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에 국정이 문란하여 관리는 백성을 마치 희생(犧牲)처럼 보고 백성은 관리를 마치 승냥이, 호랑이처럼 보았다. 동학당(東學黨)이 학대를 당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고, 이 때에 대신사를 추적 체포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용구 공은 공분(公憤)을 견디지 못하여 8만여 교도를 불러 일으켰다. 선사(先師)의 원통을 씻어드릴 것과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할 것을 기약하고 정부를 성토하니, 깃발이 이르는 곳에 인심 쏠리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듯 하였다.
전진하여 보은(報恩)의 장내(帳內)로 달려갔다. 이 때에 선유사(宣諭使) 어윤중(魚允中)은 칙명(勅命)을 받들어 널리 공포하였고, 청주병사(淸州兵使) 홍재희(洪在羲)는 관군을 거느리고 내려와서 무위(武威)를 과시하였으므로 이용구 공은 대신사의 명을 받아 교도들을 해산하여 돌려 보냈다. 자세한 내용은 제2편에 보인다.
이듬해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경기도토포사(京畿道討捕使) 김봉규(金鳳奎)가 교도들을 해치니, 체포된 자가 매우 많았다. 이용구 공은 재차 수천 명의 교도들을 규합하여 이천군(利川郡)에 모여서 겨우 눈앞에 떨어진 화[撲眉]를 면하였다. 이때에 남접(南接) 전봉준(全琫準)은 수만 명의 교도를 제창(提唱)하여 나아가 전주(全州)를 점거하였다. 이용구 공도 또한 기호(畿湖)의 교도 10만여 명을 일으켜 선사(先師)의 원통을 씻어드리기 위하여 혁명(革命)의 대의를 크게 외쳤다. 이때에 묘당(廟堂, 조정)에서 청(淸)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니, 청나라 군병이 아산(牙山)의 둔포(屯浦)에 상륙하였고, 일본 군대도 또한 이어서 이르렀으니, 동양(東洋)의 풍운(風雲)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 때에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이 칙명을 받들어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충주(忠州)의 사창리(社倉里)에 이르렀고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도 또한 관군을 거느리고 왔다. 이용구 공은 군중을 이끌고 괴산군(槐山郡)에 이르러 관군과 육박전을 펼쳐서 크게 패배시켰고 또한 청주와 보은 등지에 이르러서 연속 교전하여 승리하였다.
같은 해 겨울 10월 9일에 전봉준과 함께 은진(恩津)의 논산(論山)에 모인 뒤에 공주(公州)로 방향을 돌려서 좌우를 나누어 협공하였다. 관군과 여러 날 교전하니, 두 진(陣)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17일 이른 새벽에 관군이 봉대산(烽臺山) 정상으로부터 날개를 편 형태로 좌우를 공격해 내려오니 교도들이 많이 흩어졌다. 반나절 동안 교전할 때에 날아온 탄환이 이용구 공의 오른쪽 다리를 명중하였다. 부득이 후퇴하여 전주・금구・태인・정읍・장성 등지로 방향을 바꾸면서 교전도 하고 후퇴도 하였으나 끝내는 패하였다. 전봉준과 각각 무너져 흩어졌는데, 봉준은 사로잡히고, 이용구 공은 남은 교도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로 향하였다. 지나는 길에 대신사를 찾아뵙고 그대로 배행(陪行)하여 진안(鎭安)과 무주(茂朱)를 거쳐 영동(永同)의 용산시(龍山市)에 이르렀는데 관군의 포격을 만나 도망가기 힘든 포위 속에 갇혀 곤경에 처하였다. 이용구 공은 곧 하늘에 축원하고 군중에게 맹세한 뒤에 맨주먹으로 적에 달려들어 크게 관군을 깨뜨렸다. 보은군 속리산 아래에 있는 북실리(北室里)에 이르렀을 때 또 관군의 습격을 만나 특수한 전법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12월 24일, 비로소 충주의 외서면 별산당리(別山堂里)에 이르렀는데, 관군이 사면을 포위하여 그 형세가 마치 그물을 쳐놓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남은 교도를 풀어 보내고 다만 종자(從者) 몇 명과 함께 고리(故里)로 돌아오니, 집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혹한 속에 부인 권씨는 바위굴 안에서 분만(分娩)하였고, 양식이 떨어진 지 이미 3주야(晝夜)가 되어, 모부인(母夫人) 김씨(金氏)가 이웃 마을에서 밥을 빌어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 칸 집을 세로 얻어서 몰래 마이산(馬耳山) 아래 죽림동(竹林洞)에서 살았다.
이 때 대신사가 구암 김연국을 거느리고 와서 3일 동안 머물다가 곧 출발하여 관동(關東)으로 갔다. 이용구 공은 성명을 바꾸고 수원(水原)의 독포도(獨浦島)에 있는 농부의 집에 자취를 숨겼다. 부인 권씨는 관군에게 잡혀서 몇 달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방면되었는데, 분만한 뒤에 겁나는 일을 겪어 병세가 점차 심해져갔다.
을미년(乙未年, 1895년) 봄에 이용구 공은 풍기군(豊基郡)으로 피신해 숨었다. 7월에 홍천군(洪川郡)으로 옮겨 가서 대신사를 뵙고 자취를 감춘 채 순회하면서 편지로 각 포의 교인들을 깨우쳤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엄히 비밀 칙명(勅命)을 각 도에 전달하여 많은 상금을 내걸고 교두(敎頭)를 염탐해서 체포하라 했으므로 삼남(三南)의 각 군에는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병신년(丙申年, 1986년) 봄에 대신사를 모시고 몰래 충주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용구 공은 그 길로 해서(海西)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으로 향하여 다시 수련을 더하고 포교에 전력하였는데, 1년 사이에 도화(度化) 된 신도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피신할 때에 탄로 날까 봐 또 이름을 만식(萬植)으로 고쳤다. 같은 해 가을 8월 22일에 부인 권씨가 작고하고 3세의 어린애도 요절(夭折)하였다.