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제1세 교조 제세주의 강생[第一章 第一敎祖濟世主降生]
우리 제세주, 곧 시천교(侍天敎) 제1세 교조께서 비로소 동아시아주 조선의 전 경주부 구미산 가정리에서 탄강하였다. 때는 인효천황(仁孝天皇) 문정(文政)인효천황(仁孝天皇) 7년(조선으로는 전 조선 순조 24년이고, 서력으로는 기원 1824년이다) 갑신 10월 28일[양력 12월 19일]이었다. 제세주가 태어날 때에 붉은 기운이 가옥을 둘러싸고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으며 구미산이 사흘 동안 진동하면서 울었다.
제세주의 성은 최씨(崔氏)로 본관이 경주이며 휘는 제우(濟愚)이다. 처음 휘는 제우(濟宇)였다. 모습은 후덕하였으며 성품은 과묵하였으며 호는 수운재(水雲齋)였다. 먼 조상은 신라 문창후(文昌候), 휘(諱)는 치원(致遠), 호(號)는 고운(孤雲)이었는데 혹은 해운(海雲)이라 일컬었다. 도덕과 문장으로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고운은 신라 말기 정치의 혼란을 보고 가솔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운의 후손으로 휘 예(汭)가 있었는데 그 분은 이씨 조정에서 문학으로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내셨다. 이 분이 제세주의 13세조이시다. 휘 진립(震立)은 무과에 급제한 후 참판을 지내셨으며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받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인조 병자년에 순절했는데 이 분이 제세주의 7세이다.
제세주의 아버지는 휘 옥(鋈), 호는 근암(近菴)인데 그때 사람들은 근암께서 도학을 존중한다고 해서 근암선생
제세주는 어렸을 때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정신과 안색이 빼어났으며 놀이하는 모습이 의젓하여 성인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 거룩한 마음씨에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겸비하여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근암공마저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뜨시었다.
제세주가 나이 16세에 무릇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는데 스스로 관덕(觀德)하고 낙도(樂道)하는 뜻이 있었다. 그 무렵에 우울한 일을 만나 가지고 있던 가구와 서적이 남김없이 없어졌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세도(世道)가 타락한 데 분개해서 사방을 두로 돌아다녔다.
하늘이 장차 큰 소임을 이 사람에게 맡길 것이었다. 그에 앞서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수고롭게 하고 그 육체를 괴롭힐 것이지만 그것은 원대한 그릇을 이루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세주가 어린 나이에 이미 부모를 잃고 연달아 집안의 재앙을 입어서 선대(先代)부터 보관한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여한을 떨치지 못하는 등 그 명운의 외롭고 곤궁함이 실로 감당해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 말세 백륙(百六)의 운세를 만나 세도가 날로 문들어지고 윤리가 점점 무너지며 당론이 더욱 치성하고, 무당과 음사(淫祀)의 황탄하고 불경한 말이 마음을 현혹시키며, 관리와 호족과 횡포한 무단(武斷)의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빼앗아 모두들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아, 이 때가 과연 어떤 시절인가? 요순의 다스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베풀 수 없고 공맹의 덕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을 구제할 수 없었다. 슬프다. 우리 창생이 고난에 빠지고 부모 자식과 이별을 해서 마치 구덩이 속에 빠지는 것과 같다. 이로써 제세주가 불구덩이에 빠진 자를 구제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 차서, 못 잊어 하여 늘 편안한 곳에서 지낼 겨를이 없이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