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사가 전에 살고 있던 곳의 가지고 있던 가구는 모조리 김연국(金演局)에게 주고 다시 보은(報恩) 장안의 옛 집으로 와 살면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 이에 각 포의 교도들이 날로 몰려오니 응하여 대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사가 육임소(任所)를 설치케 하고 각 포의 교두(敎頭)들로 하여금 달마다 한 번씩 번갈아 와서 청강하게 하였다. 또 특별히 육임원을 가려 뽑아, 찾아와 뵈옵는 규정을 정하게 하였다. 문도로서 장석(丈席, 어른 자리 곧 해월이 있는 곳) 뵙기를 청하는 자들은 먼저 육임의 인가를 얻은 뒤에 비로소 나아와 뵐 수 있었다. 이로부터 대신사의 모든 권솔에 대한 조정은 도집(都執)에게 전적으로 맡겨졌다.
무자년(1888년) 3월. 대신사가, 그 부인인 손씨가 나이가 많아 점점 쇠약해져서 살림을 맡을 수 없음을 걱정하자 마침내 육임원들이 말을 합해 억지로 간청해서 측실로 밀양 손씨를 들였다. 손병희(孫秉熙)의 누이 동생이다
같은 달 10일. 제세주의 조난기념예식을 맞이해서 대신사가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염려해 와서 참석하는 것을 일절 금지하였다. 다만 육임원과 교두 몇 사람만 예식을 행하게 했는데 대신사가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오래지 않아 경사(京司, 서울에 있는 관사)에서 반드시 얽어 꾸미는 화가 있을 것이다. 원컨대 제군은 서로 왕래하지 말고 각자 조심하라”고 하였다. 문도들이 지시를 받들어 숨어 지냈다. 대신사가 또 통유문을 각 포에 보내 숨어 살면서 수도에 열중하라고 경계하였다.
이듬해 기축년(1889년) 7월. 대신사가 임시로 육임원을 파하고 괴산군(槐山郡) 신양동(新陽洞)에 옮겨와 살면서 교인의 내왕을 모두 금지시켰다. 미리 동학당을 금지시키는 화가 다시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비밀히 서로 경계하게 한 것이다.
10월. 대신사가 서인주(徐仁周), 강한형[姜漢馨, 상주인(尙州人)]과 신정엽[辛正燁, 경성인(京城人)]이 서울에서 잡혀갔다는 소문을 듣고 큰 아들 양봉(陽鳳)과 김연국(金演局), 장한주(蔣漢柱) 등을 거느리고 인제군(獜蹄郡) 김현경(金顯卿)의 집에 옮겨가 살았다. 이에 관예들의 추포가 매우 급박해지자 마침내 간성군(杆城郡) 왕곡리(旺谷里) 김하도(金河圖)의 집에 옮겨가 살았는데 그 집 뒤편 깊숙한 피난처 한 방을 택하여 세 식구가 아침 저녁으로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경인년(1890년), 대신사의 둘째 아들인 봉조(鳳朝)가 태어났다.
7월. 대신사가 김연국과 장자 양봉과 장한주 등을 거느리고 양구(楊口)와 간성(杆城) 등 몇 고을을 두루 유람하고 인제군 남면 성황거리 이명수(李明秀)의 집에 돌아와 머물렀다. 대신사가 새소리를 듣고 “이 또한 천주(天主)를 모시는 소리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잘못 믿으면서 여러 가지를 숭봉하여 그 신이 하나가 아니다. 이를 합해 말하면 한결같이 천지 음양의 기일 뿐이다. 우리 사람들은 다만 사람의 시천주(侍天主)만 알고 오히려 만물의 시천주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점시(乩詩) 한 편을 얻었는데 “수심(守心)을 정성스럽게 하되 혹 게을러지면 사람이 변하는 것이 뽕나무밭과 같도다. 수심(守心)을 공경히 하되 태연하면 산이 푸른 바다를 채울 수 있다. 구악(龜岳)에 봄이 돌아오니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도다. 용이 태양의 구슬을 전하니 궁을(弓乙)이 문명(文明)을 돌이킨다. 운이 열리니 천지가 하나이고, 도가 있으니 물이 하나를 낳았도다. 물은 사해의 하늘에 흐르고, 꽃은 만인의 마음에 피었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대신사가 얻은 점서가 매우 많았지만 그 때 사람들이 아는 이가 드물었는데 그 뒤에 맞아떨어진 것이 많았다.
8월. 교도 장세원(張世遠)과 윤상오(尹相五)가 찾아와 아뢰기를 “서인주(徐仁周)가 지금 비록 보석되더라도 재물이 있어야 살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대신사가 김연국에게 일러 500금을 마련해 보내주게 하였다. 이어 김연국에게 이르기를 “서인주가 비록 풀려났으나 생사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늘 밥을 먹고난 뒤 하늘에 고해 그 목숨을 기도했다. 너 또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로 인해서 관례가 되었다.
11월. 대신사가 경상도 김산군(金山郡) 복호동(伏虎洞) 김창준(金昌駿)의 집에 있으면서 친히 「내수도문(內修道文)」내수도문(內修道文)과 그 세칙을 짓고 언문(諺文)으로 풀어서 널리 각 포에 반포하게 하였다. 대개 부녀자들이 집안을 바로잡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신묘년(1891년) 봄 정월 15일. 대신사가 공주군 신평리(薪坪里) 윤상오(尹相五)의 집에 옮겨 살았다. 달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달 또한 먹고 먹는다”라고 하였다. 문하의 제자들은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묵묵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러 문생들이 천지와 이(理)와 기(氣)
10월. 대신사가 청주군 금성동(金城洞)에 있었다. 꿈에 제세주가 계란 500개를 주었다. 대신사가 두 손으로 받들어 계란을 어루만지면서 까보니 모조리 병아리가 되어 일제히 길게 울었지만 두 개만이 썩어서 부화하지 않았는데, 깨닫고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문도 제자에게 이르기를 “우리 교도 중에 후일 성도(成道)하는 사람이 이 계란과 같은 숫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통유(通諭) 10조를 지어 문도를 권고하고 경계하였다. 첫째는 인륜을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요, 셋째는 생업을 지키는 것이요, 넷째는 일을 처결할 때 지극히 공평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을 서로 돕는 것이요, 여섯째는 남녀를 엄하게 구별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예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요, 여덟째는 연원(淵源)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아홉째는 진리를 익히는 것이요, 열째는 함부로 섞임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 대략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그윽하게 생각하니 천운이 순환해 비로소 5만년 큰 도가 창조되어 세상의 마귀가 모조리 항복하였다. 길이 37자(字)의 신령스런 주문을 믿어 운수에 응해 살아가고 때를 기다려 은둔했다. 대개 도를 알고 도를 닦는 자는 도가 오로지 성경신(誠敬信) 석 자에 달렸고, 하늘을 섬기며 하늘을 받드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시정지(侍定知) 한 마디로 돕는다. 어찌하여 세상이 쇠해져 운수가 어두워지고 도가 희미해져 와언이 일어났는가? 도를 전하는 자는 밝지 못하고 도를 닦는 자는 믿지 못해 혹 망녕된 말과 거짓 주문이 있어 도를 어지럽히고 법을 능멸하기에 이르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편안하게 살 겨를이 없다. 아아, 너희 교도들은 이 10조목에 마음과 힘을 한결같이하여 일상을 살면서 마음을 다해 받들어 따르고 삼가 준수하여 잃지 말기를 바라노라.
이때에 호남(湖南) 교인인 전영조(全永祚)와 김낙철(金洛喆)과 김낙봉(金洛葑)과 김낙삼(金洛三)과 남계천(南啓天) 등이 찾아와 뵙고 큰 도의 운수를 물었다. 대신사가 이르기를 “이때는 동방의 목운(木運)
5월. 대신사가 김연국과 장한주와 장세원, 그리고 장자인 양봉을 거느리고 옥천군(沃川郡)을 거쳐서 호남의 여러 고을을 찾았다. 태인군(泰仁郡) 김낙삼의 집에 이르러 육임첩으로 차출하였다. 또 부안군(扶安郡) 김낙철의 집에 이르러 또 육임첩으로 차출하였다. 다시 전주(全州)의 서영도(徐永道)의 집에 이르러 머물렀다. 이때 호남의 신사(紳士)들이 날마다 문하에 나왔지만 진리를 문답하는 자들이 없었다. 대신사가 개연히 탄식하기를 “도(道)를 아는 자가 드물구나”라고 하고 드디어 스스로 ‘한 기운이 관통하여 마음을 바르는 곳[貫通一氣正心處]’이라는 구절을 짓고 문도로 하여금 알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교인인 윤상오, 남계천 등이 문호를 나누어 세워서 같은 편이면 무리짓고 다르면 쳤기 때문에 호남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각 포 교인의 마음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해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김낙삼이 16포의 교인 100여 명을 거느리고 사를 찾아와서 항변하여 “현재 호남의 좌도 우도의 편의장(便義長) 겸 도접주(都接主)를 비록 남계천(南啓天)으로 차정(差定)했으나 복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연국이 옆에 있다가 큰 소리를 말하기를 “우리 도는 지금 5만년을 천명할 운수를 당하여 어찌 신분의 등급을 매기는 옛 관습을 말하는가? 양반이니 상인이니 따질 것 없이 경을 공부하고, 장석(丈席)이 차정(差定)하면 힘써 분부를 받들어 복종하고 우리 도를 증진하는 데 기약해야 하는 게 제자의 직분이다”라고 하니 김낙삼이 감히 두 말하지 못했으며 여러 교인들이 모두 예예하면서 물러갔다.
12월. 대신사가 충주군(忠州郡) 외서촌(外西村)에 거처를 옮겼다. 이는 신재연(辛在淵)의 주선에 따른 것이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대신사에게 묻기를 “우리 도의 운수가 어느 때에 형통하고 태평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대답하였다. “산이 모두 검게 변하고 길이 모조리 비단으로 깔리고 만국이 통상하는 때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임진년(1892년) 정월. 충청도관찰사인 조병식(趙秉式)이 교인들을 해치려고 하므로 대신사가 그가 중상모략할 것을 걱정해 진천군(鎭川郡) 부창리(扶昌里)로 옮겨가 살았다. 그리고 통문을 각 포의 교도들에게 보냈는데 그 글에 “『동경대전』과 가사는 곧 우리 선사(先師)께서 도를 받은 참된 진리이니 천명을 받고 천리를 공경하는 현묘한 뜻이다. 하물며 또 순순한 가르침이 방책(方冊, 여러 전적)에 소상하게 실려 있으니 그를 받들어야지 혹 다시 어쩌겠는가? 나아가 닦을 절차와 존중하여 간직할 방법에 관계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아래와 같이 나열하노니, 아아, 우리 교인들이 규정을 어기지 말고 힘써 따르고 실행하라”고 하였다.
하나. 교유(敎儒)들이 『동경대전』과 가사를 열람할 때 혹 드러누워 보는 자, 혹 옆으로 누워 외우는 자가 있으며, 혹 허리에 비스듬히 끼우기도 하고, 혹 먼지 낀 책상자 가에 함부로 놓기도 하여 불경이 막심하니 어찌 송구스럽지 않은가? 들으니 각 포의 교도들이 혐의자로 지목이 될까 염려해서 흔적을 숨긴다고 핑계를 대며 혹 땅을 파고 묻기도 하고 혹 멋대로 불태우기도 하고 혹 처마 모퉁이에 꽂아 두기도 한다고 한다. 천주(天主)를 만홀하게 여기고 스승을 모독함을 어찌 참으랴. 『동경대전』과 가사는 다만 접주(接主)의 집에서 정결한 곳에 경건하게 받들고 만일 청강(聽講) 함에 어려운 대목을 물을 것이 있으면 특별히 도포를 입고 몸소 접주의 집에 가서 병풍이나 탁자를 설치해 향을 사르고 네 번 절을 한 뒤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받을 것.
하나. 도유(道儒)의 선비들은 부모에 효도하고 공경하며 부부가 화순함을 위주로 할 것.
하나. 『동경대전』과 가사를, 만일 사사로이 찍거나 마음대로 베껴서 각 교인이 있는 곳에 파는 자는 교의 규칙을 문란케 하는 것이다. 그 사사로이 인쇄해 파는 자와 받는 자는 함께 벌을 줄 것.
하나. 교도들이 서로 싸우는 폐단이 있는데 굳이 그 원인을 찾아보자면 오로지 교권을 잡으려는 데에 있다. 서로 믿어야 할 사이에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리오. 무릇 우리 교도들은 묵은 허물을 참회하고 욕심을 내는 생각을 끊어서 기어코 바름을 지키고 참된 일로 돌아갈 것.
하나. 우리 도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운수요 무극진공(无極眞空)의 도
하나. 하늘을 속이는 자, 이치를 어그러지게 하는 자, 세상을 현혹하게 하는 자, 비루하고 인색한 자,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은 모두 법을 어지럽히고 도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다. 각자 개과천선해 하늘의 견책을 받지 말 것.
하나. 사우(師友) 사이에는 나누어주고 돌보아주는 도리가 있으나 이밖에 특별히 진귀하거나 기이한 물품으로 사사로이 뇌물을 바치는 것은 군자의 도인을 사귀는 상정(常情)이 아니니 한결같이 거절할 것.
하나. 교인 집의 부녀가 혹 천리를 따르지 않고 함부로 어린아이를 때리니 어찌 놀랍고 두렵지 않으리오. 어린애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일절 함부로 때리지 말 것.
이달 25일. 또 통유문을 보내, 어육과 술과 담배, 그리고 사치스런 의복을 금지하였다. 그 글에 “사람은 곧 천인(天人)이요 도가 선사의 무극대도(无極大道)이다. 거기에 하늘을 공경하고 스승을 높이는 도가 있으니 비록 날마다 사용하고 늘 행하는 음식이나 복식(服飾)의 일이라도 감히 터럭만큼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어육과 술 담배는 타고난 성품을 없애고 참 원기를 없어지게 하며, 의복의 사치는 스스로 아름답지 못한 비난을 불러오며 오히려 검소하라는 계율을 어기게 되니, 이를 만약 그대로 둔다면 폐단을 장차 어찌하리오. 옛 경전에 이르기를 ‘성인은 무욕(無慾)이요 군자는 욕심을 막는다’고 하였다. 무릇 우리 교도들 중에 현성(賢聖)의 자태가 있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있을까? 진실로 생이지지(生而知之) 한 성인이 아니면 모두 만들어 이루어야 할 자질이니, 어떻게 기미와 조짐을 막아 위생(衛生)을 돕고 검소한 덕을 성취케 하지 않으랴? 삶을 상하게 하고 도를 해치는 따위 물건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노니 모두들 잘 살펴서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 어육과 술, 담배 네 가지 물품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영(榮)을 조절하고 위를 보양하는 데에는 해만 있고 이익이 없으니 한결같은 예로 엄히 금할 것.
하나. 나막신은 기운을 해칠 염려가 있고 가죽신은 지나치게 사치스런 폐단이 있으니 일절 금지할 것.
하나. 통영갓과 서양 비단과 서양 베와 비단 따위 물품은 일절 금단하고 다만 면포와 마포로 지은 옷을 입고 제량립(濟樑笠)을 쓸 것.
하나. 60세 이상 교인이 비단(명주) 등속을 입는 것과 어린애의 공적인 예복(禮服)은
2월 26일. 대신사가 유시의 글을 내렸는데 “금년 봄 향례(享禮)에는 모여서 예식을 거행하지 말고 각 교인집에서 재계할 곳을 후원 깨끗한 곳에 설치하되 자리를 깔지 말 것이며, 밤마다 해시(亥時 9~11시)에 새 사기그릇을 써서 맑은 물을 담아 받들고 공경하고 정성을 다해 무릎을 꿇고 광제창생(廣濟蒼生)의 큰 서원을 축수하라. 그리고 3월 1일부터 시작하되 만일 사유가 있으면 첫 9일에 시작하라. 또 사유가 있으면 15일에 시작하라. 백일을 기한으로 지성으로 기도하되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29일. 대신사가 또 유시하기를 “당초에 육임을 가려 정할 적에 각 포의 교도 중에서 명망이 있고 행실이 돈독한 사람을 골라, 한편으로는 조제(調濟)의 방법
5월. 대신사가 상주군(尙州郡) 왕실촌(旺實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권병일(權秉一)의 주선이다. 대신사가 문도들에게 이르기를 “주문 13자는 곧 사람이요 먹는 것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