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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8장 유적의 간행과 배포[第八章 遺蹟刊布]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79년 04월 00일
일러두기

이때에 대신사가 선사(先師) 제세주의 유적편집소(遺蹟編輯所)를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설치하였다. 원고를 마치자 인쇄해 오래 전하려고 우선 도장을 찍어 굳게 봉하고서 유시헌(劉時憲)의 집에 보관해 두었는데 그 편집임원은 다음과 같다.

도주(道主) 해월(海月) 대신사(大神師), 차도주(次道主) 강시원(姜時元), 접주(接主) 유시헌(劉時憲), 감인(監印) 최기동(崔箕東)・안경일(安敬一), 사서(司書) 전세인(全世仁), 사필(司筆) 안경상(安敬常), 사지(司紙) 김원중(金源仲), 수찬(修撰) 신시영(辛時永), 교감(校勘) 신시일(辛時一), 소주(所主) 방시학(房時學), 사접(司接) 윤종현(尹宗賢), 사재(司財) 홍시래(洪時來)・안교백(安敎伯)・최창식(崔昌植), 사통(司通) 홍석도(洪錫道), 사책(司冊) 신윤한(辛潤漢)・안교강(安敎綱).

경진년(1880년) 정월. 대신사가 강시원(姜時元)・김연국(金演局)・전시황(全時晄)과 더불어 등불을 벌여놓고 김연호(金演鎬)의 집에서 치성을 드렸으며 이어 김현덕(金顯德)의 집에서 행했다. 2월에 또 김진해(金鎭海)의 집에서 별도로 베풀었다.
4월 5일. 대신사가 개교(開敎) 기념 예식을 각 포(包)에 열라고 분부했다.
5월 12일. 대신사가 선사유적인간소(先師遺蹟印刊所)를 인제군(獜蹄郡) 갑둔리(甲遁里)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열라고 지시해 처음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게 해서 6월 14일에 일을 마쳤다. 대신사가 스스로 발문(跋文)을 지어서 책 끝에 붙였다. 이튿 날 특별히 치제(致祭)를 베풀고 이를 알렸다. 그 인소(印所)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소장(所長) 대신사(大神師), 감인(監印) 강시원(姜時元)・전시광(全時晄), 교감(校監) 전시봉(全時奉)・심시정(沈時貞)・유시헌(劉時憲), 사접(司接) 황맹춘(黃孟春)・조시철(趙時哲)・신시영(申時永), 사재(司財) 한봉진(韓鳳辰)・홍시래(洪時來)・신시일(辛時一)・김진해(金鎭海)・이정봉(李廷鳳), 사직(司直) 장형도(張亨道)・김문수(金文洙)・장병규(張炳奎)・이진경(李晉慶), 사판(司板) 김관호(金寬浩), 사인(司印) 심원우(沈遠友)・최석하(崔錫夏)・전윤권(全允權), 사서(司書) 전세인(全世仁), 사향(司餉) 장흥길(張興吉)・김인상(金寅相)・김효흥(金孝興)・이천길(李千吉), 사공(司供)이귀록(李貴祿)・강기영(姜基永).

신사년(1881) 6월. 대신사가 강석(講席)을 단양군(丹陽郡)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베풀고 처음으로 『용담유사(龍潭遺詞)』 수백부를 간행하여 널리 각 포에 배포했다. 그 때 인쇄 비용은 인제군의 접에서 의연금을 내서 전담했다. 주간(主幹)은 김연호(金演鎬)・장춘보(張春甫)・김치운(金致雲)・이은보(李殷甫)・김현경(金顯卿)・장세원(張世遠) 등 여러 사람이었고 그밖에 임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다.
10월. 대신사가 정선(旌善)의 무은담(霧隱潭) 유시헌의 집에 가서 특별히 유선불(儒仙佛) 합일(合一)의 뜻으로 특별히 바치는 고천(告天) 예식을 행하였다. 사중(四衆) 이 운집했는데 예식이 끝나자 대신사가 “우리 교에서 어육(魚肉) 먹는 것을 금지한 지 이미 7년이 되었다. 비록 〈제세주의〉의 강화의 가르침을 받들었으나 또한 시인(時人, 당시의 사람들 곧 교인들)들의 꺼려함이 없지 않으니 지금부터 일절 해금한다”라고 말했다.
임오년(1882년) 3월 10일. 대신사가 제세주 조난기념식을 거행했는데 참석한 각 포의 교인이 매우 많았다. 유시헌 등이 대신사에게 묻기를 “금년 운수가 과연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내가 어찌 알리오? 다만 국가가 머지않아 내홍(內訌, 내부의 다툼)의 기미가 있는데 제군은 다만 성심 수도하며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라 바깥 일에 현혹되지 않는 게 옳을 것이다”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훈국(訓局)의 군요가 크게 일어나 한 달이 지나서 비로소 차츰 평정되었다.
6월. 대신사가 송고(松臯)에서 정선군 갈래면(葛來面) 장정리(長亭里)로 옮겼는데 몰려오는 각 포의 교도들이 더욱 많아져 문을 메웠다.
계미년(1883년) 2월. 인간소를 충청도 목천군(木川郡) 구내리(區內里) 김은경(金殷卿)의 집에 다시 설치하고 또 『동경대전』 1,000여 부를 찍어서 각 포에 배포했다. 대신사가 또 발문을 스스로 지어 끝에 첨부했다. 이 때에 풍문을 듣고 입교하는 자들은 곧 충주(忠州)・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豊)・목천(木川)・진천(鎭川)・청주(淸州)・공주(公州)・연기(燕歧) 등의 고을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손성열(孫星烈)・안교선(安敎善)・김영식(金榮植)・김상호(金相浩)・김은경(金殷卿)・안익명(安益明)・윤상오(尹相五)・이일원(李一元)・여규덕(呂圭德)・여규신(呂圭信)・유경순(劉敬順)・이성모(李聖模) 등이 있어서, 여러 고을에서 입교한 효시가 되었다.
어느 날 대신사가 좌우를 돌아보시며 이르기를 “우리 도(道)의 운수는 바야흐로 봄을 맞아 융성해지니 숨기지 말고 드러내서 청구(靑邱, 우리나라) 팔도에 널리 포교할 뿐만 아니라 점차로 동서양 두 지역을 교화해 갈 것이다. 제군은 단지 성경신(誠敬信)을 위주로 하고, 먼저 의지하고 복종함을 하늘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각 포에 글로 유시하였는데,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받들고 형제와 화목하고 부부를 구별하고 붕우를 믿고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며,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며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하는 등의 일에 힘 쓸 것 등 무릇 11조였다.
갑신년(1884년) 3월. 대신사가 특별히 제세주의 조난기념예식을 베풀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문도들이 매우 많았다. 먼저 사문에 찾아온 자는 청주(淸州)의 서인주, 보은(報恩)의 황하일(黃河一) 같은 이들이다.
같은 해 11월 24일. 대신사가 하늘의 영험을 느껴서 점서(乩書)의 글 세 편을 얻었는데 그 하나는 당시 사람들의 지목을 피하기 위해서 명을 받아 주문을 임시 방편으로 고쳐 행하는 것이다. 그 주문은 “봉사상제일편심(奉事上帝一片心) 조화정만사지(造化定萬事知)”이다. 그 3편의 점서 전문은 대신사 연보에 상세하게 게재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신사가 또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받들었는데 특별히 교의 육임(六任)을 지정해, 진실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골라 교장(敎長)으로 삼고, 성심 수도해 사람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을 교수(敎授)로 삼고, 명망이 있어 기강을 밝히고 경계를 아는 사람을 도집(都執)으로 삼고, 시비를 밝히고 기강을 잡을 사람을 집강(執綱)으로 삼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는 근후한 사람을 대정(大正)으로 삼고, 곧은 말을 하는 강직한 사람을 중정(中正)으로 삼게 하였다.
같은 달 28일. 대신사가 특별히 제세주의 강생기념 예식을 거행했는데 참석한 각 포의 교두(敎頭, 두령)가 82인이었고 그 나머지 참석한 교인이 또한 많았다. 이에 새로 제사 의식을 정했는데 세 가지 색깔의 채단은 각 3척 3촌을 갖추고 밥과 떡과 단술과 쌀은 모두 일곱 번 빻아 나쁜 티를 제거하였으며 과일 채소는 각각 한 말들이 용기에 담아 사용하였다. 그것들을 찔 적에는 저절로 말라죽거나 저절로 썩은 나무는 사용치 못하게 하였다. 참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깨끗하게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깨끗하게 빨아 입었으며 각자 법관(法冠)과 법복(法服)을 입고 마치 처음 입교할 때 의식과 같이하였다. 드디어 세 차례에 걸쳐 초학(初學)과 강령주(降靈呪)와 본주문(本呪文)을 외우고 겸해서 축사를 고하였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도를 받드는 제자들이 외람되이 훈도의 반열에 있으면서 전발(傳鉢)의 은혜를 입어 참된 심학(心學)에 귀의해 거의 수련에 이르렀습니다. 경신년 여름에 운수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나 갑자년 봄의 변고는 원통함이 그지없습니다. 무극대도(无極大道)이신 선생 강령의 날에 성심 일편 제자들의 추원(追遠)의 마음으로 지금 좋은 날을 맞이해 도량을 정결히 하고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차려 받들어 상향(尙饗) 상향하옵나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또 갑신년의 큰 성인(聖人)의 강생(降生)의 원인과 경신년의 도를 받은 창성한 운수와 갑자년의 조난의 액운과 미래의 도운(道運)의 형통함을 부연해 설명하였다.
을유년(1885년) 3월. 제세주의 조난 예식을 거행할 때 대신사가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기에서 살아온 지 지금부터 12년이 되었는데 다행히 천사(天師, 최제우를 가리킴)께서 돌보신 큰 덕으로 편안하게 분수를 지키면서 살았다. 지금 또 자취를 감추라는 명을 받들었는데 오래지 않아 장차 화가 닥칠 것이니 제군은 삼가고 삼가라”고 하였다.
같은 해 5월. 대신사가 보은군 장내(帳內, 장안마을)로 옮겼다. 6월에 충청도관찰사 심상훈(沈相薰), 단양군수 최희진(崔喜鎭)과 오(吳, 이름을 잃었다) 등이 교인들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군교(軍校)를 풀어 기찰해 잡으려할 적에 대신사가 이미 알아차리고 김연국을 시켜 가사를 관리하게 하고 장한주(蔣漢柱)만을 데리고 잠시 공주(公州) 마곡(郡麻)에 피신하였다. 그때 강시원(姜時元)・이경교(李敬敎)・김성집(金成集) 세 사람은 이미 잡혔다.
7월. 대신사가 다시 보은으로 돌아왔다. 김연국과 장한주를 데리고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화계동(花溪洞)으로 옮겨서 초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
8월. 대신사가 강시원이 풀려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9월에 다시 상주군(尙州郡) 화령면(化寧面) 전성촌(前城村)에 옮겨가서 살았다. 이보다 앞서 대신사가 떠돌면서 숨어다닐 적에 약간의 가구를 모조리 단양군수 최희진에게 빼앗겨 다만 손을 묶이고 곤궁에 처해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문도인 서인주, 황하일 등이 정성을 다해 주선해서 겨우겨우 지냈다.
11월. 문도인 이치흥(李致興)이 대신사가 겨울이 닥쳤는데도 옷이 얇은 것을 민망하게 여겨 면포 일곱 단을 바쳐서 솜을 넣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병술년(1886년) 봄. 대신사가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살았다. 그때 서인주(徐仁周)・황하일(黃河一)・박준관(朴準寬)・박도일(朴道一)・손천민(孫天民)・이관영(李觀榮)・권병덕(權秉悳)・권병일(權秉一)・박덕현(朴德賢)・서치길(徐致吉)・박준경(朴致敬)・송여길(宋呂吉)・박시요(朴時堯) 등 여러 교인들이 차츰 모여들어 계(戒)를 받고 도(道)를 믿었다.
4월. 대신사가 말하기를 “금년에는 큰 질병이 돌아 생명이 많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통문을 각 포에 보내, 힘써 더욱 치성을 드리고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밤마다 청수를 받들어 경건히 하늘에 기도하라고 하였다.
6월. 나쁜 기운이 과연 크게 돌아 전염병이 미쳤던 곳은 죽은 사람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직 지성으로 축수를 드린 모든 교인들 집에는 편안하게 재앙이 그쳤다. 또 대신사가 살고 있는 이웃 40여 집도 아울러 모두 안도의 복을 받았다. 8월이 되자 바람이 높고 기운이 상쾌해져서 전염병이 점차 사라졌다. 이에 충청, 전라, 경상, 경기 등지의 인사들이 대신사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축수하신 효험있는 예방의 가르침을 듣고 다투어 옷깃을 날리며 온 자들을 손가락으로 셀 수 없었다.
정해년(1887년) 설날. 대신사가 점을 쳐서 한 구절의 시를 얻었는데 이르되 “무극대도작심성(无極大道作心誠) 원통봉하우통통(圓通峰下又通通)”이었다.
같은 달에 대신사의 장남 양봉(陽鳳)이 아내를 두었는데 곧 청주군 율봉(栗峯) 음선장(陰善長)의 둘째 딸이었다.
2월. 대신사의 측실(側室) 김씨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대신사가 신령스런 부적을 쓰자 곧 나았다. 며칠이 지나 병이 다시 도지어 대신사가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알고 다시는 신령스런 부적을 쓰지 않았는데 24일 무렵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예에 따라 함옥, 엽습하여 원통봉(圓通峯)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3월 21일은 곧 대신사의 61세 첫 회갑이었다. 각 포의 교도들이 그 날이 되자 일제히 모여 축복하고 헌수(獻壽)를 올렸는데 매우 성대하게 치렀다.
대신사가 서인주, 손천민과 함께 정선군 유시헌의 집에 가서 장차 칠칠(七七)의 과업을 행하려고 하니, 유시헌이 가로되 “갈래산(葛來山)은 일찍이 대신사가 강단을 설치하고 도를 펴던 곳입니다. 곧바로 이곳에서 수련한다면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겠습니다”라고 하자 대신사가 기뻐해 하면서 허락하였다. 곧바로 갈래산으로 들어가서 공부에 드는 날부터 대신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으로는 물건을 보지 않고 자리를 뜨지 않고 칠칠의 기일을 마쳤다. 기일이 찼을 때 대신사가 하나의 점시(乩詩)를 얻었는데 “뜻하지 않게 4월에 4월이 오니 금사(金士) 옥사(玉士) 또 옥사(玉士)로다. 금일 명일 또 명일이니 무엇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알리오. 날이 가고 달이 오고 또 새날이 오니, 천지 정신이 나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네”라는 것이었다.

주석
최시형이 인소(印所)라는 기구의 책임자여서 소장이란 직책을 쓰고 있다.
사중(四衆) 불교에서 말하는 사부대중. 곧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제자를 뜻한다.
훈련도감의 군사반란. 곧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말한다.
서인주는 서장옥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서인주, 황하일 두 지도자는 훗날 남접의 전봉준, 김개남 등과 손을 잡고 봉기해 관권에 맞서자는 주장을 폈다.
상제를 섬기는 일편단심, 조화가 정해지면 만사를 안다는 뜻. 원 주문을 약가 달리한 것이다.
집강이 기장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면 대정과 중정은 사무를 처리하는 일을 보았다.
불교에서 수제자에게 입던 옷과 발우를 전해주는 것. 최시형이 최제우에게서 전통을 받았다는 뜻이다.
최제우가 1860년 하늘의 명을 받음을 말한다.
최제우의 죽음을 말한다.
최제우의 탄생과 도통을 받음과 죽은 해에는 늘 재계 기도 등 행사를 벌였다.
무극대도로 마음의 정성을 짓고 원통봉 아래에 다시 통하고 통한다의 뜻.
손좌(巽坐) 묘자리의 방향. 동남쪽을 등지고 들어 앉은 자리.
칠칠(七七) 49자로 된 주문.
49일의 재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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