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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10장 교조를 위하여 신원의 송사를 하다[第十章 爲師訟冤]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2년 07월 00일
일러두기

이해 임진년(1892년) 7월에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장세원(張世遠) 등이 선사 제세주 신원(伸寃, 원통함을 풀어줌)의 일을 대신사에게 간청하니 대신사가 “일이 반드시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숨어 살면서 수도하고 시기를 기다리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성이 난 낯빛을 하고 물러갔다.
10월 17일. 대신사가 입의문(立義文, 의리를 세우는 글)을 보냈다.

무릇 종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유교(儒敎)는 처음 5제 3황으로부터 주공(周公) 공자 에 이르기까지 계통을 이어와서 인륜이 위에서 밝고, 교화가 아래에서 행해져서 중국 4천년의 교종(敎宗)이 되었다. 불씨(佛氏)는 인도(印度)의 27조로부터 창시되어 진단(震丹)의 육조(六祖)로 이어져서 자비(慈悲)를 일으키고, 관심 견성(見性) 하여 고해에서 중생을 제도했다. 도교(道敎)는 황제(黃帝) 로부터 시작되어 수련의 법을 가르쳐서 생민이 일찍 죽는 것을 면하게 했다. 오직 우리 청구(靑邱)는 단군 기자 이래 수 천년동안 신성한 가르침과 인현(仁賢)의 교화와 태평성대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말기에 이르러 성스런 도가 무너지고 인심이 꽉 막혀 날로 나쁜 길로 달려감이 도도하여 막을 길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서 우리 선사(先師)를 태어나게 하셔서 삼교(三敎)를 통합해 심인(心印)을 적통으로 바르게 전해 천하에 포덕(布德)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갑자년 봄에 거짓 도를 전했다는 무고를 입어 몸소 순도(殉道, 도를 위해 죽음)를 했으니 명인가, 운인가? 또 임신년(1872년)에 화를 입고 을유년(1885년)에 액운을 만났으며 기축년(1889년)에 잡혀갔는데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자가 몇이며 도망치거나 귀양을 간 사람이 몇인가? 무릇 셋이 생겨나 하나를 섬기는 의리는 곧 우리 교의 큰 강령이다. 지금 우리 대신사가 고난을 만난 지 지금까지 30년이 되었다. 그 문도가 된 자들이 마땅히 정성과 힘을 다해서 빨리 신설(伸雪, 억울함을 풀음)의 방법을 도모해야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서로 거짓말만 하며, 오로지 스승을 높이고 도를 보위하는 의리에는 어두워 망녕되게 조화가 장차 이른다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모든 우리 교인들은 이중 하나만 있어도 결단코 북을 울려 죄를 성토할 것이로다. 깨우치고 두려워하기를 배가하고 더욱 힘써 도를 닦도록 하라.

문도인 서인주・서병학 등이 제세주 신원의 일을 가지고 단자를 충청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에게 올렸고 또 전라도관찰사인 이경직(李畊稙)에게도 올려 임금에게 아뢰어 신원하는 내용의 안을 올리게 했다. 또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 상급관아에서 지시하는 공문)을 보내 고을 수령들이 벌이는 학대와 침탈을 금지해 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금영(錦營, 충청도 감영)에서는 관문을 얻었고, 이어 완영(完營, 전라도 감영)에서 관문을 내려고 할 즈음 교도들이 곧바로 해산하였다. 이 때문에 사문(師門)의 원통함이 펴지지 못했으며 관리의 압박이 전보다 심해졌다. 이보다 앞서 기축년(1889년) 10월 무렵에 신정엽(辛正燁)・서인주(徐仁周)・강한형(姜漢馨)・정현섭(丁顯爕) 등이 잡혀 갔는데 한형, 현섭은 마침내 서울에서 죽음을 당했고 인주, 정엽은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임진년(1892년) 가을 7월에 인주는 보석으로 풀려나서 서병학과 함께 비밀히 결의를 하고, 대신사에게 여쭈어 전라・충청 두 감영에 신원의 글을 올려 제사(題辭)를 얻고서 해산을 하였다. 그런 뒤 인주는 비소(匪所, 비도들이 있는 곳)로 돌아갔고 병학은 몸을 빼서 도망을 쳤다. 이로부터 여러 고을이 합동을 해서 교도들을 잡아들였다.
11월. 이(李)가・노(盧)가・임(林)가 세 사람이 안렴사(按廉使)라 일컫고 임금의 명을 받고 내려와서 위협 공갈로 뇌물을 거두고 토색질하였다. 대신사가 또 유시의 글을 각 포에 내렸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법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니 한 사람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지금 들으니 이가 노가 임가 세 사람이 삼도어사(三道御史, 세 도의 어사 곧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맡은 어사)라 일컫고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내려와서는 몰래 아무개 아무개 따위 잡배들과 결탁하여, 그들에게 교인 중에 조금 재산이 있는 자들에게 가도록 하고, “우리는 동학을 염찰(廉察)하려 내려왔다. 너희들의 성명을 이미 정탐해서 기록해 놓았으니 만약 후한 뇌물을 내면 그만 두겠지만 그러하지 아니하면 서울에 보고해 잡아 올려 보낼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이 똑같은 임금의 분부를 받들었다면 공정하게 염찰하여 임금의 분부를 백성에게 알림이 당연하지만, 어찌해 공무를 핑계대서 사리를 추구하면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끝이 없는가? 동정을 살펴보건대 비록 고을과 감영에 글을 올려 임금에게 알리면 반드시 변명의 길이 있을 것이다. 저네들이 비록 침탈할 꼬투리가 있더라도 각 포의 교도들은 이 유시문을 한결같이 준수하고 따라 일절 푼돈도 주지 말 것.

계사년(1893년) 정월. 문도 서병학 등이 제세주을 신원키 위해 발을 싸매고 달려가서 임금에게 호소하려 하였다. 대신사가 가로되 “시기가 비록 이르진 않았으나 스승을 높이는 길은 마땅히 우리의 정성을 다하는 데 있다”라고 하며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청주군 송산리(松山里) 손성렬(孫星烈)의 집에 정하고 다시 유시의 글을 보냈는데 그 하나는 대략 이러하다.

하수(河水)의 운이 늦게야 맑고 나라의 운수가 어렵도다. 태서(泰西, 서양)의 교(敎)가 바야흐로 치성하고 우리 도(道)의 운수가 쇠약해졌다. 그래서 우리 선사(先師)의 무극의 큰 도가 나아가 세상에 밝게 빛나지 못하고 도리어 처형의 참혹한 화를 입었으니 아픔을 어찌 차마 말하랴! 무릇 우리 사문에 들어온 자들은 비록 밥먹고 숨쉬는 시간이라도 어찌 감히 이 신원의 일을 늦출 것인가? 이에 각 포의 교도들에게 유시의 글을 보내니 일제히 와서 모여 신원을 호소하는 일을 상의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그 둘의 대략은 이러하다

다음, 선사를 신원하는 큰 의리는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고, 귀신에 물어도 의심이 없다. 돌아보건대 이 늙은이가 이미 통유문을 각 포에 보내 속속 앞으로 나오게 하고 뒤를 이어 번개처럼 나아가게 일렀다. 그런데 마침 중도에서 낙상을 하고 게다가 오랜 병이 도져 정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두려워함을 어떻게 말하리오. 아아, 큰 운수가 바야흐로 열려 우리 도가 다시 밝아지고, 중생을 위험의 땅에서 제도하며, 대의가 무너지려 할 적에 붙들었으나 오직 안타까운 사안(事案)을 만나 아직도 시원하게 펴지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문도들이 정성이 부족한 데에서 나왔다. 두 감영의 관문제사(關文題辭)는 생각건대 다 열람(閱覽)하였을 것이고, 복합상소의 거동은 바야흐로 다시 도모하고 있다. 접장으로부터 간절한 유시가 어서 먼저 힘을 내서 재산을 탕진한 자는 실로 불쌍하니 집에서 배회하면서 배부르게 밥을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기를 구하는 자가 어찌 홀로 마음이 편하리오. 반드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서 떠돌지 말게 할 것이며 멀거나 가깝거나 합심해서 방황하지 말게 하라. 이 여망에 부응해서 조석으로 우려하는 마음을 풀어준다면 내 병은 완쾌될 수 있을 것이다. 십분 경계하고 삼가하라.

2월 첫 길일에 서병학이 먼저 서울로 올라갔고 뒤 이어 8일에 김연국(金演局)・손천민(孫天民) 등이 수만의 교도를 거느리고 과거보는 선비로 꾸며서 일제히 서울로 올라갔다. 봉소도소(奉疏都所)를 한성(漢城) 남서(南署)의 남소동(南小洞) 최창한(崔昌漢)의 집으로 정하였다. 서병학이 갑자기 복합상소에 나갈 뜻이 없이 교도들을 군대 옷을 갈아 입혀서 군대와 협조하여 정부의 간사스런 무리를 타도하려한다는 말을 하니, 김연국이 한사코 듣지 않았다. 이에 11일에야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光化門) 밖으로 나아가 엎드렸다. 그 때 상소에 참여한 교인과 상소문의 원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소수(疏首) 박광호(朴光浩), 제소(製疏) 손천민(孫天民), 서사(書寫) 남홍원(南弘源), 교인 대표 박석규(朴錫奎)・임규호(任奎鎬)・박윤서(朴允瑞)・김영조(金永祚)・김낙철(金洛喆)・권병덕(權秉悳)・박원칠(朴元七)・김석도(金錫道)・이문찬(李文瓚) 등 여러 사람이다.

소문의 원본[疏本]

각 도의 유학 신(臣) 박광호(朴光浩) 등이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을 하고, 통천(統天)의 융성한 운수와 조극(肇極)의 돈독한 윤기가 성인을 바르게 하고 의리를 빛나게 했으며 공덕(功德)을 밝고 크게 하셨으며, 요임금의 높음, 순임금의 아름다움이며 우임금의 모훈(謨訓)과 탕임금의 공경이 천명에 응해 기(紀)를 세우고 교화로 신열(神烈)에 이르게 하신 주상전하께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사람이 궁색할 적에는 부모를 부르고 병이 들었을 적에는 천지를 부르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요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지금 전하는 곧 신들의 천지요 부모입니다. 신들은 또한 전하께서 교화하여 길러준 적자(赤子)입니다. 이처럼 답답하고 어려워 안타까이 부르짖는 마당에 외월(猥越)의 죄를 헤아리지 않고 일제히 한 목소리로 달려와 임금님의 지척 아래에서 부르짖는 것이 참망되고 두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와 같은 지극히 원통한 실상이 천지 부모에게 호소를 얻지 못한다면 천지의 사이에 어찌 돌아갈 곳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성스럽고 밝은 제왕과 어질고 착한 재상은 네 문을 열고 네 곳의 소리를 들어 음양을 다스리고, 사철을 따라 천하를 태산같이 안정되게 하며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라 인륜을 밝히고 기강을 세울 따름이었습니다. 근래에 실천하고 도를 행하는 참된 선비가 거의 없어, 장문(章文)을 헛되게 꾸미고 한갓 겉 꾸밈만을 숭상하여 경전을 표절하고, 부박하게 이름을 낚는 선비가 열에 아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비의 습성을 생각건대 덕성을 간직하고 학문을 닦는 것은 없어졌다 할만합니다. 일이 나라의 치적에 관계되니 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저절로 통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천운이 순환해서 가고 돌아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지난 경신년(1860년) 여름 4월에 황천이 몰래 돕고 귀신이 은밀하게 밀어서 경상도 경주의 고(故) 학생(學生) 신(臣) 최제우(崔濟愚)가 비로소 천명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고 포덕(布德)했습니다. 최제우는 곧 병자년 공신(功臣)인 정무공(貞武公) 진립(震立)의 7세손입니다. 도를 행하고 포교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아 위학(僞學)의 이름으로 무고한 비방을 받아 갑자년(1864년) 3월 초 10일에 마침내 영영(嶺營, 경상도 감영) 아래에서 정형(正刑, 법에 규정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당시의 광경은 천지가 참담하고 일월이 빛을 잃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죄과를 범하였다면 법에 있어 마땅히 주륙되어야 하니 어찌 신원을 도모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무함을 입어 이 원만하고 하자가 없는 큰 도가 이처럼 만고 초유의 꾸며낸 횡액을 만났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에, 만약 흠결된 일이 있다면 감히 도학(道學) 두 글자를 말할 수 없고, 또한 감히 신원 등의 말을 거짓으로 임금의 귀에 들려드리겠습니까? 그의 글은 『시경』, 『서경』, 『역경』, 『춘추』이며 그 법은 예악형정(禮樂刑政)이고 그 도는 온량공검, 지인성의충화뿐입니다.
선사(先師) 최제우의 말에 이르기를 “인의예지는 선성(先聖)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오직 우리가 고쳐 정한 것이다”라고 했고 또 “부자(夫子, 공자)의 도를 깨우침은 한 가지 이치로 정해진 바요 우리 도를 논할 것 같으면 큰 것은 같으나 작은 것이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이 다르다고 말한 것은 이상한 별건(別件)의 일이 아닙니다. 성(誠)과 경(敬)과 신(信) 세 단서로서 천지를 받들어 모시어 일마다 반드시 고하기를 부모를 섬기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단의 도리는 실로 옛날 성인이 밝히지 못한 일로 선사께서 처음 창시한 종지(宗旨)입니다. 대개 그 종지는 하늘을 부모처럼 섬기며 유불선(儒佛仙) 3교의 통일의 이치를 겸하였기 때문에 “작게는 다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겸유(兼有)의 원인을 규명하면 삭발을 하고 먹물 옷을 입고 멀리 떠나 돌보지 않으며 임금과 어버이를 배반함이 아닙니다. 다만 불교・선교 두 교의 자비와 수련(修煉)이 서로 합해지는 이치이지 실로 공부자(孔夫子)의 광명정대한 도의 본체에 흠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무릇 동학(東學)이라 한 것은 그 학명(學名)이 본디 동학이 아니요 그것이 하늘에서 출발했고 동(東)에서 창시되었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잘못 서학(西學, 천주교)이라 배척하고 멸시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선사 신 제우는 문도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누어지는데 서쪽을 어찌 동쪽이라 이르며 동쪽을 어찌 서쪽이라 이르겠습니까? 공자는 노나라에 태어나서 추나라에서 교화를 하여 추로(鄒魯)의 풍이 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우리 도는 여기에서 받고 여기에서 폈으니 어찌 서쪽 이름으로 쓰겠습니까? 그런 즉 서학으로 배척하는 것이 부당하며 동학으로 내치는 것도 부당합니다. 그런데도 감영과 고을에서는 잡아들이고 죽이기를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무릇 수심정기(守心正氣)와 경천순인(敬天順人)은 각각 그 자질에 따라 성자(聖者)는 성(聖)으로, 현자(賢者)는 현(賢)이 되는 것이니 부자의 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작게 다름을 두고 이단으로 지목합니까? 대저 이 도는 마음을 화평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마음이 화평하면 기(氣)가 화평하고 기가 화평해지면 형체가 화평해지며 형체가 화평해지면 천심(天心)이 바르고 인도(人道)가 세워집니다. 진실로 이와 같으니 곧 선사인 신 제우가 처음 옛날 성인이 밝혀내지 못한 큰 도를 어리석은 지어미와 어리석은 지아비라도 모두들 천리의 근원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동학이라고만 이름하겠습니까? 실로 천하의 무극대도(无極大道)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말로 임금께 거짓 아뢰어 위로는 기망(欺罔)의 죄를 짊어지고 아래로는 외설(猥褻)의 죽음을 불러오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교화로 길러준 적자를 긍휼(矜恤)하게 여기시어 신들의 스승의 원통함을 쾌히 풀어주소서. 이어 종전에 유배된 교도를 용서해 주시어 덕음(德音)을 크게 펴고 화해의 기운을 인도해 맞게 하소서. 신들이 황공함으로 끝없이 눈물과 피를 삼키고 뿌리면서 간절하게 비옵니다.

13일. 사알(司謁)이 구전으로 된 비답을 내리기를 “너희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편안히 종사한다면 원하는대로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사방의 교도들이 차례대로 귀향하였다.
그때 서인주, 서병학 등이 시세를 타고 세력을 믿고서 기어코 정부에서 세력 잡은 자들을 깨부시려고 개혁을 실행하려 하였다. 이에 포도청 대장 신정희(申正熙)가 경찰을 교인이 머무는 숙소에 많이 보내 엄밀하게 조사를 하였다. 대신사와 두 서씨는 논의가 합해지지 않았지만 드디어 결의한 대로 글을 올리고 엎드리기로 하니 비로소 안정되어 별일이 없었다.
대신사가 드디어 유시의 글을 여러 문생에게 보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이번 상소를 올린 거동은 실로 생삼사일(生三事一)의 뜻에서 나왔다. 우리 모두는 혈기가 있고 이성을 가진 자들이니 어느 누가 광명정대하다 하지 않으리오. 드디어 대궐문 앞에서 울부짖은 사흘째에 특별히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는 뜻을 삼가 사알(司謁)의 구전 비답(批答)을 받았다. 이에 성은이 망극하니 어찌 갚으리오. 밤중에 벽을 마주하고 깊이 전전긍긍했다. 지난 번 두세 사람의 잘못된 의논으로 거의 헤아릴 수 없는 데에 빠질뻔 했는데 천심이 화를 뉘우치셔서 다행히 아무 탈이 없었으니 어찌 임금이 돌보아주심이 아니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죄가 없어도 죄진 것처럼 하라는 임금의 가르침에 복종해서 묵은 허물을 참회하고 착한 일을 힘써 닦는다면, 무극대도(无極大道)와 무위화기(無爲化氣)가 자연의 묘리에 이르게 될 것이며, 번거로운 거친 말에 빠지지 말고 각자 바름을 지키는 진리를 닦는다면, 다시는 재앙의 싹이 이르지 않을 것이다.

3월 10일. 대신사가 제세주의 조난예식을 청산군(靑山郡) 포전리(浦田里)에 있는 김연국(金演局)의 집에서 거행하였다. 그때 손병희(孫秉熙)・이관영(李觀永)・권재조(權在朝)・권병덕(權秉悳)・임정재(任貞宰)・이원팔(李元八)이 대신사와 매우 가까이 할 수 있는 대열에 들었다. 이날 밤 여러 문도들이 나와 고하기를 “벼슬아치들의 공갈 협박이 더욱 자심합니다. 각 포의 교인들이 장차 깡그리 죽은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애닯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어떻게 지탱해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우리 광명정대의 무극대도로써 어찌 밝음을 판별할 방법이 없겠는가? 앞으로 보은 장내로 갈 것이다. 제군은 모름지기 유시문을 각 포에 통지해 팔도 교도들을 일제히 와서 모이게 하라”고 대답하였다. 그 글은 대략 이러하다.

무릇 우리 도는 음양으로써 하늘을 본받고 인의로써 사람을 세운다. 하늘과 사람이 덕을 합해 무위(無爲)로서 기화(氣化)하니 곧 사람의 자식이 된 자는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길 것이요, 사람의 신하가 된 자는 목숨을 다해 임금을 섬기는 게 떳떳한 큰 윤리이다. 우리 동방은 단군 기자 이래 예의의 나라로 천하에 소문이 났다. 하지만 말세에 와서는 안으로는 바른 정치가 드러나지 않고, 밖으로는 침략의 형세가 더욱 퍼졌다. 벼슬아치들은 포악하고 사나워 멋대로 위복(威福)을 행하며 강한 토호들은 능멸하고 토색질하기를 끝간데 없이 하며 학문은 지리멸렬해 각기 문호를 세우며, 민정(民情)은 퇴영과 위축으로 맞서 버틸 수 없으니 그 박상(剝床)의 재앙과 도랑을 덮을 화가 조석으로 다가오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깨닫지 못한다. 이는 진실로 뜻이 있는 자들이 근심을 숨기고 길이 탄식하는 바이다. 우리들은 모두 사문(師門)께서 화를 입은 나머지의 생명이요, 조종(祖宗)이 배양하신 유민으로 사(師)의 원통함을 펴지 못하여,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면서 다만 조화가 장차 이르고 시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큰 자비를 드리우고 크게 은택을 펴서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 소원에 부응하겠다 했다. 그런데도 어찌 이 자목(字牧)의 벼슬아치들은 임금이 베푼 은혜를 펼 생각을 하지 않고, 백방으로 침탈하기를 전보다 심하게 하는가? 모조리 문드러져 망하게 해서 반드시 성명(性命)을 희생하게 한 뒤에야 그치려 하는가. 비록 편안히 살면서 생업에 즐겨 종사하려 하지만 어찌 얻을 수 있으랴. 생각다 못해 장차 큰 소리로 다시 부르짖고 소장을 내서 원통함을 호소하려 한다. 이와 같이 널리 알리니 각 포의 교도들은 이에 일제히 모여라. 한편으로는 도를 보위하고 스승을 높이며, 한편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이 될 것이니 이것이 절실하고 간절한 소망이다.

이튿날 대신사가 보은 장안에 이르자 각 포의 교도들이 바람이 불고 조수가 밀려오며 구름이 몰려오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듯이 서로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각기 장대를 내걸어 깃발로 삼았고 돌무더기를 모아 성채를 만들었으며 읍양하고 진퇴함에 위의(威儀)가 바로 섰으며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움에 화기가 잘 어울렸다. 이에 대신사가 명령하여 각 포의 대접주(大接主)를 임명하고 포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충경(忠慶) 대접주 임규호(任奎鎬), 청의(淸義) 대접주 손천민(孫天民), 충의(忠義) 대접주 손병희(孫秉熙), 문청(文淸) 대접주 임정재(任貞宰), 옥의(沃義) 대접주 박석규(朴錫奎), 관동(關東) 대접주 이원팔(李元八), 호남대접주 남계천(南啓天), 상공(尙公) 대접주 이관영(李觀永) 등이었다. 그리고 묘당(廟堂, 의정부의 별칭)에 건백(建白)해서, 기어코 선사(先師)의 원통함을 풀려고 열흘이 넘도록 해산하지 않았다.
이때 충청병사(忠淸兵使) 홍계훈(洪啓薰)은 병사를 거느리고 보은군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선유사(宣諭使) 어윤중(魚允中)은 칙서를 받들고 내려와서 비밀스럽게 교인의 동정을 살폈다. 손에는 작은 무기도 들지 않았으나, 굳은 한 마음은 스승을 억울함을 씻는 것 뿐 이었다. 어윤중이 드디어 사실에 근거해 계문(啓聞, 임금에게 알림)하니 묘당에서는 다시 어윤중을 위유사(慰諭使)로 삼았다. 이에 4월 2일, 어윤중이 임금의 말씀을 받들고 내려와서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을 시켜 임금의 교지를 낭독하게 하였다. 이를 들은 많은 교도들은 일시에 눈물을 뿌리면서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였다. 3일이 지난 뒤 각 교도들은 대신사의 지시를 받들고 해산해 돌아갔다.
대신사가 김연국과 함께 칠곡군(柒谷郡) 율림리(栗林里) 곽우원(郭佑源)의 집에 가서 여러 달 묵었다.
7월. 대신사가 인동(仁同)・김산(金山)・황간(黃澗) 등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8월에는 권솔을 이끌고 청산군(靑山郡) 문암리(文巖里) 김성원(金聖元)의 집으로 옮겼다.
10월 11일. 대신사의 맏아들인 양봉(陽鳳)이 죽으니, 문도들이 위로하였다. 대신사가 이르기를 “지극한 정리 상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비록 순리의 일은 아니지만 하늘의 명이니 어찌하리오”라고 하고 용모와 행동이 평상시처럼 편안했다.
이때 교문(敎門)이 크게 열려 장석(丈席, 최시형)을 법소(法所)라 일컫고 또 법헌(法軒)이라고도 일컬었다. 김연국(金演局)은 포소(包所)를 문암(文巖)에 정하고, 손병희(孫秉熙)와 이용구(李容九)는 포소를 충주군(忠州郡) 외서촌(外西村) 황산리(黃山里)에 정하고, 손천민(孫天民)은 포소를 청주군(淸州郡) 송산리(松山里)에 정했으며, 그 밖에 옥천에 박석규(朴錫奎), 보은에 임규호(任奎鎬), 예산(禮山)에 박희인(朴熙寅), 문의(文義)에 임정재(任貞宰), 청산(靑山)에 박원칠(朴元七), 부안(扶安)에 김낙철(金洛喆), 무장(茂長)에 손화중(孫華仲), 남원(南原)에 김개남(金開南), 청풍(淸風)에 성두환(成斗煥), 홍천(洪川)에 차기석(車基錫), 인제(獜蹄)에 김치운(金致雲) 등을 정했으며 각자 해당 군의 조직인 본포(本包)에는 특별히 도소(都所)를 두었다. 전봉준(全琫準)은 교도를 모아들여 전라도(全羅道) 금구군(金溝郡) 원평(院坪)에 머물렀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남정동(南井洞)에 사는 김봉규(金鳳奎)가 기어코 교인들을 해치려고 감영에 밀고를 해서 교도들을 이리저리 얽어 잡아들이고 재산을 마구 빼앗았다. 이에 이용구가 교도들 수 천 명을 이천군에 모아서 빼앗긴 재산을 도로 찾아오고 붙잡혀 있는 교인들을 풀어주었다. 경기감사와 이천군수가 사람을 놓아 주선을 해서 비로소 서로 타결을 보아 해산하였다.
이 때 전봉준과 김개남은 호남지방에서 교도의 무리를 거느리고 혹 모이기도 하고 혹 흩어지기도 하였다. 교인들의 집회는 임진년(1892년) 7월에 시작해서 갑오년(1894년)에 까지 이어졌다.

〈번역 : 이이화〉

주석
유교에서 말하는 선성(先聖)으로 복희, 신농, 황제, 그리고 요순 등 고대 제왕과 유교를 일으킨 주공(周公) 공자(孔子)를 말한다.
석가 여래 이후 불교 계통을 이은 27의 조사(祖師),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육조대사로 이어짐. 진단(震丹)은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심(觀心)은 자기 마음의 본 성품을 관조하는 것, 견성은 정각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중국 고대 제왕인 황제를 도가의 원조로 본다.
도가에서는 수명을 연장해 신선이 되는 수련법을 가르치는데 단전호흡 또는 약물복용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청구(靑邱) 푸른 언덕이란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과 인증(印證). 언어 문자로 말할 수 없는 심지(心地) 임.
마을이나 모임에서 불효나 불경을 저질렀을 때 북을 짊어지고 마을을 돌면서 자기 죄를 알리는 것. 이런 의식에 따라 죄를 성토함을 말한다.
백성들이 관아에 소청을 내면 관아에서 이의 회답을 주는 것.
서병학은 처음에는 최제우 신원의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강경파였으나 그 뒤 종적을 감추었다. 훗날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을 때 관가의 인도자로 동학도 색출에 앞장선 변절자가 되었다. 그 뒤 낮은 벼슬을 받았다.
안렴사(按廉使) 조선시대 지방장관. 여기에서 사실을 조사하려 임금이 보낸 사자를 말하는 것 같다.
봉소도소(奉疏都所) 상소문을 낼 적에는 소문을 짓고 서명을 하는 등 여러 절차를 진행시키기 위해 임시 사무소를 내는데 이 일을 말함. 연명으로 할 적에 활용된다.
중국의 황하는 늘 흙탕물인데 언제 맑아질 것이며 하늘이 준 나라의 운수는 많이 어렵다는 뜻. 당시 조선의 처지를 뜻한 것이다.
관문제사(關文題辭) 교도들이 제출한 소장에 대해 감영에서 어떻게 조치했다는 사실을 적은 판결이나 지령.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에는 백성된 사람은 누구나 신(臣)이란 글자를 써야하며 ‘학생(學生)’은 죽은 이의 신분을 나타내는 관용어이다.
최진립은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참여해 죽어서 정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국가 공신임을 드러낸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맹자는 추나라에서 태어나서 유학을 폈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에서는 공자가 추나라에서 교풍을 일으켰다고 기재하고 있다.
사알(司謁)은 임금의 분부를 전달하는 일을 맡아보던 잡직, 비답(批答)은 임금의 회답이다.
원문은 ‘생삼사일(生三事一)’로 나오는데 ‘생삼사칠(生三四七)’의 오기로 보임. 사람이 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 곧 ‘죽기 살기’의 뜻이 담겨있다.
원문의 여죄(如罪)는 여죄(餘罪)의 오기인 듯함. 곧 주되는 죄 밖의 다른 죄.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달리 표현한 것. 곧 ‘억지로 함이 없이 기로 화하게 한다’라는 뜻.
박상(剝床) 벗겨서 없어짐. 백성을 모질게 학대함을 뜻함.
자목(字牧) 수령을 일컫는 말. 수령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字)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
이 무렵 동학조직으로 접주를 거느리는 대접주제를 실시했다. 전국에 걸쳐 조직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했는데 위의 보인 대접주 담당 표시는 지역 단위만이 아니라는 인적 단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교주인 최시형을 장석(丈席)이라 불렀는데 1893년부터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법소(法所)라 호칭하고 법헌(法軒)을 호처럼 사용해 인장(印章) 등에 사용했다.
북접의 강경파인 서인주와 황하일과 연계된 남접의 전봉준, 김개남 등은 봉기를 주장했으나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일단 해산하고 그 근거지를 원평에 두었다
두 지도자는 무장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본격적 봉기준비를 서둘렀는데 『뮤텔문서』에는 첩자를 보은에 보내 북접의 동정을 살피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는 문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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