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乙未年, 1895년) 정월에 대신사는 인제군(麟蹄郡) 최영서(崔永瑞)의 집에서 자취를 감추고 조용히 지냈는데, 오직 김연국(金演局) 및 손천민(孫天民)과 손병희(孫秉熙) 몇 사람만이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해서 기거하며 항시 모셨다.
7월에 김연국이 대신사를 찾아가 뵈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우리의 언어와 행동거지는 모두가 바로 강화(降話)의 가르치심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연국은 끝내 대답하지 못하였다. 며칠 후에 대신사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가르쳐주심을 깊이 연구하였더니, 행주(行住), 좌와(坐臥), 어묵(語黙), 동정(動靜)은 강화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강화의 기운입니다”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하였다. “지성스러운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김연국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만일 지성스러우면 천지의 기운을 밝게 볼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그렇다”라고 하였다. 다시, “사람의 어묵(語黙)과 동정(動靜)은 모두 한 기운이 시키는 것임을 알겠는데, 몸소 행하여 실천하고 지성스럽게 쉬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 기운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대신사가 “어찌 눈으로만 볼뿐이겠는가? 마음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장수(長水)의 교인 김학종(金學鐘)에게 신암(信菴)이란 호를 지어주었으니, 아마 학종이 그 믿음을 독실하게 지킨 때문이었으리라.
12월. 대신사가 인제(麟蹄)로부터 원주군(原州郡) 수례촌(水禮村)으로 거처를 옮기고 김연국(金演局)・손병희(孫秉熙)・손천민(孫天民)・손병흠(孫秉欽)・임학선(林鶴仙) 등 여러 사람과 조석으로 무릎을 맞대고 동거하며 진리(眞理)를 강연(講演)하였다. 아마 손병희와 임학선의 힘을 빌어서 3간 초옥(草屋)을 매입한 것이리라.
병신년(丙申年, 1896년) 정월 11일. 대신사가 손천민에게 명하여 점을 치도록 해서 한 구의 시를 얻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훈도(薰陶)훈도(薰陶)하여 의발 전해주신 은혜 입었고[荷蒙薰陶傳鉢恩], 훈도하여 의발 전해주신 은혜를 마음으로 지킨다[守心薰陶傳鉢恩]”라고 하였다.
18일. 이후 18일에 대신사가 김연국・손천민・손병희 등에게, “이 운(運)을 능히 아는가?”라고 물으니,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신사가 말하기를, “이 운은 요순(堯舜)과 공맹(孔孟) 같은 성인이 많이 세상에 나올 것이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지성으로 도(道)를 닦아 요순과 공맹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라”고 하고 또, “내가 김연국・손병희・손천민 세 사람과 함께 여기에 온 것은 백일 공부를 하여 피안(彼岸)에 이르고자 함이었는데, 곤궁하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지레 남쪽으로 가려고 하니 이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김연국의 호는 구암(龜菴), 손병희의 호는 의암(義菴), 손천민의 호는 송암(松菴), 김현경(金顯卿)의 호는 은암(恩菴), 조재벽(趙在璧)의 호는 경암(敬菴)이었으니, 아마 이름을 돌아보고 의(義)를 생각하라는 대신사의 훈계였으리라.
하루는 대신사가 구암・송암・의암에게 이르기를, “그대들 세 사람의 마음이 맞으면 천하에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도(道)를 응당 더욱 더 정진해야 할 것이니, 모름지기 가슴속에 새겨두고 조금도 의론을 달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구암 김연국, 송암 손천민, 의암 손병희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문도(門徒)들을 깨우쳐서 힘써 마음을 밝히고 덕을 닦게 하였는데,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태고시대 섭제씨(攝提氏)는 선사(先師)께서 자기를 비유한 의미의 존재였다. 산 위에 물이 있는 것은, 우리 교(敎)의 도통의 연원이다. 이러한 현기(玄機)와 진리(眞理)가 갖추어진 연후에야 개벽(開闢)의 운(運)과 무극(無極)의 도(道)를 앎이 있을 것이다. 슬프다! 나무는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물은 근원이 없는 물이 없으니, 만물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전무후무한 5만년 만에 처음 창설한 도운(道運)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나처럼 민첩하지 못한 것이 훈도(薰陶)하여 의발을 전해주신 은혜를 입은 지 지금 30여 년이 되었다. 온갖 어려움을 맛보고 누차 곤액(困厄)을 겪었다. 사문(斯門)의 정맥(正脈)이 거의 탁한 데서 맑은 데로 돌아오고 섞여서 잘못된 것을 버리고 순수한 데로 나아갔는데, 호해풍상(湖海風霜)에 온갖 고생들을 하여 혹은 중도에서 폐지하기도 하고 혹은 한 삼태기 때문에 어그러진 것도 많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대개 우리 도(道)의 진행여부는 오직 안으로 도(道)를 잘 닦느냐 못 닦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하늘은 친근히 하는 사람이 없어 능히 공경하는 사람을 친근히 한다’
2월. 대신사가 충주(忠州)의 마로탁리(馬路坼里)로 거처를 옮기니, 각처의 문도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때는 을미정변(乙未政變)이 지나 길렀던 머리털을 바싹 깎은 뒤였는데, 의리를 가탁한 무리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팔도가 소란스러웠다. 대신사는 이용구(李容九)를 시켜서 교도들의 출입을 엄하게 통제하여 종용히 앉아서 도를 닦으셨다.
대신사는 교도들이 한울님을 모시고 스승을 받드는 도리에 전연 어둡고 전통(傳統)과 포덕(布德)의 뜻을 분변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고 급하게 행해야 할 몇 조목을 죽 적어서 구암 김연국, 송암 손천민, 의암 손병희에게 명하여 각 포에 간절히 타일렀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 사람은 세 군데서 생장하였어도, 하나 같이 섬기는 것은 천지고금을 통하여 바꿀 수 없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다. 임금이 아니면 나를 먹일 수 없고, 스승이 아니면 나를 가르칠 수 없고, 부모가 아니면 나를 낳을 수 없다. 임금과 스승을 먼저 말하고 부모를 뒤에 말한 것은 부모가 비록 나를 낳았더라도 먹이고 가르치는 것은 임금과 스승의 덕이기 때문이다. 대개 선대의 성인과 후대의 성인이 한없이 많았지만, 하늘은 반드시 우리 선사(先師)께 가르치기를 명하여, “노력하였지만 공이 없었는데, 너를 만나 성공했다”라고 하였으므로 비로소 하늘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스승을 하늘처럼 받드는 도(道)를 창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전대 성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선사가 아니면 어떻게 하늘의 덕을 알겠으며, 하늘의 덕이 아니면 어떻게 선사를 내려보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겠는가? 사람의 행주(行住)・좌와(坐臥)・의복(衣服)・음식(飮食)은 하늘의 덕과 스승의 덕이 아닌 것이 없다. 지금 우리 교도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화하여 자만심과 자존심을 통렬하게 고쳐서 하늘을 모시고 스승을 받드는 대의(大義)를 밝히도록 하라.
하나. 우리 교(敎)의 전통(傳統)과 연원(淵源), 포덕(布德)과 연비(緣比)는 엄연히 구분이 있으니, 그 도통(道統)으로 말하면 오직 우리 대선사(大先師)만이 유일무인(唯一無二)한 연원이다. 그 나머지 포덕과 연비는 다만 스승의 훈계를 받아 도덕(道德)을 널리 펴는 것이니, ‘천주(薦主)’라고 말하는 것은 가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도통의 연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요즘 듣건대, 포덕하는 천주가 겨우 연비를 행하면서 문득 ‘연원’이라 칭한다니, 이것이 어찌 우리 교문(敎門)이 만든 규정인가? 지금부터는 연원과 연비를 분명하게 알고 서로 혼동하지 말 것.
이 때에 황해도 교인 김유영(金裕泳)과 한화석(韓華錫) 등이 이용구(李容九)를 매개로 명함을 내밀고 장석(丈席)을 뵈었으니, 이로부터 관서(關西)의 행화(行化)가 점차로 뻗어 나갔다.
4월. 대신사는 충주(忠州)로부터 여러 번 거처를 옮겼으니, 음성(陰城)의 창곡(倉谷), 청주(淸州)의 산막(山幕), 상주(尙州)의 고대(高垈)가 바로 그 거처를 옮긴 곳이다.
8월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동군(同郡) 은척리(銀尺里)에 자리를 정하고 거처하였다. 대개 사람의 이목에 노출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자취 감추기를 더욱 비밀히 하였다. 하루는 대신사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난세에는 영웅이 성인을 부리고, 치세에는 성인이 영웅을 부린다”고 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897년) 2월에 대신사는 음죽(陰竹)의 앵산동(鶯山洞)으로 거처를 옮기고서 찾아오는 손님을 사절하고 임첩(任帖)을 발부하는 일을 임시 정지하였다.
4월 5일은 바로 제세주께서 하늘을 모시고 도(道)를 창설한 기념일이다. 행례(行禮)할 때에 대신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탁자(卓子)에 자기를 위주로 자리를 만들어서 하늘에 고하게 하고 모든 향수(享需)와 제품(諸品)은 조금도 차등이 없게 하였다. 대신사가 말하기를, “사람이 바로 천령(天靈)이니, 신(神)은 바로 내 마음의 추상(抽象)이고, 예(禮)는 바로 내 마음의 기념(紀念)이다. 내가 하는 일이므로 내가 주(主)가 되어야 하니, 이는 바로 만세토록 바뀌지 않을 전례(典禮)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김연국과 손천민에게, “『경(經)』에 이르기를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를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천민이,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여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대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 쉬운 말이겠는가? 이것은 옛사람의 술찌게미이다”라고 하였다. 연국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천령(天靈)이 내리는 바는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 이를 감동시키니, 대신사에게나 제자에게나 어찌 가리겠습니까? 만일 운행하는 도(道)를 받는다면 이 또한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입니다”라고 하자, 대신사가 말하기를, “이 말도 오히려 진선(盡善)이 못되니, 부디 다시 생각하라”고 하였다.
5월에 대신사가 ‘심신회수(心信回水)’란 네 글자를 크게 써서 각 포의 교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7월에 황해도와 평안도의 각 교두(敎頭)들이 전도할 일로 다시 임첩(任帖) 차출하기를 여러 번 청하니, 대신사가 결국 허락하시고 임첩 중에 ‘북접법헌(北接法軒)’이란 네 글자를 ‘용담연원(龍潭淵源)’으로 고쳐 정규로 삼았다.
대신사가 좌우를 돌아보며, “너희들은 천어(天語)를 아느냐?”라고 물었다. 김연국이 대답하기를, “천어(天語)와 인어(人語)가 다름이 없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하였다. “인어가 바로 천어니라”라고 하였다. 손천민이, “그렇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8월에 대신사가 강원도 원주(原州)의 전거언리(前巨彦里)로 거처를 옮겼다.
10월에 김연국도 또한 따라서 거처를 옮겼다.
28일은 제세주의 탄강일(誕降日)이다. 다례(茶禮) 때에 대신사는 우연히 병에 걸려 한 달 동안 앓았는데, 문도들이 뵈러 오는 것을 일체 금하였고, 단지 임경국(林敬國)과 이치경(李致敬)만이 대신사의 살림을 꾸려갔다.
대신사가 말하기를, “주(主)의 『논도유훈(論道遺訓)』에 이르기를 ‘하늘로 하늘을 먹고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였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이 온 것은 사람이 왔다고 말하지 말고 천주(天主)가 강림(降臨)하셨다고 말하라. 하늘을 관찰하는 자는 바로 사람이고, 사람을 관찰하는 자는 바로 하늘이다. 그러므로 ‘하늘로 하늘을 먹고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라고 하신 것이다. 형체가 없는 것을 ‘하늘’이라 이르고, 형체가 있는 것을 ‘사람’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늘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김낙봉(金洛葑)에게 말하기를, “사람에게 허물이 있을 때 대면한 자리에서 책망하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되니, 모름지기 방증을 대고 간접적으로 간절히 타이르면 자연히 깨닫고 반드시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낙봉이, “어린애가 천연두(天然痘)를 할 때에 영리한 말을 많이 하여 그 앎이 신(神)과 같은데,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대신사가 말하기를, “두진(痘疹)은 탁한 기운을 소제하고 맑은 기운을 발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못 허령(虛靈)함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심경의 은화(隱火)가 발작하는 이치이지 결코 두진의 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무술년(戊戌年, 1898년) 정월 초1일에 이천군(利川郡)에 주둔한 병정(兵丁)과 관예(官隷)가 대대적으로 교인(敎人)을 수색 체포하는 일을 행하여 이용구(李容九)는 충주군(忠州郡) 외서면(外西面) 두의동(豆衣洞)에서 잡히고, 신택우(申澤雨)와 권성좌(權聖佐)는 음죽(陰竹)의 앵산동(鶯山洞)에서 또한 잡혔다. 이때에 수색 체포하는 관리들이 사면에 총총 늘어서서 대신사의 자취를 추적하였다. 잡힌 교인들에게는 마구 고문을 실시하여 끝까지 진상을 캐내려 하였다.
권성좌가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여 4일 이른 아침에 이천군의 관예와 여주(驪州)에 주재한 병정 수십 명을 대동하고 원주(原州)의 전거언리에 있는 대신사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 때 대신사는 이질(痢疾)로 침상에 누워있으면서 김연국과 손병희에게 이르기를, “사생(死生)은 명에 달려있고, 화복(禍福)은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오직 지성으로 하늘에 비는 것이 옳다. 이 운(運)이 만일 다한다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자연 화를 면할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병정과 관예가 멋대로 수색을 감행하였는데, 대신사가 태연하게 누워있으니 병정과 관예가 그대로 나가버렸다. 방향을 돌려 김연국의 집에 들어가 김낙철(金洛喆)을 체포해갔다.
그날 밤에 대신사는 유교(帷轎)를 타고 전거언리(前巨彦里)에서 출발하였다. 문도 이용한(李容漢)과 이춘경(李春敬)이 가마를 메고 김연국・손병희・손병흠(孫秉欽)은 호위하며 뒤에서 모셨다. 숲은 깊고 길은 칠흑 같았는데, 할 줄기 광선이 있어 앞에서 인도한 것을 보았다. 험난한 길로 약 3리쯤 가서 산막(山幕)에서 잤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지평(砥平)의 갈산(葛山)에 있는 이수강(李壽康)의 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또 이튿날 비로소 홍천(洪川)의 서면(西面) 제일동(濟日洞)에 있는 오문화(吳文化)의 집에 이르러서 머물렀다. 대신사의 묵은 병이 갑자기 발작하였는데,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번에 체포하러 온 관예가 끝내 말 한 마디 없이 물러갔으니, 제군(諸君)들은 비록 화망(禍網)을 벗어났지만, 김낙철만이 불행하게 잡혀갔으니, 내 마음은 마치 가시가 목에 걸려있는 것과 같다. 헤아려보건대, 큰 액(厄)은 없을 것으로 안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용구・신택우・김낙철 등은 경성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내 수원(水原)의 감옥으로 옮겨 수감되었다. 이들은 여러 번 형신(刑訊)을 겪어 온갖 고초를 맛봤지만 대신사가 있는 곳을 끝까지 저항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제공하지 않아 결국 석방되었다.
3월에 대신사는 원주의 서면(西面) 송동(松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4월 5일은 개교기념일(開敎紀念日)이다. 대신사가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예식(禮式)은 각자 집에 돌아가서 힘닿는 대로 정성을 드리도록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문도들은 모두 분부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김연국이 앞으로 나아가 그 까닭을 청하니, 대신사는 말하기를, “지난 경신년(1860년) 4월 5일에 우리 제세주(濟世主)께서 하늘에서 명을 받아 천주(天主)를 모셨으며, 전대의 성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도(道)를 발견하였는데, 안에는 신령(神靈)이 있고 밖에는 기화(氣化)의 이치가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를 모시게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번 기념식은 각자 봉행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먼 곳에서 와서 대신사를 뵙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대신사는 김연국과 손병희 등에게 명하여 각각 돌아가서 편히 지내게 하였고, 오직 사위인 신현경
이 날 오시(午時) 경에 전(前) 참위(參尉) 송경인(宋敬仁)이 병정과 관예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대신사는 결국 체포되어 즉시 출발하여 문막점(門幕店)에 이르렀는데, 문도 황영식
해가 저물 무렵에 대신사는 여주군(驪州郡)에 이르렀다. 교도 임순호(林淳灝)도 붙잡혔는데, 그의 아버지가 많은 뇌물을 써서 석방되었다. 대신사는 드디어 경성에 들어가서 감옥서(監獄署)에 수감되었는데, 오직 황영식(黃泳植)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신사를 모시고 갔다. 김연국・손천민・손병희 등이 뒤따라 출발하여 지평군(砥平郡)에 이르러서 대신사가 체포된 일을 각 포(包)에 통문을 띄워서 알리고, 따라서 경성으로 올라갔다.
이에 앞서 회덕(懷德) 사람 송경인(宋敬仁)은 장석(丈席)을 대신사로 모셨는데, 갑오년 이후로 대신사를 배반하고 영화를 탐하고 관록에 연연하여 몰래 교도들을 꾀어서 대신사가 머무는 곳을 정탐하고, 기념예식으로 집회하는 날이 되자 다수의 병정과 관예를 거느리고 이와 같은 난폭한 짓을 행하였다. 착한사람들을 해치고 의리를 멸절하니, 이것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인가? 활쏘기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작은 기예(技藝)이나 자탁유자(子濯孺子)는 말하기를, “차마 부자(夫子)의 도(道, 기술)로써 도리어 부자를 해칠 수 없습니다”
5월 11일 법부대신(法部大臣) 겸 평리원(平理院) 재판장(裁判長) 조병직(趙秉稷), 수반검사(首班檢事) 윤성보(尹性普), 법부협판(法部協辦) 겸 수반판사(首班判事) 주석면(朱錫冕)은 크게 법정을 열어 초심(初審)을 행하고 이어서 두 차례 심문(審問)을 행하였다. 20일 이후로 대신사는 더위와 설사로 탈진이 되어 정신과 기력이 다 떨어져서 스스로 일어나기가 어려웠건만, 형틀과 족쇄 속에서도 오히려 주문을 계속 외웠다.
5월 그믐에 병직・성보・석면 등은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로 상주(上奏)하여 재가를 받았는데, 갑자기 불법을 가하여 교수형(絞首刑)에 처할 것을 선고하였다. 그 때 상소하여 터무니없는 죄목을 꾸민 사람은 바로 황기인(黃基寅)이다.
6월 2일(양력 7월 21일) 하오 2시에 대신사는 감옥서에서 교수형을 받아 조용히 의를 좇아 도(道)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 때 나이 72세였다. 교수형에 임할 때에 대신사의 진영(眞影) 수백 장을 찍어서 각 도 각 군에 공시(公示)하였다. 황영식(黃泳植)은 이어 징역형 4년에 처해졌다.
김연국・손병희・박인호(朴寅浩)・이종옥(李鍾玉) 등은 자취를 숨기고 밖에서 주선하였다. 이종옥은 오작(仵作) 김준식(金俊植)과 형제를 맺고 비밀리에 옥중을 드나들었는데 교수형을 행한 3일 후에 감옥서에서 비로소 유체(遺體)를 광희문(光熙門) 밖에 버렸으므로 이종옥 등이 밤을 틈타 비를 무릅쓰고 겨우 수의를 입혀서 광주(廣州) 땅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 후 경자년(更子年, 1900년) 3월 12일 이천(利川)의 천덕산(天德山) 건좌(乾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907년) 7월 11일. 각 포의 교도들이 두 분 선사(先師)를 신원하는 일로 법부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에게 호소하니, 중응은 그 사안을 각의(閣議)를 거쳐 상주하여 재가를 받아서 죄적(罪籍)을 탕척(蕩滌)하였다. 대신사의 행장전문은 연보 뒤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때에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은 관동(關東)에 숨어 살고, 송암(松庵) 손천민(孫天民)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호서(湖西)에 숨어 살면서 몰래 연락하여 통하였다. 이용구는 병신년(丙申年, 1896년)부터 서북(西北) 각 포에 전교(傳敎)하였는데, 종사한 지 5, 6년 만에 교도들이 수십만에 이르렀다.
경자년(更子年, 1900년) 3월에 의암 손병희는 지평(砥平)의 대왕대(大旺垈)에서 설법식(設法式)을 행하고 스스로 임명하여 대도주(大道主)가 되었는데, 김연국은 선사(先師)의 유명(遺命)이 아니라고 하며 응하지 않았다.
6월. 의암이 풍기군(豊基郡)으로 들어가서 재차 설법식을 행하였는데, 구암도 가서 참례하였다.
8월 17일. 송암 손천민과 서인주(徐仁周)가 모두 청주군(淸州郡)에서 잡혀서 경성 감옥으로 압송되었는데, 천민은 숨김없이 바른대로 공술하여, 29일에 바로 교수형을 받았다. 대개 천민이 의젓하게 도의와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은 세상에서 그에 짝할 자가 드무니, 더욱이 슬프고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이듬해 신축년(辛丑年, 1901년) 3월에 의암 손병희는 일본의 도쿄(東京)로 피신해가서 성명을 이상헌(李祥憲)으로 변경하였다.
같은 해 6월 2일, 김연국은 양구군(楊口郡) 사명산(四明山)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대신사(大神師)의 향례(享禮)를 바로 시행하려 할 때에, 공주(公州)의 진위대(鎭衛隊) 중대장(中隊長) 이민직(李敏稷)이 병정을 거느리고 내려왔다. 이에 김연국은 체포되고, 김일서(金一西)・최명기(崔鳴基)・강건회(姜建會) 등도 동시에 붙잡혔다. 김연국은 경성의 감옥에서 종신역(終身役)에 처해졌고, 최명기・김일서는 병으로 수척하였다. 이후로는 혐의대상으로 지적됨이 날로 심해졌다. 이를테면 영변(寧邊)의 교인 강성택(康聖澤)은 본도(本道) 관찰부(觀察府)에서 포형(砲刑)을 받았고, 유지훈(柳志薰) 등 수십 인은 함흥 관찰부에 붙잡혀가 여러 달 갇혔고, 평안남도의 교인 김영학(金永學) 등 수십 인도 붙잡혀가 갇혔으며, 그 밖의 전주 관찰부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죽은 자도 몇 사람 있었다. 그 당시 비참한 상황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