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의암성사(第三編 義菴聖師)
성사(聖師)의 성(姓)은 손(孫)이고 이름은 병희(秉熙), 자(字)는 응구(應九)이며 호(號)는 의암(義菴)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의조(懿祖)이고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1861년(포덕 2년, 조선 개국 4,192년) 신유(辛酉) 4월 8일에 성사가 청주군(淸州郡) 대주리(大周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꿈에 태양이 품안에 들어오더니 태어나셨으므로 기개와 도량이 영리하고 비범하여 작은 일에는 구애받지 않으셨다.
1872년(포덕 13년) 임신(壬申)에 그 형이 성사에게 고전(古錢) 40량을 짊어지고 관청에 납부하게 하였는데, 성사가 도중에서 사람이 추위에 얼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을 스스로 등에 업으시고 주점(酒店)에 이르러 따뜻한 방에 눕게 하셨다. 그리고 돈을 지불하시고 주인으로 하여금 돌보고 치료하게 하셨다.
1876년(포덕 17년) 병자(丙子)에 부인을 곽씨(郭氏)의 문중에서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1877년(포덕 18년) 정축(丁丑)에 괴산군(槐山郡) 삼가리(三街里)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수신사(修信使, 御史)가 이르러 말 뒤에 역인(驛人)을 매달아서 유혈이 흥건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어찌 사람이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시고 곧 나무 몽둥이로 마부를 때리고 매달은 것을 풀어버리고 수신사의 유서통(諭書桶)을 빼앗아 연못 속에 던지셨다.
1880년(포덕 21년) 경진(庚辰)에 청주(淸州) 약 시장(藥市)을 밤에 가시다가 유실물이 앞에 있음을 보시고 주어서 보니 바로 돈 300량이었다.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을 두루 찾아다니시다가 한 포목상이 매우 근심하고 있음을 보시고 그 까닭을 물어보시니 곧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어서 돈을 내어주셨다.
성사가 일찍이 이웃 마을을 지나가실 때 동네 사람이 둘러앉아 수군거리고 있어 성사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즉 동네 한 집에 4~5명 사람이 전염병으로 인하여 모두 몰사하였는데 5~6일이 지나도록 수습하지 못함을 우려하였으므로 성사가 개탄하며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구하지 아니하면 어찌 인(忍)이라 하겠는가?” 라고 하시고 친히 4~5인의 시체를 염습(斂襲)하고 매장하여 주셨다.
1882년(포덕 23년) 임오(壬午)에 성사가 도(道)에 가입하셨다. 처음에 도를 전하는 사람이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면하는 방법으로써 동학(東學)을 설명하니 성사가 달가워하지 않으시더니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의 현실 이치(實理)가 있음을 들으시고 즉시 입도(入道)하셨다.
1883년(포덕 24년) 계미(癸未)에 성사가 신사(神師)[최시형]께서 가까운 지역에 오셨다는 것을 듣고 삼가 뵙기를 기꺼이 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거칠고 방자한 마음을 고친 뒤에야 신사를 뵈리라”고 하셨다.
1884년(포덕 25년) 갑신(甲申)에 성사가 신사를 찾아가 뵈었고 함께 치성제(致誠祭)를 공주(公州) 가섭사(迦葉寺)에서 행하셨다.
1889년(포덕 30년) 기축(己丑)에 문경사변(聞慶事變)[2편에 자세히 보인다]으로 지목(指目)이 심하였다. 손천민(孫天民)이 또한 지목을 당하여 그 집에 없었는데, 교졸(校卒)이 그 아내를 체포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아내를 체포하는 것보다 삼촌을 체포하는 것이 어떠한가. 나는 손천민의 삼촌이다”라고 하시니, 교졸이 손천민의 아내를 풀어주고 이어서 성사를 체포하였다. 성사가 청주군 주성점(酒城店)에 이르러 술 8잔을 연이어 마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크게 취하여 가지 못하겠으니 너희들은 나를 업으라”고 하시니, 교졸이 성사를 업고 청주진영(淸州鎭營)에 이르렀다. 신문할 때에 신사가 있는 곳을 물으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자수하여 체포되었으니 비록 사형에 이른들 어찌 신사의 소재를 말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말씀하시는 바가 의리에 마땅함으로 영장(營將)이 그 의로움을 보고 곧 석방하였다.
1890년(포덕 31년) 경인(庚寅)에 성사가 진천군(鎭川郡) 방동(房洞)에 사셨다. 이때에 37일을 1기(期)로 하여 주문(呪文) 백만독(百萬讀)을 암송하셨는데, 눕지도 자지도 않고 공부를 마치시니 이 해에 이와 같이 무릇 3기를 하셨다. 당시에 성사가 짚신을 삼으셨는데 매일 짚신 두 켤레로 한도를 삼으시며 한 켤레를 15문의 값으로 바꾸시되 값을 두 가지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삿갓[竹笠]을 쓰시고 시장에 가서 스스로 짚신을 짊어지시니 당시 사람들이 학자라 칭하였다.
성사가 일찍이 살 집이 없어 이웃 마을의 빈 집에 임시로 거처하셨다. 하루는 밥솥이 깨져서 취사를 못한지 3일에 이르러 집 뒤에 지신기(地神器)인 질그릇 한 개가 있는 것을 보시고 가져다가 솥을 삼아 사용할 즈음에 이종만(李鍾萬)이 보리죽[牟米粥]을 차려 바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어찌 이와 같이 구차하리오. 만일 7일을 먹지 않고 죽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감동하리라”고 하시더니 때마침 이종석(李鍾奭)이 쌀 3말을 지고 왔다. 도인 최종수(崔宗秀)가 성사를 모시고 공부하기를 원하여 쌀 30말을 사고 큰 솥을 갖추어 와서 공부하더니 최종수가 49일에 이르러 그 집으로 돌아가니 구멍 뚫린 창이 매우 많은지라. 성사가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매우 번뇌(煩惱)함으로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사가 성사의 아우 손병흠(孫秉欽)으로 하여금 비서(祕書)를 성사에게 전하며 이르시기를, “내가 여기에 오래 살 수가 없음으로 반드시 너와 함께 살겠다”고 하셨다. 성사가 아우 손병흠과 함께 신사의 가마를 스스로 매시고 청주군 외서촌(外西村) 보평리(洑坪里)에 가시어 거주하게 하셨다.
1891년(포덕 32년) 신묘(辛卯)에 신사가 진천군 방동에 옮겨 사실 때 성사가 그 옆을 따르고 모시며 떨어지지 않으셨다.
1892년(포덕 33년) 임진(壬辰)에 성사가 도인 한영석(韓榮錫)의 돈 3,000량과 소 1마리를 권용철(權用哲)이 탈취한 것을 들으시고 권용철 집에 이르렀다. 권용철은 일찍이 병사(兵使)를 지냈음으로 성사가 불의(不義)를 꾸짖으니 권용철이 탈취한 것을 한영석에게 돌려주셨다. 이 해에 성사가 많은 덕을 펼치셨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성사가 주점에 이르리니 가게 주인은 오직 여자 한 사람뿐이고 그 남편은 외출하였다. 밤이 깊어 가게 여자가 술을 올리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술을 끊었노라”고 하시니, 가게 여자가 또 담배를 올리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담배를 끊었노라”고 하시니, 가게 여자가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합니까?” 라고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생의 경영이 있노라. 그러므로 정성스럽고 극진한 마음으로 계율을 지킨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술을 마시면 해롭고 고기를 먹으면 해롭다. 담배를 피우면 해롭고, 여인을 취하면 해로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와 같이 하노라”고 하셨다. 그 후에 성사가 그 주점을 지나가시다가 그녀가 병으로 누워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부적[符圖]으로써 시험하시니 병이 곧 나았다.
신정희(申正熙)의 큰 아들 신일균(申逸均)이라는 자가 동학을 지목하여 도인의 재산을 탈취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성사가 신가의 집에 이르러 꾸짖기를, “그대는 유학자이고 양반으로 자처하는 자이다. 그런데 유학자로 자처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서 자신을 살찌우려고 하니, 유학자의 소행에 위반되는 것이 심하다”고 하시고 이어서 이미 빼앗은 재물을 모두 되찾아 각 주인에게 돌려주셨다.
도인 한영석의 어머니가 죽은 어린 아들 하나를 안고 와서 폭언으로 성사께 아뢰기를, “도(道)를 믿으면 좋은 일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어린 아들이 죽고 무당의 주술까지 못하게 한다”하며 “이 아이를 환생시켜 달라”고 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들은 고사하고 큰 아들 한영석이 지금 또 죽었으니 빨리 귀가하라”고 하시니, 한영석의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니 한영석이 과연 죽은지라, 한영석의 어머니가 다시 와서 말하기를, “바라건대 선생은 한영석을 회생케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성사가 오랫동안 묵념하시고 말씀하시기를, “한영석이 반드시 회생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하니, 한영석의 어머니가 귀가한 즉 정말로 회생하였다.
1893년(포덕 34년) 계사(癸巳)에 성사가 49일 기도식을 행하셨다.
1894년(포덕 35년) 갑오(甲午) 2월에 성사가 “달리던 말들은 갑오년의 난리에 지쳐서 다 죽어가고, 풀려난 양들은 을미년의 새 세상에 숨었도다”라는 강시(降詩) 일구(一句)를 얻으셨다. 10월에 성사가 신사의 명을 받으시어 각 포(包)의 도인을 통솔하는 임무를 맡으셨다. 이때에 성사가 각 포를 이끌고 공주에 이르러서 전봉준(全琫準) 등과 더불어 서로 만나 특별히 자리를 베풀고 대신사(大神師)[최제우]께 심고(心告)하여 중대한 맹약을 맺으셨다.
이때에 도인과 관군(官軍)이 수차례 전투하였는데 불리함을 보고서 남쪽으로 후퇴하여 논산(論山)에 진을 쳤다. 하루는 논산에 진을 친 모든 사람이 서로 떠들며 말하기를, “모든 두령(頭領)은 아무 조화(造化)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난리에 빠지게 하였으니 일찌감치 죽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여 그 기세가 막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성사가 반월산(半月山)에 오르시어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만약 조화를 믿지 않는다면 일제히 나를 쏘아라”고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 숙여 엎드렸다.
성사가 도의 무리를 이끌고 익산(益山), 전주(全州), 금구(金溝), 태인(泰仁), 정읍(井邑), 고부(古阜), 장성(長城), 순창(淳昌) 등 군으로부터 임실군(任實郡) 조항(鳥項)에 도착하시니 신사가 사람들에게 기다리도록 하시므로 이에 신사를 모시고 금산(錦山)으로 향하셨다.
성사가 무주(茂朱)에 이르니 이응백(李應白)이란 자가 민보군(民堡軍)을 이끌고 포위하였다. 성사가 수하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나의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행동하라”고 하시고 이어서 깃발을 올림으로써 모든 도인이 직진하니 민보군이 크게 무너졌다. 이때에 성사가 임학선(林學善)으로 하여금 도인 수천을 이끌고 신사를 모시고 먼저 가시게 하시고 나머지 무리는 뒤를 옹호하여 나가고자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용구(李容九) 등이 명을 따르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성사가 분노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 자를 크게 꾸짖으니 군중이 갑자기 말 아래에 떨어져서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성사가 영동군(永同郡) 용산(龍山)시장에 이르러 관군과 맞닥뜨렸는데 마침 짙은 안개가 하늘에 가득하여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성사가 신사를 모시고 솔밭에 들어가 뒷일을 상의하실 때에 신사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일심(一心)으로 나올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하늘에 고하고 나가니 관군이 더욱 굳게 포위하였으므로 성사가 용맹스런 기력으로 격퇴하셨는데 탄환이 성사의 겉옷[周衣]을 찢어버렸다. 이에 신사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믿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여서 겉옷이 찢어진 것이다”고 하셨다.
청산(靑山)을 지나갈 때 수하가 아뢰기를, “지금 성사의 가족이 여기에 있으니 들어가 만나보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누가 처자(妻子)를 사랑하는 정(情)이 없겠는가마는 많은 사람들의 가족이 난리 중에 흩어져 있어 생사를 알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홀로 처자를 사적으로 돌보겠는가?” 라고 하셨다.
보은(報恩) 북실[北谷]에 이르러 관군과 더불어 교전하고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이르렀다가 다음날에 충주(忠州) 외서촌(外西村) 도잔리(都孱里)에 이르러 관군을 만나니 많은 사람들이 매우 혼란하여 각자 흩어져 갔고 또한 신사가 계신 곳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성사가 홍병기, 이승우(李承祐), 최영구(崔榮九), 임학선과 함께 야행하였는데 죽산(竹山) 칠정사(七精寺)에 이르러 관군과 교전하셨다. 성사가 오랫동안 고요히 생각에 잠기니 완연한 한줄기 빛이 어딘가를 향하여 감으로, 성사가 그 빛줄기를 따라서 50 리를 가서 작은 집에 들어가니 신사가 거기에 계셨다.
12월 24일에 성사가 충주에 이르러 “모든 도인을 총 집결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고 또 계명(誡命)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집에 돌아간 뒤에는 반드시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수련하여 하늘의 때를 거스르지 마라”고 하셨다. 성사가 이용구 집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는데 관군이 와서 포위하여 그 기세가 매우 위험하고 급박하여 성사가 스스로 신사를 업으시고 마이산(馬耳山) 정상에 이르러서 화를 피하시다가 이날 밤에 관군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하산하셨다.
성사가 이용구 집에서 이목정(梨木亭)에 이르시니 성사의 아우 손병흠이 병으로 인하여 갈 수가 없었다. 성사가 신사께 아뢰기를, “손병흠이 병 때문에 갈 수 없음으로 제자가 홀로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손병흠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병이 심하지만 어찌 신사를 모시고 가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동행하니 70 리에 이르도록 길 가는 도중에 수십의 병참(兵站)이 있었지만 침해하는 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성사가 갈대 숲[蘆林]에 이르러 유숙하고자 하였는데, 당시 관군이 그곳에 주둔한 자가 많았다. 성사가 관군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동학당을 체포하는 임무를 띤 사람입니다”라고 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한 동학인데 너희들이 어찌 체포하지 않느냐?”고 하시며 옷섶에서 궁을장(弓乙章)을 찍은 것을 보이시니 관군이 공경히 몸을 굽히며 말하기를, “소인 등이 비록 지식이 없으나 어찌 사람의 영험함을 살피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성사가 여러 도인들과 함께 그곳에서 휴식하시고 다음날 아침에 신사를 모시고 가 인제군(麟蹄郡) 최영서(崔永瑞)의 집에 이르렀다.
1895년(포덕 36년) 을미(乙未) 1월에 성사가 신사를 모시고 최영서 집 뒷방에 계시니 손병흠, 손천민, 김연국, 이종훈 등이 같이 거하였다. 머문 지 한 달여에 최영서가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하기가 곤란하였다. 성사가 아우 손병흠과 함께 상인을 가장하여 간성군(杆城郡) 압진리(鴨津里) 이달서(李達瑞) 주가(酒家)에 왔으나, 주머니 속에서는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인근에 사는 윤규칠(尹圭七)이라는 사람이 마침 와서 성사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은밀히 성사께 아뢰기를, “내가 약간의 식견이 있어 공(公)의 몸가짐을 살펴보니 공은 분명히 상인이 아니다. 한때의 곤란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니 내말을 저버리지 마시오”하고, “곧바로 천금(千金)을 줄 것이니 한때의 곤궁을 면하시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에 윤규칠이 다시 와서 천금의 어음을 바치며 말하기를, “원산(元山) 객주(客主)에 가서 돈을 찾아서 취하소서”라고 하였다. 성사가 굳게 사양하시니, 윤군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천심(天心)의 감동됨이 있어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니 뒷날에 좋은 일에 사용하든지 않든지 하는 것은 내가 간섭할 바 없다”하고 즉시 귀가하였다. 손병흠이 말하기를, “윤군과 본래부터 친분이 없음에도 윤군이 이와 같이 두텁게 사랑하니 이는 곧 한울님이 시키신 바입니다. 이 돈을 받아서 신사에게 바치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불가하다. 내가 도인을 물과 불 속에서 구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수십만 도인을 포화(砲火)와 칼끝의 혼이 되게 하였으니, 내가 비록 풍찬노숙(風餐露宿)할 지라도 구차스럽게 일신의 편안함을 어찌 도모하겠는가? 신사 또한 나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어찌 이 돈을 받겠는가.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밤에 편지를 써 어음[錢票]과 함께 윤군에게 보내시고 곧바로 원산으로 향하셨다.
도중에 이종훈을 만나서 원산에 이르렀다. 성사가 안경을 150금(金)에 팔고 상품을 사서 3인이 나누어 짊어지고 최우범(崔禹範) 집에 도착하여 판매하니 50량의 이익을 얻었다. 정조(正租) 10여 석을 매입하여 식량을 마련하고 각자의 의복을 준비하였다.
6월에 성사가 강계군(江界郡)에서 청국(淸國) 땅에 들어가서 성심(誠心)으로 상업을 경영하시니 이익을 얻은 것이 또한 많았다. 신사가 계신 곳으로 돌아오시니 충분히 5~6인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에 신사가 성사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성심으로 돈을 얻은 것이 충분히 1년의 호구(糊口)가 풍요할 것이니, 너는 다시 번거롭게 출입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라”고 하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이 매우 불편하니 손천민, 김연국, 손병흠, 이종훈은 다른 곳으로 가서 머물러라”고 하셨다.
신사가 다시 성사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천품(天品)이 비록 대도(大度)가 있으나 다시 공부를 더하여 하늘의 이치를 크게 깨쳐서 무극대도(無極大道) 창건의 무거운 임무를 스스로 맡아라”고 하시고 천지(天地)의 이치(理)와 우리 도의 본체(本體)와 시운(時運)의 변천과 용세(用世)의 방편(方便)과 성심(性心)의 수련하는 절차를 차례로 설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의심스럽고 어려운 곳이 있으면 다시 질문하라”고 하셨다. 성사가 이와 같이 여러 날을 공부하셨다.
9월에 신사가 와서 모인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내말을 듣고 의암(義庵)이 만약 1시간에 뜻을 깨쳐 안다면, 다른 사람은 여러 달을 연구하여야 깨치리라”고 하시니 좌우가 모두 침묵하였다.
○ 성사가 신사의 이사할 일 때문에 임학선과 더불어 치악산(雉岳山) 정상에 가시니 마침 한 칸 초막이 있고 인적이 드물었다. 여기에 거처를 정하고 양식을 구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하여 한 달 여를 임학선 집에 머물렀다. 이때에 성사가 몇 구절의 강서(降書)를 얻으셨다.
강서(降書)
요망한 잔나비 슬프게 울어 어진 손님이 흩어지고,
사람 닭이 처음으로 울어 함곡관(函谷關)이 열린다.
달리는 개가 화살을 만나니 형세가 가련하고,
숨은 돼지 놓임을 얻으니 기운이 양양(揚揚)하도다.
쥐가 노적 가운데 들었으니 짐승의 무리가 아니요,
소를 진두(陣頭)에 놓았어도 전단(田單)이 아니더라.
날랜 범이 숲에서 나오니 때는 9월이요,
옥토끼가 정(情)을 머금으니 달은 삼경(三更)이라.
용이 물 기운을 얻으니 가장 재미가 좋고,
새가 푸른 숲에서 노래하니 처음으로 사람이 놀래더라.
1896년(포덕 37년) 병신(丙申) 1월에 성사가 신사의 가족을 치악 산중에 정돈케 하시고 집안 소식을 들으니 집안사람이 동서로 떨어져서 생명을 겨우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의 명(이때에 신사가 성사께 이르시기를, “이곳은 아주 조용하고 외져서 공부하기가 좋다”고 하셨다.)을 받들어 100일 공부를 하실 때에, 임학선에게 쌀을 100여 리에서 짊어지고 오게 하고 성사의 부인으로 하여금 식사를 주관하게 하셨다.
2월에 남로(南路)가 비로소 통하였다. 신사의 주택은 충주군 마루타리(馬樓坨里)에 매입하고, 성사의 가족은 충주군 방축리(防築里) 도인 집의 딸린 방에 임시로 머물러 사니, 이것은 모두 이용구의 주선이었다. 성사가 이용구의 신실(信實)을 칭찬하셨는데, 신사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한때의 믿음으로써 지나치게 칭찬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사가 신사를 모시고 여주(驪州)에 이르시니 때에 의병(義兵)이 크게 일어나 민가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 포탄을 함부로 쏘아 탄환이 비처럼 내렸다. 성사가 잠시 산에 올라 난을 피하시다가 음죽군(陰竹郡) 도인 권재천(權在天) 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으셨다.
다음 날은 한식(寒食)이었다. 신사가 여러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손병희의 신의(信義)는 천하에 둘도 없다”하시더니, 그 뒤에 의암(義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리신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날에 충주에 가시어 가족과 상봉하시니 3년 만에 처음 뵙는 것이었다.
12월 11일에 성사가 스승의 명(2편에 보인다)을 받들어 손천민, 김연국과 함께 3인의 이름을 도장 하나에 조각하여 ‘대종포행(大宗布行)’의 문자에 찍으셨다.
1897년(포덕 38년) 정유(丁酉)에 성사가 강원도(江原道)을 순회(巡回)하실 때 여주군 임순호(林淳灝) 집에 이르시니 때는 바야흐로 4월 5일이었다. 성사가 대신사(大神師)의 향례(享禮)를 행하실 때 임순호, 염창순(廉昌淳) 등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지금 향아설위(向我設位)할 의향이 있으니 이는 나의 개인적인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天意)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종문(宗門) 모든 사람이 만약 이 일을 알면 반드시 나의 개인적인 뜻에서 함부로 행했다고 질책할 것이니 그대들은 아직 쓸데없이 떠들지 말라”고 하시고 곧 향아설위하여 향사(享祀)를 행하셨다. 다음 날에 성사가 신사댁에 이르렀는데, 신사가 성사에게 이르시기를, “어젯밤에 내가 5만년 변하지 않는 법을 비로소 정하였는데 네가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서운하도다”라고 하셨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어째서입니까?” 라고 하셨다. 신사가 말씀하시기를, “향아설위의 법을 정하였다”라고 하셨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제자가 또한 어젯밤에 임순호 집에 있으며 향아설위하고 향사(享祀)를 행하였습니다”라고 하셨다. 신사가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곧 천심(天心)이 함께 하신 것이다”라고 하셨다.
7월에 성사가 광주군(廣州郡) 사동(寺洞) 정성모(鄭性模)와 함께 자다가 한밤중에 정성모가 소변을 보다가 갑자기 넘어 쓰러졌다. 성사가 이종훈 집에 가서 이종훈과 함께 다시 정성모 집에 가시니 정성모가 아직도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성사가 부서(符書)로써 시험하시니 3시 경을 지나서 회생하였다.
12월 24일에 성사가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2편에 보인다]가 되셨다.
1898년(포덕 39년) 무술(戊戌) 1월 3일에 군사 60여 인이 도인 권성좌(權聖佐)를 결박하고 앞세워 몰아 신사댁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성사가 병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이 누구이기에 감히 나의 안 뜰에 돌입하느냐?” 라고 하셨다. 군사가 권성좌를 가리켜며 말하시기를, “이 사람을 알지 못하는가?” 라고 하니 성사가 긴 목침(木枕) 1개를 들어 문턱을 치시며 권성좌를 질책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아느냐? 사실을 바른대로 말하라”고 하셨다. 권성좌가 놀라 겁먹고 말하기를, “나는 정말로 알지 못합니다. 핍박에 이기지 못하고 거짓말로 꾸며 말했습니다”라고 하니 군사들 역시 말없이 물러갔다(이때 신사댁은 원주[原州] 원송리[元松里]에 있었다).
이날에 성사가 수하 6, 7인으로 하여금 신사를 모시고 산중 작은 움막[2편에 보인다]에서 하루를 묵으셨다.
2월에 성사가 원주군 둔둔리(屯屯里)에 이사하셨다.
4월 4일에 성사가 신사를 모시고 앉았는데, 신사가 성사에게 이르시기를, “이번 향사(享祀)는 집에 돌아가 행하라[2편에 보인다]”고 하시니, 성사가 두세 번 주저하시다가 이어 명을 받들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성사가 향사를 행하신 뒤에 취침하고자 하였더니 순식간에 가슴 속이 답답한 상태가 되었고 또 분명하게 군사들이 신사댁에 들어감을 보는 것을 역력히 스스로 경험하셨다. 이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곧바로 산길을 따라서 신사댁을 향하실 적에 마음의 상념이 매우 황홀하였으므로 잠깐 동안 산 위에 앉아 무심히 손가락으로 풀뿌리를 잡았는데 홀연히 임학선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놀라 깨달으시어 일어나 살펴보시니 몸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5리 쯤 떨어진 큰길 위에 앉아 있으셨다. 성사가 이상히 생각하시며 신사댁에 이르니 신사가 이미 체포당하여 서울[京師]로 향하셨다고 말하였다.
생각하건대 성사댁에서 신사댁의 거리가 작은 길로는 5리이고, 큰 길로는 10리나 되었기 때문에 성사가 만약 작은 길로 가서 빨리 걸어갔다면, 신사와 동시에 체포될 염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간섭으로 5리 밖 큰길 위에 앉아있도록 한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더라. 때에 홍병기, 김연국, 박희인이 와서 모여 함께 뒷일을 논의할 때, 임학선이 신사댁을 횡성(橫城)으로 이주시켰다. 성사가 손병흠, 손천민, 이종훈과 함께 서울에 가서 신사의 일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를 기다리셨다. 마침내 신사가 동학의 혐의로 6월 2일 교수형에 처함을 받으셨다.
이에 앞서(6월 1일) 성사가 근심스런 온갖 생각이 마음속에 뒤얽혀 서리어 밤 깊도록 잠을 못 이루시더니 비몽사몽간에 신사가 와서 이르시기를, “나는 천명(天命)의 정한 바이니 어길 수가 없는 것이므로 너는 잘 우리의 도(道)를 주장하여 대사(大事)를 영원히 이어가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잠시 누워라”고 하시므로 성사가 명교(命敎)와 같이 하시니 신사가 성사의 배위에 엎드려 구기(口氣)로써 성사의 입 속에 불어 넣으시니 성사가 매우 안타깝고 가슴이 답답하시어 뒤척이다가 문득 깨어나시니 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그러므로 성사가 이것을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홀로 근심하시어 앞으로 화가 미칠 듯하더니 2일 오후에 권재운(權在運)이 이종훈으로 하여금 성사께 아뢰기를, “오늘 신사가 교수형을 받고 또 법관이 포졸을 많이 내어서 급히 근처에 있는 두목(頭目)을 수색하니 반드시 주의하라”고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재앙의 기색이 비록 가까이 닥쳤다 하더라도 의리에 어찌 신사의 시체를 수습하지 않으리오?” 라고 하시어 이종훈에게 염습, 운구(運柩)하도록 하시고 성사는 먼저 광주(廣州) 이상하(李相夏) 집에 가시어 장례 기물을 마련하시며 산소를 점지하시고 기다리셨다. 다음날은 비가 내렸지만 성사가 비를 무릅쓰시고 이종훈과 더불어 이상하의 산에 장사지내셨다.
손천민이 성사께 아뢰기를, “스승이 밤에 교수형을 받았으니 우리들이 어찌 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스승을 따라서 순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스승을 따라서 순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대도(大道)의 책임이 있으니 반드시 삶을 도모하여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성사가 아우 손병흠, 김연국, 신응식(申應植), 김성도(金聖道), 이용한(李容漢) 등과 함께 광주(廣州) 이수진(二水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국(技局)을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 매우 수상하였다. 성사가 군인이 아닌가 의심하였지만 진위를 알 수가 없자, 이용한, 신응식에게 기국을 설치한 사람들을 결박케 하시니 무리가 모두 도주하고 오직 1인이 결박되자 성사가 크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군인이 되어서 군율은 지키지 않고 기국을 길옆에 설치하여 사람의 돈과 재물을 탈취하니 도적에 대한 형률로써 너를 다스리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애걸하며 말하기를, “하찮은 졸병이 비록 잘못을 범하였지만 바라건대 대인(大人)께서는 용서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결박을 풀어주게 하시고 이 지점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셨다.
성사가 이성운(李聖運) 집에 이르러서 머문 지가 20여 일에 “앉아서 강산의 그림을 보니 흐뭇하게 배가 부르도다. 만약 우주 사이에 뱉으면 천하가 함께 배부르리라”는 시(詩) 몇 구절을 얻으셨다. 때에 홍병기가 왔음으로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조용하고 후미진 곳에 떨어져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도인의 향배(向背)를 살피고자 함이니 너희들은 깊이 삼가하라”고 하셨다.
성사가 신사댁에 이르시니 박인호(朴寅浩)가 우연히 찾아 왔다. 성사가 박인호에게 이르시기를, “각지 도인의 향배는 어떠한가?”라고 하니, 박인호가 대답하기를, “조금도 해이함이 없고 지성으로 도를 수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도(大道)의 책임을 지고서 우리 도를 다가올 앞날에 밝혀 드러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성으로 수련하여 황홀히 대도를 깨달은 뒤에야 도문(道門)을 크게 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박인호와 함께 의논하여 정하여 조용하고 후미진 곳에 거하셨다. 거한지 한 달 남짓에 각지 두목이 차츰 찾아 왔다.
때에 이병춘(李炳春)이 성사를 찾아와 뵈었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어찌 나의 소재를 아느냐?”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지팡이에 의지하여 지팡이 머리가 향하는 바를 좇았더니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지금껏 도를 잊지 않았느냐?” 라고 하시니 이병춘이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인황씨(人皇氏)는 사람을 구하소서”라고 하므로 앉아있던 여러 두령이 이상히 여겼다.
이에 앞서 성사가 여러 두령과 더불어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의 문자를 제작하여 교중(敎中)에 널리 알리고자 할 적에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널리 알리는 일은 잠시 멈추고 기다려라. 뒷날에 삼황(三皇)의 뜻을 가지고 말해 줄 사람이 자연히 있게 될 것이니, 이런 증험을 보게 된 뒤에 널리 알리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이르러 과연 증명되었다.
때에 성사가 식량을 구할 방도가 없어, 다수의 식솔이 굶어 죽게 될 무렵에 마침 손님이 왔다. 그러므로 성사의 아우 손병흠이 식량을 구할 방도를 물으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식량을 짊어지고 올 사람이 있을 것이니 솥을 닦고 기다려라”고 하시더니, 과연 음죽(陰竹) 도인 박용팔(朴容八)이 쌀 3말을 짊어지고 왔다.
성사가 뇌후종(腦後瘇)으로 일상생활이 곤란하셔서 시중하던 자가 의사를 부르고자 하였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5만년 대도(大道)로써 나의 임무로 삼았으니 생사가 하늘에 있는데 어찌 의약을 사용하여 치료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그 날 밤에 종기 뿌리 몇 치가 홀연히 솟아나와 고름이 많이 흘러나왔는데, 며칠 뒤에 이 종기가 완전히 치유되었다.
8월에 성사가 당진군(唐津郡) 모동(茅洞)에 임시로 옮겨 사실 적에, 박인호가 서산(瑞山) 도인 최재순(崔載淳)에게 말했더니 최재순이 논 3마지기를 팔아 조(租) 20석을 사서 바쳤다. 하루는 밤에 성사가 천동지정(天動地靜)의 이치를 이해하여 대지(大地)가 자전(自轉)함을 깨달아 아시니, 이때에 생각이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 초저녁부터 이른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셨다.
성사댁 문 앞에 마른 샘이 하나 있었는데, 낙엽에 덮여 막혀 있었다. 성사가 자신의 손으로 낙엽을 제거하시니 곧바로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정결(淨潔)함이 청수(淸水)로 올릴 수 있을 정도였고 수량 역시 풍부하여 마을 30여 집의 식수가 풍족하였다. 성사가 이사하신 뒤에는 샘물이 즉시 말라버렸다. 성사의 사위 이관영(李觀永)이 폐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성사가 심축(心祝)하며 손으로 문지르니 두서너 달에 이르러 병이 완전히 낫게 되었다.
1899년(포덕 40년) 기해(己亥) 4월에 성사가 박인호에게 춘암(春菴) 도호(道號)를 내리셨다.
7월에 성사가 각세진경(覺世眞經)을 지으셨다.
각세진경
“높은 것은 하늘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두터운 것은 땅보다 더 두터운 것이 없으며, 비천한 것은 사람보다 더 비천한 것이 없는데, 사람이 하늘을 모셨다 함은 어찌된 것입니까?” 대답하시기를 “만물은 이 성품[性]이 있고 만물에는 이 마음[心]이 있으니 이 성품과 이 마음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므로 하늘을 모셨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성품과 마음이 하늘에서 나왔다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음과 양이 덕(德)을 합하여 체(體)를 갖춘 것을 성품이라 말하고, 밖으로 접령(接靈)이 있고 안으로 강화(降話)가 있는 것을 마음이라 말하느니라.”
“그러면 높은 것이 하늘이 아니요, 두터운 것이 땅이 아니란 것입니까?” 대답하시기를 “높은 것은 두터운 것에 의지하고 두터운 것은 높은 것에 의지하였으니, 비천한 것은 그 사이에 있어 위로는 높고 밝은 덕을 입었고 아래로는 넓고 두터운 은혜를 실은 것이니라. 이러함으로 삼재(三才)란 것은 도무지 한 기운뿐이니라.”
“성품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천지의 정체(精體)이니라.”
“마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들리는 듯하나 보기 어려운 혼원(渾元)한 허령(虛靈)이니라.”
“영(靈)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허령이 창창(蒼蒼)하여 만물에 남기지 아니함이 없으며, 비치지 않은 때가 없으며,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일어나면 밝고 어두우면 변화하여 스스로의 덕과 스스로의 이치의 천지의 세요, 자연의 이치니라.”
“오행(五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기(氣)의 정체(精體)이니라.”
“기(氣)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이치의 정령(精靈)이 크게 나타나는 수려한 모양이니라.”
“이치[理]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한 덩어리니라.”
“한 덩어리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시작이 없는 것으로써 있는 것이니라.”
“정(精)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체(體)의 지극한 영(靈)이니라.”
“음양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처음에 한 물건이 있었으니 물건이란 것은 한 덩어리요 덩어리란 것은 무극(無極)이니, 다만 처음의 나눔이 있어 이른바 무극이 태극(太極)을 낳은 것이라. 무극은 음이요 태극은 양이니, 상하로 말하면 상하도 또한 음양이요, 동서로 말하면 동서도 또한 음양이요, 그밖에 춥고 더운 것, 낮과 밤, 가고 오는 것, 구부리고 펴는 것 등이 다 음양 아님이 없으니 다 그 근본을 연구하면 천지·귀신·변화의 이치가 서로 대하고 서로 응하나니, 서로 대하고 응하는 것은 도무지 음양의 이치이니라.”
“강화(降話)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강이란 것은 영(靈)이 접하는 이치요, 화란 것은 귀신의 영을 받지 아니 함이 없어 능히 말하고 웃고, 능히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다 강화의 가르침 아님이 없는 것이니라.”
“접령(接靈)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그 나타남이 그토록 빠르게 골격에 혼연히 들어가 총명이 그 귀와 눈에 응하여, 나와 하늘의 기운이 서로 합하여 하늘과 사람이 말을 서로 들으며, 뜻과 생각이 서로 같아서 모든 일을 능히 통하는 것이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찌 하늘의 적실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성현의 경지에 이르며, 능히 한울님 말씀의 적실한 것을 들어 교화의 덕을 어김이 없게 하리오.”
“귀신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음양의 변화를 이름이니라. 귀신으로 말하면 음귀(陰鬼)·양신(陽神)이요, 성심(性心)으로 말하면 성귀(性鬼)·심신(心神)이요, 굴신(屈伸)으로 말하면 굴귀(屈鬼)·신신(伸神)이요, 동정(動靜)으로 말하면 동신(動神)·정귀(靜鬼)니, 통틀어 말하면 기운이 이치를 포옹하고 그 이치가 기운을 받는 것인데, 의지한 것도 없고 선 것도 없는 둘레이니라.”
“의지한 것도 없고 선 것도 없는 둘레라면, 방위는 있으나 변치 않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대답하시기를 “배 가운데 누우면 배를 돌려서 가도 그 가는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슬프다, 살면서도 그 사는 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면서도 그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먹으면서도 그 먹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늘과 땅은 한 손바닥 가운데 그림이요
큰 도(大道)는 두 글자를 분석하는데 다했어라
사람이 하늘을 모신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을 거느렸고
입이 말을 하는 것 아니라 말이 입을 가르치고
귀가 소리를 듣는 것 아니라 소리가 귀에 부딪치고
혀가 맛을 아는 것 아니라 맛이 혀를 가르치더라.
때에 성사가 글[文]을 반포하여 생선·고기·술·담배를 금지시키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한울님의 명(命)한 바이다”하셨다. 그런데 식솔들이 더러 그 뜻을 불신한 듯 하여서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선을 사서 줄 것이니 이를 먹으면 천령(天靈)이 어떠한 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하시고 생선을 사서 주셨다. 여러 사람들이 그 생선을 삶아 먹었더니 갑자기 20여 인이 일시에 기절하였다. 성사가 손으로 문지르니 모두 일어나 앉아 평소와 같았다. 이때에 임도여(林道汝), 김영근(金英根)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니, 바라건대 국 한 그릇을 내려 주시오”하더니 국을 먹은 뒤 잠깐 동안에 한 사람은 뜰 앞에 기절하고 한 사람은 문밖에 기절하였다. 성사가 또한 손으로 문지르시니 문득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로부터 도유(道儒)가 모두 천령의 엄함을 깊게 믿었다.
12월에 성사가 정산군(定山郡) 말치[斗峙]에 옮겨 사셨다. 그런데 식수가 너무 멀리 있어 청수(淸水)를 올리기가 불편하였다. 그래서 집 뒤 노는 땅을 파내었더니 반석(磐石)이 그 속에 있었는데, 돌 위에서 물이 솟아나와 사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때에 성사의 부인과 차녀가 머리에 난 종기가 있었다. 성사가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주동이 의사를 맞이하여 부인의 종기는 이미 쨌음으로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믿는 자가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 차녀의 종기는 한울님이 반드시 낫게 할 것이니, 한울님의 치료와 의원의 치료 중 어느 것이 신효(神效)한 가를 사람들에게 시험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손으로 문지르시니 머리에 난 종기가 완전히 낫고 종기 고름은 대소변으로 나왔다.
12월 11일에 신사의 부인 손씨가 돌아가시니 성사가 친히 장례를 치르시고 정산군 땅에 장사지내셨다.
1900년(포덕 41년) 경지(庚子) 2월에 성사가 신사 및 부인 손씨의 영연(靈筵) 앞 촛불에서 불이 일어나 옥상으로 번져 타 나가는 것을 보시고 오랫동안 묵념하시니 홀연히 쨍그랑 소리가 나더니 불이 꺼졌다.
5월에 성사가 신사의 분묘를 광주군(廣州郡) 원적산(元積山) 아래에 이장하실 때, 와서 모인 자가 손병흠, 손천민,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김훤배(金萱培), 이용구 등이고 김연국은 오지 않았다. 성사가 여러 도인과 함께 지평군(砥平郡) 이종훈 집에 모일 때 여러 사람이 “김연국이 항상 두 마음을 품고 우리 도(道)에 귀일(歸一)하지 아니하니, 이는 자존(自尊)의 마음으로 천명(天命)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타일러 깨우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김연국을 청하거늘 성사가 김연국에게 이르기를, “신사가 돌아가실[授命] 때에 우리들이 스승을 좇아서 순교하지 않은 것은 육신을 구차히 살고자 해서가 아니라 대도(大道)를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고자 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런 중대한 책임이 우리들의 몸에 있는 것이다. 신사가 살아계실 때에 도통연원(道統淵源)으로써 불초(不肖)한 나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바로 천명(天命)에 따라 정한 것이다’라고 하시며 신사가 여러분에게 이르기를, ‘3인이 비록 일을 주간할지라도 주장(主張)이 없을 수 없으니 의암(義菴)으로써 북접대도주를 삼노라’고 하셨다. 신사의 이 말을 그대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들었으니 그대는 반드시 이견이 없겠지만, 그 외의 여러 도유(道儒)는 반드시 두루 알고 있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니, 지금 각지의 두목을 대대적으로 모이게 한 다음 두 분 신사의 신위(神位)를 설치하고서 신명(神明)을 경험(시험)한 바로써 다시 종통연원(宗統淵源)을 정해야 할 것이다”하시고, 이에 설법(設法)의 기일을 5월 27일로 정하셨다.
설법의 기일을 맞이하여 각지 두목이 모두 모였는데 오직 김연국만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김연국의 신의가 없음을 따져 벌하고자 하거늘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김연국이 어찌 신의가 없겠는가마는 다만 망령된 생각이 잠시 싹터 마음을 가려서 정신을 어지럽게 한 것이다. 따라서 방향을 정하지 못한 것이니, 내가 앞으로 김연국을 타일러 깨우치게 하여 천심(天心)이 감동하여 움직이게 하리라”고 하셨다.
6월 2일에 신사의 향사를 행하실 때 성사가 김연국을 불러서 참례(參禮)하게 하고 전날 설법 때 신의를 어긴 것에 대해 잘못을 따져 꾸짖으시며 또한 뒷날 설법할 일을 타일러 깨우치게 하시니 김연국이 약간 감동한 바가 있었다.
7월 20일에 설법식(說法式)을 행하실 때, 박인호, 손천민, 김연국, 손병흠, 이종훈, 홍병기, 오영창(吳榮昌), 이병춘, 이용구, 김낙철(金洛喆), 김낙봉(金洛葑), 박희인 등 30여 인이 와서 모였다. 성사가 법석(法席)을 베푸시고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종통(宗統)을 받은 것은 자네들이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러나 신사의 정령(精靈)은 저승과 이승[幽明]이 일치할 것이니, 확실히 신사의 강서(降書)를 받아서 종통을 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이용구의 조카 6살 아이를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순연(純然)하니 곧 천심(天心)이므로 이 아이에게 붓을 잡게 하여 강서를 받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박인호, 손천민, 손병흠, 이종훈, 홍병기, 이용구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하고 나머지 여러 사람은 모두 묵념하였다. 성사가 의식을 행하고자 함으로 김연국이 말하기를, “신사가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의암(義菴)으로 하여금 종주(宗主)를 삼으시고 우리들에게 보좌토록 하였으니 다시 신사의 영전(靈前)에서 강서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신사의 명교(命敎)하심을 불신하여 다시 신사의 영전에서 강서를 구한하면 신사의 정령이 반드시 노(怒)할 것이니 신사의 구교(口敎)를 따라서 대종주(大宗主) 의식(儀式)을 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굳게 사양하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명을 따르지만 혹여 다른 사람이 불신하면 앞으로 대도(大道)의 발전에 장애가 될 것이니 반드시 강서를 받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김연국과 함께 온 김낙철 기타 여러 사람이 모두 김연국의 말과 같았다. 성사가 부득이 그 말을 좇아서 대종주(大宗主)의 관복(冠服)을 입으시고 예석(禮席)에 나아가서 의식을 행하셨다.
○ 이때에 성사가 자신의 손으로 강서를 쓰시니, 이르기를,
“용담(龍潭) 대운(大運)은 하늘과 같이 무궁하여 길이 살아 죽지 않는 지라, 해월(海月) 신사께 전하여 주시고 해를 타고 하늘에 이르러 아득하게 선대(仙坮)로 향하였으나, 일에 간섭치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이 길이 내 마음에 모시었도다.
검악대세(劍岳大世)에 전하는 것이 무궁하여 죽지도 아니하고 멸망하지도 아니하여, 바릿대를 전한 도주(道主)는 때로 명(命)하지 아니함이 없고, 때로 가르치지 아니함이 없어, 길이 온전하여 마음에 새기었도다.
이렇듯이 깨달음이 없는 것이 대도(大道)를 거느려 일으키지 못하다가, 날을 가리어 설법하니 황연히 가르침이 내리어, 기강을 밝게 세우고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크게 원하노라”고 하셨다.
8월에 성사가, 손천민이 교수형 된 소식과 강성택(康聖澤)이 총살된 소식을 접하셨다. 그 전에 손천민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先師)가 모든 도(道)를 위하여 순교하셨으니 내가 반드시 도에 죽으리라”고 하여 지목을 피하지 않고 살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서우순(徐虞淳)과 함께 서울 군사[京兵]에게 체포당하였다. 손천민은 도문(道門)의 책임을 오로지 지고 교수형을 받았고 서우순은 석방되었다.
동시에 각지 도인이 많이 체포되어 징역을 살거나 죽은 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영변(寧邊) 도인 강성택이 본군[광주군] 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게 체포되었다. 이도재가 말하기를, “네가 만약 동학을 안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또 너의 스승에게 욕설을 한다면 너를 사면하겠다”고 하였다. 강성택이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도재를 보며 말하기를, “너는 무도무의(無道無義)한 사람이다. 네가 만일 적에게 체포되어 적이 너에게 ‘군부(君父)를 욕하라’고 하면 네가 감히 군부를 욕하고 목숨을 도모하겠는가. 너는 또한 유학을 배운 자이다. 유도(儒道)의 옳음을 알고 수련하다가 만일 도(道)로 인하여 사경(死境)에 이른다면 너의 입으로 유도를 배척하고 목숨을 도모하겠는가. 지금 네 말을 들으니 너는 진실로 무의무도한 자구나. 긴 말 할 것 없이 너의 뜻대로 처결하라”하니 이도재가 총살하였다.
때에 성사가 홍병기에게 집안일을 주관하게 하시며 박인호에게 각지 지목의 혐의[指嫌]의 상황을 살피게 하고 그 아우 손병흠, 이용구, 김학수(金學洙)와 함께 예천군(醴泉郡) 용문사(龍門寺)에 이르렀다. 그런데 승려 10여 인이 마중 나와 있었고, 절에 들어가니 다과(茶果)를 또한 풍성하게 차려있어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노승(老僧)이 대답하기를, “어젯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귀한 손님이 방문하니 속히 마중 나가라’고 함으로 빈도(貧道)가 문에 나와 보니 정말로 귀한 손님이 이르시니 다수의 신장(神將)이 옹위(擁衛)하였습니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 다과를 미리 준비하고 여러 승려로 하여금 마중 나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성사가 이 절에 계시며 37일 공부를 하셨다. 이때에 시(詩)에 이르기를, “구름은 용문사(龍門寺)로 돌아가고 물은 낙동강(洛東江)으로 흐르고, 성근 비는 청산이 대답하고 서늘한 바람은 벽공(碧空)의 편지로다. 노는 고기는 푸른 바다의 마음이요, 우는 새는 푸른 산의 뜻이라. 흰 돌은 만년 뼈요, 붉은 꽃은 열흘 흔적이로다”라고 하셨다. 때에 홍병기가 와서 말하기를, “예천군수(醴泉郡守) 이소영(李紹榮)이 장교를 많이 풀어서 종적을 수색하니 그 기세가 매우 급박합니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그 밤에 즉시 김영근과 함께 100리를 가서 제천군(堤川郡) 도인 염창석(廉昌錫) 집에 이르니 맑게 갠 한밤중이었다. 홍병기가 성사의 가족을 데리고 제천에 이르렀음으로 오영창에게 집안일을 주관하게 하셨다.
1901년(포덕 42년) 신축(辛丑) 1월에 성사가 죽산(竹山) 미륵평(彌勒坪)에 옮겨 사셨다.
3월에 성사가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손병흠, 이용구 등과 함께 상의하기를, “내가 지난해에 손천민, 김연국과 함께 상의하여 미국에 유람하고자 하다가 김연국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앞으로 우리의 도(道)를 세계에 드러내어 밝히고자 하는데 오늘날의 문명(文明)으로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외국에 유람하여 10년 정도 문명의 성질(性質)과 세계의 형편을 두루 탐방하고자 하니 중의(衆議)는 어떠한가?” 라고 하시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성사가 곧 아우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장도에 올라 원산에서 부산(釜山)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국 배편은 일본(日本)에 가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성사가 이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서 하루를 묵으시고 다음날에 오사카(大阪)에 도착하니, 소지한 돈이 60원 밖에 남지 않아서 미국을 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손병흠, 이용구로 하여금 여비를 대한(大韓)에 가서 마련하게 하였다. 1개월 후 두 사람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변통하여 얻은 바가 미국 배편으로는 부족합니다”라고 하니, 성사는 일본에 머무르시고 손병흠, 이용구는 대한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성사가 성명을 이상헌(李祥憲)으로 바꾸시고, 대한의 국사범(國事犯) 권동진(權東鎭), 조희연(趙羲淵), 이진호(李軫鎬), 조희문(趙羲聞),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셨다. 때에 조동원(趙東元)이 오사카에 왔다가 성사를 찾아와 뵈었고 대한으로 돌아간 뒤에 폐신(嬖臣) 이창구(李昌九)가 편지[書]로써 성사께 요구하기를, “지금처럼 나라의 형편이 매우 위태로운 때에 공(公)처럼 훌륭한 사람이 외국에 머물러 있으면 고통받는 대중을 널리 구제하는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이미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의 뜻으로써 요구하노니, 바라건대 공은 속히 돌아올지어다.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반드시 칙령(勅令)으로써 부르리라”고 하였다. 성사가 스스로 헤아려 말씀하시기를, “만약 칙령으로써 부른다면 위반하기 어려우니, 외국 땅으로 몰래 가버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고 하시고 드디어 손병흠과 함께 청국(淸國) 상하이(上海)로 향하셨다. 성사가 손병흠에게 이르시기를, “교가(敎家) 자제로 하여금 문명학술을 배우게 함이 시의(時宜)에 적합하니 그대는 가서 이것으로 도인을 깨우쳐라” 하셨다.
9월에 손병흠이 돌아와서 성사께 아뢰기를, “대중이 모두 즐거이 따랐습니다”라고 하였다.
10월에 성사가 손병흠과 함께 대한의 원산항으로 돌아오셨다. 때에 박인호, 김훤배(金萱培)를 관서(關西)에 파견하여 도인을 효유(曉諭)하게 하셨다.
12월에 성사가 과천군(果川郡)에 사셨다.
1902년(포덕 43년) 임인(壬寅) 1월에 성사가 과천에서 서울[京城] 서강(西江)으로 옮겨 사셨다.
3월에 성사가 서생(書生) 24인을 이끌고 일본국 나라현(奈良縣)에 가시어 서생에게 일본어를 배우게 하셨다.
6월에 성사가 일본 서경(西京)으로 이사하시고 서생에게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 입학하게 하셨다. 이때에 성사가 각지 도인을 가르쳐 타일러 더더욱 하늘을 믿으며 도를 수련하게 하시니 도인의 믿음과 정성(信誠)이 전날보다 더욱 증가하였다.
1903년(포덕 44년) 계묘(癸卯)에 성사가 러일개전[露日開戰]의 설이 성행함을 들으시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정리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국가는 비록 신변에 속한 일이라 하더라도 토지와 인민이 문란하여 서로 떨어져서 손해가 생기면 우리 도의 발전이 극히 어려울 것이니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전쟁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고 하시고 권동진, 조희연과 함께 상의하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대한의 정관(政官)이 대부분 바로 러시아당이므로 임금[主上]이 러시아공사관(露館)에 있고 정령(政令)이 러시아당에서 나오니, 만약 우리 도인의 합심한 힘으로써 러시아당을 깨뜨려서 마음속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하면 러시아인이 그 한 팔이 꺾이어 멀리서 엿보는 기세가 좌절될 것이니 이 계책을 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숨은 도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우리의 계책이 완벽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논의를 누구와 함께하여 결실을 맺으리오”라고 하셨다. 권동진, 조희연이 말하기를, “일본 참모총장 다무라(田村)라는 위인은 지략도 있고 기개가 정독(精篤)하니 가히 더불어 일을 의논할만합니다”고 하니, 성사가 권동진과 함께 비밀히 다무라를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일본 군사를 상인으로 변장시켜 비밀리에 대한의 개항하지 않은 항(港)에 들여보냈다가 우리 도유(道儒)와 더불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모두 일어나서 곧바로 대한의 서울[韓京]로 돌격하면 러시아당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당이 깨져 무너지면 러시아 세력이 반드시 고립될 것이고, 그 기세로 인하여 우리 도유 수만과 함께 힘을 합쳐 러시아를 격퇴하면 러시아가 반드시 머리를 움츠릴 것이니 동양평화의 술책이 무엇이 이보다 뛰어나겠는가”라고 하시니, 다무라가 크게 기뻐하고 마침내 그 계책을 정하였다. 성사가 아우 손병흠을 대한에 보내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서 이 입의(立義)의 방책으로 도인에게 널리 깨우치고 또 비밀히 준비해서 이에 맞춰 떨쳐 일어나게 하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기를, “일본 군사가 비밀히 발동할 때에 네가 또한 도유를 지휘하여 도유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 기다려서 큰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셨다.
때에 성사가 명리전(明理傳)을 지으셨다. 또 삼전논지(三戰論旨)를 지으셨다.
8월 3일에 손병흠이 갑자기 질환으로 부산항에서 사망하시고 8월 5일에 다무라(田村)가 또한 사망하였으므로 거듭 전보가 일시에 함께 도착하니 성사가 통곡하시고 3일을 먹지 않으셨다. 성사가 다시 마음을 다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모든 일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따른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니 어찌 전날 실패로써 나의 뜻을 꺾게 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드디어 스스로 분발하여 속행하실 적에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등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3인이 스승의 명을 받들어 일본 고베(神戶)에 이르렀는데, 같이 배를 탄 조동원이 일본인에게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하선하지 못하고 대한으로 복귀하였다.
성사가 대한의 내정(內政)이 날로 그릇되고 외국의 침략과 압박이 날마다 이르고 있음을 한탄하시어 이인숙(李仁淑)으로 하여금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등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서 민회(民會)를 설립하게 하셨다. 또한 의정대신(議政大臣) 윤용선(尹容善)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정(稅政)을 탄핵하였더니, 윤용선이 요서(妖書)라 하여 이인숙을 잡고자 하여서 이인숙이 몸을 숨긴지 7일 만에 다행히 사면되었다.
정부가 보낸 서신 내용 중 감옥에 갇혀 있는 김연국을 정부에서 시험적으로 등용하려는 뜻이 있었다.
성사가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인천해(仁川海)에서 개전(開戰)함을 들으시고 군자금 10,000원을 일본 대장성(大藏省)에 보조함으로써 이웃나라의 우의를 표하셨다.
성사가 모든 서생에게 이르시기를, “사람의 덕의(德義)는 상애(相愛)에서 나오나니 친애로 맺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문명적 과학으로써 가르치는 이유는 우리 도의 발전에 성심을 기울여 천국(天國)을 건설하고자 해서이니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되 남을 자신과 같이 여겨서 덕의를 기르라”고 하시고 김현구(金顯玖)로 서생감독(書生監督)을 삼으셨다.
1904년(포덕 45년) 갑진(甲辰)에 성사가 일본 도쿄(東京)에 옮겨 머무르실 때 서생 40여 인을 더 모집하여 학교에 입학하게 하시다.
성사가 인계(人界) 장애를 크게 깨트리고자 하시어 도력(道力)을 행하실 때에 대한에 있는 종문(宗門) 두령 40여 인을 부르시어 인계의 일을 맡기셨는데, 계책을 상·중·하로 정하셨다.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엄주동, 이용구, 신광우(申光雨), 김훤배 등 여러 사람이 서울에 비밀히 모여서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려다가 성립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4월에 박인호, 홍병기가 일본에 와서 성사를 뵈오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대의(大義)를 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방 도인이 모두 단발(斷髮)함으로써 그 의지를 도탑게 하고, 회무(會務)를 맡은 자는 반드시 3개월 내에 대사(大事)를 마쳐야만 본래의 성과를 이룰 것이니 너희들은 성심으로 도모할 지어다”라고 하니 박인호, 홍병기가 명을 받들고 마침내 환국하였다.
7월에 박인호, 홍병기, 이종훈, 엄주동, 나용환(羅龍煥), 김명준(金明濬), 전국환(全國煥), 박형채(朴衡采), 국길현(鞠吉賢), 최영구(崔榮九), 정경주(鄭璟珠) 등이 모화관(慕華館) 산당(山堂)에 모여서 대동회를 중립회(中立會)라고 개칭하였다.
9월에 모든 도인 중 단발한 자가 16만에 이르니 모두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서하였다.
성사가 권동진, 오세창(吳世昌), 조희연과 함께 도인 회집(會集)의 계획을 의논하여 결정하시니 회명(會名)은 진보회(進步會)라 하시고 취지, 강령, 규칙을 만드시고 이용구 등으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하셨다. 도유(道儒) 중 서울에 있는 자가 다시 중립회를 진보회라고 개칭하였는데, 개회 전에 경관(警官)에게 금지를 당하게 되어 니현(泥峴) 일본인 조계(租界)에 피하여 숨었다.
때에 나용환, 임례환(林禮煥), 홍기억(洪基億), 홍기조(洪基兆) 등이 도인 20,000여 인을 모아 평양에서 개회하고자 하더니 김연번(金淵蕃), 최주억(崔周億), 김두현(金斗鉉), 한명륜(韓明倫), 박관춘(朴官春), 고몽량(高夢良) 등이 경무청[警廳]에 수감되었다가 회원의 공질(公質)에 의해서 석방되었다.
진보회가 4강령을 세상에 널리 밝히니 하나, 황실을 존중히 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하게 함이요 둘, 정부를 개선함이요 셋, 생명재산을 보호함이요 넷, 군정(軍政) 재정(財政)을 정리함이라. 이때에 진보회의 지회가 사방에 빽빽이 들어서 13도 각 군에서 개회(開會)하였다.
11월에 진보회가 일진회(一進會)와 합하여 일진회라 명명하다.
12월에 일진회의 지부를 13도 관찰부 소재지에 설립하고 360여 해당 군에는 모두 지회를 설치하여 4강령을 제각기 갖게 하니, 일진회가 전국 정계(政界)를 점령함이 미증유의 기세가 있었다.
9월에 관서 교인 문학수(文學洙), 오성룡(吳成龍), 최봉관(崔鳳官) 등이 개회하려고 회원 1,000여 인을 이끌고 태천군(泰川郡) 검암(檢岩)에 이르렀다가 포수 병사에게 쫓겨 총에 맞아 죽게 된 자가 10여 인이었다.
부득이 물러나 돌아올 때 꼬치강[串江]에 이르니 뒤쪽에는 탄환이 비 오듯 하고 앞쪽은 큰 강이 가로 놓여 있음으로, 도인이 앞 다투어 배를 오르려다 배가 전복되어 배에 가득찬 도인 수백 명이 물속에 빠져 죽으니 뒷날 사람들이 꼬치강을 지나갈 때에 반드시 “의인(義人)과 열사(烈士)가 돌아간 곳 어디란 말인가. 강가 가을 단풍은 점점이 붉구나”라는 구절을 읊는다고 하더라.
1905년(포덕 46년) 을사(乙巳)에 도인의 집안에서 수도(修道)하는 예절을 매우 돈독하게 하여 하늘의 보우를 받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는데 청수(淸水)를 올리며 주문을 암송하는 것이 평일보다 배나 더하였다.
때에 회의 면모가 날로 그릇되어서 40여 대두령이 일본에 건너와 성사를 찾아와 뵈오니 성사가 선후책(善後策)으로써 타일러 깨우쳐서 귀국하게 하였다.
12월 1일에 성사가 천도교의 이름으로써 천하에 포고(布告)하셨다. 김현구를 총무사장(總務司長)으로 삼으시어 대한에 도착하게 하시니 엄주동이 재정 장부[財帳]을 김현구에게 주었고, 오영창을 감정원장(監正員長)으로 삼았다. 6임소(任所)를 서울 황단(皇壇) 앞에 설치하고 사무를 주관하니 박인호, 이종훈, 홍병기 등이 각각 각 직을 관장하였다.
때에 성사가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과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지으셨다.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
도(道), 정(政), 교(敎), 법(法), 이(理), 치(治), 도(道)
도(道), 정법(政法), 교리(敎理), 치안(治安) 율도(律度) 공인(公認) 조행(操行) 학력(學力) 신념(信念), 비(秕) 미(迷), 도인(導引) 반성(反省), 중심(中心), 교리연구(敎理硏究) 교리감화(敎理感化), 수규(守規) 각심(覺心), 입신(立身) 율기(律己) 정심(定心) 정기(正氣), 교리진상(敎理眞相) 정법진면(政法眞面) 정법진면(政法眞面) 교리진상(敎理眞相), 도(道)
교(敎)(개인자격), 물지질소(物之質素) 기지진리(氣之眞理), 성지운용(性之運用), 사업(事業) 법리(法理) 질서(秩序) 덕의(德義), 진화(進化), 만화귀일(萬和歸一), 교(敎)
천도태원경
도 전체도설(道 全體圖說)
우리 도(道)는 하늘(天)이라, 하늘의 지극히 넓고 큰 범위 안에 있는 새·물고기·짐승·풀·나무가 각각 바탕의 원소 속에서 미는 힘과 당기는 힘을 받아 그 바탕을 이루며, 기운의 원소 가운데 많은 부분과 작은 부분을 받아 그 기운을 마련하니, 이것은 하늘이치[天理]의 유행(流行)이라. 이것을 본체로 하여 사람과 물건이 하늘이치에 밀접한 관계가 있게 하는 것은 우리 도에 책임이 있느니라.
도(道)는 무선무악(無善無惡)
(넓힌 뜻) 새는 것도 없고 더함도 없는 원체(原體)를 말함이니라.
선과 악은 베풀어 이루는 데서 그 자취를 발하는 것이요, 선이라 악이라 말하는 것은 향하고 등지는 데서 일어난 생각이니, 하늘이치의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며 얕은 것도 없고 깊은 것도 없는 큰 울에 대하여, 사람의 향하고 등지는 데서 일어나는 생각을 용납하여 조치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 이 경지가 공(空)이요, 이 방안이 단(斷)이라. 그러므로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는 것은 하늘이요, 하늘은 우리 도의 기원이니,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무극대도(無極大道)”라 하시니라.
새는 것도 없고 더함도 없는 것은 이상(理想)의 참된 깨달음이라. 우리 사람의 눈앞과 마음 안에 엇갈린 이치의 미묘함과 물건의 형상이 하늘 밖에 별 다른 구역으로 좇아서 가고 돌아오는 것이 없고, 다만 푸른 하늘 속에서 이 형상의 소화된 남은 원소가 저 이치의 만물을 생성하는 도를 제공함에 불과하니, 이에 대하여 과학적 관념으로 시험하면 하늘 속에 어디나 늘 있는 현묘한 기틀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니, 하늘의 한 궤도에 같이 돌아가는 우리 도의 원체는 한 말이라도 더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느니라.
교(敎)는 선악분별(善惡分別)
(넓힌 뜻) 두개의 마음과 성품을 형평(衡平)함이라.
교(敎)는 자와 먹줄의 일정한 표준으로, 선은 고도(高度)에 이르게 하며 악은 싹트기 전에 경계하여, 두 길이 같지 아니한 생각과 자취를 인류문화의 요긴한 점에 돌아가게 하고, 선천(先天)의 순박한 소질을 버리어 미래의 밝은 등촉을 얻게 하는 새로운 법을 겸하여 내포한 것이니라.
이(理)는 선악범위(善惡範圍)
(넓힌 뜻) 마음과 성품의 정하여져 있는 테두리라.
이치[理]는 선악의 두 경계에 도(道)의 빛을 대조(對照)하여, 선의 높은 언덕과 악의 열조(熱潮)가 어떠한 테두리에 점거한 실적을 생각하여 얻는 슬기로운 안목이 내게 있는 것이니라.
정(政)은 사물분별(事物分別)
(넓힌 뜻) 일체 이익을 감정함이라.
정사[政]는 같은 겨레에 관한 사유와 물질을 쌍방으로 적당하게 주재하는 입각점이니, 적극적인 좋은 성과를 맺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 정사가 뇌 속에 젖어 구시대의 낡은 사상을 물리치면, 사람은 정사를 신뢰하여 사람 된 도리의 지극한 정도에 이르나니, 정사는 사람에 점착하고 사람은 정사를 사용하여 서로 맺어 합한 뒤에야, 국가의 기능과 가정의 규칙이 건전하느니라.
법(法)은 사물범위(事物範圍)
(넓힌 뜻) 이익 원인의 고루함이라.
법(法)은 법인과 개인 사이에 서로 끊어진 것을 맺는 원인의 밝은 증거니라. 법의 성질은 국가의 특종 형식으로 인중적(人衆的) 원소의 영향 아래 구성되어 획정한 한계 내에서 각 개인의 활발한 기색을 처음 돕는 일점(一點)에 있으며, 그 다음은 사람의 정당한 궤도 밖에 맹종하는 정적(情迹)을 이끌어 법의 발족한 점에 다시 돌아가게 하는 만능력이 있으니, 법은 행정상 큰 기관이요, 신분상 반사경이니라.
치(治)는 범위평균(範圍平均)
(넓힌 뜻) 기운이 화하고 형상이 화하여 만방이 마침내 어질게 되는 것이니라.
다스리는 것[治]은 수많은 인족(人族)이 한길로 돌아가 마음자리를 가르치는 구역에 세우고, 몸의 격을 정계(政界)에 지켜서, 영속적인 한 규칙으로 영의 빛을 세계에 발휘하면 인계(人界)에 참된 면목이 드러나느니라.
◎의 극치(極致)
(넓힌 뜻) 하늘은 높고 땅은 둥그니라.
다스림[治]의 극치에 이르러 빛나고 화하는 천연한 품격이 있으면, 이는 종교와 정치를 넓게 펴는 근본적 사상에 이른 것이니라.
도(道)
(넓힌 뜻) 하늘과 사람이 덕을 합한 것이라.
우리 도(道)의 본체를 말하던 여상(餘想)으로 마음 자리의 세 단계를 말하여 사람의 세 가지 생각을 힘쓰게 하노라. 그 처음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주관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시험하고, 그 다음은 종교와 정치의 나누어진 부분을 이해하여 그 참된 핵심을 찾아내며, 일방으로는 차별하는 사상이 객체(客體)에 진흙같이 합하여 아득하고 망령된 생각이 가슴 속에 머뭇거리다가 참신한 깨달음을 나중에 얻어, 도의 본부(本部) 속에 맞부딪친 마음의 뿌리가 만마(萬魔)의 힘으로도 움직임을 얻지 못할 것이 있으며, 그 셋째는 도의 본체를 확실히 인식하여, 신비한 하늘의 계시문은 어떤 인격으로 인하여 얻은 것이며, 신의 사랑과 신의 은혜는 어떤 인격을 좇아 베풀어진다는 참된 근본을 문득 깨달아, 이로써 내면의 정신을 함축하며 외면의 계기를 계시하여 천연적인 이상한 빛이 스스로 나타나면 이것은 높은 덕이라. 한울님의 계시문도 그 사람의 입에 의하여 나타나며, 신의 사랑과 신의 은혜도 그 사람의 손에 의하여 베풀어지므로 천인합덕(天人合德)이라 말하느니라. 먼저 두 계단은 아득한 것이요, 뒤에 한 계단은 깨달은 것이니, 아득함과 깨달음이 내게 있는 것이니라.
도 연구도설(道 硏究圖說)
도(道)에 근원하여 교(敎)에 미친 세 단계의 사상(思想)과 세 단계의 형식이 있으니, 제일 슬기로운 사람은 도의 대원(大源)에 곧 접하여 문득 성품 깨달음을 스스로 얻으므로 각상(覺想)[하늘의 해]이라 말하고, 그 다음은 각상한 사람의 소개로 인하여 기억하는 마음이 그 참된 형상을 좇아 느끼므로 감상(感想)[밤의 해]이라 하고, 또 그 다음은 광선을 태우고 남은 점에서 불어 얻는 명상이 빈 곳에서 머뭇거림으로 공상(空想)[맑은 날의 번개]이라 하나니, 이 세 단계의 사상은 바로 보는 것[直觀]과 비치어 보는 것[映觀]의 성품 도수의 부분이요, 신(神)의 표준과 정사[政]의 살아있는 기틀을 공상 속에서 추상적으로 얻어 각종의 신의 모습과 많은 사람의 법칙을 그려내니, 이는 정령관(精靈觀) 세계관이요, 감상 가운데서 활동하는 힘이 발달하여 신의 계시와 정치의 바른 표준이라고 말하는 기색이 인류세계에 드러나니, 이는 인신관(人神觀)이요, 직각(直覺)한 힘이 성품과 이치 위에 투명하여 초신적인 사상을 발표하니, 그 말에 이르기를 “신은 종교의 주체라, 사람의 심리상으로 빼어낸 형용사를 신이라 말하나니 신의 계시는 사람의 생각이 함축된 영향이요, 정치는 종교의 배필이라, 같은 겨레의 편의한 방법을 정치라고 말하나니 정치의 바른 목적은 같은 겨레의 자유 권한을 재정하는 것이라”하니 이는 도관(道觀)이요, 도는 지극히 큰 것이라. 하늘의 창창한 것이 또한 지극히 크므로, 도는 ‘천도(天道)’라고 말하여 사람의 신앙하는 표준을 한울님께 의속(依屬)하게 한 것이니라.
도의 사상은 각상에서 일어나 공상을 하는 사람에게 전급하고 형식은 공상에서 시작하여 각상한 사람에게 소급하나니, 사상의 세 단계는 인격의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증거요, 형식의 세 단계는 세상등급의 문명과 야만의 증거이니라.
개인자격도설(箇人資格圖說)
종교에 명을 돌린 신앙의 사조(思潮)가 착착 전진하여 그 마음의 중심을 도(道)의 근본인 참된 경지에 투합하면, 세계관의 총체 속에 어떤 물건은 절대로 인정하고 어떤 물건은 상대로 부정하는 감각이 투철하며, 이곳에 서서 다시 머리를 돌리면 도를 높은 사람의 홀로 지키는 물건인 줄 알아 그 나머지를 구하던 지난날 아득한 생각이 자연히 풀어지고, 우주의 모든 이치가 사람의 성품 속에 본래 있는 원료로 믿어 이 높은 자리 속에 편안히 서게 되면 이는 개인의 도단(道團)이니라.
성사가 교빙(敎憑) 백만 매를 인쇄하여 대한(大韓)에 수송하시며 권도문(勸道文)을 펼쳐 행하셨다.
1906년(포덕 47년) 병오(丙午) 1월 1일에 성사가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도착하니 환영하는 자가 40,000여 인이었고, 서울에 이르니 환영하는 자가 80,000여 인이었다. 이때에 김연국, 권병덕(權秉悳), 김낙철이 대구(大邱)에서 와서 성사를 찾아뵈니 성사가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을 보이셨다. 김연국이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지금부터 다시 스승의 문하[師門]에 예로써 경의를 표하겠습니다”고 하더라.
성사가 대도주의 직무를 행하셨다.
성사가 종교의 진리로써 독립관(獨立館)에서 설법하시고 종문(宗門) 두령 수 십 인을 집으로 불러서 교체(敎體), 교리(敎理), 교제(敎制)로써 타일러 깨우치셨다.
2월 12일에 성사가 천도교(天道敎) 대헌(大憲)에 의하여 서울 윗 다동(上茶洞)에 중앙총부(中央總部)를 설립하시고, 각 지방에 대소교구(大小敎區)를 설립하셨다.
성사가 공동휴식일(일요일)에 시천식(侍天式)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시고 이날로써 시일(侍日)을 정하셨다.
성사가 이용구, 송병준(宋秉畯)에게 이르시기를, “오늘에야 일진회 지부를 각 군에 설치하여 정계(政界)의 대소사를 간섭하니, 일진회의 범위는 충분히 팽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부 직원이 대부분 시무(時務)에 대해 단련되어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집무상태가 대단히 거칠어서 정당한 면목(面目)으로 공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예전에 두렵고 겁먹었던 남은 기운으로 갑자기 이렇게 커다란 기세가 떨쳐 일어나는 때를 만나 간혹 분수에 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사람의 비방을 불러들이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므로 일찍 사실에 따라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지방 지부를 모두 철폐하고 다만 서울 본부만으로 민회(民會) 면목의 실상을 유지하라”고 하셨다. 때에 지부 교인 원홍재(原鴻才)와 왕일성(王日成)이 성사께 찾아와 뵈었다.
성사가 편지[書]를 펑텐(奉天), 선양(瀋陽) 장군에게 보내어 천도교인을 잘 보호해준 것에 대해 치하하셨다.
성사가 김연국, 홍병기, 이병호(李秉昊), 권병덕(權秉德), 이주백(李周伯)을 경주(慶州)에 보내어, 대신사(大神師) 어른의 옛터와 산소를 삼가 절하고 살피도록 하셨다.
성사가 김연국, 오세창으로 하여금 글을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에게 보내어 감옥설교례(監獄設敎例)를 정하게 하셨다.
성사가 부인전교실(婦人傳敎室)을 서울에 설치하라고 명하시니 무릇 10여 소가 되었다. 시일성화회(侍日聖化會) 의식을 정하시고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여 교서(敎書)의 인쇄사무를 행하시며, 한기준(韓基準), 최강(崔崗)을 보내어 감옥소 수감자에게 성금[慈金]을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9월 17일에 성사가 이용구, 송병준 등에게 이르시기를, “천도교[敎]와 일진회[會]는 성질상 혼잡함이 불가하니 순수한 교무에 종사하라”고 하셨는데, 이용구 등이 끝내 성사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사가 드디어 천도교[敎]와 일진회[會]의 분리의 명을 발동하시고 일진회 두령 이용구 등 62인을 모두 출교(黜敎)하셨다.
성사가 교인에게 1인 식료(食料) 중 쌀 한 숟가락씩[一匙米式] 기부하게 하였는데, 이름하기를 ‘성미(誠米)’라 하여 교인의 아침저녁 나태하지 않는 정성을 시험하시며 또 그 수익은 교문(敎門) 공비에 충당하도록 하셨다.
1907년(포덕 48년) 정미(丁未) 3월 11일에 성사가 종령(宗令)을 발동하여 교인에게 3개월 동안 특별 치성식(致誠式)을 행하게 하셨다.
8월 26일에 성사가 대도주(大道主)의 직을 김연국에게 선수(宣授) 하셨다.
때에 교리로 문답하고 각 신도를 한 곳으로 모이게 하여 수련공부를 시험하셨다.
이때에 평양(平壤) 경포(京浦)의 교인 이인석(李仁錫)이 허령(虛靈)으로 인하여 교인 수천과 관광자 수천이 모여서 난동을 부렸는데 해당 구(區)에서 금할 수 없었고 관(官)에서 금한 것도 역시 효과가 없었다. 성사가 두서너 줄[數行]의 강서(降書)를 오지영(吳知泳)에게 명하여 보냈다. 이인석의 회소(會所)에 들어가 강서를 한차례 낭독하니 발령(發靈)의 기운이 휴식하였다.
11월 30일에 성사가 문도 중 숙덕(宿德) 42인에게 도호(道號)를 내리셨다.
하늘에 맹세하고 의리를 지키겠다는 글[誓天立義文]
우리의 도는 하늘인데 신사(神師)에게 도를 전하고 성사(聖師)에게 도를 전하였다. 신사와 성사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우리에게 이르러 ‘암(菴)’자 도호(道號)가 내려졌으므로 외람되이 감히 받았다. 함께 받은 사람들이 하늘에 맹세하고 의리를 지켜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다.
입의인(立義人)
김낙정(金洛貞)은 숙암(淑菴), 나용환(羅龍煥)은 택암(澤菴), 서우순은 영암(泳菴), 이승우(李承祐)는 돈암(沌菴), 박희인은 상암(湘菴), 최류현(崔琉鉉)은 문암(汶菴), 신광우는 능암(淩菴), 임순호(林淳灝)는 순암(淳菴), 한태훈(韓泰勳)은 격암(滆菴), 박재덕(朴在德)은 충암(沖菴), 박용대(朴瑢台)는 경암(涇菴), 장세화(張世華)는 기암(淇菴), 박준신(朴準信)은 차암(泚菴), 김낙염(金洛濂)은 낭암(浪菴), 김한식(金漢式)은 사암(泗菴), 나인협(羅仁協)은 홍암(泓菴), 손광수(孫光洙)는 광암(洸菴), 이병춘은 풍암(灃菴), 방찬두(方燦斗)는 선암(汕菴), 홍기억은 도암(濤菴), 허선(許善)은 미암(渼菴), 원용일(元容馹)은 계암(溪菴), 정계완(鄭桂玩)은 성암(渻菴), 박화생(朴花生)은 심암(沁菴), 장남선(張南善)은 진암(溱菴), 김현구는 창암(滄菴), 임내규(林來圭)는 회암(洄菴), 조석휴(趙錫烋)는 하암(河菴), 전지택(全知擇)은 낙암(洛菴), 정량(鄭樑)은 반암(潘菴), 임례환은 연암(淵菴), 이종석은 동암(潼菴), 송배헌(宋培憲)은 남암(湳菴), 홍기조는 유암(游菴), 오영창은 장암(漳菴), 전희순(全熙淳)은 민암(澠菴), 오창근(具昌根)은 명암(溟菴), 이상우(李祥宇)는 호암(湖菴), 오지영은 원암(源菴), 김훤배는 농암(瀧菴), 송연호(宋年浩)는 수암(洙菴), 이연하(李年夏)는 곤암(滚菴)이었다.
1908년(포덕 49년) 무신(戊申) 1월에 대도주 김연국이 배반하여 시천교로 돌아갔기 때문에, 1월 18일에 성사가 신령히 대도주의 직을 다음 도주 박인호에게 선수(宣授)하셨다.
3월에 성사가 지방 교황(敎況)을 시찰하기 위하여 순회하셨다. 서흥(瑞興)에서 교인 수백 명이 공경하여 맞이한 뒤 설교하시고, 평양에 이르러 공경하여 맞이한 자가 4, 5천인에 달하여 만수대(萬壽臺)에서 설교하셨다. 영변(寧邊), 박천(博川), 가산(嘉山), 곽산(郭山), 선천(宣川) 등 여러 군의 교인 수만이 도처에서 공경히 맞이하니 설교하셨다. 3일에 철산군(鐵山郡)에 이르러 태평루(太平樓)에서 설교하시고 여관에서 묵으셨다. 이날 밤에 그 지역의 몰지각한 소년 무리 수십 명이 난입하여 성사를 핍박함이 심하여 성사가 무리들의 몽둥이에 의해 머리에 중상을 당하셨다. 이때에 한 바탕 폭풍이 크게 일어나 모래와 돌을 흩날리며 바람 부는 소리가 완전히 병마(兵馬)가 돌격하는 것과 같았다. 이로써 해당 무리가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당 무리의 이 행동은 모두 일진회에 대한 혐의(嫌疑)로써 오해한 바인데, 해당 지역 경찰관이 폭동을 일으킨 무리의 우두머리 몇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 성사가 경찰관에게 말하시어 석방하게 하셨다.
6월에 성사가 교리강습소(敎理講習所)를 설립하여 교중(敎中)에서 총명하고 뛰어난 자제(子弟)를 모집하여 가르치게 하셨다.
1909년(포덕 50년) 기유(己酉)에 성사가 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보급하게 하셨다.
12월에 성사가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에 가실 때에 최준모(崔俊模), 김상규(金相奎), 임명수(林明洙), 조기간(趙基栞) 4인이 모시고 따랐다. 성사가 통도사 내원암(內院菴)에 이르러 49일 기도식을 행하셨다. 때에 지난날 대신사가 기도하시던 적멸굴(寂滅窟)을 탐방하시며 시(詩)를 읊으시기를, “옛적에 이곳을 보았더니 오늘 또 보는 구나”라고 하셨다. 모시고 따른 자 4인과 더불어 내원암 입구 금강암(金剛岩)에 이름을 기록하시고, 또 통도사 입구 대석면(大石面)에 이름을 기록하셨다. 드디어 공부를 마치시고 무체법경(无體法經)과 후경(後經)을 지으셨다.
무체법경(无體法經)
성심변(性心辨)
성품[性]이 닫히면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의 원소가 되고 성품이 열리면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의 좋은 거울이 되나니,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이 거울 속에 들어 능히 운용(運用)하는 것을 마음이라 이르고 마음은 곧 신(神)이요, 신은 곧 기운이 이루는 바이니라.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性天)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마음이 성품과 바뀐 것을 닫혔다 말하고 성품에서 마음이 생기는 것을 열렸다 말하나니, 성품과 마음을 같이 닦는 것은 오직 도(道)를 아는 사람이라야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니라.
성신심 삼단(性身心 三端)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마음 밖에 두고 다만 지극히 정성을 다하여 감화를 받아 도를 얻는다”하고, 또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있으니 어느 곳을 우러러 보며 어느 곳을 믿으랴, 다만 내가 나를 우러러 보고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를 깨닫는다”하여, 닦는 이로 하여금 마음 머리 두 곳에 의심스러움이 겹치게 하여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의 앞길을 아득케 하느니라.
무릇 천지만물이 주객(主客)의 형세가 없지 아니 하니, 하늘을 주체로 보면 나는 객이 되고 나를 주체로 보면 하늘이 객이 되니, 이를 분별치 못하면 이치도 아니요 도(道)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주객의 위치를 두 방향으로 지정하노라. 사람의 권능이 하늘을 이기면 하늘이 사람의 명령 아래에 있고, 하늘의 권능이 사람을 이기면 사람이 하늘의 명령 아래에 있나니, 이 두 가지는 다만 권능의 균형에 있느니라.
그러나 성품을 보는 사람은 기운을 보지 못하고, 기운을 보는 사람은 성품을 보지 못하여, 도에 어기어 마지않으니 아까워라. 성품은 이치[理]니 성리(性理)는 비고 비어 고요하고 고요하여[空空寂寂] 끝이 없고 양(量)도 없으며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는 원소일 뿐이요, 마음은 기운이니 심기는 둥글고 둥글어 가득하고 가득하여[圓圓充充] 넓고 넓어 흘러 물결치며 움직이고 고요하고 변화하고 화하는 것 이때에 맞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이 두 가지에 하나가 없으면 성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라.
밝히어 말할 것 같으면 성리가 없으면 마음이 없는 나무 사람과 같고, 심기가 없으면 물 없는 곳의 고기와 같으니, 도 닦는 사람은 밝게 살피고 밝게 깨달으라. 성품을 보는 것은 누구이며 마음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만약 내 몸이 없으면 성품과 마음을 대조하는 것이 어느 곳에서 생길 것인가.
성품이 있고서야 몸이 있고, 몸이 있고서야 마음이 있으나 그러나 성품과 마음과 몸 세 가지에서 어느 것을 먼저 할 것인가. 성품이 주체가 되면 성품의 권능이 몸의 권능을 이기고, 몸이 주체가 되면 몸의 권능이 성품의 권능을 이기느니라. 성품을 주체로 보고 닦는 사람은 성품의 권능으로써 비고 고요한 경지를 무궁히 하고 그 원소를 확충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도라 말하고, 몸을 주체로 보고 닦는 사람은 몸의 권능으로써 활발하고 거리낌 없이 현 세계에서 모든 백성을 함양함을 도라고 말하느니라. 그러므로 성품과 몸의 두 방향에 대한 수련을 보이어 도 닦는 사람에게 밝혀서 말하려 하노라.
몸이 있을 때에는 부득불 몸을 주체로 알아야 할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몸이 없으면 성품이 어디 의지해서 있고 없는 것을 말하며, 마음이 없으면 성품을 보려는 생각이 어디서 생길 것인가. 무릇 마음은 몸에 속한 것이니라. 마음은 바로 성품으로써 몸으로 나타날 때 생기어 형상이 없이 성품과 몸 둘 사이에 있어 만리만사(萬理萬事)를 소개하는 요긴한 중추가 되느니라.
마음의 자취가 나타나는 것은 유정공기(有情空氣)로써 변화하는 능력이 생기므로, 마음의 힘을 얻은 사람은 능히 유정천(有情天)의 능력과 변화를 행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제 몸에서 성품을 보는 사람도 또한 제가 능히 하늘의 능력을 스스로 쓰나니, 이것은 성품을 보는 마음이 또한 유정천에 의하여 스스로 생기는 것이니라. 성품을 보는 사람의 “나도 없고 마음도 없고 몸도 없고 도도 없다”는 주장으로 신통력을 비방하나니, 이는 신통력이 자연히 성품과 마음 수련하는 데서 생김을 알지 못하고, 다만 철학의 협견으로써 비방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세상을 돌아보고 하늘의 능력을 취하여 때를 따라 도를 쓰는 것은 수도하는 사람의 중도를 잡는 데 있느니라.
신통고(神通考)
대신사(大神師)께서 자신을 천황씨(天皇氏)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늘 위에 계시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아 삼계천(三界天)의 맨 윗 하늘에 계시다는 것이 명백하니라. 그러므로 비고 비어 고요하고 고요한 무형천(無形天)과 둥글고 둥글어 가득하고 가득한 유정천(有情天)과 티끌이 자욱하고 자욱한 습관천(習慣天)이 다 성품과 마음 좌우의 현묘하고 참된 두 곳에 있는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성품과 마음을 연구하면 어찌 홀로 대신사만이 천황씨가 되겠는가. 사람은 다 모신 하늘이 있으니 그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음에 이르러는 하나이니라. 신사께서는 현묘하고 참된 두 사이에 계시어 성품의 한 쪽은 불생불멸이요, 마음의 한 쪽은 만세극락(萬世極樂)이니라.
사람의 성품을 깨닫는 것은 다만 자기 마음과 자기 정성에 있는 것이요, 하늘과 스승의 권능에 있는 것이 아니니, 자기 마음을 자기가 깨달으면 몸이 바로 하늘이요 마음이 바로 하늘이나, 깨닫지 못하면 세상은 세상대로 사람은 사람대로이니라. 그러므로 성품 깨달은 사람을 천황씨라 이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을 범인이라 이르느니라.
그러면 오직 우리 수도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여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고 나아가 물러가지 아니하여, 마음이 성품 깨닫는 데 들어가면 스스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니 한번 조용함에 비고 고요한 극락이요, 한번 기쁨에 크게 화한 건곤(乾坤)이요, 한번 움직임에 풍운조화(風雲造化)이니라.
일체가 세 가지로 변하는 것은 성품과 마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천황씨라 이르고, 만약 세 가지에 하나가 능하면 성인이라 이르고, 세 가지에 하나라도 능치 못하면 범인이라 이르나니, 천황씨와 성인과 범인이 별다른 묘법(妙法)이 없는 것이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치 못하는데 있느니라.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달으면 내 마음이 극락이요, 내 마음이 천지요, 내 마음이 풍운조화이니라. 마음 밖에 빈 것도 없고, 고요함도 없고, 불생도 없고, 불멸도 없고, 극락도 없고, 동작(動作)도 없고, 희로(喜怒)도 없고, 애락(哀樂)도 없으니, 오직 우리 도인은 자심(自心)을 자성(自誠)하고 자심을 자경(自敬)하고 자심을 자신(自信)하고 자심을 자법(自法)하여 털끝만치라도 어김이 없으면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구할 것도 바랄 것도 없어 스스로 천황씨가 되는 것이니라.
경(經)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를 위함이요 다른 것이 아니다”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 “가까운 데 있고 먼 곳에 있지 아니하다”고 하였으니 깊이 생각하라.
시천주(侍天主)의 모실 시(侍) 자는 한울님을 깨달았다는 뜻이요, 천주의 님 주(主)자는 내 마음의 님이라는 뜻이니라. 내 마음을 깨달으면 상제가 곧 내 마음이요, 천지도 내 마음이요, 삼라만상이 다 내 마음의 한 물건이니라. 내 마음을 내가 모셨으니 나는 곧 지명(指名)이요, 지명은 곧 현재의 몸을 말하는 것이니라.
성품과 마음은 현묘하고 현묘해서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으나, 있는 듯 사는 듯 하나니라. 성품은 본래 없는 것도 없고, 있는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의지한 것도 없고, 서있는 것도 없고, 선한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고,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는 것이요, 마음은 본래 빈 것이라. 모든 생각과 모든 헤아림과 억만년 예와 지금이 형상도 없고 자취도 없으나, 천만가지 모든 일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느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성품 속에 있으면 변화가 무쌍하여 조화를 헤아릴 수 없으니, 성품과 마음 두 사이에 변화가 자연히 이루어지느니라. 나누어 말하면 마음이 흰 것을 구하고자 하면 흰 것으로 보이고, 붉은 것을 구하면 붉은 것으로 보이고, 푸른 것을 구하 면 푸른 것으로 보이고, 노란 것을 구하면 노란 것으로 보이고, 검은 것을 구하면 검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이로써 미루어 생각하면 도를 구하는 사람이 또한 삼가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구하는 사람이 구하기를 바르게 하면 보이는 것도 또한 바르고, 구하기를 그릇되게 하면 보이는 것도 그릇되게 보이느니라.
지나간 옛 현철(賢哲)이 스스로 구하고 스스로 보이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으나, 우리 도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스스로 구하여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들으니, 만에 하나도 의심이 없느니라.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것은 성(性)·심(心)·신(身) 삼단(三端)이 합하여 보이고, 나누어 보임이니 세 가지에 하나가 없으면 도가 아니요 이치가 아니니라. 나도 또한 이 세 가지를 합하여 깨달아 홀로 황황상제(皇皇上帝)의 자리에 앉았노라.
사람이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큰 도를 반드시 얻으리니, 항상 생각하고 생각하라. 내가 뭇 사람을 사랑하면 뭇 사람이 하늘 길에 가서 영(靈)의 다리를 반드시 이룰 것이요, 뭇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하늘 길에 가서 영의 다리를 반드시 이룰 것이니, 돌보고 돌보아 서로 사랑하면 반드시 성과를 얻을 수 있느니라. 성·심·신 삼단으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면 대도의 큰 근본이 되느니라.
내 마음을 멀리 보내도 갈 곳이 없고, 저 하늘이 내게 와도 들어 올 곳이 없느니라. 도를 어느 곳에서 구할 것인가, 반드시 내 마음에서 구할 것이니 살필지어다.
무릇 성리(性理)는 비고 고요하나 자체의 비장한 속에 크게 활동할 만한 동기가 있는 것이라, 만물(萬物)이 한결같이 정밀한 줄과 묘한 이치의 기맥(機脈)을 드리워 만상(萬相)이 자위적(自爲的)으로 전부 한 곳에 모여 크게 활동할 본지(本地)를 삼은 것이요, 마음은 작게 활동하는 기관이니 각각 자기 직분의 동작을 받은 것이니라.
마음을 단련하는 것은 제 성품의 본 바탕의 크게 활동하는 비밀의 기틀을 받은 것이니, 능력이 가히 천지를 운반하고 권능이 가히 만상의 윗자리가 되는 것이니라.
견성해(見性解)
성품 보기를 어디서 보며 마음 지키기를 어디서 지킬까. 성품도 또한 내 성품이요 마음도 또한 내 마음이나, 보려 하여도 볼 곳이 없고 지키려 하여도 지킬 터전이 없도다. 내 성품과 내 마음은 물건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으니 어떻게 보며 어떻게 지킬 것인가.
성품을 보고 마음을 지키는데 특별히 두 가지가 있으니, 스스로 내 성품을 만들고 스스로 내 성품을 걸어 놓아 각각 자기의 분수 안에서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하여 서로 시비하니 애석하도다.
내 성품이 내게 있으니, 성품을 보고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것이니라.
내 마음을 물건 밖에 보내면 형상도 없고 자취도 없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내 마음을 물건 안에 보내면 억천만상(億千萬像)과 삼라미진(森羅微塵)이 다 내 성품이요, 내 마음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을 물건 밖에 두면 정 없는 이치하늘이요, 마음을 물건 안에 두면 정 있는 마음하늘이니, 그러면 정이 있고 없는 것은 내 성품과 마음의 본체라. 내 본체에 비밀히 간직한 것이 ‘영묘(靈妙)’와 ‘영적(靈迹)’이요, 영 속에서 나타는 것이 나의 생각과 나의 헤아림이니, 나의 생각과 나의 헤아림은 영묘에서 나타나는 것이니라.
깨달은 왼쪽은 성품하늘과 이치하늘이요, 깨달은 바른쪽은 마음하늘과 몸하늘이니라. 영이 나타난 본 곳은 내 성품과 내 몸이라, 성품도 없고 몸도 없으면 이치도 없고 하늘도 없나니, 이치도 내 하늘 다음에 이치요, 옛적도 내 마음 다음에 옛적이니라.
나는 성품과 이치의 거울이요, 하늘과 땅의 거울이요, 옛날과 지금의 거울이요, 세계의 거울이요, 나는 성품과 이치의 하늘이요, 하늘과 땅의 하늘이요, 옛날과 이제의 하늘이요, 세계의 하늘이니, 내 마음은 곧 천지만물 고금세계를 스스로 주재하는 한 조화옹(造化翁)이니라. 이러므로 마음 밖에 하늘이 없고, 마음 밖에 이치가 없고, 마음 밖에 물건이 없고, 마음 밖에 조화가 없느니라.
성품과 이치를 보고자 할지라도 내 마음에 구할 것이요, 조화를 쓰고자 할지라도 내 마음에 있는 것이요, 천지만물 세계를 운반코자 할지라도 내 마음 한 쪽에 있는 것이 니라. 시(時)에 말하기를 “마음은 천지의 저울이 되나 달아도 한 푼의 무게도 없고, 눈은 옛날과 지금의 기록이 되나 보아도 글자 한 자 쓴 것이 없느니라.”
삼성과(三性科)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물건이란 것은 나의 본래의 나니라. 이 물건은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고, 물으려 해도 물을 곳이 없고, 잡으려 해도 잡을 곳이 없는지라, 항상 머무는 곳이 없어 능히 움직이고 고요함을 볼 수 없으며, 법으로써 능히 법하지 아니하나 만법이 스스로 몸에 갖추어지며, 정(情)으로써 능히 기르지 아니하나 만물이 자연히 나는 것이니라. 변함이 없으나 스스로 화(化)해 나며, 움직임이 없으나 스스로 나타나서 천지(天地)를 이루어내고 도로 천지의 본체에서 살며, 만물을 생성하고 편안히 만물 자체에서 사니, 다만 천체(天體)를 인과로 하여 무선무악(無善無惡)하고 불생불멸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본래의 나니라.
그러나 나도 또한 이름이요, 하늘도 또한 이름이요, 사람도 또한 이름이요, 성품도 또한 이름이요, 마음도 또한 이름이나, 특히 맨 처음에 두 가지 이름이 있으니 첫째는 나요, 둘째는 저쪽이라 하는 것이라, 나는 바로 사람이요 저쪽은 바로 하늘이니라.
내가 있으면 저쪽이 있고 내가 없으면 저쪽이 없으니, 나를 나라고 이름하는 것도 내가 스스로 한 말이요, 하늘을 하늘이라 이름한 것도 내가 스스로 한 말이니라. 나와 그대에게 각각 이름이 있고 먼저 원리원소가 있어, 하늘도 생기고 만물도 또한 생기었으니, 이치도 또한 나의 본래 나니라.
만물이 생겨나지 못한 것은 인연도 없고 나타남도 없었던 시대요, 만물이 생겨난 것은 형상도 있고 나타남도 있는 시대니, 나도 또한 생물이라, 선천억억(先天億億)과 후천억억(後天億億)이 다 내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어 천천물물(天天物物)이 나를 체(體)로 하고 나를 용(用)으로 하는 것이니라.
나를 체로 하고 용으로 하는 것이 실로 세 성품이 있느니 첫째는 원각성(圓覺性)이요, 둘째는 비각성(比覺性)이요, 셋째는 혈각성(血覺性)이니라. 원각성은 만법으로 인과를 삼아 함이 없이 되는 것이므로, 마음을 지키고 성품을 단련하는 사람은 법체의 인과를 얻지 못하면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렵고, 비각성은 만상으로서 인과를 삼아 나타남이 있으나 헤아림이 없는 것이니,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려는 사람이 만일 바르게 보고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진경(眞境)을 얻지 못할 것이요, 혈각성은 화복으로 인과를 삼아 선도 있고 악도 있어 수시로 서로 보는 것이니, 선을 위하여 세상의 성과를 얻으려는 사람은 좋고 좋은 화두를 가려야 할지어다.
이러한 세 성품으로 과목을 삼아 잘 지키어 잃지 않으면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닫는 것이 시각에 있느니라.
삼심관(三心觀)
도에 세 가지 마음의 계단이 있으니,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려는 사람은 만약 이 세 가지 계단의 묘법이 아니면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니라.
첫째는 허광심(虛光心)이니 하늘과 하늘, 만물과 만물이 각기 성품과 마음이 있어,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다 법상과 색상에 말미암은 것이니라. 닦는 사람의 염두에 반드시 양단이 있으리니, 부지런히 하고 부지런히 하여 쉬지 아니하며, 깨닫고 깨달아서 어둡지 아니하고, 적적하여 혼미하지 아니하면, 빈 가운데서 빛이 날 것이라. 반드시 모든 이치가 갖추어 있어 형상없는 법체가 깨닫는 곳에 나타나며, 형상있는 색체에 돌아오는 빛이 돌려 비치어 밝지 아니한 곳이 없고 알지 못할 곳이 없으니, 이것을 허광심력이라 이르느니라. 여기에 멎어서 구하지 않으면 내 반드시 찬성하지 않을 것 이니, 스스로 힘써 분발하여 또 한 단계를 나아가라.
둘째는 여여심(如如心)이니 한번 윗 지경에 뛰어 오르면 비고 비어 고요하고 고요하여 물을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으며, 마음과 같고 참과 같아서 삼라만상이 본래 나와 일체라.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니 나와 너,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나고 죽는 것이 모두 이 법체가 스스로 쓰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지어서 이루리오. 또한 법 가운데 묘하게 쓰는 것이 다 내 성품과 마음이라. 성품과 마음의 본체는 비고 또 끊겼으니, 이 밖에 무엇을 구하리오만은 쉬고 쉬어 숨을 돌려 다시 한 층계를 더 나아가라.
셋째는 자유심(自由心)이니 하늘도 또한 비지 아니하고 만물도 또한 끊기지 아니하니, 도가 어찌 빈 데 멎으며 만물이 어찌 끊긴 데 멎으리오. 성품은 근본과 끝이 없고 이치는 처음과 나중이 없으니, 다만 내 마음 한 가닥에 기인하여 만법만상(萬法萬相)을 헤아려 생각할 지니라. 마음이 오직 비고 끊기면 이치 또한 반드시 끊기리니,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가히 성품이라 말하며 어찌 가히 이치라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과 자기의 마음을 가르쳐 한 번 뛰어서 자유로워라. 마음이 옥(玉)이 되고자 하면 옥도 또한 장애요, 마음이 물같이 되고자 하면 물도 또한 장애요, 마음이 비고 고요하게 되고자 하면 비고 고요한 것도 또한 장애요, 마음이 밝고자 하면 밝은 것도 또한 장애요, 나로서 나를 없애려 하면 나도 또한 장애요, 마음으로 마음을 없애고자 하여도 마음도 또한 큰 장애니, 어떤 묘법으로 그 큰 장애를 벗어날고. 다시 한 층계를 더하여 반드시 자유를 쓰라.
성품과 마음이 자유로우면 도가 반드시 끝이 없을 것이요, 세상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세상이 또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사람이 반드시 자유로우면 억만 사람이 마침내 이 자유를 깨달을 것이니, 살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죽으려고도 하지 아니하며, 없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있으려고도 하지 아니하며, 착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악하려고도 하지 아니하며, 기쁘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노하려고도 하지 아니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과 일용행사(日用行事)를 내가 반드시 자유롭게 하나니 좋으면 좋고, 착하면 착하고, 노하면 노하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모든 일과 모든 쓰임을 마음없이 행하고 거리낌없이 행하니 이것을 천체(天體)의 공도공행(公道公行)이라 하느니라.
성인도 또한 큰 장애요 세상도 반드시 작은 장애니, 무엇으로써 장애를 물리치어 공도공용으로 천체를 스스로 쓰겠는가. 닦는 사람에 고하여 효유하니 일체 장애를 헌옷을 벗는 듯이 하고, 빠른 걸음으로 빨리 나아가 좋고 좋은 자유를 즐거워하라.
극락설(極樂說)
나에게 한 잠잠한 것이 있으니 세상이 능히 알지 못하도다. 잠잠한 속에 나무가 있으니 그 줄기는 성품이 되고 그 가지는 마음이 되었느니라. 성품이 있고 마음이 있음에 큰 도가 반드시 생겨나느니라.
도가 또한 세상에 있으니, 만약 말을 쓰지 않으면 도가 끊어지고 세상이 거칠어질 것이니라.
잠잠한 것은 반드시 성품이 근본이 되나니, 만약 그 근본이 굳건치 못하면 잎이 푸르지 못하고 꽃도 붉지 못할 것이요, 말은 반드시 마음이 근본이 되나니, 만약 그 근본이 맑지 못하면 봄도 오지 아니하고 가을도 오지 아니 하느니라.
마음을 들어 도를 쓰는 사람이 성품을 잠잠한 속에서 얻지 못하면 도가 반드시 빈 데 돌아가고, 말을 들어 세상을 쓰는 사람이 도를 마음속에서 얻지 못하면 세상이 반드시 거칠어질 것이니, 도를 쓰고 세상을 쓰는 것은 성품과 마음에 있고, 세상과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것은 바른말에 있느니라.
말이 반드시 바르면 하늘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세상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나라도 또한 바를 것이요, 말이 반드시 바르면 사람마다 반드시 바를 것이니라.
천지가 바르면 만물이 자라고, 세계가 바르면 전쟁이 반드시 그치고, 국가가 바르면 인민이 복을 누리고, 사람사람이 반드시 바르면 천하가 극락이 되리니, 어찌 오늘의 잠잠한 것이 후일에 많은 말이 될 줄을 알겠는가.
나는 천체공법(天體公法)을 써서 아름답고 거룩한 한울님 마음에 맞게 하노라.
성범설(聖凡說)
사람이 묻기를 “성인과 범인이 특히 차별이 있습니까?” 대답하시기를 “한 나무에 꽃이 피니 꽃도 같은 색깔이요, 한 꼭지에 열매가 맺혔으니 열매 또한 같은 맛이라. 성품은 본래 한 근원이요, 마음은 본래 한 하늘이요, 법은 본래 한 체이니 어찌 성인과 범인이 있으리오?”
묻기를 “성인은 밝고 범인은 어리석으니 어찌 차별이 없습니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성품은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고, 마음도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고, 몸도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으나, 그러나 다만 이 마음을 쓰는데 작은 차별이 있으니 성인은 내 성품을 물들이지 아니하고, 내 마음을 변치 아니하고, 내 도를 게으르게 하지 않는지라,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하나라도 거리낌이 없으며, 마음을 가지고 도를 쓰는데 선이 아니면 행치 아니하며, 바른 것이 아니면 쓰지 아니하며, 옳은 것이 아니면 행치 아니하며, 밝은 것이 아니면 하지 아니 하느니라. 범인은 내 성품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도를 내가 알지 못하여,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스스로 외도를 쓰며 악을 행하고 패도를 행하며 정의가 아닌 것을 행치 않는 바 없느니라.”
묻기를 “성인과 범인의 성품과 마음이 한 체(體)에서 나타난 것이라면 마음을 쓰고 세상을 쓰는데 어찌 가히 다름이 있다고 말합니까?”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태어난 그 처음에는 실로 한 티끌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다만 보배로운 거울 한 조각을 가진 것뿐이라, 허공에 도로 비치우니 왼쪽 가에 한 편은 여여적적(如如寂寂)하고 바른쪽 가에 한 편은 티끌이 자욱하고 자욱하니라. 그 두 사이에 살면서 비로소 위위심(爲爲心)이 생기었고, 위위심이 비로소 생기니 천지가 생기고, 세계가 생기고, 도가 또한 반드시 생기었느니라.”
고금의 현철이 다만 이 한 마음으로 항시 쉬지 아니하고 오래오래 끊기지 아니하며 천지만물을 다 위위심두(爲爲心頭)에 실었으나, 범인은 위위심이 없어 다만 오늘 보는 것으로서 오늘 마음을 삼고, 또 내일 보는 것으로서 내일 마음을 삼아 방향을 알지 못하고, 자기 천성의 소관 아님이 없으나 본성의 본래를 알지 못하고, 모든 일이 자기 마음의 소관 아님이 없으나 자기 마음의 용도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범인의 마탈심(魔奪心)이니라. 성품은 본래 어질고 어리석음이 없으나, 그러나 마음을 쓰는데 반드시 어질고 어리석음이 있느니라.
성인의 위위심은 곧 스스로 이로운 마음[自利心]이니 자리심이 생기면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利他心]이 저절로 생기고, 이타심이 생기면 공화심(共和心)이 저절로 생기고, 공화심이 생기면 자유심(自由心)이 저절로 생기고, 자유심이 생기면 극락심(極樂心)이 저절로 생기느니라.
범인은 마탈심이 한번 생기면 한 몸이 반드시 망하고, 한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한 세상이 반드시 망하고, 천지가 반드시 망하나니, 사람은 마탈심을 두지 말 것이요, 위위심을 잃지 말 것이니라.
진심불염(眞心不染)
중생이 천만 티끌 구덩이에 빠져 능히 아득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세상 티끌에서 벗어나는 이유를 말하리라.
나는 바로 나니 나는 한 티끌이 되고, 물건은 바로 물건이니 물건은 많은 티끌이 되느니라. 나라는 티끌과 물건이란 티끌이 도시 한 티끌이니 어찌 여기에 물들며 저기에 물들겠는가. 그러나 나는 정이 있고 만물은 정이 없으니, 정있는 것으로써 정없는 것을 빼앗는 것은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라. 마음이 있고 빼앗김이 있는 것을 바로 티끌에 물들었다 말하나, 실로 그렇지 아니하니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라.
나에게 두 마음이 있으니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라 이르고, 하나는 미워하는 마음이라 이르느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마음이 마음을 가리운 것이 티끌과 같으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모든 물건이 마음에 들면 스스로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생기나니,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물건의 반동심(反動心)이라. 비유하면 젖먹이가 눈으로 물건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어 기뻐하며 웃다가 물건을 빼 앗으면 성내어 싫어하나니, 이것을 물정심(物情心)이라 이르느니라. 물정심은 곧 제2 천심(天心)이니 억만 사람이 다 여기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그리하여 나의 본래 하늘을 돌아보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다만 물정심으로써 세상에 행하니 이를 범인의 어리석음이라 이르느니라.
성현은 그렇지 아니하여 항상 나의 본래를 잊지 않고 굳건히 지키며 굳세어 빼앗기지 않으므로, 모든 이치의 근본을 보아 얻어 모든 이치가 체를 갖추게 하며, 마음머리에 머뭇거리어 둥글고 둥글어 그치지 아니하며, 스스로 놀고 놀아 슬기로운 빛 안에서 고요하지 아니하며, 일만 티끌 생각이 자연히 꿈같으니 이것을 해탈심(解脫心)이라 이르느니라. 해탈은 곧 견성법(見性法)이니 견성은 해탈에 있고, 해탈은 자천자각(自天自覺)에 있느니라.
내 마음을 내가 지키어 잃지 아니하고, 굳게 하여 흐르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자연히 해탈이 되나니, 만법만상이 일체 마음에 갖추어져서 일과 이치가 엇갈리지 아니하면 나와 하늘이 둘이 아니요, 성품과 마음이 둘이 아니요, 성인과 범인이 둘이 아니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참된 마음은 둘도 아니요 물들지도 아니 하나니, 천체를 스스로 쓰며 내 땅을 스스로 쓰며 나를 자유로 쓰느니라.
후경 이(後經 二)
상편(上篇)
성품은 본래 처음이 없고 마음은 본래 둘이 없으나, 만법이 체를 갖추어 하늘에 놓아도 한량이 없고 땅에 놓아도 가이없고 거두려 하여도 또한 터전을 얻지 못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성품은 본래 처음이 없거니 성품이 있고 마음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대답하시기를, “성품이란 것은 이름이니 이름은 만물이 있게 된 후에 처음으로 얻은 것이요, 처음이란 것은 태초 만물이 있던 때이니라. 능히 성품을 말하고 능히 처음을 말하는 것은 이는 영감으로 생각한 것이요, 영감이 나타나는 것은 유체성(有體性)이라. 이 성품과 이 마음은 죽고 사는 것을 면치 못하나 처음도 없는 성품은 바로 무체성(無體性)이니 나고 죽는 것이 있지 아니하여 진진여여(眞眞如如)한 것이니라.”
묻기를, “진성(眞性)이 이미 처음이 있기 전에 있었으니, 처음이 있은 뒤의 사람이 어떻게 능히 성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대답하시기를,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을 보면 없는 것도 또한 있고, 없는 것으로서 있는 것을 보면 있는 것도 또한 없나니, 그 없고 있는 것을 정하여 비로소 무시유생(無始有生)이 있고 유시무멸(有始無滅)이 있나니, 진진여여하여 새는 것도 없고 더함도 없는 것이니라. 새는 것도 없고 더함도 없는 것은 성품과 마음의 처음이라. 그러므로 본성의 인연없이 생함이 있음을 알지니라.”
묻기를, “어떠한 방법으로 그 큰 장애를 벗어나서 그 진성을 볼 수 있습니까?”
대답하시기를, “해와 달은 비록 밝으나 검은 구름이 가리면 병 속의 등불 같으니라. 성품의 맑고 깨끗한 것을 많은 장애물이 둘러서 진흙 속에 묻힌 구슬과 같으니, 다른 묘법이 없고 다만 마음으로써 스승을 삼아 굳세게 하여 빼앗기지 아니하며, 정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부드러우나 약하지 아니하며, 깨달아 매혹하지 아니하며, 잠잠하나 잠기지 아니하며, 한가하나 쉬지 아니하며, 움직이나 어지럽지 아니하며, 흔들어도 빼어지지 아니하며, 멈추었으나 고요하지 아니하며, 보이나 돌아보지 아니하며, 능력이 있으나 쓰지 않을 것이니라.”
묻기를, “보이는 것이 있으나 돌아보지 아니하고 능력이 있으나 쓰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늘을 쓰고 사람을 씁니까?”
대답하시기를, “법과 같이 행하면 스스로 큰 도가 나타나느니라.”
묻기를, “어떤 것을 큰 도라 합니까?”
대답하시기를, “큰 도는 하늘도 아니요 땅도 아니요 산도 아니요 물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니, 생각하나 생각하는 것 같지 아니하고, 보나 보는 것 같지 아니하고, 말하나 말하는 것 같지 아니하고, 들으나 듣는 것 같지 아니하고, 앉으나 앉은 것 같지 아니하고, 서나 선 것 같지 아니하여 변하지 않는 사이에 황연한 본래의 맑고 깨끗한 것이니라.”
묻기를, “큰 도가 여기서 그치나이까?”
대답하시기를, “그 성품을 닦아 그 도를 얻은 사람은 진실로 지극히 다 할 것이나, 그러나 성품에서 마음이 생기면 몸은 청풍명월에 있고 집은 우주강산에 있느니라. 천지를 나에게서 보면 나도 있고 세상도 있어 나와 나, 만물과 만물이 각각 그 천성을 이루며 각각 그 도를 지키며 각각 그 직분을 얻나니, 기쁜 나와 기쁜 만물이 어찌 극락세계가 아니겠는가.
중편(中篇)
“세 하늘의 큰 기운이 섞이어 서로 응하여 한 마음으로 같이 돌아가니, 먼저 성인과 뒤의 성인이 문자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다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 것이니라. 천도를 구하고자 하면 구하는 마음을 스스로 가져야 하니, 구하면 구할 것이나 구하기를 다하면 받을 것이 없느니라.”
묻기를, “구하기를 다하여 받을 것이 없다 하면 어디서 구합니까?”
대답하시기를, “네가 구함을 묻는 것은 이는 네 마음이요, 내가 네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이는 내 마음이니, 내가 없고 네가 없으면 나와 너 사이에 어떻게 이 말이 있으리오. 무릇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많은 중생의 움직임과 일체 선악이 다 바로 사람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니,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 내 성품과 내 마음이라. 이 본래의 마음을 제거하면 마침내 별다른 하늘이 없는 것이요, 이 본지를 떠나면 다시 구할 곳이 없으니, 자성을 자심에서 스스로 구하라. 성품과 마음의 본체는 원인도 아니요 결과도 아니며, 증거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또한 모습도 없는 것이니라. 텅 빈 것 같아서 가지려 해도 능히 얻지 못하며, 버리려 해도 능히 버리지 못하며, 가고 오는 것도 스스로 있어 항상 머물러 있는 곳도 없고, 미묘해서 보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려우나, 그러나 사람이 능히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쓸 수 있는 것이니라.”
묻기를, “사람이 제가 능히 움직이고 쓸 수 있다면 어찌하여 하늘을 믿습니까?”
대답하시기를, “자기 마음을 자기가 믿으며, 자기 하늘을 자기 마음으로 하며, 스스로 아는 것을 스스로 움직이며, 자기 하늘을 스스로 법으로 삼나니, 그러므로 옛부터 많은 경전과 많은 법설이 자기 마음을 자기가 법으로 하는 것이요,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니라.
경전을 배워서 만 번 외우고 하늘을 보고 천 번 절하라는 것은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을 경계하느라고 만든 법이요, 이로써 성품을 보고 마음을 깨닫는 것은 얻지 못하느니라. 성품과 마음을 닦는 데는 반드시 묘한 방법이 있으니 깨닫고 깨달아서 어둡지 말 것이니라. 마음이 성품 속에 들면 공공적적하고, 성품이 마음속에 들면 활활발발해지니라. 비고 고요하고 활발한 것은 자기 성품과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고, 자기 성품과 자기 마음은 내 마음의 본바탕이니, 도를 어느 곳에서 구할 것인가. 반드시 내 마음에서 구할지니라.”
묻기를, “나는 또 어디서 났으며 성품은 어디서 왔겠습니까?”
대답하시기를,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없고 성품도 없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있고 성품도 있느니라. 나도 없고 성품도 없다고 보면 그 수명이 한량이 없고, 나도 있고 성품도 있다고 보면 그 수명이 반드시 짧아서 죽고 사는 것을 떠나지 못하느니라. 큰 수명은 죽고 사는 것도 없고, 선하고 악한 것도 없고, 움직이는 것도 없고, 비고 고요함도 없고, 빛깔과 형상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고, 옛날과 지금도 없고, 말과 글도 없는 것이니 형용하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니라.”
묻기를, “형용하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 “너의 물음이 다만 색상에서 나온 것이요, 너의 묻지 아니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형용하기 어렵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니라. 성품은 비고 고요함도 없으며 빛깔도 형상도 없으며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으나, 그러나 기운이 엉기어 혈맥이 서로 통하면 때가 있고 움직임이 있나니, 이것을 하늘이 있다, 사람이 있다, 정이 있다, 신이 있다 말하는 것이니라. 보통 사람의 눈은 다만 자신의 감각 영식(靈識)으로써 광내(光內)에서 대조할 뿐이요, 광외(光外)에 한량없이 넓고 큰 본성은 알지 못하느니라.”
묻기를, “한량없이 넓고 큰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너의 감각이 미치는 것은 형상이 있고 빛깔이 있는 것뿐이요, 너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한량없이 넓고 큰 것이니라. 너도 또한 한량없이 넓고 크고 맑고 깨끗한 지경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므로 본래는 업인과 장애가 없었거늘 오랫동안 고해에 빠져 뜬구름이 햇빛을 가리운 것 같으니라.
네가 자기 성품과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비록 몸을 깨뜨려 티끌같이 할지라도 끝내 크게 이루지 못할 것이요, 네가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크며 자기의 마음에 도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비록 천 가지 경전을 만 번 읽어서 설득하더라도 반드시 분별치 못하리라.
도를 자기의 성품에서 구하고, 법을 자기 마음에서 구하라. 성품과 마음이 있는 곳은 저기도 아니요, 여기도 아니요, 위도 아니요, 아래도 아니요, 다만 내가 내게 있는 것이니라. 내 하늘을 내 도로 하면 천도(天道)의 한량없는 것이 또한 내게 매었으니, 내가 높고 높음이 위도 없고 위도 없어 세 하늘의 위에 높이 있느니라.”
하편(下篇)
1장(一章)
주문을 생각하여 보는 것과 감화함을 보는 것(念呪觀 感化觀)
2장(二章)
나를 없다고 보고 하늘을 있다고 보는 것(我無觀 天有觀)
3장(三章)
나를 있다고 보고 하늘을 없다고 보는 것(我有觀 天無觀)
4장(四章)
성품을 없다고 보고 마음을 있다고 보는 것(性無觀 心有觀)
5장(五章)
마음을 없다고 보고 성품을 있다고 보는 것(心無觀 性有觀)
6장(六章)
성품도 없다고 보고 마음도 없다고 보는 것 (性無觀 心無觀)
7장(七章)
성품도 있다고 보고 마음도 있다고 보는 것(性有觀 心有觀)
8장(八章)
나를 먼저 보고 하늘을 뒤에 보는 것(我先觀 天後觀)
9장(九章)
나도 있다고 보고 하늘도 있다고 보는 것(我有觀天有觀)
10장(十章)
나도 있다고 보고 물건도 있다고 보는 것(我有觀 物有觀)
11장(十一章)
자유를 보고 자용을 보는 것(自由觀 自用觀)
12장(十二章)
중생을 보고 복록을 보는 것(衆生觀 福祿觀)
13장(十三章)
세계를 보고 극락을 보는 것(世界觀 極樂觀)
후경 일(後經 一)
상편(上篇)
그 성품은 달이 만경창파(萬頃蒼波)에 떨어져 숨은 것 같고,
그 마음은 불이 천리장풍(千里長風)에 일어나 타는 것 같으니라.
달이 창파에 숨으니 바다 나라가 밝고
불이 장풍에 타오르니 구름하늘이 개이도다.
바다가 맑고 구름이 개이니 일색공(一色空)이요,
공을 거두고 색을 지우니 밤에 말이 없어라.
어둠속에서 바람이 나니 하늘이 다시 살아나도다.
중편(中篇)
비고 빈 것이 본래 빈 것이 아니요, 마음이 비어서 공적계(空寂界)가 되니라.
내 성품은 본래 하늘이요, 내 마음은 몸 뒤의 하늘이니라.
내 성품에는 나도 없는 것이요, 내 마음에 내가 바로 있는 것이니라.
세상 법(法)은 백년 괴로움이요, 성인 법은 만년 수심(愁心)이니라.
하편(下篇)
밝은 가운데서 어둠이 나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나는 것이요,
어둠 가운데서 밝음이 나고 밝은 가운데서 어둠이 나느니라.
1장(一章)
도가 세 하늘을 지나면 마음이 스스로 어두워지고, 바람이 잔잔한 물결을 움직이니 부질없이 시끄럽기만 하느니라. 흰 구름 위와 흰 구름 아래에 위에서는 듣고 아래서는 논하니라.
2장(二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이 하늘마음 있는 곳이요, 알려 해도 알지 못할 것을 아는 것이 내 마음이니라. 뜬 꽃이 하늘을 묻어 만겁(萬劫)을 벗어나고 빈 배가 물결을 구속하여 백년을 실었더라.
3장(三章)
법계(法界)를 두루 돌아 옛집에 돌아오니 오색 꽃잎이 처마 끝에 날리니라. 맑고 빈 달빛의 담박한 맛은 속절없이 내 마음을 스스로 흐뭇하게 하느니라.
4장(四章)
상제(上帝)가 잠잠하고 잠잠하여 하늘이 오래 비고 바람이 속빈 대나무를 움직이어 처음으로 마음이 생기게 하느니라. 도는 반드시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 둘이 없으나 사물을 대하는 정신은 각각 정(情)이 있느니라.
5장(五章)
헤아릴 수 없는 큰 하늘도 조그만 마음보다 낮고 홀연히 풍운이 일어나 만리(萬里)를 뒤밟느니라. 베개 위에 깨인 혼(魂)이 중천(中天)에 올라가니 달 아래 동서를 다 굽어보느니라.
6장(六章)
사람은 해와 달같이 분시(分時)가 아니니 단연코 백년 슬픔을 만들지 말라. 사나이 마음을 두면 하늘도 쉬지 않나니 그 목숨은 반드시 백년의 앎을 만들리라.
1910년(포덕 51년) 경술(庚戌) 1월 3일에 성사가 이병춘, 서우순 2인을 성도사(誠道師)로, 나인협, 홍기덕 2인을 경도사(敬道師)로, 홍기조를 신도사(信道師)로, 오영창을 법도사(法道師)로 임명하셨다.
3월에 성사가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설립하시고 지방 교인의 총명하고 뛰어난 자제(子弟)를 모집하여 교리와 과학을 가르치게 하시니 이로부터 지방 각처에 강습소가 많이 일어나 800여 개소에 달하였다.
4월에 성사가 각지 교인에게 49일 기도식을 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홍병기, 나용환, 양한묵(梁漢默), 이관(李瓘), 오지영 등 여러 사람에게 과천군 관악산(冠岳山) 삼성사(三聖寺)에서 연성기도를 행하게 하실 적에 수련의 법문(法文)[후경에 자세히 보임]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이치를 깨달아 이 마지막 구절(末句)의 한 구절을 채워라”고 하셨다.
7월 16일에 성사가 진리의 선전과 학술, 기예(技藝)의 보급을 위하여 월보과(月報課)를 설치하셨다.
9월에 성사가 전문·중학·소학 각 학교를 설립하여 일반교육을 확장하시니, 이로부터 교무(敎務)가 날마다 더욱 진전하여 지방 교도가 300여 만에 달하였다.
1911년(포덕 52년) 신해(辛亥) 4월에 성사가 대도주 박인호 이하 모든 관장(觀長) 및 부원과 보성중학(普成中學) 교직원 및 생도 수백 인을 이끌고 경주(慶州)에 가시어 대신사의 묘를 성묘하시고 대신사의 옛터 용담정(龍潭亭)과 가정리(稼亭里)를 방문하여 예를 올린 뒤에 경주부(慶州府) 황오리(皇吾里)의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옛터를 방문하여 예를 올리셨다.
1912년(포덕 53년) 임자(壬子) 4월에 성사가 종학강습소(宗學講習所)를 설립하여 교리를 전문으로 강습하게 하셨다.
이때에 성사가 각 지방 두목 500인에게 49일 연성기도식을 행하게 하셨는데, 도장(道場)은 봉황각(鳳凰閣)[우이동]과 도선암(道詵菴)[우이동] 두 곳으로 정하시고 7회로 나누어 차례로 수련하게 하셨다. 때에 성사가 설법하시기를, “내가 통도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리 도(道)의 근본 뜻을 홀연히 크게 깨우쳤노라. 대신사가 반드시 이 성령(性靈)으로 출세(出世)할 것을 확실히 자신하노니 너희들은 삼가 들은 다음 믿고서 행하라”고 하시며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以身幻性]’는 4자를 깊게 생각하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성사가 성령을 단련하고 마음을 닦는 것을 학업으로 삼으셨고 매년 기념할 때에는 각 지방 두목에게 설법만 하시고, 교무에 대해서는 제각기 분담한 임원에게 일임하셨다.
1913년(포덕 54년) 계축(癸丑)에는 작년에 시작한 49일 연성공부를 두목으로 하여금 계속하게 하셨다.
1914년(포덕 55년) 갑인(甲寅) 4월 2일에 성사가 법석(法席)을 여시고 직접 두령 74인을 소집하셨다.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일제히 천사(天師)[최제우]께 심고(心告)하라”고 하고 이어서 설법하시기를, “내가 지금 너희들 일반에게 심법(心法)을 전수하노라”고 하시며 강서를 각자에게 주시니 그 글에 이르기를, “너는 반드시 하늘이 하늘된 것이니, 어찌 영성(靈性)이 없겠느냐. 영은 반드시 영이 영된 것이니, 하늘은 어디 있으며 너는 어디 있는가. 구하면 이것이요 생각하면 이것이니, 항상 있어 둘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8월 4일에 성사가 임례환, 이종석 2인을 신도사로 임명하셨다.
10월에 성사가 일반 교도에게 105일 기도식을 행하게 하셨다. 이때에 설법하시기를, “대신사가 성령으로 출세하여 도석(道席)을 베푸시고 수많은 종도(宗徒)에게 도를 시험할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 합격할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때는 대신사의 출세기(出世期)니 너희들은 성심으로 수도(修道)하라”고 하셨다.
11월 7일에 성사가 밥상을 받으실 때 방에 신선한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문을 여셨더니 참새 100여 마리가 날아들어 밥상에 둘러앉았다. 성사가 참새들을 사랑하여 밥으로 나누어 먹이니 참새들이 더러는 무릎에 앉고 더러는 손에 올라 밥을 받아먹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는 성사의 집 안뜰에 산 까치 10여 마리가 날아와서 두 시간 가량을 돌며 살피다가 날아갔다.
1915년(포덕 56년) 을묘(乙卯) 봄에 성사가 105일 기도를 마치시고 시(詩)를 읊으시기를, “기도 백오일에 흰 눈이 큰 들에 깊고, 찬바람 사람 없는 길에서 홀로 만년(萬年) 마음을 즐기느니라. 하늘이 있고 하늘이 있는 하늘이면 내가 있고 내가 있는 하늘이요, 하늘이 없고 하늘이 없는 하늘이면 내가 없고 내가 없는 하늘이라”라고 하셨다.
7월에 성사가 가족과 부원을 이끌고 청주(淸州) 옛터에 가시니 공경히 맞이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성사가 대중에 대하여 천도교 취지를 설명하시고, 다시 초정(椒井)에 가시어 친척과 친지들을 위로하고 돌보아주셨다.
1916년(포덕 57년) 병진(丙辰) 4월 1일에 성사가 특신교도(特信敎徒)[오의(五疑)에 대하여 5년 동안 흠이 없는 사람]에게 천훈장(天勳章)을 주셨다.
6월에 성사가 제자들에게 설법하시기를, “우리 교(敎)의 과거는 의뢰시대(依賴時代)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의 수준이 성숙하지 못함에 종사하여 기이하고 신령스런 형적으로 인심을 인도하였다. 오늘날은 우리 교의 조화시대(照化時代)이다. 비유하자면 백일(白日)이 하늘에 떠있으면 온갖 사물의 형상이 빛을 머금고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엷은 구름[纖雲]이 있었더라도 한낮의 하늘[午天]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크게 밝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도는 한울님[天主]과 신사께 의뢰하던 마음은 타파하고 자신의 한울[自天]을 스스로 믿으라. 만약 자신의 한울을 믿지 않고 천사(天師)[최제우]만 의지하면 매양 나의 본체[我體]가 미약하여 일이 생겼을 적에 힘있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자신의 한울은 나의 육체를 통솔하는 주체자이니, 신도는 객체와 주체를 잘 분간(分揀)하여 수련하라”고 하셨다.
성사가 제자들에게 일찍이 이르시기를, “우리 교(敎)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의 큰 뜻은 5만년을 마치는 것이 하루처럼 하는 것이고 교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적절함에 합류할 수가 있으니, 10년에 작게 한 번 변하고 100년에 중간으로 한 번 변하고 1,000년에 크게 한 번 변하여 항상 새로운 면목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고 하셨다.
9월에 의사원(議事員) 일동이 봉황각에 나와서 성사를 찾아와 뵈니, 성사가 이신환성설(以身換性說)로 설유(說諭)하시기를, “몸을 성령으로 바꾸라는 것은 대신사의 본뜻이니라. 육신은 100년 사는 한 물체요, 성령은 천지가 생겨나기 전에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라. 성령의 본체는 둥글고 둥글어 가득하고 가득하여[圓圓充充] 나지도 아니하며, 멸하지도 아니하며,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것이니라. 성령은 곧 사람의 영원한 주체(主體)요, 육신은 곧 사람의 한 때 객체(客體)니라. 만약 주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영원히 복록(福祿)을 받을 것이요, 객체로써 주장을 삼으면 모든 일이 재화(災禍)에 가까우니라. 그런데 주체가 영생(永生)하고자 하면 객체 즉 육체가 험하고 괴로움이 많고, 객체가 안락(安樂)하고자 하면 주체 즉 성령의 앞길이 들떠 있으리니 그대들은 무엇을 취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교인을 대하여 험하고 괴로움을 많이 말하고, 안락을 말하지 아니 하노라. 무릇 안락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좋으나 실은 안락이 아니라 도리어 험고(險苦)하고, 험고의 말은 듣기에는 비록 싫으나 실은 험고가 아니라 곧 안락이니, 우리 교의 대신사는 성령으로 주체를 삼으신지라. 그러므로 수련이 극치에 이른 사람이라야 험고로써 안락하여 육신의 안락은 홀연히 잊어버리는지라, 깊은 물을 건너시며 빗속에 그냥 보행하신 것을 보아도 황홀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육신을 성령으로 바꾸는 사람은 먼저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12월 21일에 오세창, 권동진 2인을 신도사로 임명하셨다.
1917년(포덕 58년) 정사(丁巳) 1월 10일에 성사가 권병덕, 유세증(柳世增) 2인을 데리고 가서 김연국(시천교주)을 만나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와 내가 비록 문호(門戶)는 각립(各立)하였으나 천사(天師)를 숭배하는 심리(心理)는 하나이고, 또 도(道)를 이루고자 함도 하나이다. 그 동안에 그대와 나 사이에 막혀서 서로 통하지 못한 것은 육신상(肉身上) 사소한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천사의 심법(心法)을 받은 자가 어찌 도 이외의 사적 감정으로써 선사(先師)의 대법대의(大法大義)를 손상하겠는가. 지금 내가 그대에 대하여 감정을 풀고자 왔으니 그대도 권병덕, 유세증[시천교에서 천도교로 온 사람]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을 풀어라”고 하시며 또 말씀하시기를, “일치한 정신과 동일한 규모로써 교도를 지도하고자 한다면 어찌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 그대와 나는 연로(年老)하기 때문에 만일 이때에 감정을 풀고 도법(道法)을 정하지 못하면 그대와 내가 떠난 뒤에 누가 능히 대행(代行)하여 천사[최제우]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하겠는가?”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교도(敎導)하는 법이 있으니 사람이 만약 강(强)한 편에 기울었으면 유(柔)로써 이끌고, 사람이 만약 유한 편에 기울었으면 강으로써 이끄는 것이 옳을 것이니 그대는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다. 후일에 수차례 방문하여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나 김연국이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성사가 4차 방문하시니 김연국이 안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자 성사가 깨닫지 못한 것을 한탄하시고 돌아오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모두 분노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그가 끝내 깨닫지 못하니 한탄스러울 뿐이다”고 하셨다.
2월에 수도승(修道僧) 백용성(白龍城)이 성사를 찾아와 뵙고 이어서 도(道)를 물으니 성사가 대답하시기를, “부처가 없어야 부처가 있는 것이고 하늘이 없어야 하늘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때에 성사가 문도에게 설유(說諭)하여 이르시기를, “성(性)은 천지만리(天地萬理)의 부모가 되고 심(心)은 세계만유(世界萬有)의 군사(君師)가 되니 너희들은 수심연성(守心煉性)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라”고 하셨다.
4월 5일에 성사가 지방 두목 24인에게 도호를 내리시니 그 성명은 다음과 같다.
김영언(金泳彦)은 평암(枰庵), 이정점(李貞漸)은 남암(楠庵), 정용근(鄭溶根)은 양암(樑庵), 정도영(鄭道永)은 표암(杓庵), 이인숙(李仁淑)은 상암(桑庵), 신정집(辛精集)은 단암(檀庵), 김철진(金哲鎭)은 회암(檜庵), 한창덕(韓昌德)은 극암(極庵), 신광로(辛光魯)는 모암(模庵), 김진팔(金鎭八)은 재암(材庵), 한현태(韓賢泰)는 주암(柱菴), 최영곤(崔永坤)은 환암(桓菴), 최주억(崔周億)은 악암(樂菴), 최석련(崔碩連)은 계암(桂菴), 이정석(李鼎錫)은 백암(栢菴), 김승주(金日+丞周)는 근암(根菴), 김세업(金世業)은 교암(校菴), 김명선(金明善)은 기암(棋菴), 이정화(李晶和)는 매암(梅菴), 김안실(金案實)은 영암(楹菴), 이종수(李種秀)는 요암(橈菴), 안처흠(安處欽)은 당암(榶菴), 한관진(韓寬珍)은 수암(樹菴), 김봉년(金奉年)은 권암(權菴).
10월 26일에 성사가 정계완, 박준승(朴準承), 이기완(李歧琓), 이인숙(李仁淑) 4인을 경도사로 임명하셨다.
12월 20일에 김낙철을 성도사로 임명하셨다.
1918년(포덕 59년) 무오(戊午) 2월에 성사가 교리연구부(敎理硏究部)를 설립하여 공히 대신사의 연원(淵源) 아래에 있는 일반교도로 서로 진리를 연구하게 하시니, 그 주된 뜻은 상애(相愛)를 주로 하며 교리(敎理)와 교법(敎法)을 일치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이에 앞서 교중(敎中)에서 시천교인(侍天敎人)과 상의하여 상애(相愛)의 도(道)를 강구(講究)하였다. 성사가 이 말을 들으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홍병기, 나용환, 양한묵, 오지영, 박봉윤(朴奉允), 김상묵(金尙默), 김택현(金澤鉉) 등으로 하여금 이를 발기(發起)하게 하시고 지난날 출교(黜敎)하였던 이용구 등 60여 인의 벌안(罰案)을 아울러 모두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리고 시천교 측의 한화석(韓華錫), 이필영(李弼榮), 염달한(廉達漢), 박형채(朴衡采), 박정동(朴晶東), 김진태(金振泰), 윤경순(尹敬順), 박해묵(朴海默), 윤정식(尹定植), 김영걸(金永杰) 등 여러 사람을 불러 만나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신사께 도를 전수받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대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선사(先師)의 심법(心法)을 받은 제자 중에 비록 서로 파가 갈라진 자가 많더라도 누구를 따질 것 없이 모두에게 선사의 도법이 일치되게 하는 것이 옳으니, 너희들은 이를 깨달았는가?” 하시니, 모든 사람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여 연구부에 열심히 종사하였다.
4월 13일에 권병덕을 경도사로, 방찬두를 신도사로 임명하셨다.
6월에 성사가 금강산(金剛山)에 가시어 1만2천봉의 경개(景槪)를 두루 구경하셨다.
8월 24(14)일 하오 3시에 성사가 직접 두목과 각 군 교구장을 제동(齋洞) 사저로 소집하시고, “바로 지금은 사람과 하늘이 열리다”는 제목으로 설법하셨다.
10월 29일에 성사가 신광우를 신도사로 임명하셨다.
12월에 성사가 일반 교도에게 49일 기도식을 행하게 하셨다. 이때 서울, 해주(海州), 의주(義州), 길주(吉州), 원주(原州), 경주(慶州), 서산(瑞山), 전주(全州), 평강(平康) 등 9곳으로 대표 기도지를 정하고 1곳에 4인씩 추천, 선발하여 대표로 기도하게 하셨다.
1919년(포덕 60년) 기미(己未) 1월 10일에 성사가 오응선을 경도사로 임명하셨다.
보유(補遺)
1906년(포덕 47년) 병오(丙午) 봄에 정부에서 저택을 하사한다고 하니 성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받을 의무는 없다”고 하셨다.
1906년(포덕 47년) 병오 7월 26일에 성사가 박인호를 경도사로 임명하셨다.
1907년(포덕 49년) 정미(丁未) 봄에 성사가 우리 도(道)의 갑자년(甲子年) 이래에 순도(殉道)한 신도의 이름을 나열하여 기록하고 서울 남대문 밖 영수산교당(靈壽山敎堂) 유적에서 위령회(慰靈會)를 거행하시니 순도한 사람이 수십 만에 달하였다.
1907년(포덕 48년) 정미 12월 21일에 성사가 이종훈을 성도사로, 홍병기를 경도사로 임명하셨다.
1908년(포덕 49년) 무신(戊申) 4월에 성사가 양한묵, 권동진, 오지영 등 여러 사람을 데리고 전라도에 순접(巡接)하실 때, 인천(仁川)에서 군산(群山)으로 와 1박하시니 공경히 맞이하는 자가 무릇 만여 명에 달하였다. 익산(益山) 교구에 가서 설교하시고 또 전주에 들어가서 설교하셨다.
1909년(포덕 50년) 기유(己酉) 1월 25일에 성사가 나용환을 신도사로, 양한묵을 법도사로 임명하셨다.
1909년(포덕 50년) 기유 성사가 통도사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시를 지으시니 “어디서 온 일물(一物)이 본래 내 천성인데, 어디도 없고 온 데도 없고 내 또한 없는 것이라. 보배로운 거울이 비고 비어 비치는 것을 머금고 달렸으니, 능히 천지를 삼키고 능히 세상을 뱉는 도다. 다섯 자 못 차는 피 한 덩어리에 한 가지로 우주를 실어도 걸음걸음 가볍더라”고 하시고 또 이르기를 “대지(大地)는 둥글어 경계가 없건마는 사람의 눈은 둑을 떠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다.
1917년(포덕 58년) 10월 26일에 성사가 이기완(李歧玩)에게 오암(梧菴)이라는 도호를 내리셨다.
1918년(포덕 59년) 4월 13일에 성사가 권병덕에게 청암(淸菴)이라는 도호를 내리셨다.
8월 14일에 성사가 두목(頭目) 14인에게 도호(道號)를 내리시니 다음과 같다.
장응곤(張應坤)은 행암(杏菴), 임영수(林永秀)은 격암(格菴), 장승관(張承官)은 교암(校菴), 남정필(南廷必)은 체암(棣菴), 김병주(金炳柱)는 식암(植菴), 최긍순(崔兢淳)은 종암(棕菴), 안재덕(安載德)은 초암(樵菴), 박동현(朴東鉉)은 해암(楷菴), 손필규(孫弼奎)는 반암(槃菴), 김기태(金基泰)는 방암(榜菴), 이재영(李載榮)은 검암(檢菴), 홍재길(洪在吉)은 율암(栗菴), 손영해(孫永海)는 가암(柯菴), 이근상(李根尙)은 고암(杲菴).
1920년(포덕 60년) 1월 10일에 성사가 두목 13인에게 도호를 내리시니 다음과 같다.
오응선(吳膺善)은 치암(治菴), 정계근(鄭桂瑾)은 임암(林菴), 이유년(李有年)은 삼암(森菴), 홍성운(洪聖運)은 병암(柄菴), 문철모(文哲謨)는 괴암(槐菴), 박창훈(朴昌勳)은 규암(槻菴), 김양근(金良根)은 난암(欗菴), 이대원(李大源)은 은암(櫽菴), 최승주(崔承周)는 미암(楣菴), 박문화(朴文華)는 본암(本菴), 김기수(金基洙)는 운암(橒菴), 백찬호(白燦浩)는 견암(樫菴), 이돈하(李燉夏)는 정암(楟菴).
1904년(포덕 45년) 갑진(甲辰) 9월에 황주군, 진주군, 삭녕군, 춘천군, 이천군, 금화군, 경주군, 전주군, 공주군, 홍주군, 온양군, 청주군, 황간군, 정평군, 함흥군, 평양, 박천군, 희천군, 가산군, 양덕군, 정주군, 구성군, 영흥군, 고원군 등지에서 회원 수만 명씩 단회(團會)하여 개회할 때에 관리와 병사들이 난폭하게 총을 쏘아 사망자가 매우 많았고 부상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1904년(포덕 45년) 갑진 2월에 함흥군에서 윤형천(尹亨天), 김완규(金琓圭), 이인준(李仁俊), 주인학(朱仁鶴), 강치환(姜致煥) 등이 지목의 혐의로 피살되었다.
1907년(포덕 48년)과 1908년(포덕 49년) 두 해 사이에 정평(定平), 고원(高原), 북청(北靑), 장진(長津), 단천(端川), 이원(利原), 갑산(甲山), 삼수(三水), 영흥(永興) 등 군에서 교인 수천여 명이 폭도에게 총에 맞아 죽었다.
1920년(포덕 61년) 경신(庚申) 4월 1일 편집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