직 이르지 못한 사이의 첫걸음에 있는 일이라. 만일 크게 깨달은 자로써 하늘의 말과 인간의 말의 구별을 물으면 이는 강과 바다의 구별을 짓는 자와 다르지 아니하도다. 사람은 하늘이어니 사람의 말이 어찌 하늘의 말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어찌 하늘의 마음이 아니리오.” 하시고 또 강화의 가르침을 설법으로 말하기를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 하였으니 강화는 즉 심령의 가르침이니라. 심령은 즉 하늘이니 강화는 즉 한울님의 명령과 가르침이니라. 사람이 누가 강화의 가르침이 없으리오마는 오관(五官: 귀, 눈, 입, 코, 혀)의 욕심이 슬기가 우러나오는 구멍을 막아 영혼의 길이 막힘으로써 깨닫지 못하나니. 사람이 하루아침에 환하게 통하여 도를 깨달아 영혼과 육체의 가로막힘을 쪼개어 거두면 심령의 가르침을 분명히 듣나니라. 그러나 강화도 아직 이르지 못한 한 칸(間)이니라. 사람의 한번 의 말과 한 번의 말없음과 한번 움직이고 한번 움직이지 않음이 모두 그 규칙을 넘지 아니하여 강화의 가르침과 같은 연후에야 가히 이르렀다 할지니. 고로 대신사의 말년에는 강화의 가르침이 없으셨나니라. 생각하건대 사람의 말과 동정이 원래 이 심령의 기틀이 발한 것이라. 고로 마음이 바르면 무엇이 강화의 가르침이 아니리오.” 하시고 또 우리 도의 큰 운을 설법하여 말하기를 “대신사가 항상 말씀하시되 ‘이 세상은 요순공맹의 덕이라도 말하기가 족하지 않다.’ 하셨으니 지금 시대가 선후천(先後天) 개벽(開闢)임을 이름이라. 대체로 개벽의 의의가 둘이 있으니 하나는 우주가 어떤 것이 섞여서 이루어진 본체로부터 하늘과 땅이 처음 쪼개어 갈라지고 사상(四象)이 생겨 만물이 각각 그 위치를 얻어 진화함을 의미함이오. 하나는 지금 시대 사람 마음을 여는 것을 지칭함이니. 대신사의 후천개벽설은 전혀 사람 마음의 진화를 이르심이니라. 생각하라. 물질발명이 그 극에 달하고 따라서 만반의 일을 행함이 전에 없던 발달을 성취한 오늘에 도심(道心)은 더욱 미역하고 인심(人心)은 더욱 위태로워 할 바를 알지 못하며 더구나 사상계를 지배하던 과거 수많은 도덕이 시대의 순응에 짝하지 못하여 그 이면에는 대도의 운화(運化)가 널리 퍼져 일대 개벽의 운명이 저마다의 속에 배태된 까닭이라. 고로 우리 도는 장차 이 세계 소멸의 가운데에서 널리 구제할 대운명으로 탄생한 것이라. 고로 우리 가르침에 반드시 여러 가지의 요순공맹의 재주가 배출되리니. 이는 후천(後天)은 인심개벽의 시대이며 우리 가르침은 그 책임을 짊어진 것이니라.” 하시다. 또 식고(食告)의 뜻으로 설법하여 말하기를 “하늘은 만물을 만드시고 오히려 만물의 성(性)에 있으시니. 고로 만물의 정(精)은 즉 하늘이니라. 그런대 만물 중 가장 영적인 자는 사람이니 고로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니라. 사람은 태어남으로만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곡백곡(五穀百穀)의 자양을 받아 그 영혼의 힘이 발달되는 것이라. 오곡은 천지의 살찌움이니 사람이 이 천지의 살찌움을 먹고 영혼이 있는 바이니. 고로 하늘은 사람에 의하고 사람은 먹음에 의하는 것이라. 此이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 주의 아래에 선 우리 무리는 반드시 이를 그 마음에 고하고 먹음이 어찌 적당하지 아니하랴. 하물며 먹는 것은 자양의 으뜸이 되고 동시에 만병의 근원도 되는 것이니, 화와 복의 뿌리가 이에 있는지라. 고로 하나하나 이를 마음과 하늘에 고하여 재앙을 피하고 복을 구함이 가하니라” 하시고 또 약을 쓰지 않는 스스로의 효험의 이치로 설법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한갓 병에 약으로 다스림만 알고 마음으로 다스림은 알지 못하도다. 마음은 즉 한 몸의 상제니 마음이 화응하면 온 몸이 영을 따르는지라. 고로 병이 걸리기 이전에 능히 병을 예방함도 마음에 있고 병이 걸린 후에 마음을 화응케 하면 정신의 통일이 생겨 심령의 감화가 이에 생기는 고로 만병이 스스로 고쳐질 것이며. 또 약을 쓸지라도 마음이 화응치 못하면 이는 약이 도리어 병을 도와주게 되느니라.”
신사가 일찍 누우셨다가 어린아이의 나막신 소리가 땅을 울림을 들으시고 놀라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막신 소리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도다. 천지의 큰 기운과 사람이 통하였는지라. 기를 어지러이 움직이게 함은 이 신령스런 성질에서 꺼리는 바라” 하시다.
12월 24일에 신사가 도통(道統)으로써 의암에게 전하시고 송암, 구암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너희들 세 사람 가운데에 또한 주장이 없지 않을지라. 의암으로써 북접 대도주를 삼노라” 하시다.
포덕 39년 무술(戊戌) 1월 3일에 신사가 몸의 병으로 인하여 침상에 누우시더니 이천군에 주재하는 병사와과 여주군 주재하는 병사 수십 인이 도인 권성좌(權聖佐)를 결박하여 앞머리에 세우고 신사 집에 갑자기 들어와 수색하기를 매우 하는 지라. 이때 신사가 의암, 구암 등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명령이 있으리오. 즉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기도함이 가하다” 하시고 또 말하기를 “이 운이 만일 다하였으면 끝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면할 방도가 있으리라” 하시고 여유롭게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누우시더니 병예배(兵隷輩)가 신사를 보지 못하고 다만 의암을 향하여 따져 묻거늘 의암이 소리 높여 꾸짖어 병졸을 돌려보내하시다. 이날 밤에 수레를 타고 출발하실 때 제자 이용한(李容漢), 이춘경(李春敬)이 수레를 짊어지고 의암이 손병흠, 김연국 여러 사람과 더불어 보호하여 모시고 가서 깊은 산에 들었더니, 이때 숲이 깊고 길이 험하고 더욱 큰 눈이 도로를 덮어 향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의암이 작은 불이 산 위에서 깜박거림을 보고 그 동생 병흠이 연초(烟草)를 태움인가 하여 곧 그 곳에 이르니 큰 호랑이가 있어 그 눈이 빛을 발함이더라. 이에 호랑이를 보고 잠깐 머뭇거리더니 호랑이는 문득 가고 호랑이가 앉았던 곳은 곧 산길이더라. 이 길을 따라서 몇 리를 가다가 산막에 머물러 묵고 새벽이 되면 출발하여 지평 갈현(葛峴) 이강수(李康洙) 집에 이르러 하루 자고 다음날에 홍천군 서면(西面) 제일동(濟日洞) 오창섭(吳昌燮) 집에 이르러 한 달 정도 머무시다가 2월 그믐에 임학선(林鶴善)의 주선으로 원주군 송동(松洞) 원진여(元鎭汝) 집에 옮겨 계시다.
4월 5일은 득도기념일이라. 제자가 많아 모여서 신사의 아들 동희(東羲)가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아이에게 일러 말하기를 “병정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하거늘 신사가 들으시고 집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의 말이니라.” 이때 의암과 임순호, 김연국, 이병춘이 신사의 옆에 있거늘 신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야 향례를 설비하라” 하시니 의암이 말하기를 “비록 먼 곳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여럿이 모여 예식을 거행하였거늘 하물며 이왕 모였던 자가 어찌 흩어져 가리이까?” 신사가 말하기를 “나의 말을 거스리지 말라” 하시니 의암과 여러 도인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다.
신사가 밤이 세도록 조용히 홀로 앉아 기다리는 바 있으시더니 6일 새벽에 송경인(宋敬仁)이 병사를 이끌고 신사 집에 갑자기 들어오니 신사가 마침내 잡히게 되어 서울로 向하실 때 문막점(門幕店)에 이르러 제자 황영식이 물을 주고 뒤따르니 관례배가 어지러이 때리거늘 신사가 화난 목소리로 크게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죄없는 자를 때림이 도리어 죄가 되나니. 너희들은 저 하늘이 보는 것이 두렵지 않느뇨?” 하시니 이로부터 관례배가 감히 행패하지 못하더라.
신사가 마침내 서울도 들어와 감옥에 갇히실 때 오직 황영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고 있었다. 북접대도주가 그 후 발길을 떠나 지평군에 이르러 신사의 잡힌 일로써 각 포에 통문을 날려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게 하다.
이때 박인호(朴寅浩)가 김명배(金蓂培)로 하여금 내포(內浦) 접중에 가서 쓸 돈을 마련케 할 때, 홍주군 김주열(金周烈)이 푸른 벼가 심어있는 논 10두락의 땅을 팔아 쓸 돈을 충용하다.
5월 12일에 법부대신 겸 평리원재판장 조병직(趙秉稷)과 수반검사 윤성선(尹性善)과 법부협판 겸 수반판사 주석면(朱錫冕)이 법정을 열고 여러 차례 심문하다. 신사가 칼 씌워 갇힌 중에 있으시되 오히려 주문 암송을 거두지 않으시더니 5월 그믐날에 이르러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로써 선고하다.
6월 2일 오후 2시에 신사가 교형(絞刑)을 경성감옥(京城監獄)에서 받으시니 이 때 나이가 72세이라.
신사가 갇혀 있을 때에 북접 대도주와 박인호, 김연국 등은 숨어 있으면서 바깥의 일을 주선하고 오직 이종훈은 교졸 김준식(金俊植)과 더불어 형제의 의를 맺어 비밀리에 신사의 의복과 음식을 바치다가 신사의 병으로 인하여 삼탕(蔘湯)을 바치더니 신사가 형을 받으신 後 김준식과 꾀하여 밤을 틈타 비를 무릅쓰고 그 시체를 광희문(光熙門) 밖에서 거두어 광주(廣州) 이상하(李相夏) 집에 이르니 이때 의암, 구암이 여기서 기다리다가 같이 이상하의 산에 장사지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