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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11장 갑오년의 교액[第十一章 甲午敎厄]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01월 05일
일러두기

갑오년(甲午年) 명치(明治) 26년, 서기 1893년, 이조개국(李朝開國) 503년. 정월 5일. 대신사가 강석(講席)을 문암(文巖)에다 열었다. 이때에 전봉준(全琫準)은 호남(湖南) 고부군(古阜郡) 경내(境內)에 포고문(布告文)을 발표하고 군민(郡民) 약 5,000명을 본군(本郡) 말목장터[馬項市]에 집결시켰다. 당시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탐욕스럽게 불법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계속 빼앗아 그칠 줄 몰랐다. 전봉준은 자기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통탄하고 세상 운세가 쇠체(衰替) 된 것을 개탄하며 이에 낡은 정치를 새롭게 개혁하고 좋지 않은 세상을 구제할 계책에 대해 절규하였다.
16일. 전봉준은 여러 교인을 거느리고 백산(白山,) 으로 주재하는 자리를 옮겼다.
17일. 무장접주(茂長接主) 손화중(孫華仲)이 교도(敎徒) 수천 명을 거느리고 태인(泰仁)과 부안(扶安) 등지를 순회하면서 뼈에 사무치는 군(郡)의 폐막(弊瘼)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서 수탈해 간 것을 도로 찾아왔으므로 이르는 곳 모두가 환영하였다.
이에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김문현(金文鉉)은 난후통장(攔後統將) 이재한(李在漢)과 전(前) 사천군수(泗川郡守) 송봉호(宋鳳浩) 등으로 하여금 포군(砲軍) 2,000명과 부상(負商) 1,000명을 거느리고 4월 7일에 황토현(黃土峴,)에서 접전하게 하였는데, 관군(官軍)이 패전하여 사상자가 1,000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10일. 전봉준이 여러 교도를 거느리고 정읍군(井邑郡)과 함평군(咸平郡) 등을 거쳐 장성군(長城郡)에 이르렀는데, 따르는 자가 날마다 많아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으므로 군오(軍伍)를 편성하고 그대로 장성에 주재하였다. 그 진법(陣法)은 삼삼오오(三三五五)로 하늘에 가득한 별의 형상을 이루었고, 기치(旗幟)는 청색, 흑색, 백색, 황색, 홍색의 다섯 색깔을 사용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포(砲)와 마필을 거둬들이고 대나무를 깎아 창(槍)을 만들었으며, 또한 바랑을 제작하여 각각 어깨에 메었다.
전봉준은 흰 갓을 쓰고 흰 옷을 입었으며(부친상을 표시함), 키는 7척이 채 되지 않았는데, 손에는 백오염주(百五念珠)를 걸고 입으로는 삼칠(三七) 주문을 외웠다. 각 포사(砲士)들은 ‘궁을(弓乙)’궁을(弓乙) 두 글자를 어깨에 붙이고 몸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 네 글자를 두르게 하였고, 깃발 앞면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란 글귀를 크게 써서 세우게 하니, 참으로 전무후무하고 변화불측한 훌륭한 장수와 병사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군의 인심이 마치 바람이 일 듯 경모하여 따라붙었다. 한편으로는 도(道)를 강설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훈련시키니, 그 형세가 점차 확장되어 전국이 들끓었고, 마침내는 동아세아의 풍운(風雲, 戰雲)을 야기시켰다.
이 때에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강화(江華)의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밤에 남하하여 월평(月坪) 황룡시가(黃龍市街), 에서 〈농민군과〉 교전하였다. 관군(官軍)은 대적할 수 없어 30리를 후퇴하였고 대포(大砲) 3문(三門)을 빼앗겼다. 홍계훈은 도로 영광군(靈光郡)에 들어가 성벽(城壁)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이 달 28일, 전봉준이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감영에 돌입하니, 관찰사(觀察使) 김문현(金文鉉)과 통판(通判) 민영직(閔泳稷)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전봉준은 전주성에 들어간 뒤에 4문(四門)을 굳게 지키고 관창(官倉)의 곡식을 꺼내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며 각각 안도하도록 타이르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3일을 지나 그믐에 홍계훈이 갑절이나 길을 빨리하여 뒤 쫓아와 완주(完州) 진산(鎭山)의 정상에 자리 잡고, 육박하여 성을 에워싸며 7일 동안 교전하였으나 끝내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노포(露布)가 오가고 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전봉준이 백성들의 고충을 구제할 수십 조목을 열거하니, 홍계훈이 다 읽어보고 나서, “똑같이 우리 성상(聖上)의 적자(赤子)인데, 형제간에 창을 들고 서로 죽이는 것은 천리를 어기는 일이다. 교주가 진술한 여러 조목들은 응당 상주하여 실시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5월 8일. 홍계훈은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갔고, 전봉준도 무리들을 거느리고 도로 장성군(長城郡) 북쪽의 백양산(白羊山, 장성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음)으로 향하였다.
이에 앞서 전봉준이 호남(湖南)에서 일어났을 때에 대신사가 글을 보내서 경계하기를, “작고한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은 효(孝)요,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려 하는 것은 인(仁)이다. 효(孝)가 감동되는 곳에는 인륜(人倫)이 밝아질 수 있고, 인(仁)이 미루어가는 곳에는 인권(人權)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동경대전(東經大全)』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현기(玄機)가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음을 조급하게 쓰지 말라’고. 이것이 바로 선사(先師)의 유훈(遺訓)이니 운수가 아직 열리지 않고, 때가 또한 이르지 않았으니, 망동(妄動)하지 말고 더욱 진리를 궁구하여 천명을 어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각처의 교도(敎徒)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외치며 앞 다투어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대신사는 그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나쁜 쪽으로 지향해가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결국 도금찰(都禁察)을 별도로 보내서 각포(各包)를 단속하였다. 글을 지어 통유(通諭)하였으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불초인(不肖人)이 외람되이 선사(先師)께서 의발(衣鉢)을 전해주신 은혜를 받았지만 능히 사도(斯道)는 선양하지 못하고 이 세상 사람들의 지목만 심하게 입어 여러 번 화망(禍網)에 걸려 몸을 황량한 골짜기로 피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지능(知能)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시(天時)를 기다리려 꾹 참고 여기에 이르렀다. 근래에 들으니, ‘교도(敎徒)들이 본분(本分)을 편안히 여기지 않고 정업(正業)을 힘쓰지 않은 채, 각각 당여(黨與)를 수립하여 서로 성원을 하고 심지어는 예전에 흘겨보던 원수를 보복하기까지 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아래로는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지게 한다’고 한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후를 통하여 포유(布諭)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만일 마음을 고쳐먹고 조용히 앉아 수도(修道)하지 못하고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서로 구제하기를 꺼린다면 이것은 하늘을 거역하고 사(師)를 배반하는 행위이다. 단연코 북을 울려 성토하고 녹명안(錄名案)에서 빼어버릴 것이니, 모두들 이렇게 알고 법규를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옳다.

대신사는 각 포(包)에 명하여, 도접주(都接主)는 도강장(都講長)을 겸하고, 부접주(副接主)는 부강장(副講長)을 겸하여, 매월 한 차례씩 『동경대전(東經大全)』과 가사(歌詞)를 개강하고 의심이 나는 곳과 문답을 펼쳐야 할 구절 말씀은 부강장이 수합하여 도강장에게 보고하고, 도강장은 법소(法所)에 보고하게 하며, 또한 사계월(四季月)에 각 포의 도강장은 상호간 회강(會講)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전봉준이 일으킨 난을 걱정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한 청국(淸國)의 총리사(總理事) 원세개(袁世凱)와 협상해서, 그로 하여금 천진(天津)에 주재한 직예총독(直隸總督) 이홍장(李鴻章)에게 파병해줄 것을 청하게 하였다. 일본이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있다’고 하면서 또한 파병해 먼저 왔다. 그래서 결국 일청전쟁(日淸戰爭)이 있기에 이르렀다.
19일. 전봉준이 무리를 거느리고 담양군(潭陽郡)에 이르자, 청국(淸國)의 장관(將官)이 막비(幕裨) 유영경(劉永慶)을 파견해서 서로 만나기를 청하고 군대를 해산하도록 회유하였지만, 전봉준은 응하지 않고 마침내 순창군(淳昌郡)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때에 일본 시찰원(視察員)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 15인이 면회를 요청하고 금시표(金時表) 1매(枚)와 마노(碼瑙) 1과(顆)를 주며 이것으로 신표를 삼을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서로 만나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전봉준은 드디어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띄우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뜻으로 깨우쳤다. 이에 김개남(金開南)은 남원(南原)에서 일어나고, 이유형(李裕馨)은 호서(湖西)에서 일어나고, 손화중(孫華仲)은 무장(茂長)에서 일어나고, 김덕명(金德明)은 금구(金溝)에서 일어나고, 최경선(崔景善)은 태인(泰仁)에서 일어나고, 차치구(車致九)는 정읍(井邑)에서 일어나고, 정진구(鄭進九)는 고창(高敞)에서 일어나서 전봉준과 서로 연합하고 전주(全州)를 중심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일에 토호(土豪)가 백성들의 산에 늑장(勒葬)한 것은 파서 옮기게 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은 돌려주게 하고, 또 수령(守令)이 부민(富民)들을 곤장 쳐서 가두어놓고 멋대로 재물을 갈취하는 것은 즉시 풀어주게 하고, 양반이 양민을 억압하여 천민으로 만든 자들은 풀어주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 평민을 조례(皁隷)로 보던 것을 평등하게 하였고, 근 100년 동안 압제(壓制)해온 나쁜 정치와 못된 풍속을 한결같이 개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옥송(獄訟)을 제기하는 사람은 관청으로 가지 않고 반드시 교인회소(敎人會所)로 와서 호소하였다. 민심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해서 막을 수가 없었다.
이때 정계(政界)의 풍조(風潮)가 완전히 변하였다. 전에 있던 3상(三相)과 6조(六曹)를 10부(十部)로 고치고 옛적에 물들어 오염된 풍속을 모두 새롭게 하니, 모든 사람들이 도리어 의구심을 품어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였다. 혹은 몰래 밀사(密使)를 보내 선동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스스로 비관하여 원망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이단(異端)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는 경우도 있고, 혹은 외국의 문물・사상 같은 것을 배척한다고 칭하여 탄압하려는 경우도 있었으니, 커다란 문제들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같은 해 8월에 대신사는 교인들이 규법을 준수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싸움을 일으키는 것을 걱정하고, 또 글을 지어서 아래와 같이 깨우쳤다.

하늘이 큰 운수를 내리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는 것은 대개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며, 어두운 곳을 버리고 깨달을 곳으로 나아가 더욱 정진(精進)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교(敎)를 빙자하고 풍속을 능멸하는 등 불법을 많이 자행하니, 이것이 어찌 정도를 지키는 소행인가? 심지어는 말류의 폐단이 도(道)가 도(道)를 해쳐서 막을래야 막을 수 없고, 강한 포(包)의 위협을 약한 포(包)가 지탱하기 어려우며, 패류(悖類)의 방자한 생동으로 선류(善類)가 보존하기 어렵다. 아! 도(道)를 아는 자의 소행이 도리어 도(道)를 모르는 자만 못하니, 탄식을 참을 수 있겠는가? 추(鄒)나라 맹씨(孟氏, 孟子)가 말씀하기를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이 미워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은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으니, 금수와 다를 것이 거의 없다. 우리들은 30년 동안 혹독한 형벌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겨우 큰 재앙에서 벗어났는데, 호월(胡越)이 오순도순 한 집에 동거하는 것은 보지를 못하고, 결국은 형제가 서로 팔을 비트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경훈(經訓)』에 이른바 ‘직접 만나지 못한 탓이요. 사람이 많은 까닭이다’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면전에서 타이르고 서찰로 경계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건만, 그냥 버려두고 무시하여 휴지를 만들어버렸으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사문(師門)께서 의발(衣鉢)을 전해주신 은혜를 갚고자 신도들끼리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부승(負乘)한 재변을 참을 수 없다. 이에 11조목을 정하여 특별히 각 포(包)에 알리니,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이라 폐기하지 말고 영원히 금석 같은 전법으로 삼아 한결같이 준수하라. 내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다.
하나. 각 포(包)의 사무는 한결같이 해당 주사(主司)와 별임(別任)이 지위(知委)하는 것을 따르도록 할 것.
하나. 몸을 닦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집에 있으면서 일을 할 때에는 단지 경농하고 독서하는 것만을 힘쓸 것.
하나. 남의 무덤을 강제로 파거나 남의 돈이나 재물을 강탈하는 자는 보는 즉시 관에 고발하여 그 죄를 처단하게 할 것.
하나. 각 포(包)의 교도(敎徒) 중에 당(黨)과 세력을 믿고 갚아야 할 재물을 갚지 않거나, 도리어 차지해서는 안 될 재물을 구하는 자가 있을 경우는 엄하게 징벌을 행할 것.
하나. 누구를 막론하고 오래된 채장(債帳)이든 오래되지 않은 채장(債帳)이든 일체 간섭하지 말 것.
하나. 다른 포(包)의 교도가 혹 강제로 침탈하는 폐단이 있으면 이름을 밝혀서 법소(法所)에 빨리 알릴 것.
하나. 본포(本包)의 교도로서 법소(法所)와 포덕소(布德所)의 문빙(文憑)을 휴대하지 않고 마음대로 무리를 모은 자는 즉시 명단[記名案]에서 제명할 것.
하나. 무리한 일을 가지고 서로 힐책하고 구타하는 자는 동문교우(同門敎友)로 대우할 수 없으니, 북을 울려 성토하고 각 포에 돌려 보일 것.
하나. 술주정을 하고 도박을 하고 재물을 편취하는 것은 교인의 행위가 결코 아니니 만일 타일러도 따르지 않는 자는 영원히 명단에서 제명할 것.
하나. 관령(官令)에 복종하기를 힘써서 공세(公稅)를 제때에 납입함으로써 영읍(營邑)에 죄를 짓지 말것.
하나. 각 포의 사무는 크든 작든 막론하고 한결같이 법소(法所)와 포덕소(布德所)의 지시를 따라 경건하게 봉행할 것.

9월. 대신사는 남접(南接)의 각 포가 선동하여 화(禍)를 부르는 것을 걱정하여, 친히 통유문(通諭文)을 지어 각 포에 돌려보였으니, 그 통유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교(敎)는 남접(南接), 북접(北接) 그 어떤 포(包)를 막론하고 똑같이 용담(龍潭)이 연원이니 도(道)를 보위하고 사(師)를 존숭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남접의 각 포들이 의거(義擧)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탈하고 교인을 상해하는 일을 끝없이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일찍 단절하지 않는다면 향내 나는 풀과 누린내 나는 풀을 분변할 수 없어, 옥과 돌이 함께 타고야 말 것이다. 오직 원하건대, 팔역(八域)의 각 포 교우들은 이 통유문이 이름과 동시에 분발하고 깊이 생각하여 태도와 마음을 고쳐서 한결같이 각 해당 교두(敎頭)의 지위(知委)와 단속을 따르고 터럭만큼도 교규(敎規)를 어기지 말며, 마음과 힘을 합하여 사(師)의 원한을 씻어줄 것을 도모하기 바란다.

18일. 이 달 18일에 대신사가 교도들의 참살 보고를 듣고 장차 천폐(天陛)에 원한을 호소하여 사(師)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산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려고 각 포(包)의 교두(敎頭)들을 소집하였더니, 이에 청산(靑山)의 장석(丈席)에 모여든 각처의 교도(敎徒)가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 초유문(招諭文)은 아래와 같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시작되고 ‘지극하다. 곤(坤)의 원(元)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었다. 아버님은 낳으시고 사(師)는 가르치시고 임금님은 길러주시니,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리에 있어 ‘세 군데서 생장하였어도 하나같이 섬겨야 한다(生三事一)’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선사(先師)께서는 지난 경신년(庚申年)에 천명(天命)을 받아 도(道)를 창설해서 이미 무너진 강상(綱常)을 밝히고, 이미 도탄에 빠진 생령(生靈)을 구제하려고 하시다가, 도리어 위학(僞學)으로 지목 받아 재난을 당하여 하늘나라로 돌아가셨건만, 아직까지 원통함을 풀지 못한 지 지금 31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하늘이 우리의 도를 상하게 하지 않아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니, 전국의 교도(敎徒)가 몇 10만 명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은(四恩)의 보답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육적(六賊)의 욕망만을 일삼으며, 척화(斥和)를 빙자하여 도리어 창궐(猖獗)하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늙은이는 나이가 7순에 육박하여 기식(氣息)이 곧 끊어지려고 하는데, 아득히 의발(衣鉢)을 전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생각다 못해 이에 또 통유문을 띄우니, 여러 교우(敎友)들은 이 늙은이의 진솔한 마음을 헤아리고 빠른 기일에 회집하여 정성을 다해서 황제폐하께 크게 호소하여 선사의 숙원(宿怨)을 상쾌하게 풀어드리고 다함께 나라의 급난(急難)에 달려가기를 천번 만번 바란다.

이 때 죽산부사(竹山府使)이두황(李斗璜)이 경영(京營)의 병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삼남(三南)으로 내려와서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였다. 저 비류(匪類)인 서병학(徐丙鶴)은 본시 교도(敎徒)로서 관군에 잡혀가서 당시 포도대장 겸 도순무사(都巡撫使) 신정희(申正熙)에게 붙어 남부도사(南部都事)란 한 직책을 얻어서 교두(敎頭)를 염탐해 잡는 일을 스스로 담당하였고, 교인으로 위장하여 비밀히 다니며 정찰하였다.
10월. 이용구(李容九)는 황산(黃山)으로부터 출발하여 충주(忠州)의 신재연(申載淵)과 홍재길(洪在吉), 안성(安城)의 정경수, 이천(利川)의 고재당(高在堂), 음죽(陰竹)의 박용구(朴容九) 등과 서로 세력을 과시하면서 도왔다.
7일. 이 달 7일 괴산군(槐山郡)에 들어갔는데, 이 때 괴산군수(이름을 잃음)가 충주군(忠州郡)에 주재한 일본군 수백 명을 요청하여 잠복해있다 저격하니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포탄이 마치 비가 내리듯이 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맹세하고 교전하였으므로 피차간에 살상이 상당하였다. 마침 해가 저물어서 일본군이 물러가므로 교도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였는데, 일본군 사상자도 역시 많았다.
8일. 다음날, 괴산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서접주(徐接主,) (이름을 잃음)가 잡혀가 군민(郡民)들에게 맞아죽었다. 서접주의 아들이 이 때 나이 13세의 아이였는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내(郡內)에 방화(放火)하여 관청과 민가가 모두 타서 재가 되었다.
여러 곳을 거쳐서 보은(報恩)의 경내에 들어갔는데, 이 때에 청주(淸州)의 손천민(孫天民)이 군중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청주병사(淸州兵使) 이장회(李章會)가 군대를 파견해 공격하였으므로 죽은 교도들 또한 매우 많았다. 강건회(姜建會)가 청주의 병사 75명과 더불어 공주(公州)의 태전(太田)에서 교전하였는데, 그 쪽 군대의 살아남은 자는 겨우 6명뿐이었다.
이 때에 박석규(朴錫奎)・조재벽(趙在璧)・유병주(柳丙柱)・오성서(吳聖瑞)・이복록(李福祿)・유현주(柳賢柱) 등은 각각 옥천(沃川)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이장회는 크게 군대를 발동하여 멋대로 초토(剿討)하였고, 또한 각각 민보(民堡)를 쌓고 별도로 유회(儒會)도 설치하여 크게 계엄(戒嚴)을 가하였다.
이 때에 손병희(孫秉熙)와 이용구(李容九)는 보은 장내에서 각 포(包)를 지휘 발동하고 청산(靑山)의 장석(丈席)에게 향하였다. 대신사는 각 포의 교두(敎頭)를 접견하고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우리 교인이 혐의를 받는 일은 3개월만 지나면 저절로 가라앉을 것이다. 현재 다수의 교도들은 앉아있으면 죽고 움직이면 산다. 언뜻 들으니, 전봉준이 교도 수만 명을 거느리고 막 공주로 향하였다고 한다. 그대들은 모름지기 전봉준을 찾아가서 그 폭거(暴擧)를 멈추도록 깨우쳐야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도모하는 일을 변경하면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고, 사(師)의 원통을 풀어드릴 수 있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으니, 각자 힘쓸지어다.

이에 문도들은 모두 명령에 응하여 출발하였다. 오일상(吳一尙)과 강건회(姜建會) 일파는 회덕(懷德) 지방으로 향하고, 손병희와 이용구는 앞장서 교도들을 거느리고 전봉준과 약속한 은진(恩津)의 논산(論山)에 모였다. 이용구는 공주(公州)의 이인역(利仁驛)에 이르러 경병(京兵)과 옥녀봉(玉女峯)에서 싸웠는데, 경병이 패해서 도주하였으므로 이용구는 드디어 전진하여 봉황산에 이르렀다. 경병과 일본의 군대가 산 위에서 총을 쏘는데도, 교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였다. 양쪽 군대가 육박 혈전을 벌이기를 10여 차례나 하였다. 이용구는 탄환에 맞아 정강이가 관통되었고, 해도 저물고 힘도 떨어졌기 때문에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논산포에 집결하였다. 또 관군에게 패배 당하였기 때문에 전주군(全州郡)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앞서 회덕에 파견한 교도들은 청주(淸州)의 관군을 지명장대에서 만나서 피차가 교전을 하였는데, 살상이 과다하게 발생하였다.
이 때에 전봉준은 7차례나 공주의 효포(孝浦)에서 혈전을 벌이고 취병산(翠屛山), 지취산(智翠山), 금반산(金盤山) 등과 연기(燕岐), 성지(成岐) 등지에서 옮겨가며 싸웠는데, 포와 탄환이 빗발쳐서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위험천만함을 두루 겪으며 결국 논산으로 물러나니 남북양접(南北兩接)의 교도들이 도합 수십만 명이었는데, 그대로 이 곳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각 포의 교두(敎頭)는 전봉준과 함께 주문을 외고 도(道)를 강설하였으며, 다시 적을 요리하고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계책을 의논하였다. 전봉준이 개연히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봉준은 사문(師門)의 도제(徒弟)가 되어 도를 어지럽히고 법을 어지럽혔으니 곧 사문의 죄인이요, 관창(官倉)에서 곡식을 꺼내고 관리를 살해하였으니 국가의 죄인이요, 백성들의 재물과 곡식을 빼앗았으니 국민의 죄인이다. 한 번 죽어 속죄하는 것은 본래 달갑게 마음먹었던 바다. 오직 원하건대, 제군(諸君)들은 선후책(善後策)을 더욱 강구하여 선사(先師)의 원통을 씻어드리고 생민(生民)의 상처를 구료할 것을 기하도록 하라. 만번 죽을 가운데서 한번 살 계책을 내어 다시 칼날을 무릅쓰고 곧장 공주의 길을 향한다면 일이 잘될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호남의 교도들은 어려 번 혈전을 벌인 나머지 지쳐서 떨치기 어려우니, 오히려 바라는 바는 기호(畿湖)의 교도들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큰일을 이루는 것 뿐이다.

11월. 대신사가 임실군(任實郡), 갈담역에 있으면서 각 포의 교인들이 감정적으로 작폐한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우려한 끝에 특별히 도검찰(都檢察)을 정한 다음 모두 그 연원을 물어 철저히 금하게 하고, 또한 교인들에게 그들의 주소, 성명과 교(敎)를 받은 연월을 상세히 적어 보내게 해서 그 진위를 상고하게 하였으며, 또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깨우쳤다.

근일에 교도들이 혹은 가탁해서 작폐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을 청탁하여 간사한 꾀를 쓰기도 하는 등 곳곳에서 나쁜 짓을 멋대로 해대며, 평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다가 뇌형(牢刑)을 실시하는 등 조금도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들으니 매우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성훈(聖訓)』에 ‘사람이 바로 하늘이다’라고 하고, 또 ‘사람을 때리면 바로 하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피차를 막론하고 다 같은 시천(侍天)의 동포이다. 가령 허물이 있더라도 절대로 구타하거나 위협하지 말고 오직 법관의 처결만을 기다리도록 하라.

대신사가 드디어 편지를 각 군의 관청에 보내어 도를 어지럽히고 법을 멸시하는 교인을 법률에 의해 처단하도록 청하였고, 또 글을 시가지의 벽에 붙여서 만일 교인이라 칭하고 마을을 다니며 행패부리는 자가 있으면 즉시 부근에 있는 접소(接所)에 와서 고발하여 엄하게 징계를 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에 남접(南接)의 각 포 교도들이 대신사의 훈계를 따르지 않고 곳곳에서 선동하고 ‘혁명(革命)’이라 소리치며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멋대로 행하였다. 대신사는 일본주재병참소에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귀국과 우리나라는 한 주(洲)에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매우 가까이 있어서 상호간 잇몸과 치아처럼 아주 밀접한 관계입니다. 비록 용사(龍蛇)의 숙원이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이미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더구나 정부로부터 지난 병자년(丙子年, 1876년)에 다시 구호(舊好)를 닦아 개항(開港)하여 통상(通商)을 하고 있으니 이웃 간의 친의가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비록 초야(草野)의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이와 같은 국면을 알고 있는데, 하물며 도를 닦고 삼가고 조심하는 우리 선비로서야 어찌 귀국을 일호라도 배척할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대개 우리 교(敎)는 하늘을 체득하여 덕을 펴며, 왕고(往古)의 성인을 계승하고 내세(來世)의 후학을 개유하며,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기를 더욱 힘쓰고, 수련(修煉)과 자비(慈悲)를 더하며, 세 가지를 융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 바로 우뚝이 새로 창설한 하나의 큰 종교입니다. 장차 중생(衆生)을 고해(苦海)에서 구제하려고 칠실(漆室)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걱정을 품어온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남접의 각 포 교도들이 사문(師門)을 빙자하여 혁명을 주창하고 무지한 교도를 선동하여 깃대를 세우고 나무를 깎아 무기를 만들어 기세가 더욱 치장(鴟張)합니다. 또한 우리 북접을 끼고 시기를 타서 함께 일어나기를 요구하지만, 우리 북접은 사(師)의 훈계를 각별히 준수하여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습니다. 아! 남접의 교도들은 도리어 도(道)로써 도를 해치고 교(敎)로써 교를 해칩니다.
살상한다는 비보가 눈발처럼 날아오니 저의 접(接)은 부득이 의병을 일으켜 가서 엄히 금집(禁戢)하는 일을 행할 것입니다. 군중이 총 집합하는 날에 가서 귀국의 주찰 병참소는 의아하게 생각하여, 이웃나라의 우의에 손상이 있는 일이라고 보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신사는 또 각 병영(兵營)과 일본의 주찰 병참소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가라지풀을 구분하지 못하여 벼를 해치는 일이 실로 많고, 자색(紫色)과 주색(朱色)이 색깔이 같아서 진짜 색깔을 어지럽히는 것이 얄밉습니다. 우리 교(敎)의 창립은 경신년(庚申年, 1860년)에 시작되어 경건하게 천명(天命)을 받아 온갖 사물을 널리 구제해왔는데, 도리어 무함을 입어 고폐(錮閉) 당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도(道)를 하는 자들은 마땅히 수심정기하고, 천성을 따라 가르침을 받으며, 머리를 들고 시기가 장차 이르기를 기다립니다. 근자에 호남의 한 구역에서 우리 교(敎)를 빙자하여 혁명(革命)의 의리를 주창(主唱)하고 여러 교도(敎徒)를 규합해서 방자하게 침포(侵暴)를 행하여 위로는 지존(至尊, 임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아래로는 백성의 재앙을 선동하니, 놀라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 북접(北接)이 조용히 있고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원망을 품고 곳곳에서 교인을 살상한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어떻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성심으로 창의(倡義)하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접(接)은 차마 가만히 앉아 그 곤욕을 받을 수 없어서 부득이 의병을 일으켜 가니, 대중이 집회하는 날에 가서 우리들은 응당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을 가지고 저 맹수 같은 성질을 가진 자들을 일시에 귀순시키고, 벌레 같은 자들을 당장에 굴복시킬 것입니다. 귀곤(貴閫)과 귀찰(貴紮)의 각하(閣下)들께서는 놀라 괴상히 여기어 위세를 보이지 마시고, 우리의 행동에 지장을 주는 일이 없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때에 각처에서 흩어져 도망한 교도들은 전주군(全州郡)에 이르렀다가 경영(京營)의 군대가 뒤를 밟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망하여 금구(金溝)의 원평(院坪)에 이르러서 경병에게 패하게 되었다. 다시 정읍(井邑)과 태인(泰仁) 등지에 모였는데, 남은 군중이 아직도 수만 명이나 되었다. 장성군(長城郡) 북쪽에 있는 노령(蘆嶺)을 넘었으나 갈 바를 몰랐다. 마침 대신사와 김연국(金演局)이 임실(任實) 등지에 와서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각각 앞에 와서 모시고 산의 후미진 곳으로 난 험한 샛길을 따라서 갔기 때문에 수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의 자취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경군과 일본의 군대가 서로 선후를 바꾸며 행군하였으나 하나도 맞부딪힌 군대는 없었다.
교인들이 열흘 남짓 걸려서 영동(永同)의 용산장대(龍山場垈)에 이르니, 청주(淸州)의 군대와 부상(負商) 등이 습격하려고 하였다. 남쪽에 있는 큰 강은 상주(尙州)의 낙동(洛東)이라 하는데, 그 연안에는 바로 일본 병참이 주재하고 있고, 뒷 쪽에는 큰 영(嶺)이 하늘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진퇴양난이었다. 관군(官軍)이 사면으로 포위하고 포격(砲擊)하여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이에 교도(敎徒) 수만 명이 모두 북쪽을 향해 절하며 빌고 죽음으로써 하늘에 고하고 나서 일제히 빈주먹을 휘두르며 탄환과 칼끝을 무릅쓰고 전진하니, 관군이 모두 창을 버리고 옷을 벗어던지면서 도주하였다. 교도는 드디어 전진하여 보은(報恩)의 북곡(北谷)에 이르렀는데, 밤에 청주 군병의 습격을 받아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다음날 청주의 화양동(華陽洞)을 거쳐서 충주(忠州)의 외서촌(外西村)에 이르렀는데, 청주 군병이 다시 추격해왔고, 일본 군병이 충주의 무극장대(無極場垈)에서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남은 군중은 모두 무너져 흩어졌으니, 이 날이 바로 12월 24일이었다.
이 때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李勝宇)와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대대적으로 초토(剿討)를 행하여 남김없이 멸살하였다. 각처의 교도 중에 살상자에 대한 명단 때문에 호서(湖西)의 홍주군(洪州郡)・정산군(定山郡), 영남(嶺南)의 성주군(星州郡)・진주군(晉州郡)・상주군(尙州郡)・안동군(安東郡), 호남(湖南)의 전주군(全州郡)・나주군(羅州郡) 등이 많은 숫자를 차지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은 순창(淳昌)의 구로리(龜老里)에서 잡혀서 이내 압슬(壓膝)이 가해졌고, 김개남(金開南)은 태인(泰仁)의 종성현(鍾城縣)에서 잡혔으며, 손화중(孫華仲)은 무장(茂長)의 선은사(宣恩寺) 석굴(石窟) 속에서 잡혔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함거(檻車)로 경사(京司)에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김개남은 즉시 전라감영에서 효수(梟首)되었으며, 그 나머지 임규호(任奎鎬)는 병으로 인해 저절로 죽었고, 고재당(高在堂)・성두환(成斗煥)・차기석(車基錫)은 모두 포형(砲刑)에 처해졌고, 강시헌(姜時憲)과 박석규(朴錫奎) 형제는 청주(淸州)의 병영(兵營)에서 피살되었고, 오성서(吳聖瑞)와 강기만(姜基萬)은 거창(居昌)의 민보(民堡)에게 피살되었고, 김연순(金演淳)・유병주(柳炳柱)・이복록(李福祿)은 옥천(沃川)의 민보(民堡)에게 피살되었고, 박태은(朴泰殷)은 청산군(靑山郡)에서 피살되었으며, 강령(康翎) 사람 성재호(成在鎬)와 연안(延安) 사람 유근호(劉根鎬)는 경사(京司)에서 복주(伏誅) 되었고, 성재석(成在錫)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조리돌림 되었고, 김윤경은 순창(淳昌)의 민보(民堡)에게 피살되었다. 그 나머지 각 포의 접주(接主)와 접사(接司) 등 여러 사람들은 처자를 빼앗기고 가옥이 불태워졌다. 전장터에서 죽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 때에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사람 맹영재(孟英在)는 토병(土兵) 800여 명을 모집하여 그가 사는 고수동(高水洞) 산 위에 보(堡)를 쌓아 군대를 훈련시켰고, 충청도 진천(鎭川) 사람 허문숙(許文叔)과 조백희(趙白熙) 등도 토병 500명을 모집하여 본군 용수동(龍水洞) 산 위에 주둔하면서 동학(東學)을 박멸(撲滅)한다고 큰 소리치며 원근(遠近)에 격문(檄文)을 보냈다. 경기도・충청도・강원도의 교도들이 참혹한 화를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그들은 모두 난을 피하여 충주군(忠州郡) 황산(黃山) 이용구(李容九)의 도소(都所)로 귀속하였는데, 기약하지 않고 모인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때에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이 허문숙(許文叔)과 함께 포군(砲軍) 500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 사창리에 들어가 황산(黃山)에서 약 1리쯤 떨어진 지점에 주둔하였다. 편의사(便義司) 이용구(李容九)가 정경원에게 편지를 보내 면회하여 담판할 것을 약속하고 단신(單身)으로 가서 ‘동일한 신민(臣民)으로서 이처럼 나라가 위급할 때를 당하여 서로 살상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통쾌하게 설명하니, 경원이 그 말을 옳다고 여기고 드디어 10리 밖의 성산(星山)으로 물러가 주둔하였고, 교도들도 이내 곧 흩어졌다.
이 때에 맹영재(孟英在)가 군중을 거느리고 홍천군(洪川郡) 서석리(瑞石里)에 이르렀고, 교도 차기석(車基錫) 등을 역습하여 싸워서 크게 패배시켰는데, 살상이 지나쳐 시체가 골짝을 메웠다. 이때에 강원도와 충청도의 난리를 만난 교인이 모두 황산 이용구의 도소로 귀속한 자가 또한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이 때에 대신사는 김연국(金演局)과 문도(門徒)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관동(關東) 등지로 피난하였는데, 옥천(沃川) 민보(民堡)의 두령(頭領) 박정빈(朴正彬)이 동학을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말하고 나서서 청산군수(靑山郡守)가 잡아가둔 대신사의 부인과 자녀를 데려다가 혹독하게 매질을 하였다. 부인은 이가 부러지고 갈빗대가 부러졌으며, 17세의 연약한 딸은 청산군 지인(知印) 정주현(鄭周鉉)이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이에 황해도 강령(康翎)・문화(文化)・재령(載寧) 등지에 있는 교도 중에서 임종현(林鐘玄)・김유영(金裕泳)・원용일(元容馹)・한화석(韓華錫)・최유현(崔琉鉉)・오응선(吳膺善)・김응종(金應鍾)・성재석(成在錫)・방찬두(方粲斗) 등과 같은 이들 또한 군중 수십 만 명을 모아 관군 및 일본군과 수십 차례 전투하였는데,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또 평안도 강서(江西)・용강(龍岡) 등지의 교도 김사영(金士永) 등과 함흥부(咸興府) 김학수(金學水), 강계군(江界郡) 이백초(李白草) 등이 각각 군중을 모아 포(包)를 일으켰다가 곧 해산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우리 교를 신앙하는 자들로서 사(師)의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번 각처에서 일어난 교도들의 선동은 그 원인을 구명하면 전적으로 관리들의 끝없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이처럼 서로 끌어들여 세력이 더욱 걷잡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외치면 백 사람이 따르고 팔도가 한 목소리를 내니, 참혹한 화에 걸린 자가 숫자로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은 과연 기운(氣運)이 관계된 바이니, 동양국면(東洋局面)이 한꺼번에 변해서 그런 것인가? 사람의 지력(智力) 같은 것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주석
1894년의 오기인 듯 하다.
궁을(弓乙) 동학의 기본 부적으로 ‘약(弱)’자를 파자한 것이라 한다.
노포(露布) 봉함을 하지 않고 노출된 채로 선포하는 포고문. 주로 전승(戰勝)을 속보하는 데 사용하였다.
사도(斯道) 여기서는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그 방면의 도(道). 곧 천도교리를 가리킨다.
금시표(金時表) 금시계(金時計)를 말한다.
늑장(勒葬) 강제로 장사를 지내는 일이다.
조례(皁隷) 관아에서 부리는 관노비.
『맹자(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에 “주방에는 살찐 고기가 쌓여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가득하게 있는데, 백성들은 굶은 기색을 띠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으면 이것은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짐승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이 미워한다. 그런데 백성의 부모 된 임금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일을 면치 못한다면 백성의 부모 된 도리가 어디 있는가?[庖有肥肉 廏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獸相食 且人惡之 為民父母 行政 不免於率獸而食人 惡在其為民父母也]”라고 보인다.
『주역(周易)』 점괘(漸卦)의 주석에, “배를 함께 타고 물을 건너면 호(胡)와 월(越)이 딴마음 갖는 것을 어찌 걱정하리오.[同舟而濟則胡越何患乎異心]”라는 내용 등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호(胡)와 월(越)은 원래 원수지간이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마음이 서로 같다는 뜻이다.
부승(負乘) 『주역(周易)』 해괘(解卦) 육삼효(六三爻)의 효사(爻辭)에 보이는데, 곧 소인이 군자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지위(知委) 명령을 내리어서 알리어 주는 것이다.
천폐(天陛) 제왕이 있는 궁궐의 섬돌이니, 여기서는 곧 국왕 고종을 가리킨다.
사은(四恩) 불교의 말로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은 네 가지 은혜. 1. 천지(天地)・국왕(國王)・부모(父母)・중생의 은혜. 2. 국왕・부모・사보(三寶)・중생의 은혜. 3. 국왕・부모・사장(師長)・시주(施主)의 은혜. 4. 부(父)・모(母)・불(佛)・설법사(說法師)의 은혜.
육적(六賊) 불교의 육근(六根). 육근은 육식(六識)을 낳는 여섯 가지 근(根). 곧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총칭.
용사(龍蛇)의 숙원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원한을 가리킨다.
구호(舊好) 예부터 좋아하는 사이.
유교(儒敎). 불교(佛敎). 선교(仙敎)를 가리킨다.
중국 노(魯)나라의 한 여자가 캄캄한 방에서 나라의 일을 걱정하였다는 고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치장(鴟張) 흉포(凶暴)한 사람이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이 크게 세력을 펼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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