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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시천교종역사
  • 기사명
    제1장 제1세 교조 제세주의 강생[第一章 第一敎祖濟世主降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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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24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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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제1세 교조 제세주의 강생[第一章 第一敎祖濟世主降生][第一章 第一敎祖濟世主降生]

우리 제세주, 곧 시천교(侍天敎) 제1세 교조께서 비로소 동아시아주 조선의 전 경주부 구미산 가정리에서 탄강하였다. 때는 인효천황(仁孝天皇) 문정(文政)인효천황(仁孝天皇) 7년(조선으로는 전 조선 순조 24년이고, 서력으로는 기원 1824년이다) 갑신 10월 28일[양력 12월 19일]이었다. 제세주가 태어날 때에 붉은 기운이 가옥을 둘러싸고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으며 구미산이 사흘 동안 진동하면서 울었다.

제세주의 성은 최씨(崔氏)로 본관이 경주이며 휘는 제우(濟愚)이다. 처음 휘는 제우(濟宇)였다. 모습은 후덕하였으며 성품은 과묵하였으며 호는 수운재(水雲齋)였다. 먼 조상은 신라 문창후(文昌候), 휘(諱)는 치원(致遠), 호(號)는 고운(孤雲)이었는데 혹은 해운(海雲)이라 일컬었다. 도덕과 문장으로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고운은 신라 말기 정치의 혼란을 보고 가솔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게송(偈頌)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우리 동방의 도기가 가득 차고 빛나 길이 이어질 것이요, 우리 후손에 큰 성인이 반드시 나타날 것인데 그가 동방 문헌의 마루가 되리라”로 되어있다.
고운의 후손으로 휘 예(汭)가 있었는데 그 분은 이씨 조정에서 문학으로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내셨다. 이 분이 제세주의 13세조이시다. 휘 진립(震立)은 무과에 급제한 후 참판을 지내셨으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인조 병자년에 순절했는데 이 분이 제세주의 7세이다.
제세주의 아버지는 휘 옥(鋈), 호는 근암(近菴)인데 그때 사람들은 근암께서 도학을 존중한다고 해서 근암선생이라 불렀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연과 벗삼아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끌어주었다. 일찍이 나이가 많았는데도 아들이 없어 걱정을 했다. 어느 날 낮 무렵에 우연히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가니 마침 한 부인이 내실 뜨락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냐고 물어보니 문도인 한 아무개의 고모였다. 찾아온 사유를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저는 나이가 넘었는데 과부로 김척리 가정리와 50리 떨어진 곳 친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미시(未時, 오후 1~3시)와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사이에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여 인사불성이 되었을 적에 태양이 곧바로 품속으로 들어가고 또 이상스런 기운이 감도는 것 같더니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했다. 근암공이 그녀의 말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마침내 동거를 시작하였고 임신까지 하여, 제세주가 태어났다. 제세주께서는 곧 상제(上帝)의 화신으로 우리 교종(敎宗)을 창립한 제1세 교조이다. 후에 사람들은 주를 숭봉해서 제세주라고 일컫는다.

제세주는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정신과 안색이 빼어났으며 놀이하는 모습이 의젓하여 성인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 거룩한 마음씨에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겸비하여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근암공마저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뜨시었다.
제세주가 나이 16세에 무릇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는데 스스로 관덕(觀德)하고 낙도(樂道)하는 뜻이 있었다. 그 무렵에 우울한 일을 만나 가지고 있던 가구와 서적이 남김없이 없어졌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세도(世道)가 타락한 데 분개해서 사방을 두로 돌아다녔다.

하늘이 장차 큰 소임을 이 사람에게 맡길 것이었다. 그에 앞서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수고롭게 하고 그 육체를 괴롭힐 것이지만 그것은 원대한 그릇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세주가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를 잃고 연달아 집안의 재앙을 입어서 선대(先代)부터 보관한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여한을 떨치지 못하는 등 그 명운의 외롭고 곤궁함이 실로 감당해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 말세 백륙(百六)의 운세를 만나 세도가 날로 문들어지고 윤리가 점점 무너지며 당론이 더욱 치성하고, 무당과 음사(淫祀)의 황탄하고 불경한 말이 마음을 현혹시키며, 관리와 호족과 횡포한 무단(武斷)의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모두들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아, 이 때가 과연 어떤 시절인가? 요순의 다스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베풀 수 없고 공맹의 덕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을 구제할 수 없었다. 슬프다. 우리 창생이 고난에 빠지고 부모 자식과 이별을 해서 마치 구덩이 속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로써 제세주가 불구덩이에 빠진 자를 구제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 차서, 못 잊어 하여 늘 편안한 곳에서 지낼 겨를이 없이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주석
시천교는 1906년 이용구 김연국 등이 천도교에 반기를 들고 설립해 친일노선을 걸으면서 일제에 영합했다. 그러면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세상을 구제하는 주, 즉 제세주(濟世主)로 표현하면서 천주교의 천주와 비슷한 의미로 내세웠다. 교명 시천교는 하늘을 모시는 교, 곧 천주를 모시는 교라는 뜻이다. 손병희 중심의 천도교는 하늘의 도를 받드는 교라는 뜻으로 천도교라 했는데 이와 대립해 교명을 지었다. 또 2세 교주 최시형을 대신사(大神師)로 표기하면서 본문에서는 사(師)로 약해서 표기하고 있다. 천도교에서 최제우를 대신사, 최시형을 신사(神師)로 표기하는 것보다 한 단계 높인 호칭이다. 편집 체제는 강목체(綱目體)로 이루어져 있다. 곧 앞에 강(綱)인 본문을 내세우고 그 사실을 설명하는 글인 목(目)은 한 글자 내려서 기재하고 있다. 또 글 안에서 보충 설명을 붙일 적에는 작은 글자로 표시했다.
인효천황(仁孝天皇) 1817년 즉위해서 1846년에 죽은 천황으로 명치(明治) 천황의 조부. 굳이 일본천황의 연호를 사용해 친일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하고 있다.
신라 제1의 문장가로 일컫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하의 내용은 꾸민 얘기이다. 민간 전설에도 이 사실은 전해지지 않는데 조작의 혐의를 풍기고 있다.
최진립은 경주 최씨의 중시조로 받드는 인사로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 되어 전투를 벌이다가 순사하였다 한다. 다른 천도교 관련 기록에는 6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퇴계 이황 계통의 학자로 과거제의 모순, 토지개혁에 관한 글을 남긴 진보적 학자로 알려졌다. 시문집으로 필사본인 『근암유고』가 전해진다.
관덕(觀德) 활쏘기를 덕을 함양하다는 뜻을 따서 활쏘는 터를 관덕정(觀德亭)이라 명명한다.
한우충동(汗牛充棟) 책이 많음을 비유. 많은 책을 실은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비유해 이루어진 고사.
백륙(百六)의 운세 액운이 드는 시기를 말한다. 음양가에서는 양액(陽厄) 5와 음액(陰厄) 4를 합해 9가 되는데 이를 양구(陽九)라 해서 액운이라 한다. 이것이 하늘의 운수인데 반해 땅에는 백륙의 운세를 액운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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