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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7장 의례와 제문을 베풀다[第七章 設儀祭文]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75년 10월 00일
일러두기

10월. 대신사가 법식을 베푸는 일을 글로 적어 정선군에 있는 여러 교인들에게 일러주었다. 같은 달 28일에 모두 모이게 한 뒤 대신사가 스스로 법관(法冠) 법복(法服)을 만들었고, 처음으로 법제(法祭)를 베풀 적에 시행하였다. 대개 도가(道家)의 의제(衣制)를 모방해 가지고 변통한 것이다. 그 법관 법복의 양식과 참배 인원 성명은 다음과 같다.

법관(法冠)은 네 방향의 높이가 세 층으로, 중간은 똑바른 원(圓), 전후는 잎사귀 모양의 원으로 하지만 조금 솟아나게 했으며, 좌우는 잎사귀 모양으로 뽀죽하게 하지만 조금 낮게 하였다. 색깔은 붉기도 하고 검기도 하며 안에는 남색의 감을 붙이지만 정해진 색은 없다.
법복(法服)은 바른 사폭(邪幅, 바지의 허리와 마루폭 사이에 잇대는 헝겊쪽)이 앞에는 5, 뒤에는 4이며 소매는 직경이 한 자 세 촌, 세로 길이는 7촌이다. 소매 뒤쪽은 바르고 곧은데 앞뒤 폭의 양쪽 꿰매는 사이에 붙였으며 소매 입은 겨우 포갠 손을 넣을 만하다.
법대(法帶)는 너비가 2촌, 둘레가 2자쯤인데 오른 쪽 겨드랑이 밑에 묶고, 앞은 두 끈을 늘어뜨리는데 너비는 또한 같으며 길이는 몸에 맞추고 색깔은 순 검정이다.
초헌(初獻)은 대신사, 아헌(亞獻)은 강수(姜洙), 종헌(終獻)은 전성문(全聖文), 대축(大祝)은 유인상(劉寅常), 집례(執禮)는 박규석(朴奎錫), 봉향(奉香)은 김영순(金永淳), 봉로(奉爐)는 김연국(金演局)이었다.

예식이 끝나자 대신사가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거기에 가로되 “내게 12시(時) 자와 12활(活) 자가 있다. 우리들 세 사람이 먼저 시(時) 글로 이름을 고치고 활(活) 자로 자(字)를 고쳐 천명을 공경히 받는 게 옳을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강수 유인상과 함께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제세주의 작은 아들 세청(世淸)이 죽은 뒤 매년 제세주의 생일 아침에는 다례(茶禮)를 하고 돌아가신 날 밤에는 향사를 올렸는데 대신사가 오로지 맡아서 받들었다.
11월. 또 법제(法祭)를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베풀었다. 세 가지 색깔로 물들인 3척 3촌의 감을 폐백으로 삼고 3색의 소찬(素饌)을 진설해 제사를 지냈는데 참배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헌(初獻)은 도접주(道接主) 유시헌(劉時憲), 아헌(亞獻)은 신석현(辛錫鉉), 종헌(終獻)은 홍석범(洪錫範), 집례(執禮)는 최진섭(崔振爕), 대축(大祝)은 신봉한(辛鳳漢)・홍석도(洪錫道)・전세우(全世祐)・최기동(崔箕東)・유택진(劉澤鎭)・김원중(金源仲)이었다.

병자년(1876년) 4월. 또 법제(法祭)를 인제군(獜蹄郡) 김연호(金演鎬)의 집에서 베풀었는데 그 때 참배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헌(初獻)은 접주(接主) 김연호(金演鎬), 아헌(亞獻)은 장춘보(張春甫), 종헌(終獻)은 이은보(李殷甫), 집례(執禮)는 김연국(金演局), 대축(大祝)은 김종여(金宗汝), 봉향(奉香)은 김경식(金卿植), 집사(執事)는 김관호(金寬浩)・이윤희(李允喜)였다.

7월. 부인 손씨(孫氏)가 송고(松臯)에 왔다. 대신사와 손씨는 난을 당한 후 서로 헤어졌는데 무릇 6년간 소식이 끊겨 생존을 알 수 없었다. 현실로 부인이 고생을 겪으며 갑자기 찾아오니 대신사가 괴이하여 물었다. “종적을 감추고 여기에 있은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소. 그런데 부인이 어떻게 찾아왔오?”라고 하니 이에 부인이 “꿈에 선동(仙童)이 인도하기에 가리키는 대로 힘들지 않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년) 겨울 10월 3일. 처음으로 구성제(九星祭)를 지냈다. 향폐(香幣)와 향수(享需)를 성대하게 진설했는데 헌관은 9명, 집사는 12명이었다. 이를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초헌(初獻)은 대신사(大神師)와 강수(姜洙)・김시원(金時元)이었고 아헌(亞獻)은 유시헌(劉時憲)・김경화(金敬和)・심시정(沈時貞), 종헌(終獻)은 김연국(金演局)・장춘보(張春甫)・김치운(金致雲), 집례(執禮)는 장인호(蔣麟鎬), 대축(大祝)은 김영순(金永淳), 봉향(奉香)은 김문여(金文汝), 봉로(奉爐)는 안교백(安敎伯), 봉촉(奉燭)은 최창익(崔昌翼), 제물유사(祭物有司)는 유인형(劉寅享), 진설(陳設)은 윤종현(尹宗賢), 찬인(贊引)은 안교상(安敎常), 알자(謁者)는 김세필(金世弼), 집사(執事)는 허찬(許燦)・최기동(崔基東)・안교일(安敎一)이었다.

같은 달 16일. 이어서 또 구성제를 정선군 유시헌 집에서 거행했다. 또 문도와 함께 구성계(九星稧)를 만들고 해마다 한번 씩 수정하기로 했는데 존사(尊師, 최시형을 가리킴)의 뜻이 반영되었다. 그 때의 제관과 계원은 다음과 같았다.

초헌(初獻)은 유시헌(劉時憲)・신시영(辛時永)・홍시래(洪時來), 아헌(亞獻)은 신시일(辛時一)・최시경(崔時敬)・방시학(房時學), 종헌(終獻)은 안상묵(安尙默)・유진택(劉鎭澤)・김원중(金源仲), 집례(執禮)는 최창식(崔昌植), 대축(大祝)은 홍석도(洪錫道), 봉향(奉香)은 유경식(劉慶植), 봉로(奉爐)는 안교백(安敎伯), 봉촉(奉燭)은 최창익(崔昌翼), 집사(執事)는 허찬(許燦)・최기동(崔箕東)・안교일(安敎一)・최익섭(崔益爕)・안교강(安敎康)・전두원(全斗元)・전석두(全錫斗)이다. 계장(稧長)은 안상묵(安尙默), 계원(稧員)은 김응규(金應奎)・유시헌(劉時憲)・신시영(辛時永)・방시일(方時一)・최창식(崔昌植)・유택진(劉澤鎭)・최창익(崔昌翼)・전석두(全錫斗)・홍시래(洪時來)・최기동(崔箕東)・홍석도(洪錫道)・안교강(安敎綱)・김원중(金源仲)・안교일(安敎一)・윤종현(尹宗賢)・안교백(安敎伯)・안교상(安敎常)・홍상의(洪尙義)・신용한(辛龍漢)・안교흥(安敎興)・홍봉의(洪鳳儀)・안교룡(安敎龍)・이득룡(李得龍)・최진섭(崔振爕)・유인형(劉寅享)・유경식(劉慶植)・허찬(許燦)・전두원(全斗元)・최흥섭(崔興爕)・최익섭(崔益燮)・전세숙(全世淑)・전세필(全世弼)・전세인(全世仁)・박영근(朴永根)・노정식(盧貞植)・최재구(崔在九)였다.

무인년(1878년) 4월. 대신사가 김연국(金演局)과 함께 경주군 최형오(崔享悟, 대신사의 재종제이다)의 집으로 가서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밤마다 요배례(遙拜禮)를 제세주의 현경(玄扃)에서 올렸다. 대개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어 지목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몸소 묘소를 살필 수 없으니 갱장(羹墻)의 사사로운 사모만 간절할 뿐이었다.
7월이다. 대신사가 통고문을 각 포(包)에 유시하여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접소를 열라고 일렀다. 대개 제세주가 접(接)을 철폐한 뜻을 추술(追述)하고 이때에 다시 연 것이다.
이달에 4녀 정주현(鄭周鉉)의 아내가 태어났다.(김씨가 낳았다)
기묘년(1879년) 윤3월 첫 길일. 대신사가 김연국, 강시원(姜時元, 洙)를 바꾼 이름이다]고 함께 영서지방으로 가시려고 길을 나섰다가 영월군(寧越郡) 거석리(巨石里) 노정식(盧貞植)의 집에서 유숙했다. 이날 밤 대신사가 눈을 감고 도(道)를 생각하고 있을 때, 제세주가 홀연히 현관(玄冠)을 쓰고 남의(藍衣)를 입고 3층의 누대에 있었다. 동자 4~5명이 모시고 서 있고 두 노인이 좌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데 한 노인은 반듯하고 규격에 맞은 갓과 신발 차림을 하고 흔연히 하악(河岳)을 지거나 잠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한 노인은 붉은 얼굴과 푸른 수염을 하고 나는 듯이 구름과 노을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또 한명은 중머리를 한 칠순 노인으로 지팡이를 세우고 뒤에 손을 모으고 서있었다.
대신사가 나아가서 뵈려 하니 제세주가 “해월(海月)”의 도호(道號)를 불렀다. 대신사가 곧바로 대에 오를 적에 열 명 남짓 문도들이 뒤를 따라 나아갔다. 그때 강시원(姜時元), 유시헌(劉時憲)이 또 무리 속에 섞여서 함께 절을 했다. 제세주가 대신사의 옷차림이 남루함을 보고 시자(侍者) 한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입고 먹는것이 비록 정해진 분수가 있다 할지라도 이 사람의 옷은 어찌 이처럼 헤져 있으며 그대의 옷은 어찌해 이처럼 화려한가? 그 벗들이 서로 믿고 사는 처지에 어찌 돌보아줄 방법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자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제세주가 잠시 일어나 이리저리 걸었는데 대신사가 우러러 그 의대(衣帶)를 보니 무명과 삼베와 비단으로 다른 색깔 삼단을 겹겹이 묶고 땋았다. 대신사가 그 까닭을 물으니 제세주가 말하기를 “이 띠는 그대에게 주려는 것이다”라고 하고 풀어서 대신사의 허리에 묶어 주었다. 그리고 제세주가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무개 세 사람에게는 특별히 상재(上才)를 줄 것이요 아무개 다섯 사람에게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이처럼 다시 주리라. 그밖에 20여 인에게는 일후에 또 차례로 정해진 대로 주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제세주가 몸을 일으켜 대를 내려갔다.
대 아래의 문은 넷이 있는데 위의 대에는 20여 인이 있고 가운데 대에는 1백여 인이 있고 아래 대에는 얼마의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세주가 북문에 이르러 큰 글씨로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 이란 일곱 글자를 문설주에 붙이고는 세 번 입으로 외우고 세 번 손으로 치니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대신사도 따라 치니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마음으로 기이하게 여겨 또 그 까닭을 물으니 제세주가 대답하기를 “마땅히 소리가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득 명하여 돌아가겠다고 말하니 대신사가 “어찌 갑자기 돌아가십니까”라고 묻자 제세주가 말하기를, “내가 천주(天主)에게 밝은 일을 여쭐 게 있는데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처럼 서둘러 돌아가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 한 사람이 뛰어들어와 옷을 풀어헤치며 뵈옵겠다고 말했다. 대신사가 “어찌 이처럼 무례하게 뵙자고 하느냐”라고 하자 제세주가 “이 사람을 마땅히 수용할 것이니 허물치 말라”고 하였다. 또 한온포(寒溫飽) 석자를 써서 주면서 “한(寒)에는 온(溫) 자를 쓰고 온에는 한자를 쓰고 기(饑)에는 포(飽) 자를 쓰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각각 양평(良平)의 지혜와 한구(韓歐)의 문장과 도의(陶猗)의 부(富)를 주겠노라”고 말했다. 대신사가 꿈을 깨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는 우리 도(道)가 크게 들어낼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대신사가 인제군 김현수집에 이르러 여러 교인을 모으고 크게 법제식(法祭式)을 지냈다. 그 제사에 참석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헌(初獻) 김계원(金啓元), 아헌(亞獻) 장춘보(張春甫), 종헌(終獻) 김현수(金顯洙), 집례(執禮) 이윤희(李允喜), 대축(大祝) 김연국(金演局), 봉향(奉香) 이은보(李殷甫), 봉로(奉爐) 김관호(金寬浩), 봉촉(奉燭) 김종여(金宗汝), 찬인(贊引) 김경식(金卿植), 집사(執事) 장희용(張喜用).

4월. 대신사가 강시원에게 이르기를 “지금 등불을 켜는 법식을 베풀려고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떠하냐?”라고 하니 시원이 대답하기를 “교(敎)에서 벌이는 한결같은 행사는 오직 스승님의 가르침에 있을 뿐인데 어찌하여 다른 것을 물으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신사가 “교의 능력을 헤아려 보니 크게 등불을 벌이는 일은 갑자기 행하기 어려우니 먼저 작게 등불을 시험적으로 설치함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유시헌(劉時憲)・홍시래(洪時來)・최시경(崔時敬)의 집에서 각기 하나의 보기로 시행하게 했다. 또 10월 11일 무렵에 최경화(崔慶華)・조시철(趙時哲)・홍석범(洪錫範)의 집에서 각기 연달아 베풀게 했다.

주석
옷감의 예물이다.
청홍백의 채소이다.
구성은 북두성을 일컫는다. 민간에서 길흉을 판단하는 의식이다.
요배례(遙拜禮) 멀리에서 절하는 예식. 본디 지방 벼슬아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의식이다.
현경(玄扃) 무덤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갱장(羹墻) 국과 담장. 사모하는 마음이다.
현관(玄冠) 검정관에 붉은 색을 띤 관이다.
남의(藍衣) 남색 옷. 귀인이 입는 옷이다.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 하늘 문을 여는 자방의 문이란 뜻. 자방은 24방위의 하나로 정북(正北)의 중심. 정북은 임금자리이다.
춥고 따뜻하고 배부름의 뜻. 석자를 섞어 써서 주술의 의미를 띤다.
주림에는 배부름을 나타내는 글자를 쓰라는 것이다.
양평(良平)은 한나라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한구(韓歐)는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 도의(陶猗)는 중국의 고대 부자인 도주공(陶朱公)과 의돈(猗頓)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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